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생명학연구원 대구 청소년 종합상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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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4(화)
커뮤니케이션 신학  
1)커뮤니케이션의 성서적 모델

⑴3위1체의 이미지

신약성서를 통해 암시적으로 제시되었으며 기독교 신학을 통해 일관되게 주장되어 온 3위1체의 이미지는 단적으로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커뮤니케이티브 엔티티(Communicative Entity)임을 증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아버지-아들-성령의 상호관계에 대한 3위1체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인격안에는 분열이 없으며 그 분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하신 인간존재를 향해서 궁극적으로 바라시는 것도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을 실현하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 기술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로서의 안간에 관한 기사에서 하나님을 엘로힘, 곧 단수가 아닌 복수성을 지닌 복수적 통일체로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신 인간 역시 단수가 아닌 복수,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 co-humanity였다는 것이 성서의 기본신념이었다.

창세기 2장의 성서기자 역시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류를 보시고 가장 좋지 않게 보신 것, 사악하다고 보신 것이 바로 켜뮤니케이션이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 즉 혼자있는 인간성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형상의 회복, 타락한 인간의 회복과 구원의 목표가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회복임은 여기에서 자명해진다고 할 수 있다.



⑵하나님의 역사 참여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복음전달의 매체로서의 커뮤니케이션이 행해진 포괄적이고 대표적인 모델은 세속적인 인간 역사 속에 개입, 참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참여 행위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의 역사 참여 행위는 성서적 맥락에서 보면, 인간과의 참된 의미의 인격륢 교제를 꾀하는 행위이며, 신학적으로는 인간의 구원을 의도한 행위이다. 즉 하나님의 역사 참여 행위의 성격은 구원사적 의미를 지닌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 활동이다.

창세기 제3장의 낙원 추방 이야기는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원초적 모습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태고의 인류가 신이 설정해 둔 법질서를 깨뜨리고 거기서부터 이탈하여 나갔을 때 야훼 하나님께서 신속하고 민첩하게 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치유의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하신 것을 보여준다.

야훼 하나님은 이 세속의 인간을 찾아 오셔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 질문을 던징다.

"너 어디 있느냐?"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일러 주었느냐?"

"왜 너는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이 세가지 질문은 문체로 보아 분명히 심문의 형식을 띠고 있으나 이 사건 말미에 나오는 야훼 하나님의 일련의 행위, 즉 낙원으로부터 쫓겨나는 이 태고의 한 부부를 위하여 신의 호를 상징하는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다는 그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심문은 분명 구원의 응답, 즉 화해의 커뮤니케이션을 기대하는 질문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응답은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인격적 대화의 커뮤니케이션을 거부하고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너 어디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인간은 "나는 숨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고, "누가 네가 벗었음을 일러 주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당신께서 짝지어 주신 여자가 금단의 열매를 따서 주므로 내가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으며, "왜 너는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뱀이 속여서 따먹었습니다"라는 대답을 한 것이다.

이러한 대답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인간-여인-뱀으로 결속된 저 에덴동산에 수립되었던 원초적 커뮤니티(community)의 파괴이다. 즉 아담이 응답한 "당신께서 짝지어 주신 여자가 금단의 열매를 따서 주므로 내가 먹었다"라는 대답은 "당신"으로 표현된 영원자인 야훼 하나님과 인간의 최고 최선의 구원자(에뵉 커그네도인)인 "여자"와 그리고 "인간"(아담) 자신의 삼자 사이에 맺어진 신의의 관계를 깨드리는 성격의 대답, 이른바 자신의 과오를 여자를 주신 하나님에게 돌리고 그리고 동시에 그 허물을 자신의 구원자(에뵉)인 여인에게로 돌림으로써 저 에덴의 평화공동체를 깨뜨리는 성격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파괴가 빚어내는 결과인 신의 저주는 모두 관계의 왜곡과 커뮤니케이션의 붕괴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즉 그토록 절친했었던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관계는, 하나는 다른 하나의 발꿈치를 물고 또 하나는 다른 하나의 머리를 치는 반목의 관계가 되어 그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영원히 단절되게 되었고, 아담과 그의 구원자인 여자 사이는 평등보다는 서로 지배하려는 종속과 반목의 관계로 전락되어 완전한 의미의 커뮤니케이션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아담은 그의 원고향인 땅, 즉 "아다마"와 불편스러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성서는 이처럼 커뮤니케이션의 도착과 왜곡이 곧 인류와 자연이 신으로부터 받은 저주의 본질임을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곧 커뮤니케이션의 파괴의 결과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낙원 추방 이야기 다음으로 커뮤니케이션의 파괴를 말하고 있는 것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이다.

