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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9(수)
[21세기] 21세기를 앞둔 교회 예배학의 새로운 지평  
박 성 원


본고(本稿)의 목적은 한국교회의 예배갱신에 관한 논의이다. 예배갱신의 필요는 두 가지의 측면에서 요구되는데 한 가지는 잘못된 예배를 바로 잡는데 있고 다른 한가지는 예배의 활성화에 있다. 그 어느 쪽이 당면 목적이 되든 이 논의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전제되는 연구가 필요하다. 그 한 가지는 현재의 한국교회의 예배에 대한 정확한 이해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한국교회의 예배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그 발전과정에서 예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된 것에 대한 사회-문화적 분석을 하는 일이다. 갱신의 필요나 방향은 이러한 역사적 고찰과 사회-문화적 분석을 바탕으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한국개신교회예배의 역사적 발전과 문화적 분석을 바탕으로 그 갱신의 과제와 목표를 설정하기로 한다. 이 논의는 부득불 한국개신교, 특히 장로교 예배에 국한한다.



1. 한국교회 예배의 역사적 고찰



1.1. 초기 천주교의 예배


1.1.1. 한국의 기독교예배의 전래와 관련하여서는 천주교의 전래과정에서 나타났던 현상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 소현세자등을 통한 간접적 접촉이 이루어져 오던 한국과 천주교의 접촉은 18세기에 이르러 본격적 괘도에 오르게 된다. 17세기까지 단순히 서양 기물이나 서학서등이 유입되던 것이 18세기 와서는 실용적 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서학이 한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이 과정에서 그 종교적 진리에 심취한 사람들이 최초로 아주 단순한 형태의 기독교 예배행위를 하게 된다. 최초로 천주교가 요구하는 종교적 계율을 실천에 옮긴 인물로는 이 벽의 제자였던 홍유한으로서 그는 1770년(영조46년)에 처음 천주학 서적을 접한 이래 그 이후로 7일마다 하루씩 노동을 금하고 기도와 금욕생활을 실천하였다. 보다 확실한 신앙실천은 권철신, 정약전이 주도한 1777년 겨울의 교리연구회에서 비롯되었는데 수명의 학자들이 천주교 교리를 연구할 목적으로 외딴 절에 모여서 천주교 관계 서적을 연구하는 가운데 종교적 진리에 대해 깨닫고 이 모임 이후에 아침 저녁 기도, 주일의 노동금지, 금육재(禁肉齋)등의 계율을 지켜나가기 시작했다. 또 이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천주교교리에 접한 소감을 노래가사로 지어 남기기도 하였는데 이 벽은 ぢ천주공경가っ를, 정약전은 ぢ십계명가っ를, 이 가환은 ぢ경세가っ를 남겼다. 이 노래들은 불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반면에 유교에 대해서는 우호적 입장을 보였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주로 유학자출신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유교와의 우호적 분위기는 조상제사문제를 기화로 완전히 바뀌어 피비린내나는 조선천주교탄압의 역사로 이어진다. 조상제사문제는 단순히 종교적 계율의 문제를 넘어서서 유교가 당시 조선의 정치적 이념을 받치는 종교로 조상제사거부가 곧 국가에 대한 반역의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초기 조상제사의 문제는 정치적 대결의 구조속에서 속죄양이 되어 이 후로 한국기독교로 하여금 한국문화에 대한 배척성향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1.2. 개신교의 접촉


1.2.1. 개신교가 한국과 접촉할 때는 천주교와 접촉할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천주교의 경우 주로 서학책이나 여러가지 서양문물을 전해주면서 신앙이 깊어지면 십자가상이나 성화 또는 묵주등 예배적 상징과 기도등으로 접근한 반면 개신교는 최초부터 ぢ성서를 통한 접근っ을 시도했다.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을 최초로 방문한 귀츨라프(Karl F.A. Gutzlaff)의 집요한 시도는 성서의 반포였다. 그는 한국에 온 이후 이 나라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귀한 선물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다른 책들과 함께 성서반포에 주력하였으며 상당히 많은 관리들과 주민들이 비밀리에 성서를 받았다.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Robert J. Thomas)도 한국인들에게 살해를 당하면서 성서를 반포했고 이 때 성서를 받은 사람중 한 사람이 후일 선교사 마펫 (Samuel A. Moffet)을 찾았다는 일화도 있다. 또 언더우드(Underwood)와 아펠젤러(Appenzeller)가 한국에 최초의 거주선교사로 들어오기전 만주에서 로스나 매켄타이어등을 통해 복음을 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한국청년들도 성서번역에 한글교사로 참여하면서 회심을 하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현상을 볼 때 개신교의 선교는 성서를 통한 선교로서 전형적인 개신교적 특성을 담은 것이었다. 이 의미는 개신교의 예배에는 애당초부터 성서, 회심을 목적으로 한 전도설교중심으로 예배가 형성되었으며 예전적(Liturgical)접근이 희박했다는 증거이다.



