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0/5(수)
분단 한국에 있어서의 민중의 한  
­한반도의 분단 피해자들의 치유­

서 광 선 (전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8월 보름달의 한

음력 8월의 보름날인 추석은 한국인들에게 옛부터 내려오는 감사절이다. 이날 모든 한국인들은 한해의 수확을 하늘에 감사하며 가족묘소에서 조상혼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도처에 흩어졌던 가족 구성원들은 고향의 동산에 있는 가족묘역으로 돌아오며 ,감사절인 추석을 기념한다. 이날은 또한 저세상에 있는 가족 구성원들의 혼령 앞에서 이세상에 살고 있는 가족들이 만나는 상봉의 날이기도하다. 이날 약간의 곡주를 들면서 하는 몇마디의 논쟁과 울음과 흐느낌이 있지만,떠날 때는 조상혼의 이름을 빌어 위로와 화해의 감정이 되는 화해의 때가 된다.

이 일는 바로 지난달 말에 있었는데, 김용복 박사가 서울에서 북동쪽으로 20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그의 가족 묘역을 방문하는데 추석 교통난으로 인해 꼬박 다섯 시간이 걸렸다.추석 연휴 3일간 ,서을은 거의 텅 비었으며 모든 고속도로들은 시골로 그들 가족을 방문하는 차들로 혼잡을 이루었다. 나는 가족과 함께 장인 장모의 묘역으로 차를 타고 갔다.나의 아들이 겨우 십대소년 이었을때 그는 나의 아버지의 묘소에 관해 묻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데,왜나하면 이제는 그 이유를 알고 있고 내가 당황 해하거나 화까지낸 경우를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금년에 나는 그가 이 죽음에 관계된 질문을 다시 하길 바라고 있음을 알았다."당신은 아직도 당신 생전에 북으로 돌아가서 당신 아버지의 묘소를 쁹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내가 대답을 할수 없었기에 그도 알려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에 나는 그를 보며 눈에는 눈물이 맺힌채 긴 한숨을 쉬었다.

수백만의 한국인들이 1950년에 다음 추석에는 그들의 가족 묘소에서 성묘하러 돌아올 것을 기약하며 고향을 떠나 왔다. 나는 언제나 푸르른 대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북한의 수도인 평양의 남쪽 언덕에 나의 아버지의 묘소를 두고 왔다.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의 아버지의 외로운 묘소를 한번도 돌보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한

나의 아버지는 자주독립 설교가였다.그는 젊었을 때 일본의 신사 참배를 거부했으며 한국을 떠나 만주로 자진 망명하였다.그가 우리 북한의 고향으로 돌아 왔을때 그는 출애굽과 해방에 대해 말하는,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설교가가 되어 있었다. 한국 전쟁이 터지기 전날 그는 북한 경찰에 체포되어 갔다. 나는 싸늘한 10월 바람이 부는 어느날 저녁 대동강 둑에서 총탄이 박힌 그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8월의 달이 보름달이 되고 밝게 비추일때, 남과 북으로 분단된 수백만의 우리 동포들은 위험으로부터 안전과 편안함을 쁹아 탈출한 수치와 죄때문에 뒤에 남겨두고 온 가족 구성원들에게 깊은 한이 맺힌 찢어지는 마음에서 나오는 눈물을 삼키고 있다.남북한 양쪽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전투와 폭격 가운데에서 그들 식구를 잃었다.북한의 집에 부인을 남겨두고 와서 남쪽에서 재혼한 수천명의 남자들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의 소재를 궁금해 말없이 울고 있다.수백,수천의 남한 가정들은 그들의 가족 묘소를 공개적으로 방문할 수 없다.왜냐하면 그들의 아들이나 형제 자매,남편과 아버지가 남한군의 양민대량학살의 공포로 고문을 받고 어두운 밤 최전선에서 서있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마을에 숨어있는 북한 간첩들에게 도움을 주는 친공산주의자들로 간주 되었기 때문이다. 전투와 납치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잃었기에 남한에도 북한에도 묘소를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분단때문에 그들은 친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고고,또한 반공산주의자라고 죽어야 했다.북한에서 반공산주의자들이 죽었을 뿐 아니라,남한에서는 친공산주의자들이 죽었다.그들은 이념적 확신 때문에 죽고 납치 되었을 뿐만 아니라,이렇게 분단되고 전쟁으로 찢긴 강토에서 우연히 살게 되었을 뿐이다.

