한국생명학연구원 대구 청소년 종합상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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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5(수)
희년과 경제 정의  
­선교적 윤리적 조명­

채 수 일(전 한국신학연구소 소장)



1. 희년의 성서적 의미와 역사적 배경

1­1. 희년, 곧 "기쁨의 해"는 농부와 목자들이 부르는 뿔나팔 소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매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을 7번 지낸 다음 해를 말한다.

속죄의 날에 뿔나팔 소리와 함께 선포된 희년이 오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해야 했다(레위기 25:10). 저마다 제 소유지를 찾아 자기 지파에게로 돌아가야 했다(레위기 25:10). 희년에는 농사를 지어서도 안되었다(레위기 25:11). 부동산은 투기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까닭은 본래 땅은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다만 땅 위에서 나그네일 뿐이기 때문이다(레위기 25:23). 무엇을 사고 팔 때 이웃끼리 억울하게 해서도 안되었다(레위기 25:14). 세나 이자도 금지되었고(레위기 25:37), 진 빚도 조건 없이 탕감되어야 했다. 식객과 종으로 타향으로 팔려 나간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레위기 25:39). 오늘의 언어로 말한다면 희년 정신은 창조의 보전, 토지 공개념, 경제 정의의 실현, 손님, 특히 외국인 노동자의 접대, 민중의 해방 등이라고 하겠다.

부동산 투기로 일확천금을 한 소위 "졸부"들이 듣기에는 거북한 법이 아닐 수 없다. 제3세계의 산더미 같은 외채와 불의한 이자 정책으로 부자가 된 제1세계 국가들에게도 희년은 기쁜 소식이 아니다. 분단체제를 권력 유지에 악용하는 이들에게는 기분 나쁜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지칠 대로 지친 땅을 그나마 계속 파헤치고 화학비료를 쓰지 않으면 안되는 가난한 소작농들에게는 현실을 모르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유기 농업자들의 헛소리처럼 들릴지 모른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주지 않으면서 혹독한 작업환경에서 일하게 하면서 돈을 버는 기업인들에게도 희년은 기쁨의 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노예가 된 노동자와 농민들, 돈을 벌어서 언젠가 금의환향하겠다고 고향을 떠났으나 돈을 벌지 못해 선물을 사 들고 얼굴 들고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도시 빈민들, 높은 이자의 빚을 갚기 위해 또 빚을 얻어야 하는, 그래서 평생 빚에 시달려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년은 기쁨의 해가 아닐 수 없다.


1­2. 레위기에 나타난 희년법은 참으로 혁명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레위기의 희년법은 누가, 언제,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을까?

오늘의 레위기에 전승된 희년법이 성문화된 것은 포로기 이후에 레위인에 의한 것이다. 레위인들은 그 출처를 알 수 없으나 그들의 독특한 경건 때문에 제사장직을 맡게 된 사람들이다. 레위인들 가운데서도 계급의 격차가 심각했다. 희년법은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국가재건을 이스라엘의 법정신에 기초해서 시도했던 낮은 신분의 레위인들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희년법은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의 사회상, 곧 노예와 농노의 반란과 채무자들의 극에 달한 곤궁과 권력자와 부자의 횡포가 극대화되었던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분열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개혁하려는 제사장 레위인들, 곧 민중 사제들의 의도를 반영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레위인들은 희년법을 혁명적 방법으로 실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희년의 내용은 혁명적이지만 그 실현 방법은 전혀 혁명적이지 않다. 빚을 탕감해 주고, 노예를 해방하고, 식객으로 붙어사는 소작농이나 노동자를 고향으로 보내고, 이자를 받지 않는 것 등은 부자와 권력자들의 자발적 의지 없이 실현되기 어렵기 때문에, 레위기는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호소한다.