1.3. 개신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성향


1.3.1. 기독교는 한국에 있어서는 전혀 생소한 종교였다. 그리하여 그 교리나 예배에 관한한 전적으로 선교사들의 소개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한국개신교의 영성과 예배형식의 형성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신학적 성향이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행사하였다는 의미이다. 알려진 바대로 초기 한국교회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청교도형의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엄격히 지켰고 춤이나 흡연, 카드놀이 같은 것은 죄로 여길 정도의 엄격하였으며 신학이나 성서관에 있어서 극도로 문자주의적이었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실한 역사적 사실로 믿는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졌다. 선교사의 대부분이 19세기 미국의 부흥운동과 선교운동에 감동되어 신학을 하고 선교사로 지망했기 때문에 그들의 목회는 전적으로 선교지향적이었고 예배 또한 강력히 선교지향적이었다.


1.3.2. 선교사들의 신학이 이처럼 근본주의적이고 보수적이기 때문에 타 문화권에 대한 접근도 배타적이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전통종교를 완전히 우상숭배로 단정하고 최초부터 전통종교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동시에 아주 소수의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전통문화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초기 선교사들은 다소 전통문화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접근을 하였으나 이것도 전통문화에 대한 가치인정이나 존중의 차원이 아니라 선교의 한 방편이 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고 후에 파송된 선교사들 중에는 서양문화우월의식에 의거 한국의 전통문화를 교회에서 배제하려고 노력한 경향이 농후하였다.



1.4. 1876-1906까지의 예배특성


1.4.1. 이 시기는 선교초기로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 시기였다. 첫째 전통종교나 전통문화에서 인식되어 오던 신관(神觀)에 대한 부정이다. 한국인들의 신개념에 대해 선교사들은 두 가지 종류의 생각을 가졌는데 한 가지는 한국에는 신의 개념이 명확치 않다는 견해였고 다른 한 가지는 한국에는 아주 풍부한 신(神)개념이 있는데 전부 미신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의 노력의 대부분은 기독교의 신(神)을 새로 소개하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이 종종 기독교의 신을 소개하기 위해 주역(周易)이나 중국고전의 전통적 신개념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전통종교나 문화에서 이해해 오던 신을 부정하거나 대치시키는 차원에서 접근했다. 전통종교나 전통문화에서의 신(神)은 거짖 신이고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참 신(神)인 것으로 강조되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의 최초의 예배적 강조는 신개념에 대한 전환이다.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며 그 이외의 어떤 종교의 신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예배의 대상으로 삼을 경우에는 우상숭배로 간주되었다.


1.4.2. 전통종교의 예배방법도 부정되었다. 즉 절하는 것, 향을 피우는 것, 과일을 바치는 것, 촛불을 밝히는 것 등의 모든 한국인이 행해오던 제의의 방법과 예배형식, 상징들은 우상숭배로 간주되었고 이런 영향때문에 이 후에 한국교회 예배문화형성에 예배적 상징이나 전통문화에서의 제의적 표현들과의 접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근거가 뿌리채 잘려나가 버린 셈이다. 조상제사가 부정되는 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1.4.3. 초기의 예배양식은 아주 간편하였다. 상징이나 절차는 중요시되지 않았고 예배가 전적으로 성서와 설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ぢ위원입교인규도っ (1895년 장로교선교부에 의해 발행됨, 13-14쪽)에 의하면 초기 한국교회에서 행해진 예배순서는 다음과 같다.


찬송 / 기도 / 성경봉독 / 기도 (회중중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대표로 함) /

찬송 / 설교 / 기도 / 봉헌 / 찬송


1880년 후반에 발행된 어떤 부활절 예배모범순서에 따르면 위의 단순한 예배순서에서 축도가 마지막에 더해져 약간 발전하게 된다.


감리교는 장로교보다는 좀 더 예전적인 예배를 강조하였다. 목사이자 의료선교사로 왔던 감리교선교사 스크랜톤(W.B.Scranton)은 감리교의 예배가 장로교보다는 훨씬 예전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감리교는 1898년 조선그리스도인회보를 통해 세계감리교협의회의 모범예배안을 소개하기도 하였다.(조선그리스도인회보 1898년 1월 12일자)


서주 / 찬송 (회중은 일어서서) / 사도신경 / 기도 (목사나 회중이 인도하며 회중은 꿇어앉음) / 주의 기도 / 찬양 (성가대) / 성경 봉독 : 제1독서 (구약중에서) / 시편 교독 (회중과 교독으로 낭송) / 영광송 / 성경봉독 : 제2독서 (신약중에서) / 봉헌과 광고 / 찬송 / 설교 / 찬송 / 축도


1.4.4. 초기한국개신교에 있어서 특징적인 부분은 세례이다. 역사적 기독교에서 세례는 하나님의 사유와 성령의 은사의 징표로서 강조되었다. 그러나 초기한국개신교에서는 교회공동체로 전입하는 예식(Initiation)으로 강조되었고 동시에 ぢ선교의 서약っ으로 강조되었다. 초기한국개신교에서는 한 사람을 전도하는 것이 세례받는 조건이 될 정도였다.


