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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4(화)
창조의 보전과 한국신학  
채 수 일 (한국신학연구소 소장)

오늘 창조의 보전이 문제된 배경에는 성장지향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을 추구해온 역사적 경험이 놓여있다. 서구의 산업혁명이래 역사를 지배해온 기술과학의 발전이 창조파괴를 더 가속시켰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창조 -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창조의 영역에 들어가는데 - 의 보전은 인간이 부딪친 지구적 차원에서의 현실적 위기에서부터 비롯된다. 때문에 그 해결 역시 현실적인 변혁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그래서 창조보전을 위한 기술 과학적 대안이 모색되기도 한다.그러나 창조의 보전이 기술과학적 문제를 넘어서서 신학적 성찰의 중심에 놓여야 하는 까닭은 서구의 자본주의적 발전의 정신사적 배경, 즉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그리스도교가 함께 형성해 왔다는 역사적 반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 보전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필연적으로 서구 그리스도교 전통의 비판을 전제한다.

제3세계,혹은 개발도상국가의 그리스도교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는데, 서구 그리스도교의 비판적 극복외에도,자신의 정신사적 전통에서 창조보전의 전거를 찾아내고, 그것을 지금의 변화된 상황 - 대부분 서구 자본주의적 발전에 예속된 발전의 길을 강요받는 -과 대결시켜야 할 과제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서구의 정신사적 배경을 이룬 인간 중심적 세계관은 무엇이며, 어떻게 발전하여 왔는가? 현대 서구신학은 창조보전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성찰하며, 그들이 제안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한국, 나아가서 아시아의 정신사적 전통에서 찾아낼 수 있는 창조보전의 전거는 무엇이며,그것은 얼마만큼 예속된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걷는 한국의 미래에 대안적 현실성을 가지는가?

1.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역사적 발전과정

1-1 신적 존재를 인간과 동물의 일치에 기초하여 파악한 이집트인, 바빌로인, 인도인과는 달리,희랍인은 그들의 신들에게 순수하게 인간적인 성격을 부여함으로서 ,인간을 신적 존재에 가깝게 이해하였다.종교심리학적으로 희랍적 신이해의 시초에 이미 인간을 신화적이고 무의식적이며 본능적인 세계와의 관련성으로부터 이탈시킨 발전방향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하겠다. 특히 요니의 자연철학(Die jonische Naturphilosophie)과 함께 서구세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고,즉 신화의 자리에 말씀을, 감성의 자리에 이성을,신들의 세계에 원인의 법칙성을 앉힌 사고가 시작된다.(Eugen Drewermann,Der todliche Fortschritt - Von der Zerstorung der Erde und des Menscgen im Erte des Chrestentums,Regensburg 1981,S,67)

희랍적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의 역사는 단순한 자연사와 구별된다.또 사고의 합리성은 곧 옛날의 신들에 대한 신앙의 정신적 기초를 총체적으로 파괴하였다.이런 회의의 시대에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순수하게 인식론적으로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선언하였고, 자연을 주관적 현현의 놀이로서만 의의를 가지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로써 인간은 서로 낯선 존재가 되었고,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소외되든지,아니면 자유롭게 신 없는 세계와 마주 서있게 되었다.(Eugen Drewermann,a,a,O.S.68)

1-2 세계에 대한 희랍인의 이런 이원론적인 태도가 로마 세계에서는 보다 현실적으로 드러난다.키케로(Cicero)는 세계는 일차적으로 신들과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졌으며,이 세계안에 잇는 모든 것은 그러므로 인간을 위하여 고안되고 활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키케로는 모든 동물을 살아 있는 저장식품 정도로 여겼다. 로마인에 의해 처음으로 자연이 인간의 목적성취를 위한 단순한 원자재로 생각하는 태도가 대두된 것이다.

1-3 로마인의 정치적, 문화적 유산위에 성립한 그리스도교는 자연의 소외와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더욱 강화시켰다.신적 존재를 만물안에 있는 비인격적 원칙으로 파악하거나 자연현상의 원인과 작용법칙을 연구한 희랍인과는 달리 히브리인들은 창조의 신을 명령과 능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가부장으로 이해하였다. 신화의 세계를 극복하려 했다는데서 희랍인과 히브리인은 비슷한 길을 갔지만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희랍인은 자연의 비밀을 합리성의 추상화로 해소시킨 반면,히브리인은 세계를 신적 능력의 단순한 현현으로 파악하였다.