결국 주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해방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려는 것이 희년의 정신이고, 이런 새로운 시작은 부자와 권력자들의 태도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부자와 권력자들의 태도 변화는 죄 사함의 결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희년이 속죄의 날, 곧 화해의 날에 선포되었는지 모른다. 소유 관계의 전적인 새로운 출발은 속죄와 화해의 구체적인 결과가 아닐까?


1­3. 그렇다면 이렇게 훌륭한 희년법이 이스라엘 역사상 실현된 적이 있었나?

이 질문에 대하여 학자마다 의견을 달리 한다. 어떤 이는 역사적으로 실천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희년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어떤 부자와 권력자가 자발적으로 자기 노예를 해방시켜 고향으로 돌려보내며, 빚을 무조건 탕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한 해라도 더 많이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어 들여야 이익이 남을텐데 땅을 놀릴 부자가 어디에 있으며, 돈을 무이자로 빌려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느냐며 희년이 실천되었을 가능성을 회의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희년법이 역사적으로 실현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 성서는 또 왜 희년법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지켜지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성서는 희년법을 지키는 이들에게 내리는 축복과 그 법을 지키지 않은 이들에게 내려지는 화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정해 준 규정들을 따르고, 내가 지시한 계명들을 지켜 그대로 하면 내가 너희에게 제 때에 비를 내려 주리니, 땅은 소출을 내고 들의 나무들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마음껏 먹으며 나의 땅에서 안심하고 살게 되리니…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주리니, 너희는 다리를 뻗고 잘 수 있으리라"(레위기 26:3-6)

"그러나 너희가 만일 나의 말을 듣지 않아, 이 모든 계명을 실천하지 않으면… 너희에게 몹쓸 재앙이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마침내 두 눈은 꺼지고 맥은 빠지게 하리라. 너희가 씨앗을 심은 보람도 없이 너희 원수가 그 것을 거두어 먹으리라. 내가 너희를 엄한 눈초리로 쏘아보면, 너희는 원수와의 싸움에 져서 적의 지배를 받으리라… 너희 하늘을 쇠처럼, 너희 땅을 놋쇠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너희가 힘을 다한 보람도 없이 너희 땅은 소출을 내주지 않을 것이요 너희 땅에 선 나무는 열매를 맺어 주지 아니하리라"(레위기 26:14-20)

희년법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내려질 하느님의 재앙이란 인간이 스스로 만든 사회적 모순의 결과와 다르지 않다. 그 재앙은 역사 안에서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집단에게, 한 세대에게만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주어진다. 재앙을 초래한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재앙에 책임이 없는 세대에까지 재앙이 미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문제는 또 사람이 재앙을 통해서도 깨닫고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인도의 보팔 시 가스 폭발 참사, 체르노빌 원전 사고, 걸프전은 물론, 서울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건,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참사도 점점 우리의 의식 가운데서 사라지고 있다.

유럽의 전투적 환경운동 단체인 그린피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구 위에 있는 마지막 나무에서 마지막 남은 잎이 떨어질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배울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야 배운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때는 이미 돌아서기에 늦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사람은 차라리 그런 대재난이 계속해서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 달에 한번씩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같은 것이 일어나야 망각증이 심한 인간의 기억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정신차려 부실공사, 부정부패의 사슬을 끊으려고 할 것이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 파국론이나 재앙론은 "휴거파 종말론자"들이나 "옴진리교" 같은 열광주의자들을 정당화시켜 줄 뿐이다. 시대가 불투명하고 불안하면 할 수록 사이비 종말론자들이 득세한다. 그들은 세계가 부딪친 위기 상황을 정신적 테러의 수단으로 삼아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현혹하여 교주의 재산을 늘리거나 교세확장에 골몰한다.

그러나 희년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적인 역사참여를 요청한다. 가까이 다가오는 재난과 인류 공멸의 위기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적극적인 결단을 통하여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희년운동의 주체일 수 있다.


