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2/29(수)
[21세기] 21세기와 한국교회와 시민사회운동  
권 진 관 (신학 및 윤리, 성공회대)


21세기는 한국 민족 대부분의 성원들과 전통적으로 고난받아 왔던 이른바 민중들이 많은 고난을 받는 시기가 될 것이다. 어디 약소 민족과 민중 뿐이랴. 21세기에 가서는 우주와 환경도 수난을 받게 될 것이다. 극대 이윤을 얻기 위해 타자의 생명을 서슴없이 남용하는 어떤 강력한 세력이 21세기를 풍미할 것이며, 이러한 세력은 그 어떤 세력에게도 굴복하지 않고 이 지구를 경영해 나갈 것이다. 이 힘을 어떤 사람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라고도 말하기도 한다. 이 세력을 혹자는 다국적 기업과 자본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다국적만이 그 세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력은 이른바 다국적 기업과 자본을 비롯한 국가 등 온갖 세력 들의 총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세력은 개인, 인간 집단뿐만 아니라 민족, 인종, 심지어 대륙 마저도 희생시킬 수 있는 강한 힘이다. 이 힘은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도 종식시키기도 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우리 한반도에 전쟁을 일으키고, 자연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국의 민중의 수난은 세계적인 차원의 원인이 있다. 노동자들의 수난, 심지어 화이트칼라들의 불안도 세계적인 시장경제원리에서 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노동자들의 수난은 자신들의 잘못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부리는 사람들의 잘못에서 비롯된 사람들이다. 21 세기를 바라보는 척박한 상황 속에서 지휘하는 사람들이 잘못 판단하고 준비하고 배분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의 물질적 욕심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라, 권력과 유착한 비리 재벌들의 소유주들, 경영인들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인간들을 마음대로 부리려고 하는 바로와 같은 세력이 있는데 그 세력은 이른바 세계시장경제체제가 불러일으키고 있는 경쟁체계라고 할 수 있어며, 이것은 모든 나라의 민중들을 억압하는 세력이다. 이 세력은 한국이라고 하는 제3세계의 경제를 위기에 빠뜨려 놓고, 그 경제의 주요 책임자들에게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쓰고 버릴 수 있도록 강요함으로써 그 세력의 주구가 되게 하는 세력이다. 정치권력은 이 세력의 주구 혹은 대리인이 되기 쉽다. 한국의 재벌들은 이러한 세력의 일부이기도 하고, 또 그의 수혜자이기도 한다. 개악된 노동법에 복수노조금지, 제3자 개입금지, 공무원 교사 단결권 금지조항 등이 존재하는 것도 바로 이 세력의 존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또 파업기간중 대체근로 허용은 사실상 노동자 쟁의권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것이며,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시간제 도입은 사용자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노동자를 최소한의 임금으로 마음대로 부려먹고 필요에 따라 해고할 수 있게 한 것인데 이와같이 노동자들이 극단적으로 고난을 받게 된 원인도 따지고 보면 이 거대한 세력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 노동자들뿐 아니라 중소기업, 자영업자, 서민, 농민들이 모두 수난을 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기업체들의 임원들 혹은 중견의 위치에 있는 사원들 마저도 세계적 경쟁구조의 편입 (이른바 세계화의 이름으로)에 의해서 수난을 받고 있는 중이다. 연봉제, 명퇴, 감원 등에 의해서 일자리를 잃고, 등산길을 메우는 40대가 생기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이 세력이 한번 지나가면 민족과 민중을 억압하거나 해지지 않고는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이 세력은 전 인류와 세계를 극단적인 경쟁구조 속에 몰아넣음으로써 약자들은 도태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러한 척박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운동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글에서는 앞으로의 운동을 위한 기본 방향과 자세에 대해서 언급하려고 한다.


유대계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다음 3 가지의 본원적인 것들로 나누었다. 그것은 노동 (labor), 업적 (work), 행동 (action) 등이다. 이 세 가지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활동들이다. 본필자는 아렌트가 제시한 세 가지의 행동양태들을 응용하여 오늘날의 우리들의 모습을 부각시켜 보려고 한다.

노동이란 인간이 먹고 마시고 입고, 생육하고, 거주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결과물들을 얻기 위한 활동이다. 옛날에는 노동이 자연물에 대해 직접 몸을 부려 결과물을 거두어 들였으며, 오늘날에도 이러한 종래의 노동의 형태는 계속 이어지기는 하지만, 요즘에는 여러 기계와 도구를 사용하여 자연에 대해 변형을 가해 결과물을 얻는 방식을 주로 택한다. 비록 노동의 모습이 변화되기는 했지만, 그 본질에서는 변함이 없다. 노동은 삶의 신진대사를 위한 최소한의 인간의 활동이다. 노동은 그렇기 때문에 인간 생명과 직결된 활동이다. 재산을 가지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은 노동하지 않고 살 수없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재산은 자기의 몸이다. 몸과 노동, 그리고 생명은 직결된다. 몸의 생명은 노동을 위한 원천이요, 노동의 목적은 인간 몸의 생명을 영위키 위한 것이다. 이와같이 노동은 자연과 생명에 가장 밀착된 인간활동이다. 노동자들은 노동을 하며 가족의 생명을 부양한다. 그들은 노동아니고는 달리 부양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들의 활동의 대부분은 이 노동에 의해서 차지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데에 한눈을 팔 수가 없다. 다른 곳에 눈을 돌려 시간을 소비할 수도 없다. 하루 24 시간을 거의 노동을 위하여 투자한다. 쉬는 것도 노동을 위한 휴식일 뿐이다. 이러한 현실을 칼 마르크스가 잘 설명해 준 바 있다.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의 활동 양식은 노동이다. 삼성이나 현대, 대우 등 굴지의 기업에 종사하는 중산층 화이트 칼라들도 그들이 아무리 지금 잘 산다고 하더라도 노동을 한다는 점에서는 일고 노동자들과 다름없다. 노동은 기본적으로 강제되는 것이다. 노동에 있어서 자발성은 상대적으로 작다.

