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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4(화)
동서철학의 비교  
김 상 일(한신대학교, 한국철학)

1960년도 신학으로부터 시작된 나의 학문은 1970년 중반부터 한국사상에로 가게 되었다. 1975년도에 있었던 미국유학은 나로 하여금 더욱 한국 것을 찾게 만들었다. 미국유학 10년(1975- 1985)을 통하여 얻은 것은 학문이란 학문하는 주체의 강한 자기인식과 의식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대부분 외국유학을 한 국내학자들은 외국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지식을 그대로 객관적인 진리인양 수용한다. 그러면서도 막상 그 객관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그것이 만들어진 풍토와 주관적 편견에 의해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반성해 보지 않는다.

만약에 우리가 이러한 반성없이 한국에서 학문을 한다면 끝내 학문적 종속성과 노예근성을 탈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학자들의 큰 병폐는 이런 종속성과 노예근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들이 유학생활에서 즐기던 토론을 국내에다 한 판 벌려놓고 큰일이나 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이런 학문의 사대주의 근성은 속히 청산되어져야 한다. 불교와 유교도 국내에 소개된지 100여년이 지났을 때에는 우리 것이 되었으며, 원효나 율곡같은 독창적인 사상가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양학문이 들어온 지는 벌써 거의 1세기가 가까워 오지만 우리의 自生的인 사상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움이 있다.

학문에는 Text가 있으며 Context가 있어야 한다. 지금 한국학은 Text만 있고 Context가 없는 실정이다. Text만 고집하면 국수주의자가 될 것이고 Context만 강조하면 상황기회주의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자생적인 사상을 창출해내기 위해서 Text와 Context의 적절한 결합이 필요한 것이다. 그 동안 적지 않은 국내학자들이 실존철학, 현상학 등 서양철학을 Context로 삼아 한국사상을 이해해 보려고 하였으나 모두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여기서 필자는 화이르헤드의 과정철학 그리고 현대과학에서 등장되고 있는 제 범례들(Holon, 상실성이론, 퍼지이론)이 그 Context로 상당히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그것들을 중심으로 [한철학]을 지금까지 전개해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들은 하나의 암시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암시(Hint)라고 한 것은 자신의 외람됨을 피하기 위한 것이고, 한국에 앞으로 율곡이나 원효 같은 자생적이고 창의적인 사상가가 나오기를 기다리기 위한 마음에서이다.

1. 한철학이란 무엇인가?

1. 왜 [한철학]이어야 하나?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 민족을 韓族으로 해석한 사람은 茶山 丁若鏞이었다. 다산은 그의 책 [我邦强域考]에서 한은 크다 혹은 높다는 뜻으로 중국에서 건너온 종족이 아닌 토착종족이라고 하면서, 한족의 긍지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다시 철학적으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철학사상을 한 이라고 정의한 이는 주시경(1876 - 1914)이었다.

주시경은 한글학자로서 구한말의 무너져가는 민족의 정체성과 고유한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서 그 고유한 얼을 [한]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다산 정약용과 주시경은 한을 역사적으로, 철학적으로 우리 고유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한으로, 우리의 역사적 철학적 정체성을 밝히려는 노력은 최근에 와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깝게는 주시경으로부터, 좀 멀리는 다산으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철학계의 원로들 가운데 이러한 한을 다시 찾아 철학적으로 전개시키고 있는 분들은 이을호와 최민홍이며, 신학계에서는 유동식을 손꼽을 수 있다. 이분들은 이미 학교에서 은퇴한 분들이지만, 이분들이 작은 후학들에게 영향을 주어 이제는 한철학 혹은 한사상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다.

심재룡 등 국내 철학자들에 의하여 편집된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집문당, 1987)은 그 동안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서양철학에 대해 깊이 반성하도록 만들고 있다. 서양에서 철학서가 3개월만 안 들어와도 한국철학이 바닥이 날 정도인 상황에서, 우리 철학자들이 한번쯤 철학하는 자세를 반성해 보아야 할때인 것이다. 이 책속에서는 철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으며, 박종흥, 이명현 같은 분들은 자생적인 한국철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어서 대조적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국철학의 국지적 특수성과 국제적 보편성을 동시에 살리기 위해서 [한국철학]이라는 명칭 대신에 한철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강조하는 바이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즉 한옥, 한글 할 때의 한은 국지적 성격이 뚜렷한 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밝히기에 충분하다. 다산이 함으로써 토착민족을 정의하려고 했던 그러한 [한]을 두고하는 말이다.