1­4. 레위기에서 선포된 희년은 예수 운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예수는 그의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선교를 처음 시작하였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는 놀라서 자신을 쳐다보는 회중을 향하여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한다(루가 4:21).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는 것, 곧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 예수의 선교적 사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희년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악령 축출을 통하여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희년을 이미 현재화했다. 이로써 주기적으로 역사의 모순을 극복하고 계약 공동체를 새롭게 회복하려는 야훼의 의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현재적 사건이 된다. 이제 희년은 50년마다 실현되는 특별한 해가 아니다. 희년은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사람을 해방하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을 자유케 하는 곳에서 예수의 선교는 시작되고, 그와 함께 희년도 시작되는 것이다.


2. 기독교 신앙과 경제의 관계

2­1. 그리스도교에게 경제문제는 성서의 역사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 안에 있는 교회와 신학이 지금까지 경제문제를 자신의 신앙적, 신학적 성찰의 중심에 세우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산업혁명과 계몽주의 이래, 자율적인 운동 법칙과 가치 중립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이해하고 비판하며 극복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과 발언권을 교회와 신학이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교회에게 경제문제는 마치 뜨거운 감자를 만지는 것처럼 교회와 신앙양심 자체에 거침돌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가 국가종교로 공인된 이후, 특히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에 편승하여 함께 성장해 온 그리스도교에게 경제적 정의의 문제는 교회의 진정성을 문제삼기 때문에 언제나 무시되거나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억압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불의한 세계 경제 체제에 의해 희생당하는 민중들, 특히 제3세계의 민중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면서 정의로운 경제체제와 평화, 창조의 보전을 위한 그리스도교인의 각성과 세계적 연대모색이 일어나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중앙 통제적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정치적, 경제적, 생태학적, 윤리적 파산 선고를 당한 후, 이 도전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변혁 운동의 이념적 대안이었던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에도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인류의 미래를 위한 대안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까닭은 민중의 고난과 환경파괴가 지구적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가 성장과 부의 축적, 기술 과학의 발전, 식량과 의료 및 교육에 관한 기본 욕구의 해결과 그 기동성 때문에 우월성을 입증할 수 있었지만, 이런 물질적 성장의 기초인 불의한 수탈 구조와 윤리적, 정치적 의식 수준은 여전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세계의 다수 민중은 질병과 가난과 투쟁하면서 매일의 생존을 위하여 허덕여야 하고,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심연은 더 깊어만 간다. 정치적 참여를 위한 권력도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있다. 제3세계의 산더미 같은 외채, 세계의 군사화, 환경 파괴, 성차별과 인종주의, 신민족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 등도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러한 세계적 도전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도전을 피해 갈 수 없는 상황에 인류는 처해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경제 문제가 경제 학자나, 경제 정책 입안자 혹은 기업가들의 과제이지 그리스도교인의 과제는 아니며, 또 경제 문제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만약 경제 문제가 신앙의 관심사일 수 있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사회 봉사와 자선 사업의 차원에서 그럴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 문제는 더 이상 기독교 신앙의 이차적이거나 부차적인 관심사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경제 문제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의 중심 문제인가?