그 다음의 중요한 활동 양태는 work (업적)이다. 이 업적을 이루며, 또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가진 자들일 것이다. 소위 부르죠아들이며 힘있는 사람들이며, 명망가들일 것이다. 아마 전문가 계급도 여기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 계급은 고용된 노동자일 수도 있으므로 노동하는 노동자와 흡사하기도 하지만 그중 상당수는 '업적을 쌓는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그만큼 자기의 시간을 자기의 계획 하에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문가들에게는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위있고, 재산있으며, 권력있는 사람들, 소위 이 땅의 '주인들' (masters)은 업적을 위해 활동한다. 그 업적이 자신의 생활을 지탱해 주고 식구들을 부양시켜 주지만, 그러한 활동은 위에서 말한 노동이라는 활동과는 그 종류에 있어서 다르다. 그 업적을 위한 활동에서는 활동 주체자의 자아(I, ego)의 기획이 자기의 활동의 결과물 속에 박혀져 나온다. 따라서 업적의 삶은 소유격의 형용어를 가진다. 이른바 누구 누구의 업적을 말한다. 이와같이 임자를 분명하 하는 활동은 무엇이 자신의 업적을 가장 많이 이루게 하느냐에 따라 행동한다. 즉 자기의 계획과 이익에 유용한가에 따라 행동하거나 않거나 한다. 여기에서의 행동을 하기 위한 기준은 이른바 "유용성" (utility)이다. 업적을 위한 활동은 따라서 "자기 중심적"이다. 바울과 루터가 말한대로 우리는 업적(work, 행위)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 혹은 믿음의 행동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세번째의 활동 양식은 이른바 '행동' (action)이다. '행동'에서는 행위자의 주체성이 중요시된다. 남들이 시켜서 하는 것이 행동이 아니다. '행동'은 자신의 판단과 의사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자발성과 자유에 기초한다. '행동'에는 말하기가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말과 함께하는 행동이 아니면 진정한 행동이 될 수 없다. 말을 자유스럽게 한다는 것은 그 관계가 평등하고 참여적이며 상호주체적인 관계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이 오고 가면서 '행동'이 이루어 지는데 이러한 행동은 홀로만의 유아독존적인 행동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행동이다. 즉, 공동체적 행동이다. 따라서 '행동'을 위한 전제조건은 공동체의 성립이다. 행동의 결과는 행동일 뿐이다. 행동자는 행동을 생산해 내는 저자가 될 수 없고, 단지 행동자일 뿐이다. 여러 행동자들의 행동의 산물로 나타난 역사는 그 저자(author)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역사는 저자가 없는 열려있는 것이지 어떤 생산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노동이나 업적의 활동 속에는 공동체가 있기 보다는 이익사회가 존재한다. '말있는 행동'을 위한 사회적 조건은 공동체적인 참여 민주적인 질서이다. 따라서 이러한 질서가 갖추어지지 않은 사회는 자유한 '행동'을 억압한다. 이러한 사회는 사람들을 주체자로 만드는 것을 거부한다. '행동'은 유용성(업적)에 의해서 이루어 지는 것도 아니며, 삶의 필연적 강제 (노동)에 의해 기인되는 것도 아니다. '행동'은 인간다움을 위한 필수적 조건이다. 이것이 없을 때 인간다움은 사라진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활동은 업적이나 노동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에서 아렌트의 '행동'에 대해 좀더 설명해 보기로 한다. 행동한다는 것은 곧 시작한다는 것 곧 기선을 취한다는 것 (to begin, and to set something in motion, to take intiative)을 의미한다. 즉 자유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란 인류가 시작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철저히 업적을 부정하는 삶이었다. 그는 업적이 없는 삶을 살았다. 업적 대신에 사랑의 행동을 추구했을 뿐이다. 그의 삶은 누가 복음 4:17 이하에 나오는 말씀이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의 삶은 교회를 세우는 업적의 삶도 아니었으며,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짧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순수히 하느님의 나라을 위해 믿음의 행동을 했던 분이었다. 그는 자기의 업적으로 저서 한권도 내어 놓지 못했다. 그는 결국 십자가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그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다. 그의 삶은 업적을 그렇게도 철저하게 이루어 놓지 않은 삶이었다. 그는 재산을 한푼도 마련하지 않았으며, 자식하나 남기지도 않고 그야말로 철저하게 종말적인 행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신 분이었다. 그는 솔로몬 처럼 성전을 건축하는 업적을 내지도 못했으며, 다윗처럼 이스라엘을 통일하여, 나라를 일으키는 업적을 내지도 않았다. 빌라도나 헤로데 처럼 권력을 가지지도 못했다. 그는 오직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하셨다. 그의 행동이나 말씀은 업적으로 남지는 않았다. 말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며, 행동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것들이 업적으로 남지는 않는다. 그것들이 업적으로 남으려면 그 속에 자기 중심적인 욕심이 있을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셨던 선한 사마리아인도 업적과 관계없이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의 행동이 자기 자신의 업무, 업적 혹은 비지니스와 무관하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 말씀 속에서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업적과 무관하지만 그는 행동했다. 그 행동이 자신의 출세와 영달에 관계가 없었을 것이지만 그는 행동했던 것이다.


업적에 대칭한 개념으로서 '행동'이 있을 때 공동체는 큰다


업적이라는 내용 속에는 언제나 자아의 계획이 담겨있다. 라틴어로 업적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homo faber라고 한다. 공작인이다. 무엇을 만들 때 자기 자신을 그 속에 부어 넣는다. 자기 자신의 도안이나 계획된 디자인을 자기가 만든 작품에 부어 넣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이 무엇을 만들고 이루어 내는 사람을 말한다. 현대인들은 모두 homo faber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무슨 일이든 자기가 한 일에 자기 자신을 각인 시키고 싶어하는 성질을 현대인들은 가지고 있다. 무엇을 만들고 이루어 낼 때, 언제나 그 속에 자신의 의도가 담겨 있다. 자신의 계획이 그 속에 담겨있는 성질을 가진다. 따라서 업적 속에는 언제나 자아라는 것이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자기 교만이라는 것도 그 속에 담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업적이라는 말에는 항상 소유격이 붙는다. 누구누구의 업적이라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세종대왕의 업적, 김영삼 대통령의 업적, 누구 누구 총장의 업적... 이러한 것들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업적 등등. 업적이라는 말 속에는 "나"가 우선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믿음의 행동에는 나 보다는 우선 이웃이 중심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행동을 하는 사람은 나를 내세우지 않고 상대방을 내세우기 때문에 이것은 공동체를 형성한다. 업적을 추구하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은 공동체가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경쟁 사회가 이루어진다. 서로 자기 자신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 속에는 공동체성이 자랄 수 없게 된다. 오직 경쟁으로 서로 질시하고, 헐뜯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업적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믿음의 행동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중요하다.

업적을 추구하지 않고 믿음의 행동을 하는 사람은 곧 예수의 십자가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업적의 자랑과 위용이 무너진다. 십자가 앞에서는 나의 모든 영광과 지혜와 힘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업적이 무색해 지고 초라해 지고 마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업적을 구하지 않는 '행동'의 전형이었다. 십자가에 대한 믿음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행동으로 인도해 주는 무한한 흡인력이다. 십자가의 신앙은 우리의 업적적인 공명심을 버리고 믿음의 행동으로 인도해 준다.