구약성서는 놀랍게도 인간의 피조물성, 다른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 인간과 자연 상호간의 교차적인 위협과 대결 등에 대하여 극히 적은 보도를 할뿐이다.동물, 특히 뱀에 대한 적대감이 단 한번 표현될 뿐이다(창 3:15) 구약성서는 전적으로 인간 사이의 사회적, 정치적 관계에 관하여 언급할 뿐이다.자연에 관한 관찰은 극히 예외적으로 언급된다.예컨데 농사법을 일러주시는 하느님(사 28:23 - 29),가뭄으로 신음하는 토지와 들짐승과 새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호 4:3,렘14:5이하, 욜 1: 17 - 20)를 포함해서 지혜문서도 극히 적은 부분에서 자연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뿐이다.

자연에 대한 서술이 적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창조의 중심에 서있다는 고백과 자연은 그 마술적 능력때문에 인간과 적대적인 관계에 서있으나 결국 인간의 삶을 위해 지배되어야 할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세계관이다.시편 8편과 창세기 1장의 창조설화는 이것을 뒷받침한다.인간은 하느님 다음가는 존재이며, 만물을 다스리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도록 위탁받았다는 것이다.홍수심판 이후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약속하는 때에도 인간은 여전히 자연의 지배자요 정복자일 뿐이다(창 9:2 - 7)

유목 혹은 농경사회에서 인간이 자연에 예속되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또 시편 104편(인간의 삶이 자연질서의 한 부분으로 이해된다)과 두번째 창조설화(자연보호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강조된다)를 고려하더라도, 자연에 대한 두가지 모순된 태도가 병존하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인간의 생존자체를 위한 투쟁이 오늘날 우리가 부딪친 지구적 범위의 자멸을 초래할 만큼 심각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지배관계를 전제한 인간과 자연사이의 적대감이 이스라엘이 생각한 이상적인 과제도 아니었다. 성서는 하느님과의 새로운 계약을 통하여 자연과 인간 사이의 소외가 극복되고 치유될 것을 희망하고(호 2;20)늑대와 새끼양,표범과 숫염소,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어울려 풀을 뜯고, 어린아이들의 친구가 되는 세계를 꿈꾼다(사 11: 6 - 9)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관계(시 104)와 지배관계(시 8) 사이에는 그러나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적 삶이 하느님의 창조의 영역에서 하느님이 원하신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이로써 인간적 실존방식이 다른 피조물에게 부담이 된다는 사실이 근본적으로 인정된다.자신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모든 인간적 행동은 다른 생명을 공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등장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자연이 바뀌고, 경쟁적 관계에 있는 다른 피조물들이 추방당하고 인간자신의 척도에 따라 자신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환경을 변화시킨다.자연과의 거의 운명적인 대결속에 있는 인간에게 시편 104편은 모든 피조물이 생명에의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제한된 삶의 영역을 허락 받았다는 것을 가르친다.그러나 시편 8편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세계변화의 공동책임을 지시한다.

그런데 서구 세계의 역사는 구약성서 안에 있는 이 두모델 가운데서 유감스럽게도 절대화된 지배모델 (시 8)을 극단적으로 추구해 왔다.

2. 자연파괴와 그리스도교의 책임

2-1 인간, 특히 개인의 절대적인 의미와 가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신념은 성육신 교리의 정립과 함께 형이상학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나아가서 신의 예정론이 자연질서 안에서도 자연철학으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자연은 인간의 행복과 불행에 봉사해야 했으며 - 그것도 각 개인들에게 - 인간은 우주적 의미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선언되어야 했다. 기독교의 인간중심주의는 마침내 자연질서까지 도착시켜 자연의 총체적인 운명을 인간에게 예속시키기까지 하였다. 아담의 죄로 모든 피조물이 심판을 받았고, 자연도 인간에 의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으므로 인간에 의해 구원받아야 한다는 세계관은 신학자들에 의해 신의 높은 지혜와 정의로 서술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도전은 2세기 중엽부터 이미 제기되었다. 켈수스(Celsus)는 초대교회의 변증론자들을 비난하면서, 자연은 인간의 특별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모든 피조물의 행복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인간의 세계 중심적 위치와 그에 대한 신의 예정론이 그런 비판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도전은 자연과학의 발전과 함께 더 뚜렷해지기 시작했지만,교회는 이단재판과 화형으로 대응하였다. 세계를 선입관 없이 교리에 예속되지 않고 연구함으로써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지 않으려 한 지오다르노 부루노(Giodarno Bruno)는 가까스로 화형에 처할 수 있었지만 ,태양 중심적 세계관을 발견한 코페르티쿠스와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에 일대 충격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 후 수백년 동안 인간 중심적 자연이해가 무너지는 것을 무시하거나,위장된 선언으로 논쟁을 피해갔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나 심라학과의 대결에서 보여 준 태도가 그것이다.