2­2. 경제 문제가 신앙의 문제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체제가 수반하는 문제, 즉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실업, 외채, 임금노동의 문제, 예속 등이 성서가 증언하는 하느님의 정치 경제에 정면으로 반대되기 때문이다. 민중의 구조적인 희생을 기초로 하여 유지되는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는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자본가나 기업가도 그들이 직접적으로 살인을 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윤 극대화"라는 자본의 고유한 운동 법칙과 "자유시장 원칙", 투자된 자본의 소유권이 기업의 활동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성장 지표, 생산량, 무역 수지 등의 통계 자료만 보일 뿐, 그 뒤편에서 가난하고 굶주리며, 실업으로 고난받는 사람들의 개별적 운명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는 누구도 자기의 욕구를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충족시킬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증언한다. 자기 욕구의 충족은 인간적 연대의 틀에서 추구되어야 하고, 최소한의 인간적 기본 욕구의 충족을 보장하는 영역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이자놀이에 대한 금지(레위기 25:35-38), 저당 잡은 외투를 밤이 되면 되돌려 주라는 이스라엘의 법정신(레위기 17-26장) 등은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야훼의 정의가 기본적인 사회 원칙임을 보여준다. 야훼는 사회적 약자(병자, 불구자, 과부, 어린이, 나그네 등)의 보호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스라엘 종교개혁의 근간이 된 신명기는 빚진 노예의 해방과 일반적인 부채의 탕감을 규정하였고(신명기 15:1 이하), 레위기의 희년법은 임금노동자로 고향을 떠난 이들과 노예들의 귀환, 빚의 탕감, 토지의 휴경과 야훼 귀속성을 선포한다(M. Hengel, Eigentum und Reichtum in der frhen Kirche, S.22). 이스라엘 법정신의 최고 목적은 정의의 실현에 있었으며, 안식년법, 희년법 등은 상이한 소유관계에 기초한 사회적 불평등을 정기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었다(출애굽기 22:24-25).


2­3. 경제 문제가 신앙의 문제인 두 번째 이유는 야훼의 부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야훼의 약자에 대한 관심은 무제한적인 사유 재산의 축적을 비판한다. 재산의 공동 소유가 이스라엘 고대 농경 문화권에서 실천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언제부터 사유 재산의 확보가 시작되었는지 역사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이스라엘 포로기 이전까지 공동 소유 개념이 전승되었다는 것과 사유 재산 제도가 그 후의 계급 분열(귀족, 대토지 소유자, 급증하는 소작농과 부채 등)에 기초를 놓았다는 것은 확인될 수 있다(Konrad Farner, Theologie des Kommunismus, S.16). 물론 아브라함이 그의 처의 매장지를 은 사백 세겔에 사는데서(창 23:13-20) 토지의 사적 소유와 매매가 이미 이스라엘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지만,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는 부가 공동체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소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위한 물질적 기초로 이해된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왕정 체제로 들어가면서 야훼 동맹에 더 이상 신실하지 않았을 때에도 예언자를 통한 부에 대한 비판이 지속된다. 예언자들의 부에 대한 비판은 부 자체가 가지는 사회적, 개인적 악 때문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에 대한 신앙 때문이었다. 자비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라하밈"(Rachamim)은 삶과 권리를 위협 당하는 형제 자매들의 삶과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비는 그러므로 자선적 행위가 아니라, 권리의 보호를 뜻하는 것이다. 부에 대한 성서의 비판의 핵심은 삶에 적대적인 부의 축적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억압적인 지배 체제가 우상 숭배이며, 사회적 부정의의 유지는 하느님 인식을 방해한다는데 있다(예레미야 22:16). 호세아는 폭력과 살인과 도둑질이야말로 하느님에 대한 부족한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다(호세아 4:1-6). 예언자적 비판의 최종 목표는 재물이 인간의 생명을 좀먹는 물신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데 있다.

재물로 번역된 맘몬은 아람어로 소유, 사유재산을 의미하는데, 초대교회가 이 셈어 계통의 외국어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데는 재물을 섬기는 것을 우상 숭배와 동일시 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여진다. 소유 자체가 악마적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눈을 멀게 하며 하느님과의 교제를 거부하게 하기 때문이다(M. Hengel, Eigentum und Reichtum in der frhen Kirche, S.32). 예수가 맘몬에 대하여 과격한 비판을 거듭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소유욕을 강화하고, 그 소유물로 다른 인간을 지배하려는 속성 때문으로 보여진다. 초대 교회 역시 탐욕은 하느님의 나라 상속을 방해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하였다( 에베소서 5:5; 골로사이 3:5 이하). 재물이 인간의 생명을 보장하지 못하고(누가 12:15-21), 부의 잘못된 쓰임과 불의한 축적은 인간성을 파괴하며(딤전 6:17; 야고보 2:6), 보다 많이 가지려는 소유욕은 인간을 시험에 빠지게 한다는 것은 초대교회에 널리 인식된 일이었다( 마가 7:22; 누가 12:15; 롬 1:19; 에베소 4:19; 고전 5:10 등).