십자가의 신학과 믿음의 '행동'


십자가 신학을 모르면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이면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하느님은 전통적으로 선한분, 힘있는 능력자로 보여졌지만, 십자가에 의해 하느님의 가려졌던 부분이 들어났다. 보이는 부분은 하느님의 적극적인 능력 부분이다. 영광의 하느님, 전능의 하느님, 전지전능, 무소부재, 능력의 하느님이다. 병을 낫게하고, 만물을 다스리는 하느님, 이러한 분을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느님이다. 좋으신 하느님의 모습이다. 하느님은 강한 성이요, 구원의 바위이시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다. 이러한 분이 우리들에게 드러나 알게되었던 분이시다.

그런데 하느님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부분, 감추어졌던 부분이 있다. 보이지 않았던 부분의 중요한 부분이 예수에 의해서 드러났다. 그것은 십자가의 사건 속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하느님이 정반대되는 표지 아래에서 사역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신학이다. 십자가는 연약함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다. 그야말로 로마시대에 정치범들에게 주어졌던 가장 심한 형벌이었다. 그리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은 연약하고 어리석음을 드러내셨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가 가장 약하고 어리석을 때 우리를 돌보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십자가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십자가 신학이 가장 잘 나타난 곳이 고린도 전서 1장이라고 생각한다. 그중 중요한 부분을 보자.


고린도 전서 1장 23-24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이시다. 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일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이것이야 말로 하느님의 지혜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는 세상을 다시한번 보아야 한다.


다시 26-29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지혜있는 자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미련하고 지혜없는 자들을 택하신다는 것이고, 또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한다는 것이며,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신다는 것이다. 지혜있는 사람들, 세상적인 지혜, 사회에 잘 적응해 내고, 사회에서 잘 나가는 사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못나고, 여러모로 약하고 천한 것같은 자들을 택하사 그들을 높이 쓰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지혜없고, 약하고, 천한 자, 멸시받는 자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그것은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바로 세상적인 업적을 이루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 업적이 아니라, 믿음의 용기, 믿음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 업적을 쌓고 경쟁에서 이기며, 출세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볼 때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며, 이러한 사람들의 공통된 점은 업적을 쌓는 사람둘이라는 것이다. 업적을 쌓는 사람은 바로 세상적인 지혜와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바울 선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면서, 세상적인 지혜와 세상적인 권력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것들이 비록 일시적으로는 지혜있는 것같고, 힘이 있는 것같지만 결국은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들의 구원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에 기대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소치라는 것이요, "어리석은 부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약함과 어리석음의 상징이다. 그렇지만 30절에 바울 선생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명쾌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이십니다."


그런데 헬라 사람들처럼 세상 지혜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걸림돌이 되었다. 헬라인들이나 유대인들처럼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멸시한다. 그리고 세상적인 지혜와 세상적인 권력에 눈멀어 있다. 무엇이 진정한 지혜요 진리인지를 모르고 있다.


고로 2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루터도 그의 하에델베르크 논쟁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있는 영광의 신학자들은 고통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광의 신학자들은 고통보다는 업적을, 십자가 보다는 영광을, 약함보다는 강함을, 어리석음 보다는 지혜를, 일반적으로 말해 악보다는 선을 더 좋아한다. .... 그들은 십자가와 고통을 싫어하고 업적과 공적의 영광을 사모한다."


세상지헤자들은 권력과 명예와 업적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그러나 루터는 "십자가를 통하여 업적이 권좌에서 쫓겨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업적주의자, 권력 추구자, 금전 만능주의자, 세상권세주의자들은 신학적으로 빗대어 말한다면 영광의 신학을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출세를 지향하고, 권력을 추구하며, 물질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무기력한 것이라고 예수 이후의 기독교 제일의 선생인 바울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크리스찬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의 깊이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사회를 잘못 바라 볼 수 있다. 루터에 의하면 십자가의 고통을 모르고 그것을 못느끼는 사람은 교만하고 오만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기때문에 만약에 그들이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선택적으로 할 것이며, 꼭 좋은 것만을 골라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거나,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교만을 자초하게 될 것이라는 한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오늘날 한국 교회는 업적을 위한 교회이지 '행동'을 위한 교회는 아니다. 한국교회는 자본주의적 행동양식을 추구하고 있으며, 유용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무엇이 교인을 늘리는 일이냐, 재산을 늘리는 것이냐, 어느 목사가 이러한 일을 잘 해 내느냐로 그 가치를 판단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업적주의, 물량주의에 빠져 있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더 많은 교인수, 더 많은 헌금과 예산, 더 큰 교회를 가지려고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한국교회가 물질주의(맘몬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다. 물질이 많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만능주의가 은연 중에 교회 속에 스며 들어왔다. 업적과 권력과 물질이 중심이 되는 곳에는 소수가 그것들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교회의 관료주의가 생긴다. 교인들의 참여는 매우 수동적으로 일어나고, 그것도 부차적인 영역에서만 일어나지 교회의 중요 영역은 성직자와 소수의 교회관료들에 의해 운영되어 진다. 양심있고 뜻있는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처음 기독교가 전래되었을 때 한국의 교회는 민족의 희망이었다.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의 위협과 봉건주의의 질곡 하에 있었던 우리나라에 주권재민 사상, 남녀평등사상, 민주주의, 반봉건 사상, 신교육이 기독교와 함께 소개되었을 때 기독교는 그야말로 민족의 희망이었고, 개혁적인 사상이요 종교였다. 그리하여 이 나라에서는 아시아에서 유래없이 기독교 선교가 성공했고, 불교와 유교 등과 함께 민족의 종교로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3.1운동과 같은 빛나는 전통을 창조했고, 70년대-80년대 독재와 항거하는 좋은 전통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기독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팽창주의, 물량주의, 성장주의, 성공주의에 눈이 어두워 맘몬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역사의 희망이기는 커녕 역사의 짐이 되고 말았다. 이제 한국의 기독교는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 대안적 교회를 창출하지 않고는 모든 교회개혁의 노력은 구호로 끝나고 말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 나타나야 할 대안적 교회는 지금 존재하고 있는 제도 교회들에 대한 부정 속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 부정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부정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존의 한국교회에 대해 먼저 긍정해야 한다. 긍정은 곧 포용을 의미한다. 포용과 동시에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한국교회에 대해 강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뜻있는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여하면서 한국교회의 지금의 모습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자본주의 질서 (특히 쁘띠 부르죠아적 정신구조)에 잘 적응하고 있다. 즉 현실 질서와 타협하고 있는 교회가 한국의 교단교회, 제도교회라고 보여진다. 한국교회의 장로를 중심한 당회구조는 마치 주식회사의 임원회와 비슷하며, 따라서 주로 돈있는 사람들이 교회의 실권을 행사하는 제도적 장치로 사용되고 있으며, 많은 목회자들은 이러한 구조가 잘 돌아가도록 설교하고 축복해 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것이 한국교회의 전체의 모습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다만 많은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교회는 민중들로부터 배척받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는 이미 기존질서와 손을 잡은지 오래 되었다. 이러한 교회가 우리나라의 통일에 어떻게 기여할 것이며, 통일 후에 있을 혼란 속에서 어떻게 민족의 양심의 지주로 설 수 있을 것인가?