1.4.5. 안식일에 대한 강조는 초기한국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특징중의 하나였다. 선교사들이 청교도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안식일성수에 관해서는 아주 엄격하였다. 명칭도 ぢ안식일っ로 지칭하였고 노동은 물론 안식일을 지키도록 허락하지 않는 직장은 떠나도록까지 권면하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당시 농사일을 주로 하는 교인들에게는 상당한 갈등의 요인이 되었다. 초기한국개신교의 안식일개념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ぢ주일っ의 개념으로 보다는 구약의 율법적 개념이 더 강조되었다.


1.4.6.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초기한국개신교의 예배의 특징은 전반적으로 성서와 설교위주였고, 선교위주로서 엄격한 청교도적 영향아래 형성되었고 전통문화와는 상당한 대결구조를 가졌다. 그리고 초기 한국교회의 엄숙한 예배분위기는 선교사들의 청교도성향과 조선말기의 지배종교였던 유교의 가부장적 분위기에 의해 그 첫 기초가 닦여졌다.



1.5. 1907년 대부흥을 통하여 형성된 한국개신교의 예배


1.5.1. 1907년 대부흥운동은 한국개신교 예배가 상당한 부분 한국적으로 형성되는 시기였다. 이렇게 특징지어지는 절대적 영향은 대부흥운동을 주도한 길선주 목사에게 있다. 길선주 목사는 한국개신교의 어거스틴이었다. 길선주 목사는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과 자신의 건강에 문제로 절에서 요양하는 동안 도교의 명상법과 차력술을 배워 자신의 심리적 좌절과 나빠진 건강회복을 도모하였으나 일단의 차력술을 익히는 것외에는 마음에 완전한 평화를 얻지 못했다. 선불교에도 심취하였으나 만족할 만한 상태가 되지 않았을 때 그는 김종섭이라는 친구를 통해 기독교복음에 대한 소개를 받았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보라는 권고를 받고 시험삼아 기도를 한 결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심하게 된다. 그는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장대현교회의 장로로 교회를 섬기다가 후에 신학교에 가서 장로교 최초 7인의 목사중의 한 사람으로 안수를 받고 장대현교회를 목회하다가 1907년 대부흥운동의 핵심적인 인도자중의 독보적 한국설교자가 된다.


1.5.2. 길선주가 한국교회 예배에 영향을 끼친 것은 독특한 기도방법이다. 도교와 선불교에서 새벽기도에 심취한 적이 있었던 그는 한국교회에 새벽기도회를 도입한다. 이 후 새벽기도회는 한국교회만이 가지는 독특한 예배의 형식이 되었고 오늘날도 이 전통은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기도생활이 한국교회 경건에 중요한 목록이 되게 한 것도 그의 영향이며 성경읽기와 공부가 한국교회 신앙생활에 중요한 요소가 된 것도 그의 영향이다. 특별히 성경통독과 같은 독특한 방법은 불교나 도교에서 경의 암송을 통한 경건접근의 방법과 비슷한 것이었다.


1.5.3. 1907년 대부흥운동의 경험은 한국교회 예배에 몇가지 중요한 특징을 형성케 했다. 첫째 기도가 한국개신교예배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는데 특별히 열렬한 기도, 새벽기도, 문장에 매이지 않는 자유형식의 기도, 통성기도의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둘째 성령의 역사가 예배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전통적 기독교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임재(The presence of Christ)였다.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중에 하나가 그리스도가 임재하는 자리는 떡과 잔이 아니라 선포되는 말씀속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07년 대부흥운동을 깃점으로 한국개신교의 예배에는 그리스도의 임재보다도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더 강조되었다. 이 후 성령의 역사와 임재는 한국개신교 예배에 항상 강조되어 왔다. 세번째의 결과는 성경공부의 열정이다. 이것은 서구교회의 성경을 듣는 형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서속으로 들어가는 참여적 전통을 낳게 하였다. 넷째, 1907년 대부흥운동은 비예전적 예배, 단순한 예배로 한국교회 예배전통을 낳았고 예전적 요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찬송은 찬송으로서의 고유한 예배의 요소라기 보다는 기도나 말씀의 선포를 효율적으로 만드는 보조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섯째 1907년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예배를 주정주의적으로 인도하였다. 이성적 사고보다는 감성적 느낌이 중요하였고 이 후 예배에서는 예배속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보다도 예배자의 감정적 느낌, 즉 감동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에도 그대로 살아있어서 소위 ぢ은혜스럽다っ는 형용사로 예배의 감동정도를 예배자의 감정적 감흥이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현상을 낳고 있다. 여섯째 설교의 형태를 열정적인 형태로 자리잡게 했다. 부흥회 인도자의 열정적 설교가 감동의 중요한 촉발제가 되었고 참회와 결신을 촉구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감성에 호소하는 열정적 선동형식의 설교를 한국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형태로 자리잡게 했다. 이 때 부터 선교사들이 설교의 일선에서 물러나며 한국인 설교자의 역량이 과시되게 되었다.