제도권 신학자 가운데서 자연이 인간을 위해 봉사한다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잘못된 희망과 그에 대한 신앙이 파괴되어야 한다고 지적한 최초의 신학자는 라이프티츠였다.그는 자연이 인간보다 훨씬 더 크며, 인간의 자연의 극히 작은 일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학의 자연에 대한 무관심은 그러나 현대 신학에 이르기까지 관철된다.현대 신학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 실존주의는 삶의 철학에서 유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는 끝없는 우연의 장으로 이해하거나,인간이 사용해야할 보조적 존재로 이해하였다.특히 죄렌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적 종교성에 기초하여 자연에 빠지는 것을 마치 이교도에게 빠지는 것으로 엄격하게 금하였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대가인 리츨 역시,창조를 세계의 도덕화를 목적으로 한 인간의 주체적 지배와 형상화의 대상으로 이해하였다. 리츨이 자연질서를 말할 때에도 그것은 여전히 부부관계,가족, 직업, 법치국가,민족간의 교제를 의미할 뿐이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떠난 창조는 단지 도덕적 완성의 의미로서 직업이 요청하는 물질일 뿐이다.인간은 자연에 예속되지 않을 때 비로소 정신적 자주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연이 신학적 성찰의 중심부에 서지 않은 것은 불트만, 바르트, 틸리히의 신학에서도 예외가 아니다.현대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의 예외가 있다면 그는 쉴라이에르미하일 것이다.그는 도식적인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적인 분리에 저항하였을 뿐만 아니라,자연을 비자율적인 메커니즘으로 평가절하하는데 반대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성찰의 중심에 자연의 이성화와 이성의 자연화, 자연과의 우호적 관계,인간과 자연의 화해등을 세웠다. 그는 신이 자연속에서 가장 가시적으로 자신을 나타낸다고 확신하였으며, 인간이 신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과제를 보여준다고 생각하였다. 이로서 쉴라이에르마하는 현대 신학자 가운데 서구의 인간 중심주의의 게토를 파괴하고 그리스도교의 결핍된 자연이해를 지적했으며, 구약성서에 나타난 자연의 소외와 지독하게 편협된 이해를 비판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인간중심주의가 초래한 결과는 자연의 파괴,인간의 뿌리상실,피조물의 권리박탈로 요약될 수 있다. 소수의 예외적 신학자들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그들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그것은 서구신학이 서구철학과 히브리인의 종교적 유산을 자신의 정신적 뿌리로 의심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2-2 현대 신학의 창조보전에 대한 신학적 성찰

현대 신학자 가운데 창조보전을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많지 않은 신학자 가운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독일어권의 개신교 신학자는 위르겐 몰트만, 도로테 쥘레, 오딜 슈택과 울리히 두흐로가 있다.카톨릭 측에서는 오이겐 드레버만과 한스 큉이 비교적 낯설지 않다.

죌레는 그리스도교의 자연파괴를 정당화한 신학적 출발점에 ぢ하나님의 절대적 타자성っ이 놓여 있다고 본다(도로테 죌레,[사랑과 노동] 32쪽).하나님을 세상과 분리시킨 단서는 이미 창세기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속에 산재해 있다.다른 자연신에 대한 야훼의 우월성을 입증하기위해 강조된 하느님의 타자성은 세가지 결과를 초래하였다. 첫째는 절대적 초월자인 하느님은 왕,전사,영웅에 대한 이상과 함께 가부장적 세계관에 싸이게 되었다. 둘째는 땅에 대한 태도의 변화이다.땅은 더이상 거룩하지 않고 단순한 생산을 위한 객체일 뿐이다.셋째는 인간을 창조의 면류관으로 파악함으로써,인간의 자연 지배를 정당화하고 자연에 대한 외경을 사라지게 하였다.