다른 한편, 한이라는 어휘속에서 크다(大) 하나(一) 여럿(多) 가운데(中)어떤(或)얼마(或) 같은(同)과 같은 전혀 민족적 색채가 없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한철학은 이러한 양면성을 살리면서 전개되는 철학이다. 전자가 한의 정양용적 특징이라면 후자는 주시경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철학이라고 하면 [Korean Philosophy]가 되어 국지적 성격에서 벗어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Han Philosophy라고 한다면 국지적 성격과 국제적 성격을 모두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철학]이라는 말 대신에 [한사상]을 사용하게 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다루는 범위에 있어서 한의 개념을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좀 넓게 적용시킬 때, 한철학이라는 말 대신 한사상을 사용하기로 한 것 뿐이다. 한철학은 한국철학이라고 바꾸어 사용하여도 좋다. 그러나 한국철학은 좀 진부하기도 하고 앞에서 지적한대로 철학의 특수성과보편성을 동시에 살리기 어렵기 때문에 한 철학이 우리 철학을 대변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명칭이라고 본다.

2. 한철학의 범위

다음으로 우리에게 문제시되는 것은 한철학의 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리고 또 한철학의 전개하는 방법론도 여기서 거론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한철학의 역사적 기원을 찾기 위해[人類文明의 起源과 한](1986)을 엮었으며, 철학적 성격을 규명하기 위하여 한철학(1983), 세계철학과 한(1989)을 각각 저술하였다. 특히 철학적 성격을 밝히기 위하여 과정철학적 배경을 많이 도입하였다. 지금까지 전개되어온 한철학은 결국 순수 한국철학 그 자체라기보다는 상당히 복합적인 면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의 이러한 철학하는 태도를 이명현은[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한국철학은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모든 철학적 사상을 말한다. . . . . 한국철학이란 한국사람에 의해 새로

창출된 독자적인 이론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권으로부터 유입된 철학

이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의한 철학이론도 포함한다.


즉, 이명현의 이러한 지적은 필자의 생각과도 일치하고 있다. 한철학이란 한국의 역사와 전통속에서 이루어진 모든 사상과, 서양이나 중국 그리고 인도에서 유입된 모든 사상들이 비판적인 논의를 통해 수용된 전반적인 것을 그 주된 내용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한철학은 크게 세부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그 기원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原形的](prototype)인 것과, 둘째로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속에서 이루어진 祖形的(archetype)인 것과, 셋째로 서양철학같이 이질적인 타문화권으로 부터 유입되어 비판적 논의를 거쳐 한국적인 것인 된 變形的(transtype)인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조형적인 것이 지금까지 통상적으로 언급되어 온 불교나 유교 그리고 도가사상 같은 한국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원형적인 것은 문헌적으로 그 근거와 근원을 찾기가 매우 어려우나 한국역사 속에서 면면히 흘러내려 오면서, 조형적인 것 그리고 변형적인 것들 속에서 변혁의 매개체적 역할을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원형적인 것은 비록 현재 문헌적 근거를 밝히기 어렵기는 하지만 조형적인 것과 변형적인 것들 속에 뚜렷이 나타나 있기 때문에 그 모습을 규명하기가 차라리 쉽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세부류의 사상을 모두 한사상의 범위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이 세부류의 사상들은 나중 것이 먼저 것을 포함하면서 한 단계씩 넘으면서 한국철학 사상을 형성해 왔던 것이다. 종래의 철학하는 사람들이 범한 과오란 조형적인 것이 원형적인 것을 그리고 변형적인 것이 조형적인 것을 버리면서 넘어가는 것으로 생각한 데에 그 잘못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원형은 조형속에, 조형은 변형속에 不滅(immortal)한다. 사상은 축적되면서 변혁되어 간다. 그러면서 먼 후일에는 조형적인 것이 원형적인 것이 되고, 변형적인 것이 조형적인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철학함이란 이러한 축적에 한가닥 공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한철학의 원형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한 번 생각해 보자. 최치원은 그의 난랑비서문에서 ぢ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어 이를 풍류っ라고 했다. 최치원의 이 말에 근거하여 우리는 한국사상의 원형을 찾으려고 한다. [풍류]란 순수한 우리말의 [밝]이 한자로 전음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필자는 [한밝文明論](1986)에서 [알], [감], [탁], [밝] 그리고 한은 한국문명사에 나타난 한국[문화목록어](inventory)라고 했다. 필자는 이러한 어휘들속에 한사상의 원형이 들어있고, 이들 어휘들이 형성된 문명사적 배경과 철학적인 의미를 밝히는 것을 한국철학의 시원적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중국이나 인도에서 들어온 유교와 불교는 이들 원형에 의하여 한국적인 것으로 변혁된다. [풍류]는 위의 목록어 가운데 하나이며, 기원전 2000년경에 형성된 매우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역시 한국사상을 대표할 수 있는 목록어는 한이다. 한은 다른 목록어의 내용을 축적하면서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한이라는 하나의 어휘속에 20여가지 이상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말은 역사와 함께 자라나간다. 한의 개념속에 이와 같이 많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곧 이 말이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역사속에서 살아 움직여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은 중국인의 道와 같이 한국인과 한국사상을 대표할 수 있는 목록어로 삼기에 가장 적합한 말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특별히 한을 문제시하는 이유는 철학의 궁극적 범주(category of ultimate)는 - (one)과 多(many)의 문제인데, 우리말 [한]의 어휘속에 바로 이두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보아 [하느님]은 가장 존재의 핵심이 되는 말인데, 바로 이 말의 개념도 한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번쯤 이 한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천명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 하는데서 한철학 혹은 한 사상을 시도해 보게 된 것이다. 한의 개념속에 포함된 개념들 가운데 또 철학적으로 문제시되는 것은 中, 同, 或 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런 개념들을 한사상의 틀(paradime)로 삼는다. 틀은 그것이 하나의 凡例 혹은 凡型이 되어, 곧 모든 다른 예들에 적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들이란 곧 조형이나 변형속에 포함되어 있는 유교, 불교, 민족종교, 심지어는 서양사상가지도 이 예에 포함시킬 수 있다. 3년 전에 출간된 [한사상과 民族宗敎](일지사, 1990)는 한의 범형이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같은 민족종교에 적용된 예이다.