2­4. 경제문제가 신앙의 문제인 세 번째 이유는 노동에 대한 이해 때문이다. 흔히 노동은 인간 타락 이후, 즉 실락원 이후의 피할 수 없는 숙명, 죄의 결과라고 이해되고 있다. 노동 자체를 형벌이나 저주로 보는 근거로서 창세기 3:17-19에 나타난 저주의 말씀이 인용된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상이한 낙원 밖의 생활 양식을 언급한다. 3장 17절과 19절의 a, b는 중동지역 토경민(농부)의 생활과 경작지에서 소출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겪어야 하는 끝없는 노고를 안중에 두고 있다. 3장 18절, 19절 c는 초원 지대에 사는 베두인의 생활을 안중에 두고 있는데 그의 삶의 특징은 경작의 수고보다 생계의 빈궁과 쪼들림에 있다. 그러므로 이 민담은 노동 자체를 형벌이나 저주로 평가하는데 관심이 있지 않고 팔레스틴 지역의 두 가지 생활 양식의 곤궁에 대한 원인론적 근거를 제시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고 해석된다(폰 라트, {창세기}, 101쪽). 즉 설화자는 "노동이 왜 삶을 그다지도 고달프게 만들고, 노동이 헛수고로 끝나고 좌절될 위험 속에 있는지, 왜 노동이 기울인 노력에 비해 너무도 보잘것없는 소득을 가져 오는지라는 창조의 본래적 질서로부터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과 땅 사이의 불가해한 관련성", 즉 소외된 노동의 관련성을 단순히 하나의 사실로서 언급하고 있다. 설화자는 고대 근동에 유포된 노동에 대한 두 가지 태도, 즉 한편으로는 노동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비관적인 숙명으로 이해하는 태도와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을 이상화시키려는 태도에 대하여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 민담의 설화자는 "인간이 죽을 때까지 노동을 통하여 생존해야 하며, 노동은 인간의 삶에 속한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Westermann, Genesis, I., S.361).

오늘 중요한 경제 문제의 하나는 어떻게 자본을 매개로 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와 착취 관계를 인격적인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전환은 소외된 노동의 극복에서 가능하다. 소외가 극복된 노동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소외되지 않은 노동, 즉 자기 동일성의 실현으로서의 노동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이기심의 충족과 벌거벗은 경쟁이 아닌 협동과 공동 참여에 기초한 노동으로, 자연과의 관계에서는 지배와 착취에서 돌봄과 공존에 기초한 노동의 실현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성서가 우리에게 소외되지 않은 노동이해의 단서를 제시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서에 따르면 경제적 활동의 기초인 노동은 타락 이전의 창조 질서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사람은 창조의 질서 안에서 노동하도록 부름 받았고 노동은 야훼의 창조를 책임적으로 보호하고 가꾸는데 그 목적을 가진다(창세기 2:15과 2:5)(A. Richardson, The Biblical Doctrine of Work, London, 1958, S.25-26). 야훼는 창조 질서의 유지와 돌봄을 위해 파트너를 만드셨고(창세기 2:21-25), 이로서 창조의 돌봄은 "일부의 사람들" 만의 과제가 아닌 "사람 모두"의 과제가 된다. 노동을 표현하는 구약성서의 두 개념, 즉 aboda(봉사에서 유래)와 melaka(보내심에서 유래)는 노동이 야훼에 대한 봉사로서 이해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서의 노동은 신적 위임의 성취로서 파악된다는 점에서 노동을 "자연의 질서", "숙명", "고통"으로 이해하는 그리스 세계의 노동이해와 다르다. 하느님에 대한 봉사로서 이해되는 노동은 강요된 필연적인 자연 질서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교제"의 표현인 것이다(R.G.G., I., S.540).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 행위에 동역자로서 인간이 참여하는 것인데, 이 참여가 개인에게가 아니라 공동체에게 위임되었다는 사실이 간과될 수 없다. 노동은 또 인간만의 일이 아니다. 하느님 자신도 일하신다. 창세기 2:3은 하느님이 자기 자신을 일꾼, 노동자로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담이 들짐승과 공중의 새 등 모든 동물들에게 이름을 주는 행동은 사람과 자연의 소외되지 않은 노동 관계의 전거로 이해될 수 있다(창 2:19-20). 자연에게 이름을 주는 행위는 자연이 사람의 목적 성취를 위한 일방적 착취 관계에서 이해되는 것을 거부한다.