죌레는 이런 세가지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 창조관을 제국주의적 창조관으로 규정한다.그러면 제국주의적 창조관은 어떻게 극복되는가 ? 죌레는 현대의 과정신학과 여성신학, 유물론적 성서해석에서 그 극복의 가능성을 찾는다. 이 세가지 시도가 지향하는 공통의 목적은 생태학적 제국주의를 폭로하는 데 있다. 죌레에 따르면 생태학적 제국주의는 정신과 몸의 분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분열은 또 다른 형태의 이원론, 동물과 인간사이의 대립,여자와 남자의 분리,어린이와 어른,노예와 주인,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등의 분리를 만들어 낸다. 이런 분리는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월성을 믿는 신앙을 강화하고,약자에 대한 강자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토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적이다.그러면 이런 이원론의 극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원론의 극복은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정직하게 긍정할 때 가능하다.땅이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인간이 땅에 속한 것이다.땅은 인간의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해 약탈당하고,착취당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땅을 상품화하는 것은 범죄이다.땅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성서의 진술은 근본적으로 땅이 부재주지의 것이 아니라,농사짓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땅에 속해 있다는 것은 인간과 땅의 상호 의존관계를 의미한다.인간은 땅을 적대시하거나 땅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인간이 끊임없이 땅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을 부정하거나 지양해 왔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땅에 속해 있다는 것은 인간의 피조성을 의미한다.피조성의 긍정은 인간의 신체성과 사회성을 인식하는 것이다.인간은 고통을 느끼고,굶주림과 성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의 사회적 관계속에서 살아간다.인간의 신체성과 사회성을 무시하는 신학은 관념적인 현실도피를 조장하는데 기여해 왔다. 이런 신학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일 뿐 인간의 현실적 욕구와 희망 - 특히 역사적 해방의 욕구와 희망 - 에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런데 성서의 창조는 인간과 자연의 근원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인간과 자연의 미래에 관계되어 있다. 즉 첫번째 창조는 출애굽이라는 해방전통의 두번째 창조와 연관되어 있고,이것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성취된 세번째 창조,곧 새로운 피조물의 창조와 연관되어 있다. 창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죌레는 창조를 이미 스스로 있는,자기 자신의 고유한 운동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이나,변화가 불가능한 인간의 숙명으로 파악하지 않고, 새로운 피조물의 탄생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새로운 피조물은,그러면 창조와 어떤 관계를 가지며, 어떻게 탄생하는가?

새로운 피조물은 죌레에 따르면, 자신의 피조성에 대한 긍정을 통하여,다른 피조물과의 총체성과 연대성을 모색한다.새로운 피조물,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간은,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한다(롬 6:3 - 6) 죽어야 할 옛존재는 무엇인가? 죌레는 ぢ이기주의っ와 ぢ무기력っ을 옛존재의 특징으로 지적한다.그리고 새로운 인간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태어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싸우는 사람이다.그들은 땅의 갱신,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죽음의 세력과의 투쟁에 참여하는 사랑의 존재라는 것이다.

죌레는 자신의 신학적 성찰이 학문적 반성이상의 것이 되기를 원하는 신학자답게 창조를 죽음의 세력과의 구체적인 대결의 틀에서 이해한다.그녀에게 죽음의 세력은 ぢ자연의 파괴,가난한 자들과의 전쟁(세계인구의 3분의 2가 굶주림과 절대적 빈곤에 시달린다),핵무장에 의한 위협, 환경파괴, 군비증강 등っ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지구의 자원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착취하고 낭비하는 지배권력층이다(도로테 죌레,같은 책, 13- 14쪽) 이런 지배권력층에 대한 저항의 방법으로 죌레는 ぢ창조에 대한 사랑의 실천っ을 제안한다.

위르겐 몰트만도 창조론의 중심에 세계와 하느님의 구분을 세우지 않는다.구약성서안에 편재한 하느님과 세계의 차이에 대한 강조는 범신론적이고 모권적인 자연종교와의 대결에서 생성되었지만,서구역사를 통하여 자연의 무차별적인 정복과 착취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데 기여하였다는 것을 몰트만은 간과하지 않는다.몰트만은 생태학적 창조론의 기초를 ぢ세계안에 있는 하느님의 임재와 하느님 안에 있는 세계의 임재인식っ에 둔다(위르겐 몰트만,[창조안에 계신 하느님],28쪽) 그러므로 세계는 더 이상 하느님과 대립된 것으로 정의되지 않는다.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신 하느님은 그의 ぢ우주적 영っ을 통하여 그의 모든 피조물들과의 ぢ사귐っ의 관계안에 임재해 있다.