우리가 텔레비전 화면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 200마일의 비무장지대 철조망 장벽은 더욱 높아지고 견고해졌다.북한과 중국,미국에 의해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 거의 20년이 지난 1972년 이래로 남북한 정부가 이른바 7.4 공동성명을 발표하였을 때 그속에는 국내와 국외에서 정부간 및 비정부간의 차원에서의 상당한 양의 교류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속에는 한반도에서의 평화 성취를 위한 남북 상호 대화에 있어 중대한 변화도 담겨 있었다. 두번에 걸쳐 매우 제한된 북한 민간인들이 남한에 있는 그들의 이산가족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매우 제한된 소수의 남한 민간인들이 많은 기자들과 예능인들과 함께 북한에 있는 그들의 이산 가족들을 방문하엿다.북한선수단이 1988년 서울올림픽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기는 하였지만, 국제경기에서 남북한은 자주 만났으며 어떤 때는 남북 단일팀으로 출전하기도 하였다.남한의 음악가들이 북한에 초청되었으며 북한사람들도 남한으로 초청 되었다.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남한의 여성지도자들이 북한여성들의 서울 방문에 대한 교환방문으로 북한의 김일성을 방문하엿다. 더 밀접하게는 우리 남한교회의 지도자들이 스위스,일본,미국,캐나다 등지에서 한국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에 대한 토론을 위해 북한 교회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번지르한 상호간의 교류 기록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분단 백성들의 축적된 한은 풀리지 못하고 잇다.비무장지대가 가로막혀 다른쪽의 가족이나 묘소를 단 하루라도 방문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국경을 넘는 우편교류도 없다.남한 사람들은 북한의 신문을 읽을 수 없으며,북한사람들은 퇴폐적인 남한의 오락프로그램을 볼 수 없다.


분단의 한의 정치경제학

한은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욕망이 만족되지 못할 때의 심리적 감정이다. 사람들은 그의 배를 채우기 원하는 이런 불만족의 한이나 교육,정치권력,부에 대한 결코 채워지지 아니하는 욕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부당한 이유에 의해 사람의 욕망이 만족되지 못할때는 한의 감정이 고조 된다.그리고 사람이 정당치 못하게 심지어 비인간적으로 취급받으며,부당한 대우에 대항하거나 항의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으면 한의 감정은 축적되게 된다.그리고 그같은 감정은 생존을 위해 억제 되어야하며,그런 경우 인간의 전 존재는 오직 한으로 남을 뿐이다.

한국과 같은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여성의 삶은 한이 맺힌 생활로 묘사될 수 잇다.출생부터 여성의 삶은 학대 받는다.여성은 부모와 형제 자매에 의해,학교와 사회와 교회에서 차별대우를 받는다.여성들은 직장에서 차별대우를 받거나 소외되며,가정에서는 자주 남편에게 구타당하며,성적 괴롭힘과 학대의 대상이 된다.여성은 법적,문화적,정치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취급되며 여성의 인권은 무시된다.여성의 삶은 자아실현의 성취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는 한의 삶이며,문화적으로도 가부장적 사회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을 갖고 있지 못하다.구조적으로 한국의 여성들은 한이 맺힌 백성이며 참된 인간 존재로서의 자아 정체성을 위해 이제까지 투쟁하고 있다.

분단의 한은 개인적인 한일 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다. 한국 백성의 분단의 한은 전쟁

희생자들의 매장지역을 방문하지 못하는 일과 비무장지대를 가로질러 가족들을 상봉하지 못하는데 대한 수치와 죄의식과 슬픔의 감정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물론 그 자체가 분단의 한은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으며, 우리들 중에서 돌아갈 고향이 없는 자들도 해당한다.그러나 그 이상으로 한국인의 분단의 한은 역사와 체제에 의해 축적되어 왔다.