1.6. 삼일운동과 예배


1.6.1. 한국개신교는 3.1운동을 통해 예배의 정치적 의미 (Political implication of worship)를 경험하게 된다. 1905년에서 1910년으로 이어지는 한일합방에 대해 기독교 가치관에 물든 인사들이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한다. 이에 대한 일제의 견제가 심해짐에 따라 교회의 정치적 참여로 한 민족의 운명보다는 오히려 어렵게 열린 전도의 문이 닫힐까봐 염려한 선교부는 그 특유한 보수적 신앙에 근거하여 교회의 비정치화 작업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이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증언의 길을 막지는 못했다. 선교사들의 신학적 성향과 잘 맞았던 길선주 목사까지도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은 한국그리스도인의 신앙이 무조건 선교사들의 영향아래 있었던 것만은 아님을 증거하는 한 예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역사적 정황에서 읽었다. 출애급기는 한국상황으로 그대로 옮겨져 이해되었다. 3월 1일 평양 한 중학교 교정에서 있은 고종황제 추모예배는 독립운동시위로 그대로 발전되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그대로 행동으로 증언하는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3.1운동당시가 한국교회 신앙에 있어서는 보수적 신앙과 진보적 신앙이 완전히 일체가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1.7. 삼일운동의 여파에 대한 한국교회의 반응


1.7.1. 삼일운동에 참여함으로 독립이 오리라는 기대속에 역동적으로 참여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3.1운동이 성과없이 끝나자 깊은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1.7.2. 한국교회는 3.1운동 여파에 대해 두 가지 방향으로 반응을 보였는데 한 방향은 소수 지식인들과 청년들에 의해서 전개된 것으로서 이들의 접근은 독립역량을 구체적으로 키우기 위해 농촌계몽운동같은 것을 통해 의식화운동으로 한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1.7.3. 또 다른 한 방향은 부흥운동이었다. 이 때의 부흥운동은 3.1운동의 충격으로 인한 좌절을 달래기 위해 말세신앙과 치유와 이적 및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흘렀다. 말세신앙은 길선주 목사에 의해 심어졌고 치유와 이적을 중심한 부흥회는 김익두 목사에 의해 주도되었고 신비신앙은 이용도 목사에 의해 주입되었다. 이 때 부터 한국개신교회의 예배에는 강력한 이원적 종말신앙, 신유와 이적 추구의 집회, 신비주의등이 한국교회 예배에 상당히 견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1.8. 무교회주의자들의 주정주의적 예배비판


1.8.1. 1930년대까지 한국교회 예배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던 종말신앙, 신유와 이적 추구의 집회, 신비주의등 주정주의에 바탕을 둔 부흥회식의 예배는 김교신이 주도하는 무교회주의자들의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무교회주의자들은 철저히 주지주의자들로서 성서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현실적 사회변혁을 지향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계층적 구조(Hierarchical structure)를 반대하고 성직주의(Clericalism)를 반대하며 성직자에 의해 집례되는 성례전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교리의 필요성도 느끼지 않고 성례전의 필요조차도 느끼지 않았다. 철저히 반의식주의(Anti-ritualism)이며 기독교의 한국화(Koreanization of Christianity)라는 복음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 of Gospel)를 철저히 시도하였다.


1.9. 신사참배와 예배


1.9.1. 1930년대의 한국교회의 예배가 신비주의, 타계적 말세신앙, 주정주의등에 입각하였다면 1930년대 말에서 해방때까지로 이어지는 한국교회 예배의 최고 이슈는 신사참배문제였다. 신사참배의 경험은 예배의 정치적 의미 (political implication of worship)을 다시 한번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단순히 국민의례라고 하면서 신사참배를 한국교회에 강요했고 한국교회는 제1계명을 범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거부했다.


1.9.2. 사가(史家)들은 기독교의 신사참배거부가 순전히 종교적이었지 정치적 의미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한국크리스챤들의 입장보다도 일제당국의 반응을 보면 정치적 의미가 상당히 짙게 나타난다. 신사참배거부자에 대한 조서를 통해서 보면 일제 당국이 가장 꺼려한 부분이 재림신앙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였다. 일제는 이 두 가지의 신앙을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이해했고 그리스도가 왕으로 재림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건설되는 것이 곧 일제의 천황이 폐위되고 일제의 지배가 종식되는 정치적인 사건으로 이해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에 복음서 이외의 성서, 특히 출애굽기같은 것은 못읽게 했고 예수를 왕이나 주(主)로 지칭하는 찬송과 십자가군병들과 같은 찬송가를 금지시켰다. 따라서 신사참배거부는 일제당국에 가장 위협적인 종교적 행위가 되는 동시에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제1계명의 철저한 준수는 부당한 권력이 존재할 때는 그것은 자연히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1.10. 해방직후의 교회상황


1.10.1. 해방직후의 상황은 해방의 기쁨으로 예배의 자유를 누리기 보다는 신사참배문제를 둘러싼 배반의 문제로 교회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는다. 신사참배를 한 교역자들은 자숙과 참회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던 옥중성도를 중심으로 한 그룹은 그것을 신앙의 순수를 판정하는 기준으로 삼아 신사참배자들을 숙정의 대상으로 삼았다.