하느님의 영을 통한 그의 창조와의 사귐의 관계는 하느님과 세계의 ぢ혼합っ이나 ぢ구분っ을 동시에 극복하는 기제장치가 된다. 이 기제 장치는 그의 っ랍비적인 쉐히나 이론ぢ과 っ삼위일체론적 창조론ぢ에 의해 뒷받침되는데, 쉐히나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기 낮추심과 그들 가운데 거하심의 뜻을 가진다.하느님의 이런 자기 나눔은 하느님 자신 안에서 일어난다(위르겐 몰트만, 같은 책, 30쪽).하느님은 자기를 그의 백성에게 내어주며, 이 백성의 고난을 함께 당하며, 이 백성과 함께 낯선 곳의 고통을 당하신다.결국 하느님은 그의 모든 피조물 안에 임재하며, 기쁨과 고통 속에서 모든 피조물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내재성은 그러나, 이런 일이 하느님 자신 안에서,삼위 일체적 관계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인과율적 범신론과 구별된다(같은 책 20쪽).아버지인 っ하느님은 자기로부터 나와서, 자기와 같이 존재하지만, 자기와는 다른 하나의 창조를 지으신다.아들을 통해서 그는 그의 창조를 지으시고 화해하게 하시고 구원하신다.성령의 능력 속에서 하느님은 그의 창조와 그의 화해와 창조의 구원속에 임재 한다ぢ(같은 책 30쪽)

그러면 어떤 기준에 따라 하느님의 영은 창조속에서 인지되며,하느님의 내재는 어떤 의미에서 정령론적인 표상(animismus)으로부터 구별되는가?

몰트만은 하이네를 인용하면서 범신론이 인간을 무관심주의자로 만들었다고 비판한다.피조물의 세계에서 단순히 영원한 신적 현재를 보는 범신론과는 달리,만유재신론(Panemtheismus)은 미래의 초월과 진화와 목적성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하느님의 세계 내재를 그의 세계초월과 결합시키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진다(같은 책, 131- 132쪽)이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이 ぢ영안에서의 창조っ혹은 ぢ삼위 일체적 창조론っ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세계초월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빠지게 될 뉴턴의 이신론(Deism)과, 하느님의 세계 내재를 지나치게 강조할 때 빠지게 될 스피노자의 범신론의 위험을 동시에 극복하면서,이 둘이 가진 진리가 삼위 일체적 창조 개념속에서 통합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주적인 하느님의 영의 활동방식은 어떤 것이며,그의 내재는 어떻게 인식되는가?

영은 하느님의 능력들 가운데 있는 하나의 능력이 아니라,하느님 자신이다.하느님의 창조안에서의 내재는 영의 자기 낮춤을 전제한다.영의 자기 낮춤은 허무에 종속되어 있는 창조의 고난의 역사에 참여하여,고난의 역사를 희망의 역사로 만드는 목적을 가진다(같은 책 ,130쪽)이런 의미에서,피조물의 세계는 정적이고 기계론적으로 이해되지 않고,ぢ보존っ과 ぢ완성っ이라는 전망에서 이해된다(같은 책 251쪽).창조는 이미 완결된 것이 아니라,완성을 향한 과정속에 있다. 완성을 향한 과정에서 영과 피조물의 관계는 ぢ사귐っ이며,이 사귐은 창조자의 끝없는 ぢ인내っ와 그의ぢ적극적인 고난의 능력っ과 다르지 않다(같은 책 ,253쪽) 몰트만은 영의 인격적 성격을 포기하지 않는다.그러나 인격의 개념을 차별 없이 아버지와 아들과 영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하려고 하지 않는다.삼위일체의 각주체는 그의 유일한 인격성을 가지고 있다.하느님은 아들과 영을 보내시는 창조자이시며, 아들은 하느님의 해방하는 주권속에서 세계를 총괄하고 구원하시며, 영은 세계를 살리고 하느님의 영원한 삶에 참여하게 한다(같은 책, 124쪽)

그러면 창조과정의 완성은 어떻게 가능한가?몰트만은 창조의 과정이 ぢ하느님의 거하심っ을 통하여 완성하며, 완성된 창조안에서 하느님의 무한한 삶의 충만함이 거하며,전 창조는 하느님의 제한되지 않은 현존에 참여함에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한다(같은 책,255쪽). 그러나 완성된 창조를 역사의 끝에 이르는 폐쇄적이고 경직된 체제로 이해하는 것을 몰트만은 거부한다.오히려 완성된 창조는 모든 삶의 체계들의 개방성과 영원한 생동성을 의미한다.