낙원에서 쫓겨난 인류가 그 첫 생산활동을 통하여 얻은 두아들 카인과 아벨이 서로 반목관계가 되어 형제 살인 행위로 번지자 야훼 하나님은 또 그들을 찾아 오셔서, 즉 인간 역사 속으로 개입해 오셔서 커뮤니케이션을 재개한다. 카인을 향해 하나님은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하는 두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 역시 이 이야기의 말미에 나오는 한 사건, 이른바 신의 호의를 상징하는 저 유명한 "카인의 표"를 통하여 살인자 카인의 생명을 보호해 주시는 일련의 야훼 하나님의 구원행위로 끝나고 있다는 점에 미루어 볼 때, 이 심문도 역시 구원의 응답, 즉 화해의 커뮤니케이션을 기대하는 질문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카인의 응답은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하는 커뮤니케이션 파괴의 대답이었으며 이에 따르는 하나님의 저주는 농토를 생업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농경민의 조상 카인이 농토로부터 유리하는, 이른바 농민과 농토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단절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밖에도 원역사를 마무리 짓는 바벨탑의 이야기 또한 인류가 그의 죄로 거두어들인 심판이 다른 아닌 "언어의 혼란"이라는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원역사에 기술된 커뮤니케이션의 파괴는 아브라함 소명사건부터는 야훼 하나님께서 깨어진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 회복을 위해 그의 구원사업의 방향을 "한 백성의 선택"이라는, 이른바 선민역사를 통한 세계인류의 구원이라는 방향으로 역전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곧 아브라함 소명사건, 모세 소명사건, 여호수아, 사사들과 그리고 여러 예언자들의 부르심 등을 통해 자신의 종들을 메신저로 불러 세우셔서 그들을 통한 인류와의 커뮤니케이션 회복을 시도하신다. 성서기자의 전통에 의하면 아브라함이나 모세, 또는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과 사울까지도 예언자라고 부르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성서 역사속에 등장한 소명받은 자들은 모두 그 기능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야훼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재하는 미디에이터(mediator)들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미디에이터 활동 역사의 절정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서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참여 행위들이 모두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류사이의 이 깨어진 커뮤니케이션을 회복하시려는 구원의 역사과정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이들 소명받은 자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인간과 인간사이의, 그리고 인간과 자연사이의 이 깨어진 대화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돕는 미디에이터들이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도구들이라고 하는 것을 밝혀주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활동과 언어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비젼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것으로서 이들의 예언의 핵심에 잇는 메시아 왕국의 도래란 곧 단절되었던 커뮤니케이션이 회복된 공동체(community)에 다름아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날이 오면 이스라엘은 에집트와 앗시리아 다음의 세번째 나라가 되어 세상에서 복을 받으리라. 그때 만군의 야훼께서 복주시며 이르시는 말씀 '복을 받알, 내 백성 에집트야. 내가 손수 만들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하시는 말씀을 들어라."(이사야 19:24-25)

이 선포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원수 에집트와 앗시리아가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임을 예시하고 있는데 이는 곧 원수로 갈라졌던 나라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벽이 열리는 그 시대가 바로 메시야의 시대임을 가리키고 있다. 이사야 뿐만 아니라 예언자 아모스도 야훼께서 불러 올리신 백성이 결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디오피아와 블레셋 백성과 시리아 백성도 모두 포함되는 그런 시대를 메시야 시대로 예견했으며(아모스 9:7) 예언자 미가도 먼훗날 메시야 시대가 오면 모든 민족과 만민이 야훼의 산으로 모여 제각기 가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전쟁이 없는 화해와 평화의 삶을 살게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미가 4:1-5) 예언자 이사야는 또한 이상적 메시야 왕국이 늑대와 새끼양, 표범과 수염소, 사자와 송아지, 암소와 곰이, 그리고 어린 아이와 독사가 함께 있어도 아무런 해가 없고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의 공동체 사회로 나타날 것임을 예언했다.

신약은 이같은 커뮤니케이션 회복의 비젼이 역사안에서 실현되기 시작했음을 증언하고 있는 바, 이것이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의 의미이다. 이 이야기에서 바벨탑의 언어혼란으로 깨어졌던 커뮤니케이션은 성령의 강림을 통해 불소통의 벽을 허무는 것으로 나타난다.


⑶성육신

커뮤니케이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선교역사의 절정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아들 예수의 인격 안에 성육하신 하나님의 자기겸허의 사건이며 이는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참여 행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육신 사건은 성서가 제시하는 가장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의 사건이며 커뮤니케이션 모델의 가장 모범적인 원형인 것이다.