앞으로 한국교회는 교세의 측면에서 볼 때, 전반적인 침체에 빠질 전망이다. 그것은 주로 다음의 몇 가지의 이유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첫째로, 일반인들의 생활이 나아진 것이 한 요인이 된다. 산업화와 현대화 이후의 서구 교회가 침체에 빠졌음을 상기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테코스탈 (오순절, Pentecostal) 교회들이 일시적으로 흥할 소지는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한국의 제도교회는 쇠퇴의 길로 빠져 갈 것이라고 보여진다. 둘째로, 교회의 권위, 특히 목회자들의 권위가 약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변화된 현실 속에서 정의에 입각한 발언을 제대로 해오지 못했고, 자본주의적 방식의 목회를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는 자기 예배당의 좌석도 제대로 채우지 못 할 정도로 교세가 침체할 것으로 보인다. 세째로, 한국교회는 현대의 우상들의 포로가 되었다. 물질만능주의, 거대화 주의, 권력 지향주의에 빠져있다. 이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기능과 사명이 상실되었다. 네째로 한국의 교회들이 침체할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요인으로 멀티미디어 등 새로운 미디아의 발전에 의해 교회 공동체의 약화와 개인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이 양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영상 매체 등 멀티미디어를 이용하여 필요한 종교방송을 집에서 선택하여 예배드리고 헌금을 내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일반 교회들은 약화될 우려가 있다.


멀티미디어와 교회의 미래: 교회는 '행동'하는 제자 공동체여야 한다


기독교는 공동체이다 (Christianity is community). 기독교의 사랑은 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나는 공동체 안에 있는 나이다. 공동체 없는 나를 생각할 수 없다. 기독교는 언제나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동체와 무관한 나만의 신앙을 추구하는 일부 기독교의 세력이 있다. 그러한 신앙을 퍼뜨리고 조장하고 있는 사람들 중의 대표격인 사람들은 필자가 생각하기에 TV 에반젤리스트들이다. 그들은 공동체적인 예식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들이 안방에 편안히 앉아서 자신들이 연기하는 설교와 예배를 보고 듣기를 원한다. 그리고 5불, 10불, 혹은 5천원, 만원의 헌금만 우편으로 혹은 온라인으로 보내면 성도의 역할을 다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뉴 미디어의 발달은 이러한 개인적인 종교를 더욱 조장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에도 기독교가 복음전파를 위해서 멀티 미디어를 활용하거나 케이블 TV를 활용하게 될 것인데, 이것의 문제점은 바로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종교, 보이지 않는 종교 (the invisible religion)가 조장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보이지 않는 종교」를 쓴 러크만 (Thomas Luckmann)에 의하면 현대인들은 "자율적인" 소비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인은 자신의 궁극적인 의미 체계를 종교들, 교회들, TV 종교 프로그램들로부터 얻은 종교적인 상징들을 선택적으로 재구성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한 교회나 한 공동체에 스스로를 붙들어 놓지 않고 여러 교회, 여러 종교 프로그램들 중에서 필요한 것을 취향에 따라 선택하여 자기의 신앙 체계를 만드는 종교적 상징의 소비자요, 재구성자라고 한다. 자신의 취향에 따라 스스로 판단한다는 점에서 그는 "자율적" (autonomous)이며 독립적이다. 이러한 현대인에게 있어서 종교는 공동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다. 오늘날과 같이 멀티 미디어에 의해서 쏟아지고 있는 종교 프로그램이나, 케이블 TV로부터 오는 다양한 예배와 설교들은 이러한 자율적인 소비자인 현대인의 취향에 딱들어 맞는 환경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이것의 함정은 다름 아닌 공동체성의 파괴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 종교'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믿는 신앙, 또 그것에서 비롯되는 '개인적인' 신앙이 결과하는 문제점은 신앙인들의 이웃에 대한 무관심,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하는 공동체 정신의 상실이다. 이러한 신앙은 사람을 '노동'과 '업적'의 행동 반경 속에 묶어놓을 뿐이지 믿음의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성공주의를 조장함으로써 가난한 노동자를 부유한 사람들의 업적의 세계로 갈 수 있다고 하는 장미 빛 환상에 젖게 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기독교인들은 공동체의 성원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교회없이는 존재이유가 없다. 그 교회가 아무리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교회를 떠날 수는 없다. 교회를 갱신해야 하는 과제만이 남을 뿐이다. 교회가 타락해서 교회를 떠난다고 우리의 책임은 면제되는가? TV 에반젤리스트(복음전도자)들은 '그렇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교회를 떠나 개인적인 신앙을 가진다고 해서 그는 책임적인 존재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의 제자들인 우리들은 '행동'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 교회공동체가 이 사회와 세상에 봉사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갱신하고 참여해야 한다. 필자는 보이지 않는 종교, 개인적인 신앙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을수록 기독교는 건강하지 않게 된다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교회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무책임한 사람들이며, 그들은 예수를 뒤따르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라고 본훼퍼는 말하였다.

한국 교회는 물량주의적 경향에 의해서 교회 내의 코이노니아와 공동체성이 많이 손상되었다. 이러한 공동체성의 상실은 앞으로 뉴미디어의 시대, 미디어 혁명 시대가 본격화되면 더 심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동체 성원들의 직접적인 만남과 참여에 의해서 교회공동체는 세워진다. 필자는 교회는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자발적인 참여와 친교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는 많은 경우 목회자 중심, 당회 중심으로 운영됨으로써 위로부터 아래로 모든 결정 사항이 내려오는 운영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필자는 이러한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밑바닥으로부터의 자발적인 참여,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열심에 의해서 교회가 서야 한다고 본다. 교인들은 양떼, 목사는 목자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회는 모든 교인들과 함께 해 가는 것이지 목회자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목사가 전문적인 목회자라고 한다면, 교인들은 목사의 동역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교인은 함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신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를 이루는 지체들이다. 바울선생이 설파했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관한 말씀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특별히 의미있는 말씀이다 (고전 12장). 모든 성원들은 하나의 유기적인 공동체를 이룬다. 성원들은 각자의 은사를 가지고 공동체에 공헌한다. 거기에는 어느 누가 위에 있고 어느 누구는 낮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원 모두가 평등하며, 모든 일에 성원들이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참여한다. 이러한 공동체를 우리 교회가 목표해야 하지 않을까? 교회가 먼저 이 사회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 교회 안에 사랑과 평등의 공동체성이 있을 때 우리 사회는 교회를 존경하게 되고 따르게 된다.