1945년 일본이 서방 연합군에 항복하였을 때, 한국백성들은 도시와 시골의 거리에서 민족의 독립을 외쳤다.그러나 우리들 해방의 흥분이 가시자마자 분단의 발표가 남북한 모두에게 충격과 실망을 주었다.한국 백성들은 분단에 대해 항변할 기회나 방법이 전혀 없었다.그것은 초강대국에 의해 부당히 주어진 것이었다. 일찌기 한반도 전체가 초강대국들에 의해서 일종의 신탁통치를 받게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그리고 소련 병사들과 미국 병사들은 영구히 본토로 갈 것이란 소문도 돌았다.그러나 한국 전쟁은 발발했으며,통일을 위한 시도로써의 피비린내나며 참화를 가져온 3년간의 전쟁이 끝났을때 분단의 벽은 전보다 더 높게 세워져 있었다.

한국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난 1953년 이래로 한국의 정치경제는 민족적 분단과 군사적 대결, 경제적 경쟁과 사상적 퇴보를 바탕으로 서 있었다. 남북한은 서로를 생사의 적으로 간주하며 양측에서 2백만의 군대를 남한은 지엔피의 거의 6%,북한은 20%의 비용으로 최첨단 현대화기로 무장하였다. 이른바 전쟁이 없는 평화시대에 있어서의 군부는, 장군들이 나라의 정치에 관해 야망을 품게 되었다.그들은 남한에 대한 북한공산주의자들의 공격 위험에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다는 정당화로 정치적 권력을 잡았다.민족의 분단은 정계에 나오며, 의회의 운영절차를 억압하며,국가의 선거에서 농간을 부리고,민중들에게 민주주의로 가겠다고한 약속들을 저버리고,권력의 장기집권을 수용하도록 국민에게 강요하는 군의 장군들에게 가장 좋고 편리한 변명이 되었다.분단상황의 정권유지에 있어서 언론,집회,정치적 의사표시의 인간 권리가 억압을 받았으며,나라의 감옥은 항거하는 학생들,지식인들,야당 지도자들 뿐 아니라 양심적인 종교지도자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지난 30년간 선도적 이념은 국가의 안전과 반 공산주의였다.이러한 국가의 이념 주변에서 군사적 문화가 국민들의 삶의 양식에 있어서 자리 잡았다.북한의 공산주의 자들에 대한 증오와 공포,복수와 폭력의 문화는 우리들 마음에 자리를 잡았다. 국민학교의 교과과정에서 대학의 필수과목인 국민윤리에 이르기까지 북한사람은 동물보다도 못하고 공산주의는 인류의 주된 적으로 간주되었다.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는 군부 정권에 대한 어떠한 문제의 비판도 북한 적들과 제휴하는 것이며 이런 경우 국가보안법에 의해서 친공산주의자들은 제거 되어야 한다고 말하게까지 되었다.심지어 북한에 관한 어떤 지식도 금지 되었고 한국의 통일에 관한 어떤 논의나북한에서나 북한에서온 어떤 사람과 접촉을 시도하는 것도 법에 의해 심한 처벌을 받았다.가장 근본적으로 한국 백성들은 통치의 절차와 기본적 인권,그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 하는데 있어서 소외되었다.분단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포기해야 했으며,신이 우리에게 준 권리를 포기해야했다.


분단의 국제적 체제

민족 분단은 한국 백성의 집단적인 한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해방직후 38도선이 한국 민족과는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소련과 미국 군대에 의해 이땅에 질러졌다.한국 백성은 오랜 식민통치와 외세의 공격과 정복의 역사를 통해 한이 맺힌 백성이다.중국,일본,러시아와 같은 강대국에 둘러싸인 반도의 작은 나라로서 한국은 제국 진출의 먹이가 되어왔다.한국 백성들은 집단의식에 있어서 외세에 의해 억압받고 착취된 백성의 한이 축적되어 있다. 한국의 분단은 이미 축적된 한민족의 한에 또다른 무거운 짐을 더한 것이다.