창조가 하느님의 인내와 적극적인 고난의 능력을 통하여 완성된다면 도대체 창조안에 있는 인간의 역할이란 그러면 무엇일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이해되는 인간은 창조의 사귐 속에서 하느님을 대리하고 그의 영광과 그의 의지를 나타낸다.동시에 인간은세계의 형상(imago mundi)이다.세계의 형상인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모든 다른 피조물을 대변하며 서 있다. 상호의존성 없이 인간은 이해될 수 없다.인간은 다른 모든 피조물에게 의존하고,그들은 또 인간에게 의존한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맺는 사귐의 존재이다(같은 책 ,228쪽)

그런데 문제는 오늘의 세계가 성서의 증언대로 과연 보기에 좋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창조안에 잇는 인간의 위치,즉 인간의 피조물성과 상호의존성을 재조명하는 것으로 창조가 부딪친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몰트만은 하느님의 형상의 회복 내지 새 창조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사귐으로서 일어난다고 한다(같은 책,269쪽)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예수의 뒤를 따르는 데서 자란다.하느님은 ぢ선택과 소명っ,ぢ창의와 영화っ를 통하여 인간을 변화시킨다.이런 의미에서, 새창조는 은혜인 동시에 과제이며, 명령인 동시에 약속이라는 것이다(같은책, 269쪽) 믿음과 제자직이 전제된 하느님의 행동이 여전히 창조과정의 중심에 서있다는 점에서, 몰트만의 신학이 기독교적이지만, 허무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힌 창조가 완성에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인간이 해야 할 구체적인 과제가 언급되지 않는 것이 지적되어야 한다.몰트만의 쉐히나 이론과 삼위일체론적 창조론이 가진 난해성은 그것의 범신론과의 관계가 선명하게 해명되고 있지 않다는 것 외에도, 하느님의 자기소외로서의 창조와 소외된 자연의 위기 극복과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해명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한국의 정신사적 전통에 나타난 창조이해와 그것의 신학적 상관성 : 김지하의 생명사상을 중심으로

한국의 정신사적 전통 ,특히 종교적, 문화적 전통에서 창조는 어떻게 이해되는가?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창조론과는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 그리고 이 관계가 창조적으로 결합되어 한국적 창조신학이 발전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일 수 있을까? 한국적 창조이해, 혹은 한국적 인간관과 자연관은 -그것이 풍수사상이든, 정령주의이든, 도가적 자연이해든, 기철학이든 - 오늘 개발도상국가로서 예속적인 자본주의적 발전과정에서 비롯된 파괴된 창조의 보전과 완성에 얼마만큼 현실적 대안일 수 있는가? 한국의그리스도인이 창조의 보전과 완성을 실천하기위한 구체적인 선교적 프로그램은 무엇일 수 있는가?

필자는 위의 질문에 대한 접근을 김지하의 생명사상에 제한하려고 한다.그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주제에 대한 무식과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할 수 없었던 시간적 한계 때문이다.

김지하는 현대문명의위기의 뿌리를 16세기이래 서구세계의 발전을 규정한 기계론적 세계관과 성장제일주의의 산업기계문명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서구세계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문명비평가와 다르지 않다.현대물리학, 특히 동양적 세계관에 접근하여, 인간의 정신과 육체, 자연과 우주를 끊임없이 변화하며 순환하는 통일적인 개방계로서,서로 연결되어 생성 진화하는 살아 있는 생명의 총체요 영성을 가진 생명체로 파악하는 새로운 과학을 기초로 하여, 지하는 동양적 세계관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문명 창조의 전망을 확신한다(김지하,[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 서울 1991,98쪽)

현대과학이 새로운 생명문명 창조의 가능성으로 전망하는 동양적 세계관의 하나인 우리 민족의 전통적 자연관은 무엇일까?

김지하는 그것을 풍수(風水)와 수운의 진화사상에서 찾는다.풍수는 전 자연 상태를 살아 있는 유기체요 생명으로 보며, 신령한 기(氣)의 체계로 본다.풍수에 의하면 땅은 단순한 흙,돌, 물의 결합체가 아닌 지기(地氣)라는 생명소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은 생산의 원천이며, 결코 범해서는 안되는 대상이며 금기다.땅이 소유나 이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땅의 파괴는 반드시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이 풍수의 체계다.이 대가는 자연의 재해로, 개인적으로는 재난의 형태로 나타난다 (김지하,같은책, 104 - 106쪽)

전통적 풍수체계의 몇가지 원칙들은 김지하가 전개하는 생명운동의 현실적 대안에 상상력을 준다.

그 첫째는 동기 감응론이다.사람은 자기 안에 생동하며 연속하며 변화하는 전우주생명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사람의 기는 하늘, 땅,우주만물의 기와 통하게 되어 있다. 동기 감응론은 인간의 우주와의 상호의존성의 표현과 다르지 않다.

그 둘째는 소주 길흥론인데, 착한사람이 좋은 땅을 차지한다는 원리로서, 지하는 이것을 자연생태계와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의 우주적 생명공경의 윤리성의 강조로 해석한다.

이런 풍수체계의 원칙이 그러면 어떻게 생명운동으로 실현될 수 있을까?