1.10.2. 이후 한국동란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한국그리스도인들은 무질서속에 방황하면서 온갖 신흥종파와 사이비 신앙에 의해 현혹된다. 정치적 혼란과 방황은 종교적 혼란과 방황으로 연결되었다.


1.11. 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예배


1.11.1.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80년대로 이어지는 경제개발과 군사독재상황은 한국교회에도 적지 않는 영향을 끼쳤다. 군사정권에 의한 억압적 상황에 대해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주정주의적 예배와 치유, 신비, 방언, 성령운동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예배를 통해 민중들을 역사적 상황에서 도피하게 하고 피안의 세계로 은신하게 하는 길로 인도했다. 기도원운동이 왕성히 전개되며 치유와 이적, 탈현세적 신앙, 신비주의적 성향과 극도의 주정주의적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의식을 탈정치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볼 때 인권탄압에 맞서고 정치적 억압에 맞서는 교회의 예언적 예배는 탄압된 반면 성령운동 방향은 자유롭게 발전한 것은 정치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11.2. 이 시기에 한국개신교예배가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성령운동이었다.이 시기의 한국교회는 초기기독교가 로마제국과 맞서기 위해 제도적 교회가 되었고 그 후 종교개혁이후로는 성서중심의 교회가 되었다가 제3의 시대에 이르면 성령중심의 교회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요아킴 플로리스 (Joachim Floris; 1132-ca.1202)가 예언대로 성령의 시대를 맞는듯 성령운동이 한국교회를 휩쓸었다. 일찌기 1907년부터 이미 한국교회예배의 독특한 특징으로서 자리를 잡아온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부흥회는 삼일운동이후와 1930년대를 거쳐서 한국교회사상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그 제3기의 현상이 1970년대에 일어난 것이다. 성령운동은 한국교회예배의 특성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성령운동을 통해 형성된 특징을 몇가지 간추려보면 첫째 성령운동이 주도하는 예배는 아주 축제성(Festivity)을 띠 게 된다. 박수와 열정적 찬송, 때로는 황홀경까지 일으키는 예배분위기는 축제적이다. 둘 째 성령운동의 예배는 무형식성(Informality)을 가지고 있다. 물론 기본적인 골격은 있으나 성령의 감동이나 인도자의 특성에 따라 예배형식은 자유자재로 바뀐다. 셋째, 성령운동의 예배는 강력한 일체감과 공동의 소속감을 느끼게 한다. 성령운동은 방언과 신유, 이적적 사건들을 추구한다. 성령운동은 역사적 성령운동이 걸어온 바와 같이 강력한 주정주의에 근거한다. 성령운동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한국전통종교인 샤마니즘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신학과 예배특성에 있어서 평행점이나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문화적 분석에서 다시 논한다.


1.11.3. 국가의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ぢ성장っ이 교회의 이데올로기로도 자리잡게 했다. 교회성장이 선교의 최대 목표로 설정되고 예배도 성장이데올로기에 따라 메머드화 한다. 문제는 여의도집회와 같은 대규모 집회에 아무리 많은 군중이 모여도 집회의 규모만을 기록할 뿐, 예배자들의 연대(Solidarity) 같은 예배의 공동성은 형성되지 않고 개인적 차원에 머문다.


1.11.4. 1970년대 군사정권의 폭압적 상황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다시 예배의 정치적 의미를 경험하게 한다. 산업선교로 시작된 노동자의 고난에 참여하는 선교적 경험, 정치적 억압에 대해 민주화운동으로 맞서는 교회의 경험은 예배가 피안적 위로로서만 존재할 것이 아니라 예언적 소리가 되게 하는 필요를 절감한다. 유신선포이후에 수감된 구속자들의 가족들이 아무로부터도 위로를 받지 못할 때 기독교회관에서 목요기도회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 기도회는 당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예배행위였다.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기도하는 모임에 수백명의 경찰이 동원되어 경비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 예배는 여의도에서 모인 백만여명이 모이는 예배보다는 이 땅위에 권세잡은 자들이 훨씬 더 두려워하는 예배가 되었다. 1970년대의 이 경험은 1919년 3.1운동때와 1930년대 후반의 신사참배때 한국교회가 경험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 예배에 대한 세 번째의 경험이었다.