1945년 해방으로 점령군 일본군은 무장이 해제되고 영구히 떠났다.그러나 승리를 거둔 미국과 소련의 해방군이 퇴각하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들어왔는데, 그들은 지역적일 뿐아니라 이념적인 면에서까지 분단을 고착화하기 위하여 주둔하였다.한국전쟁 기간에 15국가의 군대가 유엔군의 깃발아래 한국땅에 상륙하여 그들의 생명을 희생했으며 수백만의 중국군이 북한군과 함께 싸우기 위하여 밀려내려 왔다.일본군은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약 36년을 한국에 주둔했고 1945년 이후 지금까지 미국군은 46년 이상을 한국에 머무르고 있다.약 4만 3천의 미군병사가 한국에 주둔하고 있으며,이그들뿐 아니라 한국군의 최고의 작전지휘권도 미국이 갖고 있다.미군병사는 북한에 대해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으며,헌병은 판문점 공동경비 구역을 북한과 대치하여 지키고 있다.남한에 대한 북한의 공격 위협이 있고 분단이 되어 있는한 미군을 유지케 하기위한 수백만 달러가 미국정부에 지불된다.지금까지 약 10년간 매해 봄이면 모든 한국의 산들과 강들과 숲들,논들이 대규모 한미 연합 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 병사들에 의해 손상되어 왔다.팀스피리트 동안 거기에는 약 20만의 미군 병력이 육,해,공으로 참여하는데 강물은 오염되고,우거진 삼림이 황폐화되고,농경지가 피해를 보았고,마을의 여성들이 추행당하고 강간당하였다.최근 미국 대통령의 방한때 클린턴은 한국민이 원하는한 한국에 있을 것임을 재차 언급하였다.그러나 그들의 뒷마당에 외국 군대가 나타나는 것을 참아야하는 게 분단된 한국 민족의 한이다.

분단 한국의 여성들은 한국 민족의 집단적인 한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다.일본 식민주의 아래서 한국여성들의 상처와 흉터는 깊고 고통스러웠다.태평양전쟁 동안 193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밝혀지지 않은 숫자로 10만에서 20만 사이의젊은 여성들이 일본관리에 의해 납치되고 억류되어 병사들에게 강간되기 위해 일본의탄광에서부터 인도네시아와 캄보디아 정글레 이르기까지 어디나 최전선에 보내졌다.태평양전쟁에서의 한국여성들의 상처와 흉터가 채 치유되기도 전에 또다른 군사적 윤락이 미군 부대와 주변에서 시작 되었다.어떤 여성들은 미군 병사와 결혼하여 새로운 삶의 방식과 언어에 적응하기 위해 투쟁 해야하는 분단과 단절의 한을 가지고 낯선 나라로 건너갔다.(마리온 케네디 김의 책을 보라.내가 꿈을 꾸었을 때.한국의 여성 민중 이야기,홍콩,1992)

소련 연방의 해체와 독일의 통일,냉전 체제의 와해 이래로, 괄목할 진보가 한반도에서의 남북한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회담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다.그러지만,아무도 한반도의 통일에 관한 미래적 진보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국제적 조정을 확신하지 못한다.유엔은 두개의 한국을 회의에 참석 시키며,유엔 국기 게양대에는 남한과 북한기 모두가 약 2년간 나란히 날리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를 하나의 통일된 한국기가 게양될때까지의 일시적인 것이 되어야한다고 믿으나,어떤 사람들은 한반도와 주변에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간은 두개의 깃발이 유지되야 한다고 주장한다.요즘은 북한의 핵문제가 국제 협의에 있어서 가장 열띤 주제가 되고 있다.북한 정부는 국제 원자력 기구의 사찰을 거부하였고 핵확산 금지조약을 탈퇴하였다.그런데 이는 동북 아시아의 평화유지에 있어서의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되고 있다.우리가 핵전쟁의 잠재력에 의해 위협받는한 우리의 통일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며,대부분이 심상치 않게 생존 자체의 위험 안에 처해 있는 것이다.