공동체적 문화를 형성해 나가는 과제가 21 세기를 향한 오늘의 시대에 주어진 교회와 청년의 중요한 사명이다. 현대인들은 점점더 개인주의화의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며 개인적인 현대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에 맞는 정보들과 상징들을 취사선택하여 자기의 방식대로 사용할 것이다. 멀티 미디어 등 뉴 미디어는 이러한 현대인들의 경향을 더욱 강화시켜 줄 것이다. 또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제도의 강화에서 비롯되는 경쟁주의는 공동체적 문화를 더욱 파괴할 것이다. 이러한 속에서 공동체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킨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 취향에 있어 개인주의화되어 가고 있으며, 또 혹독한 경쟁 구조는 더욱더 사람들을 공동체로부터 떨어뜨리고 개별화시키고 있다. 교회가 이러한 환경 속에서 공동체적인 삶과 문화를 형성시킨다는 것은 매우 중차대한 일이 된다.

우리는 우리 교회와 기독청년학생운동이 지금 공동체적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어떠한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공동체성과 공동체 문화의 형성은 기독교 복음의 정신을 구체화하는 첫출발이다. 공동체가 있어야 코이노니아가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천될 수 있다. 교회는 우리 사회가 공동체적인 훈훈함과 정의가 있는 곳이 되게 하는 출발지요 진지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교회가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나아가서 교회는 이 사회가 전체적으로 올바른 코이노니아 속에 있게 하기 위해 그 사회적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시민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과제


자유민주주의는 시민사회적 공간을 마련해 주는데 일정하게 공헌하였다. 이전에는 시민사회의 제 요소들이 국가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 하에 놓여 있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자율적인 공간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공간이 이제는 국가뿐 아니라 자본과 시장의 힘에 의해 크게 제약되고 있다. 이러한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힘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은 시민사회 안에 형성되는 다양한 공동체들에서 나온다. 필자는 시민사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이 시대의 몰록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이론적 가능성을 열 수 있다고 본다.

시민사회는 그대로 방치될 경우 기존의 지배세력 즉 자본과 국가의 연합에 의해 지배되고 만다. 여기에 진보적인 세력의 과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진보적인 세력은 시민사회 안에서 대안적인 비젼과 삶과 행동의 양식을 가지고 시민사회 안에 있는 인자들을 설득하고 연대해 나가야 한다. 오늘날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다양한 시민운동, 연대활동들은 이러한 노력들의 일환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연대활동과 운동은 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맘몬과 몰록의 영이 현대인의 정신 속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적 자세를 형성해 놓았기 때문에 잘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시민운동도 국가가 지원하게 되었고, 기업의 돈에 의존하게 되는 경향마저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필자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시민사회운동의 기초를 건실하게 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며, 교회와 기초공동체들이 여기에 일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초없는 시민운동은 퇴락하고 만다. 시민사회 안에 존재하는 교회와 기초공동체들은 서로 광범위하게 연대함으로써 자신의 공간적, 지역적, 영역적 제한성을 탈피한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관점과 연대 속에서 자신들의 과제들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시민사회 안에는 크게 보아 두 개의 진영이 싸우고 있다. 그것은 이 사회를 맘몬과 몰록의 지배하에 놓으려고 하는 세계적 자본과 시장의 힘과 이에 대항하는 더불어 살고자 하는 공동체 운동간의 싸움이라고 본다. 공동체들은 새로운 정치사회(국가)와 새로운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대안적 삶을 제시한다. 즉, 한편으로, 공동체들은 지방자치제와 정당의 올바른 발전에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와 공동체들, 기독학생운동은 새로운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려고 한다. 생산협동조합,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그 예라 하겠다. 교회와 공동체들은 자기들만의 고립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연대할 수 있는 교회와 공동체만이 오늘의 문제를 풀 수 있다. 교회와 기초공동체는 시민사회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조직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교회, 기초공동체, 기독학생운동은 이른바 밑바닥을 구성하고 있는 성원들로부터 그 조직의 힘이 올라오는 사랑과 참여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선교의 과제: 시민사회 속에서의 공동체 확대의 과제


예수는 자신들만의 섹트적인 공동체를 형성하지 않았다. 예수는 이 공동체를 매개로 하여 더 크고 넓은 공간에서 형제자매애에 기초한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했다. 오늘날의 교회공동체도 예수의 뒤를 이어야 한다. 교회공동체는 자신을 목적으로 삼지 말고 더 큰 과제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보다 넓은 범위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 공헌하여야 한다.

교회공동체를 넘어서 사회적인 상위 개념으로서 시민사회를 말하고자 한다. 필자는 교회공동체가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더 넓은 사회적 공동체는 시민사회 안에 건설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공동체들이 모여 시민사회를 이룸으로써 시민사회의 원리가 약자를 보호하는 공동체적 원리가 되게 하는 것이 교회공동체의 사회적 임무라고 생각한다. 시민사회는 자연그대로는 힘있는 자들에 의해 지배되는 영역이다. 시민사회 안에 두 개의 진영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진영과 이에 대항하여 약자를 보호하는 정의로운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진영이 있을 수 있다. 교회공동체는 후자의 진영에서 전초기지의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시민사회는 한편으로 물질적인 힘으로 지배하려는 세력과 다른 한편으로는 물리적 힘으로 지배하려는 정치세력애 대항하며, 나아가서는 현대의 새로운 레바이아단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기술주의(technology)의 지배에 의한 민중과 시민의 대중화(massification)를 극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사회 내에 대안적 공동체들이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제 속에서 교회공동체의 선교적 과제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시민사회 (civil society)라는 개념은 앞으로 진보 운동을 펴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인다. 이태리의 실천적 사상가인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로부터 시민사회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얻었다. 그람시는 경제적 토대와 공권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국가를 제외한 모든 광범위한 영역을 시민사회라고 했다. 그리하여 시민사회는 학교, 교회, 노동조합 등 여러 형태의 조합들, 신문, 언론, 정당 등을 포함한 이른바 ぢ이념의 시장っ을 형성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람시는 시민사회 내부에 분열이 있음을 보았다. 현재의 국가와 경제적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해 주는 진영과 이에 대항하는 이데올로기를 갖는 진영, 즉 낡은 사회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대안적 세상을 세우려는 세력 간의 대립이 존재한다.