김지하는 ぢ먼저 각 개인이 자기 자신을 신령하게 하는 우주적 생명체험, 영성체험, 곧 깊은 명상을 일상화함으로써 가능하며, 그와 함께 깨닫는 생명의 원리에 따라 자기 생활을 바꾸어가야 한다고 말한다っ(김지하, 같은 책, 110쪽) 사람이 자신의 생활을 그에 따라 바꾸어야 할 생명의 원리는 무엇인가?김지하는 생명의 원리를 ぢ질적으로 확산진화っ(서양의 직선적, 양적 수렴진화론과 동양의 양적, 확산적 순환론을 동시적으로 극복하는)하는 ぢ개방적 주체っ(같은 책, 191쪽)로서, ぢ상보적 활동っ(같은책,196쪽)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김지하는 그러나 풍수만으로 오늘 사람과 자연이 부딪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폐쇄적인 동양사상 신봉가가 아니다.그는 ぢ풍수가 동양의 전통적인 원운동적 순환론에 갇혀있고 천원지방(天圓地方)시대의 공간적인 음양오행과 방위사상안에 꼴잡혀 있다っ고 비판하면서, 서양의 현대적인 생명과학,진화론, 지구물리학, 생태학, 자연심리학,심리물리학 등과 결합하여 새 차원에서 탁월한 과학으로 부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같은 책,112 - 113쪽)

김지하는 자신의 이런 생명사상을 가지고, 서구의 인간중심적이고 기계적인 세계관에서부터, 한국의 지역갈등, 남북의 분단현실,민중운동 진영의 오류에 이르기까지 비판하면서, 생명운동의 실현가능성을 ぢ연대적인 네트워크로서의 시민운동っ에서 본다.연대적이라는 말은 변화된 시대에 대한 그의 인식 - 계급과 노동의 내용의 세분화에서 비롯된- 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김지하는 자신의 시민운동이 시민운동이면서 시민운동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까닭은 그것이 시민적 운동의 형식을 가지면서도 그 내용은 철저하게 전민중 특히 기층 노동자, 농민의 여러가지 욕구와 세계관을 그 안에 포괄적으로 포함하면서 그 문제까지 해결하려고 해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같은책 198 - 199쪽)이것이 운동의 네트워크적 성격을 요청적이며 형식적으로는 담지할 지 모르나,운동의 주체와 형식에 대한 현실적인 질문 - 즉 민중적 욕구라는 내용과 시민적 운동이라는 형식 사이의 고리에 관한 - 에 구체적인 대답이 될지 분명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네트워크는 김지하에 따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형성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ぢ개인,사회, 민족, 환경,생태계,지구전체, 우주전체에로 확산 진화되어야 할뿐만 아니라,내면적으로는 무의식,시층의식의 의식화, 정신 해방 등과도 연결っ되어야 한다(같은책, 100쪽)그래서 지하의 연대적 네트워크로서의 시민운동은 개인적 수양, 사회적 개혁운동, 새로운 가치 창조운동으로서의 생명운동에로 전개된다.

그러나 김지하는 자신이ぢ변증법적 합명제っ의 설교자로만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다.그는 생명의 가치관을 중심으로 다원주의적 네트워크를 구성,ぢ예っ와,ぢ아니오っ운동을 전개하려고 한다.생명에 대한 긍정과 죽임에 대한 부정의 운동이라고 할까? 남은 문제는 이 운동이 어떻게 구체성을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다.

김지하의 생명사상이 가지는 신학적 상관성은 무엇일까?

필자는 김지하가 한국적 창조신학의 모색에 상상력을 주는 사상가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까닭은 그가 풍수적 세계관의 한계를 인식하고, 창조를 필연이 아닌 질적으로 확산 진화하는 개방적 체제로 이해하기 때문이다.이것이 자연 경외의 근거를 자연의 보복이나 길흥화복에서가 아니라,상보성에서 찾게 하고, 창조를 ぢ과거っ와 ぢ보전っ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ぢ미래っ와 ぢ완성っ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그리스도교적 창조신학과의 대화가능성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5. 맺으면서 : 지구의 위기와 그리스도교적 대안으로서 의 삶의 질의 문제