2­5. 경제문제가 신학적 문제인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오늘의 부르쥬아 경제가 가지고 있는 물신숭배적 성격과 기업 형이상학 때문이다. 부르쥬아 경제의 주요 구성 요소인 상품과 돈과 시장과 자본의 세계는 인간을 초월해 있는 자신의 고유한 운동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에서 우상적이다. 물신 숭배란 인간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자기를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돈과 상품이 오늘 인간의 예배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신학적 도전이 아닐 수 없다.


3. 희년과 경제정의:선교적 윤리적 조명

3­1. 경제는 오늘 모든 사람을 규정하는 사회적 본질이 되었다. 동서간의 이데올로기적 냉전체제의 해체 이후 인류는 남북간의 경제 열전시대에 돌입하였다고 한다. 사회주의라는 적이 사라진 후 새로운 적은 자본주의 그 자체 안에 도사리고 있고, 이 적은 지금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가 모색되고 있지만, 전망이 투명하지 않다.

전환기에 선 인류 전체의 생존 능력 있는 미래의 대안을 모색하는 이들은 경제 체제 못지 않게 경제 윤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까닭은 자본주의적 실험이 남긴 수많은 문제들이 결국 인간의 삶의 태도의 변화 없이는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단순히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라는 인식은­까닭은 그것이 여전히 인간과 자연의 생명 파괴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경제에 대한 신학적 판단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복잡한 노동의 구조적 분화와 기술 과학화는 경제문제를 해결할 대안을 신학이나 성서로부터 직접적으로 추출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또 성서적, 신학적 대안이 얼마나 현실적일 수 있느냐도 문제가 된다. 더욱이 "모노 야훼이즘"이라는 신앙의 공통 기반이 없는 다종교적 전통이나, 세속사회, 그리스도교가 중산층 종교로서 기능을 하는 사회 안에서 성서적 진술이 얼마나 변혁 대안으로서 설득력과 실천력을 줄 수 있을지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신학적인 현실 인식과 진술은 성서의 세계와 오늘의 세계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역사의 질적 차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할 과제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복잡한 경제 체제, 숫자, 도표, 통계 자료 등을 이해하기 어렵고 냉정하기도 한 경제의 뒤편에서 잊혀지기 쉬운 고난 당하는 민중의 얼굴과 그들의 개별적 운명을 읽어 내고 그들과의 연대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 질서를 모색할 때, 성서와 현실의 역사적 단절은 극복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3­2. 한국사회, 특히 권력층이 그 뿌리에서부터 부패하였다는 것과 성장 일변도의 발전 독재가 그 동안 직업 윤리나 경제 윤리에 대한 숙고 자체를 우습게 여긴 풍토를 만들었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지적이 아니다.