부언하면, 그람시는 시민사회를 ぢ모든 물질적 관계っ와 동일시하는 경제 결정론적 환원주의에 반대하여 시민사회를 ぢ모든 이데올로기적-문화적 관계っ로 파악한다. 그는 시민사회를 경제적 토대로부터 일정하게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음을 우선 강조하면서 이 시민사회는 또한 국가로부터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영역이라고 했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국가와 경제적 토대로부터 항상 영향을 받으며, 기존의 국가와 경제적 토대는 서로 힘을 합쳐 시민사회를 장악하려고 한다. 그람시에 의하면, 시민사회가 국가와 경제적 토대의 장악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비젼을 가지는 근거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젼을 시민사회의 대부분의 성원들이 공유할 때에만 효과적인 사회변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고 구현하는 세력이 시민사회에서 헤게모니를 가지게 될 때 사회변혁이 가능하며, 따라서 시민사회 안에 광범위한 연대 (진지)를 형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시민사회는 그대로 방치될 경우 기존의 지배세력 즉 자본과 국가의 연합에 의해 지배되고 만다. 여기에 진보적인 세력의 과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진보적인 세력은 시민사회 안에서 대안적인 비젼과 삶과 행동의 양식을 가지고 시민사회 안에 있는 인자들을 설득하고 연대해 나가야 한다. 오늘날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다양한 시민운동, 연대활동들은 이러한 노력들의 일환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연대활동과 운동은 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맘몬과 몰록의 영이 현대인의 정신 속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적 자세를 형성해 놓았기 때문에 잘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시민운동도 국가가 지원하게 되었고, 기업의 돈에 의존하게 되는 경향마저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필자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시민사회운동의 기초를 건실하게 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며, 기초공동체들이 여기에 일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초없는 시민운동은 퇴락하고 만다. 시민사회 안에 존재하는 기초공동체들은 서로 광범위하게 연대함으로써 자신의 공간적, 지역적, 영역적 제한성을 탈피한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관점과 연대 속에서 자신들의 과제들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시민사회 안에는 크게 보아 두 개의 진영이 싸우고 있다. 그것은 이 사회를 맘몬과 몰록의 지배하에 놓으려고 하는 세계적 자본과 시장의 힘과 이에 대항하는 더불어 살고자 하는 공동체 운동간의 싸움이라고 본다. 공동체들은 새로운 정치사회(국가)와 새로운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대안적 삶을 제시한다. 즉, 한편으로, 공동체들은 지방자치제와 정당의 올바른 발전에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다른 한편으로, 공동체들은 새로운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려고 한다. 생산협동조합,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그 예라 하겠다. 공동체들은 자기들만의 고립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연대할 수 있는 공동체만이 오늘의 문제를 풀 수 있다. 기초공동체는 시민사회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조직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기초공동체는 이른바 밑바닥을 구성하고 있는 성원들로부터 그 조직의 힘이 올라오는 사랑과 참여의 공동체이다. 기초공동체에서는 다음 절에서 언급되듯이 나눔과 비움과 스스로 행함과, 연대와 사랑이 일어난다.


시민사회를 위한 기본 조직으로서의 공동체 형성의 원리


(1) 나눔의 원리: 공동체의 형성은 성원 상호간의 나눔에서부터 출발한다. 요한복음은 ぢ생명의 빵っ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생명의 빵은 제자들을 위해 나뉘어진다. ぢ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っ (6:51). 생명의 빵은 나뉘어 질 것이며, 이것이 나뉘어져야만 생명을 얻게 된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들이 나뉘어져야 생명이 살고 공동체가 이루어진다. 나눔이 없이는 이 모든 것이 이루어 질 수 없다. 무엇을 나눈다는 것인가? 나눔에 있어서는 우선 경제적인 나눔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실, 경제적으로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경험 속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형식으로든 나눔이 없이는 생명이 살아질 수 없고 공동체가 형성될 수 없다. 모두 자기가 가진 것을 자신을 위해서만 쓴다고 가정하자. 거기에 어떻게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예를들어, 음식을 나눔은 옛부터 내려온 공동체적 전통이다. 음식을 나누는 곳일수록 공동체가 생긴다. 가족이 공동체일 수 있는 것은 가정만큼 음식을 많이 나누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가정에서는 모든 것을 나누어 가진다. 나눔이 없는 곳은 냉랭하다. 예수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생명을 나누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했다. ぢ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っ (요한 15:13).