1.11.5. 1970년대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민중신학적 발전을 하게 한 시기였다. 민중의 발견, 민중문화의 재조명등은 예배로 하여금 현장성과 정치성, 그리고 민중문화적 접근의 과제를 낳았다. 민중신학은 70년대의 신학적 탐구에서 80년대로 접어들면서 민중교회를 구성한다. 민중교회로 형태로 전환한 도시빈민공동체나 노동교회, 농촌교회등은 피안적, 사변적 예배주제를 탈피하고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예배의 주제로 삼고 전통적 예배의 틀을 과감히 깬다. 이를테면 노동자들이 노동권익투쟁에 임할 때는 투쟁장에 나가기 전, 새벽에 성찬식을 가지면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로 결속되는 연대(Solidarity)를 형성하는등 아주 현실적인 예배를 가졌다. 민중교회예배는 예배의 언어도 민중적으로 전환시키고 형식도 상당히 자유로운 형식을 띠며 전통문화와의 접목도 적극적으로 시도한다. 민중교회의 목표중의 하나가 교회갱신이었으므로 이 모든 예배의 갱신도 교회갱신의 일환으로 시도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예배에 대한 고정관념이 워낙 강했고 민중교회라는 특성때문에 보편적인 확산이 되지 못하였다.


1.11.6. 이 시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비록 소수가 경험한 것이지만 1960년대에 일어나기 시작한 예배갱신운동에 의해 한국교회도 도전을 받는 경험이었다. ぢ예배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공통된 삶으로 표현되는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성찬식 교제를 통한 가시적인 하나됨이라는 목적으로, 또 이 세상이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그 하나됨을 향하여 전진하도록 교회들을 부르는 것이다.っ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목표에서도 나타났듯이 세계와 세계교회의 가시적인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칼운동은 예배가 바로 그 일치의 가시적 모양새임을 인지하고 예배의 일치를 도모하는 작업을 선결작업으로 받아들였고 일치운동의 출발점이 바로 예배의 일치이며 예배의 일치가 곧 교회의 화해과정이며 화해과정이 곧 갱신의 과정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였다. 이 에큐메니칼운동에 의한 예배갱신운동을 통해 한국교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교회가 아닌 세계교회가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지를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경험하게 되고 한국교회 예배의 갱신의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실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과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경우 이러한 세계교회의 예배갱신흐름을 따라 새로이 예배모범을 만들었다. 특히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상당히 진보적이고 과감하게 에큐메니칼운동의 예배갱신연구의 결과들을 반영하였다.


1.11.7. 이 시기동안의 또 하나의 특징은 토착화문제이다. 1960년대초에 기독교사상을 통한 토착화논쟁은 문제제기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나 토착화에 대한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고 토착화의 가장 외형적 시도가 예배분야이므로 경동교회등 일부 교회에서 토착화가 밀도있게 시도되었다. 이 때의 토착화는 기독교예배를 변경하는 문화적응형식인 문화융합(Acculturation)이나 전통의식을 기독교신앙에 비추어서 재해석하고 변형하고 기독교예전에 사용할 수 있는 토착문화화(Inculturation)하는 수준이 아니고 전통악기를 사용한다든가 전통음악을 사용하는 정도의 문화적 대체(Accomodation)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수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2. 한국개신교예배의 문화적 분석



2.1. 모든 종교의 제의는 토착화를 해야 한다 혹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쟁에 앞서서 그 전래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토착문화와 일정한 융합을 하게 마련이다. 한국개신교예배도 전통종교인 샤마니즘, 유교, 불교의 영향을 직 간접적으로 받은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2.1.1. 유동식교수의 구분에 따르면 한국전통종교의 영향으로 한국에는 두 가지 형태의 영성이 형성되었다. 한 가지는 유교의 영향으로 형성된 부성적 영성(Paternal type of spirituality)로서 이 형태는 보수적(Conservative)이며 율법적(Legalistic)이며 형식적(Formal)이며 계층적(Hierarchical)이다. 다른 한 가지는 샤마니즘의 영향으로 형성된 모성적 영성(Maternal type of Spirituality)으로서 이 형태는 자유적(Liberal)이며 관용적(Tolerent)이며 무형식적(Informal)이며 평등적(Egalitarian)이다. 기독교가 들어올 당시의 조선은 유교가 지배이데올로기인 동시에 사회적 정서였기 때문에 이런 상황속에 들어온 기독교는 자연히 부성적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는 엄격하고 보수적인 청교도전통을 지닌 초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신학적 성향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늘 그래왔듯이 어떤 종교가 지배이데올로기로 채택되든지간에 민중들 사이에는 항상 무속종교가 저변을 깔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가 점점 민중계층으로 확산되어가면서 무속적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는 특히 부흥회와 같은 신학적으로나 예배형태에 있어서 무속적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는 때가 되면 무속적 경향을 아주 강하게 보인다.