한국의 파행적 자본주의 발전의 결과인 "졸부들의 천국"에서는 재산증식의 과정이야 개인의 능력(요직을 거친 빠른 출세)과 줄서기(지역 패권주의와 파벌)의 문제이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재산의 소비와 분배 역시 내가 벌어서 내 마음대로 쓰기 때문에 누가 상관할 바가 아니며, 이에 대한 간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자유주의 원칙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이것은 서구 자본주의 경제 발전과정에서 형성된 부르주아의 직업 윤리와도 상관없는 저속한 속물적 자본주의의 노골적이고도 거만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정보사 토지 부정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부정사건을 둘러싸고 움직인 세탁된 돈이 모두 얼마이며, 누구에게 전달되었는지는 지금도 완전히 해명된 것이 아니다. 다만 한 대령이 먹은 돈이 매월 100만원씩 단군이래 지금까지 저금해야 모을 수 있는 액수였다는 것은 평범한 월급쟁이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충격조차 주지 않았다. 이 사건의 주변부에서 일어난 작게 보도된 기사에 의하면, 이 사건에 연루된 한 사람이 거액의 헌금을 했는데, 교회가 이 헌금을 되돌려 주어야 할 것인지 논의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결론은 물론 되돌려 주지 않기로 나왔다. 이유인즉, 헌금은 하느님에게 한 것이지 교회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로서 한국교회는 하마터면 기네스 북에 오를 만한 놀랄 일을 할 기회를 잃게 되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교회를 하느님 자신과 동일시하는 신학적 과오를 범하기도 하였다.

부정부패는 윤리적 문제만이 아니라, 신학적 문제이기도 하다. 부정부패를 나타내는 "커럽션"의 라틴어 말 뿌리의 뜻은 "끊다",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놀라운 사실은 부정부패의 결과가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이 부정부패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사람이 부정부패했기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과의 바른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타락하고 부패하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이 부정부패를 의식하지 못하게 하고, 이것은 한 사회, 나아가 한 국가의 총체적 파멸을 초래한다는 것이 예언자들의 교훈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부정하고 부패한 현실을 보고 계약 공동체를 새로운 질서 위에 세우려고 고심하는 모세에게 그의 장인 이드로는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또 자네는 백성 가운데서 능력과 덕을 함께 갖춘 사람,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참되어서 거짓이 없으며,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을 뽑아서 백성 위에 세우게. 그리고 그들을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으로 세워서, 그들이 사건이 생길 때마다 백성을 재판하도록 하게"(출애굽기 18:21-22).

여기에서 처음으로 기독교 장로직의 제도화가 시작된 것이다. 표준 새번역에 따르면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츄리히 성서에 따르면 "부정부패하지 않는 사람"으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성서는 부정부패의 뿌리를 "탐욕"에서 찾는다. 부정부패는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자연에게도 영향을 미쳐 홍수심판을 가져온다(창세기 9:11-15). 부정부패와의 싸움은 희년을 맞이한 교회에게 중요한 윤리적이면서도 신학적인 도전이 아닐 수 없다.