공동체의 형성은 나눔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극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의 이야기(요한복음 6:1-15)라고 하겠다.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다섯 개의 떡을 자발적으로 나눔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함께 나누는 기적이 일어났고, 그것이 성인 오천명 이상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기는 기적이 이루어졌다. 이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었던 기적은 서로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를 이루어 질 때에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나눔 속에서 공동체는 형성되고 그 공동체를 통하여 하느님의 일이 기적처럼 이루어진다. 공동체가 음식을 나누는 밥상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주일 예배후 교인들끼리 점심을 같이 먹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의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공동체의 나눔은 공동체 자체 안에서의 나눔으로 끝날 수 없다. 공동체는 밖의 이웃, 모든 고난 당하는 이웃을 위해, 그리고 함께 의를 위해 일하는 다른 공동체들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가 공동체에 내는 재물은 주로 이러한 나누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 오늘날 제도교회들은 자신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재물을 사용함으로써 나눔을 실행하지 않는다. 공동체 교회는 제도보다는 이웃에 먼저 관심을 기울인다. 제도를 되도록 축소하고 합리화하는 일은 나눔을 위해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나눔은 단순히 경제적인 나눔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적인 의미도 가진다. 공동체 안에서의 발언권이나 지도력 등이 나뉘어져야 한다. 말의 독점이나, 결정권과 권력에의 독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많은 조직체가 이러한 권한의 나눔을 실천하지 않음으로써 권한과 권력이 소수 혹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성원의 대다수가 이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특히 교회는 이러한 권한의 나눔을 교회의 치리, 봉사, 목회, 말씀선포, 성례전 집행 등의 모든 영역에서 실천해야 한다. 공동체 교회 속에서의 나눔은 교회 안의 "권력"의 나눔에서부터 실시되어야 한다. 공동체 속에서 오고가는 말이 한 사람에 의해서 독점되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은 말하고 대다수는 그의 청중이 되는 공동체는 진정한 것이 못 된다. 이런 면에서 선포 (설교)를 되도록 짧게 간명하고도 이해하기 쉽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공부할 때에도 모든 사람들이 느낀 점을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치리와 행정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성원들 대다수가 참여하도록 지금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 교회는 무엇이든 가진 사람들이 자기의 것을 자진하여 내어 놓음으로써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리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을 배분받을 때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받을 수 있는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2) 비움의 원리: 나눔의 원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비운다는 것은 우선 집착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숫자나 외형적 크기에 집착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기획, 전략, 형식, 목표를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ぢ의지의 침묵っ을 말하는 것으로서 텅빈 상태를 의미한다. 빈공간을 형성하는 것이 공동체를 위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의도성을 너무 강조하면 공동체가 깨진다. 의지와 생각이 너무 꽉 차있고, 형식이나 제도가 물샐 틈없이 들어서게 되면 공동체성이 상실된다. 공동체 안에는 잘된 기획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버림과 비움 속에서 공동체는 역설적으로 성장한다. 이렇게 비우는 이유는 이 빈 공간에 무엇인가가 채워지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 채워지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성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채워지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빈공간이 있는 곳에 참여가 일어난다. 모든 것이 잘 기획된 곳에는 성원들이 참여할 여지가 없어 진다. 더 중요하게는 성령이 역사할 공간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빈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그 속에 배타성, 지배, 억지, 강압, 부담, 집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스럽게 모이는 것이 공동체이다. 의도성이나 억지에 의해 모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예수도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이 물러남으로써 그 공동체 안에 빈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예수는 직접 이 공동체를 지휘하지 않았다. 자신이 물러난 그 공간 속에 성령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자신이 떠나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뻐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성령이 오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3) 스스로 함의 원리: 즉 자발성의 원리이다. 스스로함의 원리는 참여의 원리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스스로 일할 수 있는 공동체의 원리이기도 하다. 공동체 성원들은 무위를 통해 일한다(爲). 스스로 있음의 (自然스러운) 존재로서 공동체 성원들은 이제 스스로 행함의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공동체 역사의 주체로 일어난다. 공동체는 자기 집착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또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한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혹은 권력이든 외적인 강제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에 의한 행동이다. 위의 비움의 원리에서는 정(靜)이었지만, 스스로 함의 원리는 동(動)의 원리이다. 그러나 이 정과 동은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공동체는 사건의 공동체요 활동의 공동체이다. 이 활동은 일단 침묵과 멈춤에서 오는 활동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활동으로만 채워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공동체는 비로서 자기의 의도성을 가질 수 있다. 위에서는 의도성을 배제했지만 이제 다시 성령의 지도에 따라 공동체는 의도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나를 버리고 성령의 가르침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박재순은 이러한 스스로 함의 원리야 말로 씨량 민중 사상의 중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공동체는 스스로 함의 원리에 의해 이 사회를 코이노니아적 정치체 (Politike Koinonia), 즉 진정한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주체가 된다. 스스로 함의 원리는 결국 신명나는 행동을 낳는다. 이러한 공동체의 자발적 행동은 다른 공동체들과 신명나는 '희망의 연대'를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한다.

(4) ぢ더불어っ의 원리: 이것은 연대의 원리이다. 공동체는 자기 자신만으로 자족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른 공동체들과 연대 속에서 형성되며, 힘을 얻고, 또 함께 일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더불어의 원리는 공동체의 형성의 원리가 된다. 기초공동체는 자기 자신을 뛰어 넘는 더 넒은 시야를 가져야 하며, 자신보다 더 큰 것을 향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들과 힘을 합쳐 사회 전체의 변혁을 모색한다. 이러한 면에서 선교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이제 선교는 가진 자(혹은, 우월한 자)가 없는 자(혹은, 열등한 자)에게 시혜적으로 무엇을 주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 속에서의 연대의 행위이다. 함께 하느님의 선교를 위해 연대하며 일하는 것을 선교라고 해야 한다. 시민사회에서의 교회의 선교의 모습은 더더욱 연대의 모습을 띄어야 한다. 시민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사회선교는 행동을 더불어 하는 연대(action in solidarity)의 모습을 취해야 한다. 이 연대에서는 다른 종교를 개종하려는 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 함께 정의롭고, 민주적인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시민사회의 기초 조직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공간을 제공하고, 인적, 물적인 공헌을 해 주는 일은 교회공동체의 연대사업의 주요한 부분이 된다. 이러한 연대를 위해서는 교회공동체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이해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즉 단순한 예배공동체라는 좁은 의미의 정체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회는 예배뿐만 아니라 봉사와 치유를 위한 공동체임을 이해하고, 나아가서 시민사회의 근간의 조직으로서, 시민사회가 정의롭고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게 하는 희망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5) 사랑의 원리: 공동체 형성을 위한 포괄적인 원리는 역시 사랑의 원리이다. 이것은 위의 모든 원리의 기초를 이룬다. 사랑의 원리는 예수가 주신 새로운 계명에 기초한다. 예수는 십계명을 종합하고 그것을 뛰어 넘는 새로운 계명을 기독교인들에게 주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복음 13:34).

이 ぢ새 계명っ은 요한복음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다 (15장 12, 17절).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기초는 그리스도인 예수의 사랑에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인 ぢ우리っ들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하는 것이며, 공동체 안의 사랑의 연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제하고 그것을 닮으려고 한다. 공동체와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연결된다.


위의 5 가지의 원리만이 공동체 형성의 기본원리일 수는 없을 것이다. 공동체의 경험이 깊어 질 수록 보다 근본적이고 중요한 원리들이 새롭게 발견되리라고 본다. 그러나 필자는 적어도 위의 5 가지의 원리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공동체는 성립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많은 공동체가 있음에도 그것이 공동체의 성격을 갖지 못하는 것은 그것들이 알게 모르게 위의 원리 중에 하나 혹은 여럿을 결여하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하고자 한다.


사회개혁과 교회갱신의 과제


공동체교회는 구체적으로는 포괄적 해방을 위한 사회개혁의 과제와 교회가 이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교회를 갱신하는 과제라는 이중적인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예수의 작은 모임인 교회공동체들은 모든 선한 세력과 모든 뜻을 같이 하는 교회들과 연대하여 사회개혁과 교회갱신에 구체적인 공헌을 해야만 그 존재 의의가 있을 것이다. 교회갱신은 포괄적인 해방을 위한 사회개혁을 위한 수단적 기능을 가진다.