2.1.2. 유동식교수에 따르면 한국교회의 예배가운데 전통문화적 색체가 많이 나타나는 것이 부흥회인데 이를테면 1907년의 부흥운동은 다소 부성적 형태의 영성운동으로서 윤리적 회개운동이 주를 이루는 것이었던 반면 김익두, 이용도 목사에 의해 주도된 1930년대의 부흥운동부터는 모성적 형태의 영성운동으로 발전하면서 무속적 색채가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것이 1970년대의 성령운동에는 이름만 다를 뿐이지 샤마니즘적 색채가 농후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기복과 신유, 박수소리와 북소리를 동반한 열광적 찬송, 방언과 황홀경의 경험은 샤마니즘의 제의에는 기본적인 과정이다. 한국교회의 부흥운동과 기도원운동은 일정정도 샤마니즘적 영향을 이미 받고 있는 상태이다.



2.2. 토착화문제


2.2.1. 선교사들의 영향권이 미치기전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초기에는 자연스럽게 토착화의 과정이 진행되었다. 초기 카톨릭교도가 된 유학자들은 그들이 깨달은 기독교의 진리를 한국의 전통적 시가형태로 만든 바 있다. 개신교의 경우 전술한 대로 초기 선교사들은 전통문화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나 찬송을 만든다든가 하는 경우에 전통가락을 사용하였다. 특히 언더우드(Underwood)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의 문화를 버리고 외국문화를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토착적 찬송가를 만드는 일들을 시도했다. 게일(Gale)과 같은 선교사는 서양기독교가 결코 우월한 것이 아니며 기독교의 현재의 형태에서 서양의 영향을 분석할 필요가 있고 한국과 같은 경우에는 사양화가 되기 전에 복음의 원형적 씨를 한국토양에 심을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토착화는 네비우스(Nevius)선교정책에서 예배당건축에 국한하여 일부 권장되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토착화는 1907년 대부흥때에 도교와 불교의 명상법에 익숙한 길선주 목사에 의해 시도되어 새벽기도회와 같은 독특한 한국형의 예배가 창안되었다. 인도등지에서 이미 경험되긴 하였으나 대부흥운동에서 지배적인 기도형태가 된 통성기도도 독특한 기도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길선주 목사는 이 외에도 의도적으로 아악과 찬송을 연결하는 토착화를 시도하였으나 구체적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 후 최병헌, 김교신등에 의해 토착화는 끊임없이 시도되었으나 게일이 염려한대로 한국개신교는 이미 서양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2.2. 찬송가의 경우를 보면 초기에는 한국가락에 기독교적 가사를 붙힌 토착적 찬송가의 작곡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장(長),감(監) 양 교단이 경쟁적으로 만든 찬송가에는 점차 영미의 복음찬송을 위주로 한 찬송이 더 삽입되고 한국가락의 찬송은 점점 쇠퇴하게 되었다.


2.2.3. 한국교회 예배당건축사를 보면 한국개신교의 서양화(Westernization)의 과정이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선교초기의 예배당건축은 네비우스선교정책을 따라서 전통적 양식으로 지어졌다. 1900년대에 지어진 대부분의 예배당은 기와를 얹은 L 형태의 한국전통적 양식이었다. 그러나 1910년경에는 한국형 기본골격에다가 서양형 방배치의 건축구조가 혼합된 형태가 나타난다. 이 때부터 이미 지붕의 곡선도 한국형이 아닌 일본형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건물이 L형태에서 T형태로 바뀌는데 이 T형태는 1830년대 미국에서 청교도에 의해 주일학교를 수용하기 위해 고안된 형태의 예배당이었다. 이 시기에는 또한 이미 고딕식(Gothic) 혹은 조지아식(Georgian) 건축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08년에 지어진 새문안교회당이 이런 형태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형태는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건축에 주종을 이루었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한국교회건축에 현대건축양식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한국교회건축사는 꾸준히 서양화의 길로만 걸어왔다. 토착화에 관한한 강화도의 성공회 성당을 제외하고는 한국교회 개신교사상 가장 적극적인 토착화가 이루어 진 형태는 1940년에 금화에서 건축된 금화감리교회이다. 금화감리교회당은 한국인의 영성과 문화를 가장 잘 표현한 양식이었다. 전통적 한국형 집으로서 서양식 고딕이나 조지아식처럼 장엄하고 열망적 형태가 아닌 안정과 평화의 느낌을 갖게 하고 외부에서 실내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영성과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장식이 되었다. 강대상과 설교단등도 신학적 토착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형태의 예배당은 더 이상 건축되지 않았다.



3. 한국개신교 예배에 대한 평가



3.1. 한국개신교의 예배의 긍정적 특성


3.1.1. 한국개신교의 예배는 열정적이다. 비이성적인 부분이 있어서 일관성이 결여되고 있기는 하나 감정에 풍부하며 이것은 한국인의 직관성과 관련하여 예배의 감동을 극대화하여 예배를 풍부하게 한다.