3­3. "세계화"라는 단어가 온통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작 "세계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분명한 것 같지 않다. "세계화"를 영어로 어떻게 표기할 것인지를 두고 고심한 정부 공보처에 따르면 "세계화는 단순히 경제적인 개방 정책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기 위한 총체적인 국가 전략으로 한국 고유의 개념"이라고 한다. 그래서 "세계화"의 영문표기도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아니라 "Segyehwa"라고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세계화"가 정말 번역 불가능한 한국 고유의 개념이라는 것은 집권당의 세계화가 김종필 전 민자당 대표의 축출로 끝났을 때 이미 사실로 드러났다. 현 정부의 세계화는 결국 김영삼 대통령 친정체제의 구축을 지향하는 지극히 한국적인 정치 이데올로기인 것 같다. "세계화"가 지극히 한국적 개념이라는 또 다른 증거는 "세계화"가 사회 문화면에서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려는 총체적인 국가전략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93년 기준으로 절대 빈곤층이 전 인구의 4.8%(2백만명), 최저 생계비 이하 소득자가 10%, 상대적 빈곤층이 30%를 차지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또 전국 가구 중 약 25%에 달하는 292만 가구가 단칸방에 거주하는 현실, 교통사고 사망률과 성폭행률 세계 1위, 수도권의 높은 공기 오염도와 획일적이고도 통제적인 교육, 17조원에 이르는 사교육비 부담, 높은 젊은 층의 실업률(대졸 실업자가 14만명, 고졸 실업자가 28만명, 34세 이하 실업자가 전체 실업자의 73.4%를 차지한다. 1993년 3/4분기 통계), 10만 이상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인권을 유린당하고 나쁜 작업 환경에서 일하는 현실 등은 우리 정부가 주장하는 "세계화"가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이해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화" 정책과 발맞춰 함께 유행하는 구호들은 세계화의 실체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예컨대 "조기 영어교육", "국가 경쟁력 강화", "초일류주의", "이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국경 없는 무한 경쟁시대" 등은 "세계화"가 철저하게 개인주의, 능률주의, 탈규범주의를 기초로 전개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화"는 모든 경쟁은 정당하고 승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시장 제일주의, 어떻게 해서든지 돈만 벌면 된다는 천민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런 가치관은 이승만 정권의 탈 역사주의로부터 시작하여, 개발 독재의 "잘 살아보세"를 거쳐 이른바 문민정부의 "무한경쟁시대"에서 결실을 맺는 "세계화"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다. 힘만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약한 자는 철저하게 소외시키는 것이 오늘의 세계화의 실체라면 기독교 선교는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것은 선교를 교회가 해야 할 수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의 일, 혹은 하나의 활동 프로그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교는 교회 존재의 근거이다. 교회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마태 5:13-16). 교회는 "역할이나 활동"으로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로 선교한다는 성서의 선교 이해가 새삼스럽게 강조되어야 한다. 까닭은 이른바 "세계화 시대"가 교회의 존재론적인 개혁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3­4. 세계화 현상이 초래하는 가장 심각한 지구적이고도 지역적인 도전의 하나는 구조적 빈곤과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다. 우리는 나눔을 통한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가난을 극복해야 한다. 하느님의 정의, 곧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신실함을 경험한 사람은 나누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나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상속받은 재산이 많지도 않고 교인도 많지 않은, 겨우 자체 유지하기도 힘든 교회가 무엇을 나눈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조금만 넉넉해도 이런 저런 좋은 선교 사업에 정말 많은 것을 나누어 줄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교회도 많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어서도 나누기가 힘들지만,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 나누기가 꼭 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부자가 더 인색한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의 형편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나눔은 언제나 예수 정신이자 제자직의 본질이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나눔은 강요되지 않는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나, 선행을 통한 구원 기대도 나눔의 동기가 될 수 없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인들보다 더 의롭기를 요청한 것도 되돌려 받기를 기대하지 않는 선한 행동이 더 의롭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예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태 6:33)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의를 구하면 정말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저절로 해결될까? 오늘의 우리만이 이런 믿음이 적은 어리석은 의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산상 설교를 듣는 청중 역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일자리(농사와 길쌈)도 버린 방랑하는 급진적인 남자와 여자들이었다. 온갖 걱정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이 어떻게 위로가 될 수 있었을까? 의아해 하는 이들을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오래된 랍비 전승에 따르면 "믿음이 적은 사람"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안식일에 만나를 모으려고 했던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한다. 내일 먹을 것에 대한 걱정 때문에 모으기만 하는 우리, 하느님의 약속보다 자신의 재산을 더 신뢰하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 나누기보다 모으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대부분 내일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랐던 이들은 왜 하느님의 의를 먼저 구해야 했을까?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 그러나 걱정으로 가득 찬 현실을 외면하게 하지 않는다. 하느님도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신다. 하느님의 의와 우리의 현실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의 의를 먼저 구할 뿐이다. 나눔을 통한 정의 실현은 우리가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을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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