교회갱신은 교회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교회갱신은 교회가 모든 면에서 균형을 갖추고 모든 면에서 전체적(wholistic) 성격을 확보하자는 것이 아니다. 완전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완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무 일도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신제가 연후에 치국평천하라는 말도 바로 이러한 완전주의로부터 기인되는 실천의 부재와 우유부단의 예일 것이다. 오늘날 온전주의 혹은 완전주의를 내새우며 소위 좌로나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ぢ중도적인っ 교회들은 역사가 실제로 그들을 필요로 할 때 이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완전주의나 중도주의를 자신의 사회적 입장으로 내세우는 교회는 이미 교회갱신을 포기한 교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아니라 자신을 부단히 변혁하는 과정에 있는 교회를 말한다. 교회의 진정한 자기 정체성(identity)을 정태적 (static) 완전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보다 진정한 것을 찾아 나서는 자기 변화과 운동의 과정에서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회의 완전함은 변화의 과정 속에 임재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 공동체교회는 스스로를 자신의 목표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렇게 된다면 공동체는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새로운 교회공동체는 포괄적인 해방을 위해 즉 하느님의 나라가 이땅에 거할 수 있도록 예수운동을 하기 위한 전초기지 일 뿐이다. 목적은 하느님의 나라, 포괄적인 해방이지, 공동체를 형성하는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오늘날 공동체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교회들이 매우 많아졌다. 그러나 그 교회공동체 운동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수단이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수단이므로 공동체를 세우는 일 자체 속에 이미 그 자체로 일정한 목적과 가치가 내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는 이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진 다른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에 참여하는 예수운동이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

대형 제도교회들이 공동체 운동을 벌이는 경우가 있다. 기성의 대형 교회들이 공동체 운동을 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고 다행한 일이다. 대형교회들이 공동체성을 회복해야만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공동체운동이 밑바닥 평신도를 중심으로하고 그들이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어야지 신도들을 소집단으로 나누어 통제하거나 관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공동체 운동은 교회를 외형적으로만 살찌게 하는 운동이 될 수 있다. 공동체 운동의 기본정신은 기초를 튼튼히 하는 데에 있다. 공동체는 기초로부터 영성과 에너지가 올라와야 한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도원리가 아니라, 저변으로부터 올라가는 지도원리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즉, 평신도의 주체적인 참여를 보장하고 북돋는 공동체일수록 진정한 교회공동체라 하겠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없거나 낮은 사람들, 여성, 청년, 학벌이 없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도력을 갖도록 북돋는 공동체가 요청된다. 교회공동체는 자체내의 참여와 정책 결정과정에 있어서 만큼은 헌금의 액수, 사회적 지위, 성별, 연령, 학벌 등을 불문한 평등을 보장하는 공동체이다. 대교회들이 공동체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과제는 공동체운동이 자기 교회의 외형적인 발전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의 소외된 사람들과 집단들의 참여유도와 교회밖을 위한 봉사와 연대를 중요한 목적으로 하는 일이다.

교회적 공동체는 앞으로의 운동을 위해 가장 중요한 조직적인 터전이 될 것이라고 본다. 공동체적인 교회가 많아질 수록 한국의 에큐메니칼 연대운동은 더욱 활발해 질 수 있을 것이다. 2천년대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과거와 매우 달라졌다. 지금은 변혁적인 사건으로 점철되는 시대가 아니다. 사건을 중심으로 모이는 운동은 퇴조했다. 이제 우리는 사랑과 연대와 참여의 공동체를 매개로, 사건이 생길 때 뿐만 아니라 항상적으로 모여야 한다.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삶의 모습을 예견할 수 있고 이를 미리 앞당겨 살 수 있다. 성공과 출세를 향해 줄달음질 치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의 모습과 대비되는 대안적인 삶의 모습은 기초공동체가 추구하는 참여, 사랑, 연대, 코이노니아, 봉사에서 찾을 수 있다.

교회공동체는 작은 공동체로서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의 평등한 관계 속에서 친교가 이루어지는 유기적 공동체이다. 교회공동체는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친교와 연대를 다음 단계의 활동을 위한 발판으로 본다. 교회공동체는 자기들만의 친교에 만족하는 폐쇄적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문 영역 개척적, 민중지향적 활동을 통하여 시민사회 안에 연대와 참여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앞으로의 한국 기독교 운동의 기초는 이러한 교회공동체들과 의식적으로 공동체 이념들을 체현하기 노력하는 갱신된 교회들에 의해 이루어 질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빛나는 역사참여 전통에 비하여 요즘의 우리의 모습은 무기력하고 혼란스러운 것같다. 기독교 운동의 바닥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이제는 기초공동체를 학원에서, 노동현장에서, 지역에서 조직하고 활성화함으로써 기독교운동을 새롭게 일으키며, 한국교회의 갱신을 도모할 때라고 본다.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자기 정체성의 확립의 과제


여기에서 공동체를 언급했는데, 그 공동체는 사회학적인 개념으로서의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공동체는 구체적으로 한국 땅이라고 하는 역사와 전통의 문화 공동체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의미의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특수한 문화적 공동체이기도 하다. 21 세기는 문화 혹은 문명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시기이다. 그 중에서 특히 동서양의 문화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서구의 반생명적 물질문명에 맞서 동양과 한국의 생명을 살리는 문화 전통을 창조해 내고 이어가야 할 것이다. 기독교 학생운동은 이러한 일에 앞장 서야 한다.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개편되며, 그 속에서 시장원리에 의한 경쟁구조가 가열화 되는 이때에 우리 문화적 공동체의 삶은 깨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화적 공동유산에 대한 한국민의 열망은 대단할 것이다. 기독학생운동은 한국민의 열망에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도록 공동체적 문화운동의 전형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보다 사회변혁적이며 정신변혁적인 운동으로서 문화운동을 준비하고 생산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결 론


2000년대의 사회는 시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시민이란 예속적인 인간이 아닌 자율적이며 스스로 행동하는 주체적 행동을 하며 소신껏 말을 할 수 있는 정신적 억압에서 벗어난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창조적인 문화유산을 지키고 이어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만큼 시민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변혁과 문화운동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민사회의 확장을 위한 운동 자체가 시민적 주체인을 형성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이러한 행동하는 시민을 형성하도록 돕고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데에 공헌하는 것이 교회와 기독학생의 과제가 된다. 또한 2000년대는 생명을 전인적, 전체적으로 (wholistically) 살리는 해방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리, 환경적인 전체적인 측면에서의 해방)을 요구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요구를 추동해내고 이루어 내는 기초세력과 그것을 취합해 내는 시민사회가 형성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와 기독교는 이제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제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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