[세계철학과 한](1989, 전망사)은 바로 한의 다섯 가지 개념들을 서양철학, 힌두이즘, 이슬람철학, 도가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등에 하나의 틀로서 적용시켜 보기위해 쓰여졌다. 그러나 늘 한을 철학적 개념으로 삼아 전개해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부족하게 느껴지는 점은 한의 이러한 틀을 좀 더 극명하게 나타내 보여 줄 수 있는 논저가 없는 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퍼지 논리학은 이러한 한 개념을 논리화 시킬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발견하고 [퍼지와 한국문화](1993)를 저술하였다.

3. 한철학의 방법론

하나의 말속에 一과 多가 동시에 포함된다는 것은 한국인의 무분별적 사고방식의 소산인 양 취급되기 쉽다는 것이다. 사실 한철학에 대한 이러한 도전과 비판은 자못 심각한 문제이며 한철학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한철학이 앞으로 이 땅위에 살아 남아 철학의 한분야로 행세하려면 이 문제에 대하여 흔쾌한 해답을 주어야 한다고 본다. 우선 이 글에서는 한철학이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비판에만 국한하여 대답해 보기로 한다. 우리가 하는 시대는 종교의 시대도 철학의 시대도 아닌 과학의 시대이다. 모든 학문이 과학적인 토대위에 서있지 않으면 현대인들에게 자기 학문의 타당성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한철학도 과학적인 용어로 개념들을 설명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러면 과연 과학이란 무엇이며 [과학적]이며 [합리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보통 과학하면 어떤 불변하는 확고한 객관적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우리가 흔히 과학적이다, 합리적이다라고 말할 때의 과학이라는 개념과 합리라는 개념은 18세기 뉴턴과학에 입각한 개념이다. 뉴턴적인 과학은 기계론적(mechanistic)과학이다. 기계론적 과학은 우주를 설명할 때에 잘 짜여진 기계인양 설명한다. 기계론적 세계관의 한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要素還元主義(reductionism)라고 할 수 있다.

요소환원주의란 전체(whole)와 부분(part)을 나누어 생각하여,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되고 전체가 흩어지면 요소로 나누어져 더 나눌 수 없는 불변 - 절대적인 입자 같은데로 환원된다고 보는 사상이다. 이런 요소환원주의적 사고방식은 오늘날 과학, 철학, 정치, 경제, 교육 등 모든 분야에 만연되어 있다. 이런 요소환원주의적 틀을 처음 만든 인물이 바로 뉴턴이며, 뉴턴의 영향을 입은 사람은 데카르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요소환원주의적 세계관을 뉴턴 - 데카르트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이런 환원주의적 세계관이 가장 잘 나타난 분야가 의학이다. 오늘날 서양의학을 지배하는 철학은 극명하게 요소환원주의적 철학을 기초로 하고 있다. 즉 인체를 위, 간, 뇌 같은 부분으로 나누고, 부분이 전 인체에 어떤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함이 없이, 부분에 병이 났을 경우 그 부분에 집착하여 고장난 부분만 치료하려 한다. 이러한 요소환원주의적이고 인체를 기계의 한 부분으로 보려는 기계론적 서양의술은 오늘날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어떤 것을 두고 과학적이다 비과학적이다 하면서 구분하는 기준은 전적으로 이러한 요소환원주의적인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개념자체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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