성육신의 의미는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를 낮추어 남에게 내어준다는 사실에 있으며 이는 또한 인간의 완전한 구원과 속량, 인간의 완전한 자기해방은 나의 모든 것을 이웃과의 관계 속에 내어주는 인격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성육신적 삶이 이를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가, 율법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에 엄격히 복종하기만을 요구했던 동시대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잃은 양의 비유, 탕자의 비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등등을 통하여 잃은 자, 소외된 자 들 국외자의 인간 회복에 중점적인 관심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그 국외자들, 이른바 세리와 창녀와 사마리아인들과는 같은 정죄받은 죄인들과 자신을 친구로서 일치시키는 삶의 행태를 동시에 보임으로써 복음을 커뮤니케이트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⑷공동체, 코이노니아,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은 본질적으로 코이노니아에 귀속된다. 코이노니아야말로 하나님 나라, 메시아 왕국, 그리고 3위1체이신 하나님의 활동안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온(교제)의 실체이다. 코이노니아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진정한 속성이며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안에 현존하는 실재이다. 인간의 약점 때문에 코이노니아는 불완전하지만 코이노니아의 실재는 사랑의 힘으로서, 인간의 온갖 적대감에 대한 도전으로서,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가운데에 있는 철저하고 완전한 코이노니아에 대한 약속으로서 엄연히 현존한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이 코이노니아에 귀속된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이 코이노니아안에서 일어나며 그 내용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즉 복음인 코이노니아에 관한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오신 근본 목적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억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 성서의 근본진리이다. 복음은 예수라는 분과 그의 공동체를 알려준다. 예수는 복음의 생생한 전달자(communicator)이자 하나님 나라 소식의 전달자이다. 그의 전존재와 삶은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행동인 것이다.

오순절 성령 도래의 결정적인 표징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 커뮤니케이션과 코이노니아가 현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바빌론 제국인 로마제국의 통치하에서 초대교회가 코이노니아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상통치의 왕국이 새로이 수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코이노니아와 커뮤니케이션을 뜻하는 공동체가 붕괴되는 원인은 민중의 충성과 언어를 독점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흩어놓아 그들 삶의 참된 목적에 관하여 분열과 혼란에 빠지게 하는 제국의 반역성에 있는 것이다.

이상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성서적 성찰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①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 영역은 분명히 초역사적이지도 않고 순수한 비정치적 영역으로 국한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바로 다원화된 세속세계,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커뮤니케이트한 영역은 그의 역사참여 행위에서 뚜렷이 나타난 것처럼 어디까지나 다원화된 - 이스라엘과 비이스라엘을 포괄하는 - 전세속역사와 문화였다. 성육신 사건 또한 초월자가 이 세속속으로 들어와서 이 세계의 일상성과 추상성을 깨드린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이 그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을 성역화, 케토화해서는 안되며 인간의 실역사, 다원화된 그 구체적 삶의 환경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②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 영역은 다원화된 세속세계 자체이므로 세상의 다원성 자체를 파괴할 위험이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집중화는 거부되어야 한다. 즉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케이션의 구조, 수단의 소유권, 프로그램 담당자의 수나 성격에 있어 복수를 지향한다.

③하나님의 성육신적 커뮤니케이션은 이 세속세계의 추상성과 상투성, 정체성을 깨뜨린 것이므로 - 신이 인간으로 낮아지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권위주의적 상태를 깨뜨린 것이므로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은 현존하는 정치, 경제 및 특수 이데올로시, 사회구조의 현존질서를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주는 사회의 다원성과 역동성을 충분하게 인지하여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로 끊임없이 변모되어 가도록 변화를 추구하는 예언자적 음성으로서 그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④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는 성육신을 통한 인간과의 커뮤니온(교제), 인간과의 화해의 실현, 인간구원의 성취와 이상적인 공동체(Community)의 수립에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커뮤니케이션 역시 화해와 대화의 채널이 되어야 한다.

⑤성서는 신구약을 통틀어 일관되게 약자 변호의 윤리를 견지하고 있으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커뮤니케이션 행위, 곧 약자와 소외된 자 편에서 서신 행위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따라서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은 약자들의 권익을 지켜주고 그들 편에 서는 기능을 수행하여야 한다.