삶에는 양과 질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양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고 삶의 질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그러나 또 삶의 질이 꼭 양적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닌 것도 삶의 진실이다. 삶의 물질적 충족이 보장된 이들이 꼭 행복한 것도 아니고,가난한 현실안에 사는 사람들이 삶이 부유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보다 질적으로 열등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마르크스주의 극작가인 브레히트는 먼저 배부른 후에야 도덕이 뒤에 온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러나 삶의 질의 문제는 배부른 사람들의 도덕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까닭은 삶의 질의 문제가 오늘날 더 이상 개인적이고, 지역적이고, 계급적인 문제가 아니라,집단적이고, 지구적인 차원에서 인류의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질,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질문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질문이다.그러나 오늘날 삶의 질이 다시 문제시되는 역사적 배경은 사뭇 다르다.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문제, 급격한 인구증가,제3세계의 구조적 빈곤과 독재, 도시화,자연의 사막화, 종의멸절,실업, 성차별, 인종주의,종교간의 갈등,민족문제, 끝없는 군비확대와 평화의 위협 등은 17세기 서구 근대과학의 탄생에 따른 역사의 급격한 전환이후 더 심화되었기 때문이다.장구한 인류의 역사에 비해 지극히 짧은 지난 300년 동안의 발전이 인류에게 가져다 준 엄청난 성과를 부인할 수 없으나, 이 발전의 결과가 인류를 전멸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부인될 수 없다.

서구의 기술 과학적 발전과 성장지향의 경제가 치루어야 할 대가,특히 자연의 보복에서 오는 대가는 누구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파국적 결과에 더 심각하게 부딪칠 사람들은 서구의 기술 과학적 발전의 희생자인 제3세계의 민중이다.제3세계 민중은 부유한 산업국가가 향유하는 발전의 희생자이면서도 그 발전의 결실을 나누어 갖기는 커녕 그 발전이 동반한 자연파괴의 결과 - 사막화, 재해, 기근과 질병 등- 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위선자들의 잔치로 끝난 UN의 환경과 발전을 위한 세계회의와 지구정상회담은 역설적이게도 제3세계에게 그들이 파괴하지 않은 자연, 예속적 발전의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나누어지도록 강요하였다.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지 도대체 누가 지구의 위기에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인가?

두말할 필요없이 이른바 선진산업국가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지구온도 상승과 오존층 파괴에 결정적이 영향을 끼치는 것도 산업국가이고, 지금가지 지구와 인류의 미래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해온 것도 산업국가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광범위한 지구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기술 과학적 대안이 모색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그런 대안은 또다른 형태의 자연파괴를 대가로 치루거나,값이 지나치게 비싸다는데 문제가 있다.

많은 이들은 인간의 자발적인 절제만이 문제해결의 가능성이라고 지적한다.인간이 스스로 자기의자유와 욕망충족의 욕구를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자발적 절제가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유감스럽게도 인간을 각성시켜 공동의 대응을 모색하도록 강요한 것은 언제나 지구적 차원의 대재난이었다.인도보팔시의 가스폭발 사건,체르노빌 원전사고, 오존층의 파괴에 따른 피부암 발생, 페르시아만 전쟁과 유전의 파괴등이 그것이다. 인류를 각성시키기 위해 그러면 그런 재난이 계속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그런 재난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된단 말인가?

유럽의 환경운동단체인 그린피스는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ぢ지구위에 남은 마지막 나무에서 마지막 잎이 떨어질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배울 것이다っ이 말은 인간은 언제나 막다른 골목, 되돌아오기 어려운 한계 상황에서 배우고, 그때는 이미 늦은 때라는 냉소적인 주장이지만,사실이기도 하다.눈에 보이는 가까이 온 파멸이 주는 두려움이 어느 정도의 치유효과나 충격을 줄지 모른다.그러나 두려움에서가 아니라,적극적 결단에 의해 인간이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는 없을까?

나는 여기에 그리스도교와 신학의 과제가 있다고 생각한다.지구와 인류의 미래에 책임을 지는 결단이 신앙에서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성서는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며 ぢ하느님의 자녀가っ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고 말한다(롬 8:18)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인가?

하느님의 자녀는 가능성과 기회 때문에 행동하지 않고 의무와 책임 때문에 행동한다.그들은 휴거파 종말론자들처럼 시대의 위기를 정신적 테러의 수단으로 삼아 사람을 위협하지 않는다.하느님의 자녀는 자신도 해방을 갈구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희망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롬8:23-25)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무를 심는 이들이다.

하느님의 자녀는 지구적 차원에서의 연대를 추구한다.이 연대는 서로의 정보교환을 강화하고, 기층운동을 지원하며,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상할 과제를 가진다.이 연대는 각국의 정부와 기업들로 하여금 인간과 지구의 미래를 위하여 일할 수 있도록 강요하고 견제할 수 있을 만큼 함께 성장하여야 한다.인류의 희망은

대재난으로부터 시작되지 않고,하느님의 자녀들이 보이는 연대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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