분단 상처의 치유

198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회는 정치선언인 민족의 화해와 평화에 관한 한국교회의선언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에큐메니칼 교회지도자들의 빈번한 대규모 회의 결과로서 기독교 행동신학자들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선언이다. 이것은 신학적인 선언으로서 치유와 화해의사역을 촉구하고 있다.이것은 정치적 선언으로서 민족의 분단,백성의 고통,평화와 통일에 대한 희망과 비전을 남북 양쪽이 타협 해야함을 촉구하였다.선언은 에큐메니칼 교회의 고백으로서 희년을 선포하였는데, 한민족 제2의 해방으로서 분단의 50주년이 되는 1995년을 바라보았다.

선언의 첫번째 부분은 신학적인 부분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의 회개를 촉구하였다.선언문은 언급하였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평화와 통일을 위한 이 선언문을 선포하면서,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민족 앞에 죄를 지었음을 고백한다.:분단의 체제 안에서 우리는 오랜기간 다른편에 대해 깊은 증오와 적개심을 품어 왔다.

1) 한국 민족의 분단은 동서 냉전 체제 하에서의 세계적 강대국들에 의한 구조적 악의 결과이다.이 실체는 남한과 북한 사회 사이에 나타나는 구조적 악의 근원적 원인이 되고 있다.분단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죄를 지어 왔다."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 22:37-40)

2. 우리는 남한의 기독교인들이 특별히 반공산주의를 실제적으로 종교적인 우상으로 여겨,북한에 있는 공산주의 집단을 적과같이 여기는데 만족해왔고,심지어는 우리들과 이념이 다르다고해서 북한 동족을 매도해왔음을 고백한다.

이것이 남한의 기독교인들이 받아 들이기에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추상적인 용어로서의 회개는 쉬울지 모르나 이와같은 구체적인 언급은 국가의 이념이 반공산주의인 상황하에서 특히 위험하기 때문이다.그리고 나자신의 경우와 같이 친척이나 친구가 북한의 공산주의 비밀경찰에 의해 고문방이나 전쟁터에서 죽은 경우도 그렇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이 계명은 증오와 불신위에 세워진 우리와 같은 분단 상황 하에서는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예수의 명령이다.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분단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타협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조건임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분단의 실체를 보일 수 있는 구조적 분단에 관한 선험적 판단이며 분단의 한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의 마음에 있는 숨겨진 상처를 드러나게 한다.당신이 한번 우리의 죄와 증오를 회개하면 우리 죄의 실제적 구조와 힌맺힌 역사,억압받는 정치와 경제를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된다.

선언의 두번째 부분은 남북한 양 정부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으로 나아갔다. 교회협 문서는 이미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언급된 자주,평화,사상,이념,체제의 차이를 극복하는 민족의 통일이란 세 원칙을 채택하고,인도주의 원칙과 통일 과정에서의 백성의 참여라는 두가지를 더하였다.

그러나 가장 눈에 띄는 주장은 한반도에서의 평화의 성취와 관련된 것이다. 교회협은 무엇보다 양측 무기의 감축,한반도의 비핵화,미군을 포함한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등을 제안하였다.증오에 대한 정치적 회개는 평화회담과 접촉,침략 노력의 중지가 신뢰될 때 보여질 수 있다.전쟁의 상처는 전쟁과 죽음,피흘림이 없을 것이란 분명한 희망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이전에는 적이었던 사이에서 진정한 신뢰를 세우며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일은 바로 분단의 한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치유의 노력이 된다.

교회협 선언의 세번째 부분은 1995년이 되는 해를 한국민의 희년으로 선포하였고,이를 위한 한국교회의 준비를 요청 하였다. 이 일은 민족 분단의 구조 아래서 고통받고 있는 한국인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의 책임을 수행하는 일이다.한국의 평화와 평화적 통일의 성취는 분단 한국과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선교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분단 한국에서의 백성들의 상처 치유의 선교와 화해의 선교를 위해 부름 받았다.


  이름   메일   회원권한임
  내용 입력창 크게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