2)교회와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의 종교인 기독교를 믿는 신안인들의 집단인 교회가 늘 커뮤니케이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온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보통 교회는 전통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해왔거나 개인과 성령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좁은 의미의 커뮤니케이션만을 인정해 왔다. 전자의 경우 신앙인은 단순히 말씀의 수신자 일 뿐으로 여기에는 쌍방커뮤니케이션의 어떠한 여지도 남겨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성서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커뮤니케이터로서 그의 메세지를 따르는 수용자, 동역자를 찾으신다. 또 수신자는 메세지를 인격으로서, 즉 능동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신앙의 사사화(私事化)로서 하나님의 역사참여 행위의 역사성, 사회성을 약화시키고 따라서 역사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에 접근하기 어려운 약점을 갖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기독교는 커뮤니케이션 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선교매체로서의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은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조차도 단순한 수단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이 강조되었을 뿐 하나님의 메세지가 위로부터 교회를 통해 개인에게 전달된다는 하향적, 일방적 도식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공중매체의 내용과 구조, 기능 등을 결정짓는 정치적, 경제적 요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가해지지 않았으며 청중은 여전히 수동적인 위치에 남아있었다. 교회 커뮤니케이션 방법의 신뢰성(credibility)은 의심되지 않았고 청중의 참여와 나눔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교회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종교적 체험은 종교지도층에게뿐만 아니라 사회기층의 민중에게서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무시되었다. 교회는 진리에 대하여 일종이 독점적 위치를 갖는 것으로 스스로를 이해하였다.

이같은 독점적 태도는 서구교회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구 있다. 서구에서는 수세기동안 교회가 사회에 대하여 지배자의 입장에 있었다. 종교와 도덕뿐 아니라 소위 세속부문에서도 교회는 서구사회를 지배하였으며 통제가 가해질 경우 교회 지도자들을 권력자들과 실제적인 타협을 했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의 태도는 권력자들의 이해에 따라 결정되게 되었다. 일례를 들어 종교개혁은 하나의 대중운동으로 출발한 것이었으나,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된 민주화 과정은 교회의 보수적인 입장을 하나도 바꿔놓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교회의 이같은 위치는 역전되었다. 이제는 교회가 아니라 세계(세속사회)가 지배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는 사회가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주요한 문제들을 깨닫게 되었다. 교회는 복음선포와 프로그램을 삶과 죽음의 문제, 인류 생존의 문제, 군비축소 문제, 인권 문제와 인종차별 문제에 적응시키려 하고 있다. 지배적인 역할을 봉사의 역할,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민중에게 봉사하는 역할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다시 새롭게 발견된) 역살이 모든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교회의 과제를 말씀에의 복종, 개인구원과 개인 개종을 통한 세계의 개종으로 제한하고 있는 경향이 많이 존재한다. 교회간의 분열과 교회내의 분쟁은 이같은 지배자적 입장이 다양한 형태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일어난다.

그러나 오늘날의 새로운 상황은 독점적인 역할로부터 겸허한 종의 역할로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이는 교회가 권력자들과의 동반적 관계를 청산하고 고통받으며 억압받고 있는 민중을 향하여 방향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독점적 위치 때문에, 교회는 늘 복음 메세지를 청중에게 전할 때, 이를 항황에 맞게 해석하는 데에 있어 과민반응을 보여왔다. 즉 교회는 청중이 온전한 복음 메세지에 접근하는 것을 제한하는 문지기 노릇을 해왔던 것이다. 교회의 이같은 지배자, 문지기로서의 역할은 복음메세지를 값싼 "소비재"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복음은 슬로건과 신조들로 포장되어 "팔렸"으며 진리는 간단한 지침들로 축소되었다. 협소하게 규정된 욕구는 쉽게 충족될 수 있었다. 간단한 욕구 충족의 경험은 대중의 개종을 결과했으며 부흥 운동과 경건주의, 근본주의의 물결을 불러 일으켰다.

복음이 쉽게 소화할 수 있는 소비재인 것처럼 전파되자 이는 곧 믿고, 회의하는 자유를 위축시키게 되었다. 이같은 복음선포는 신앙에 대한 회의나 사회에 대한 회의를 약회시켰다. 사람들은 현상유지에 만족하면서 보다 나은 미래를 다가올 세계, 피안에서 찾게 되었다. 빈곤과 비탄, 억압과 불행은 받아들여져야 했다. 그런 것들은 세상안의 죄와 악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독점과 지배, 그리고 조작은 복음메세지를 하나의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며 그렇게 됨으로써 그리스도 가르침의 열쇠인 자유와 해방을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여러분의 삶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로 몰아넣는 것"(로마서 8:15)에서 해방되고 "죄의 결과인 죽음의 공포"(로마서 6:22)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이다. 크리스찬의 자유는 그리스도에 의해 보증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풀어준 율법의 멍에를 다시 지는 것은 그의 사역을 거부하는 것이다.(갈라디아 4:9-11, 5:4)

자유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결과이다.(로마서 3:24,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진리를 만나게 되며 "진리는 너희를 자유케 하실 것이다."(요한 8:32) 크리스찬의 자유는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 주는"(고후 3:18) 성령에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증대한다. 성령에의 개방은 그리스도에의 복종과 일치한다. 크리스찬은 의의 종이 되어야 하며 이는 곧 성화(로마서 6:19)로 이어진다. 자유와 복종 사이의 긴장은 크리스찬이 그의 이웃에게 봉사하는 강도에 달려있다.

그리스도의 삶에 있어 지배로부터의 자유는 그의 소외된 자들에 대한 태도의 다른 면이었다. 그리스도는 자유하실 수 있었으며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안에서는 지배, 곧 하나님으로부터 민중을 고립시키는 행위는 결정적으로 부인되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메세지와 삶이 의미에 대해 분명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획득한 실존적인 자유 때문에 국가 관리들에 의해 핍박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그들 자신의 해방을 수반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그들은 모든 형태의 노예적 삶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이상의 성찰로부터 우리는 교회의 커뮤니케이션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크리스챤 커뮤니케이션은 그리스도를 죄와 악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시는 분으로 증언한다.

②크리스챤 커뮤니케이션은 그들의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개발(self-development)의 주체자가 되어 스스로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잇는 인격으로서의 청중을 전제한다.

③크리스챤 커뮤니케이션은 자신의 상황적, 개인적, 집단적 정체성(identity)을 지닌 각각의 특정한 청중에 대해 존중하는 자세를 지닌다.

④크리스챤 커뮤니케이션은 어떤 고정된 진리체계를 취하지 않으며 소비적인 욕망에 자신을 맞추어서도 안된다. 오히려 크리스챤 커뮤니케이션은 비판고 희의, 대화와 다양한 주장을 허락한다.


이것은 대단히 신중한 결론들이다. 확실히 이러한 입장은 이제까지 독점적 지배자의 입장을 취해온 교회에 있어서는 많은 반성의 시사를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중한 태도 역시 상황에 따라서는 무력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는 특히 억압적인 상황에서 그러한데 그러한 상황에서는 흔히 교회가 신뢰성있는 유일한 커뮤니케이션채널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신뢰성(creability)의 문제가 오늘날 교회의 커뮤니케이션 인식에 있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것도 이와같은 이유에서이다.

WCC의 제6차 뱅쿠버 총회에서는 이 신뢰성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기본적으로 신뢰성이란 단순히 진실을 말하는 것 이상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신뢰성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


①의도:그 커뮤니케이션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민중을 긍정하는가, 이용하는가? 문화적인 차이는 존중되고 있는가?

②내용:그 커뮤니케이션은 평화를 만들고 정의를 건설하며 온전한 삶을 촉구하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의 포괄적 이미지를 재현하고 있는가, 아니면 민족적 혹은 분파주의적인 편견에 기초해 있는가?

③스타일:그 커뮤니케이션은 선명, 간결, 엄밀함, 다양성, 유머감과 같은 요소를 갖고 있는가?

④대화:그 커뮤니케이션의 수신자는 응답할 기회를 갖고 있는가 아니면 전적으로 일방적인가? 그 커뮤니케이션은 말할 뿐만 아니라 듣기도 하는가?

⑤적절성:그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는 적절한가, 그리고 미디어의 선택이 과제에 적합한가?

⑥신비:그 커뮤니케이션은 모든 것을 설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리고 성급한 판단을 피함으로써 복음의 타자성을 존중하고 있는가?

⑦가치역전:그 커뮤니케이션은 중요도와 가치에 대한 기존질서를 역전시키는 복음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가? 즉 처음된 자보다 나중된 자를, 지혜로운 자보다 어리석은 자를, 권세있는 자보다 연약한 자룰, 부유한 자보다 가난한 자를 앞세우고 있는가?


신뢰성의 문제는 교회 스스로가 행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점검에만 필요한 개념은 아니다. 앞에서의 성서적 성찰에서도 밝혀졌듯이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 영역은 세속사회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제 교회는 선교라는 과제앞에서 이상의 성서적 성찰과 교회사적 경험의 반성에서 얻어진 몇가지 잠정적인 결론들을 가지고 이 세속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여기에서 교회는 세속사회 커뮤니케이션의 구조와 질서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교회와 커뮤니케이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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