3.1.2. 한국개신교의 예배의 다른 강점은 성서중심의 예배이다. 성서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생활에 적용하느냐는 별개문제이지만 성서의 이야기에 친숙하며 성서속에 깊이 참여한다. 이는 서구교회의 예배가 주로 성서는 듣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되는 현상이다.



3.2. 비예전적 예배


3.2.1. 한국개신교예배는 선교사 대부분이 청교도전통에 서 있었던 점과 이들이 부흥운동과 선교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람들이었고 또한 그들의 목적이 선교와 개종이 주 목적이었으므로 모든 예배는 성서, 회심을 목적으로 한 전도설교위주의 아주 단순한 예배가 소개되고 예전적 성격은 최초부터 배제되었다.



3.3. 성찬이 소홀히 된 예배


3.3.1. 한국개신교의 선교가 성서반포, 성서공부, 설교위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성찬은 거의 강조되지 않았다. 물론 세례와 성찬에 대한 교리공부는 있었으나 성찬이 예배의 한 부분으로 강조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고 성찬의 의미도 그리스도의 속죄에 집중되었다.



3.4. 예배인도자의 특성에 절대적으로 좌우되는 예배


3.4.1. 초기부터, 특히 1907년이후부터는 설교, 특히 영감있는 설교자의 설교가 예배의 전체를 좌우했기 때문에 예배는 설교자의 권위와 영향력의 절대적 영향아래 있었다. 예배는 설교자에 의해 주도되고 회중은 설교자의 선포에 모든 예배적 참여를 국한시켰다. 이러한 전통은 이후에도 회중으로 하여금 설교에만 참여하면 예배는 참여한 것으로 간주하는 정도의 극단적인 현상을 낳기도 했다.



3.5. 공중예배(Publich worship)가 아닌 예배의 사유화(Privatization)


3.5.1. 한국교회의 복음선포는 개인의 회심과 구원에 상당한 촛점이 ꁹ추어져 왔기 때문에 예배의 공중성보다는 개인적 경건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강하였다.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공동체성은 다소 가지고 있었으나 예배를 통한 공동체성은 희박하였다. 특히 성찬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속죄신학에 촛점이 ꁹ추어지고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의미의 성찬(Communion)은 강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배의 사유화현상이 역역히 드러났다. 가정예배, 목회자의 심방은 제의의 사유화를 재촉하는 결과를 빚었다.


3.6. 방향없는 토착화


3.6.1. 성령운동과 같은 열광주의적 예배에서는 비판없이 샤마니즘적 요소가 깊이 개입되어 있는 반면 금화교회처럼 한국인의 영성과 문화를 적절히 반영하는 체계있는 문화적 토착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강한 무속적 경향이 있는 반면 교회음악이나 전통문화를 수용하자는 요구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3.7. 신학적 원칙이 결여된 예배


3.7.1. 한국개신교의 예배에는 성서일과나, 쓰여진 기도문 같은 것이 사용되지 않는다. 설교는 설교자의 영감과 취향에 따라서 형성되며 심지어 공중기도도 기도자 자신의 신앙적 이해에 따라 눈을 감고 진행하기 때문에 설교나 기도에 신학적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3.8. 경직된 예배, 혼란한 예배


3.8.1. 한국교회예배는 양극단적 양상을 띠게 되었는데 한 양상은 유교적 영향과 초기선교사들의 청교도적 성향이 만들어 낸 소위 부성적 형태로서 이러한 예배는 보수적이며 율법적이며 형식적이며 계층적인 성격이 강한 경직된 예배전통을 낳았다. 반면에 샤마니즘의 영향을 받은 부흥회는 예배에 혼란성을 부여한 예배전통을 낳았다.



4. 21세기를 앞둔 교회 예배학의 새로운 지평


4.1. 신학적 원칙이 있는 예배


4.1.1. 신학적 원칙이 있는 예배가 되기 위해 교회력에 의한 예배의 회복이 시급하고 교회력은 복음의 내용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복음을 오늘의 상황속에 증언하는 선교적 과제를 중심으로 한국의 역사적 현실에 맞게 구성하는 신학적 작업이 필요하다. 최근의 한국교회의 예배갱신운동에 교회력의 도입은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역사적 현실이 고려되지 않은 고전적 교회력의 도입이나 서구교회가 설정한 성서일과와 해석에 기초한 교회력의 무비판적 도입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복음은 선포되어야 할 역사적 현실과 유리되면 힘을 잃기 때문이다.


4.2. 예전적 예배


4.2.1. 반예전적 예배(Anti-liturgical worship)는 주로 종교개혁 후세대중에 급진적(radical)파들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예배의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비예전성 예배 혹은 반예전적 예배가 나오게 된 배경은 중세교회가 보인 한계처럼 예전적 예배가 미신적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성을 차단하는 잇점도 있으나 예배문화의 보편성은 예전적임을 감안할 때 이를 배타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예배의 속성을 무시하는 무리수가 될 수 있다. 요즈음 서구교회에서는 반예전적 예배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던 계몽주의에 대해 조심스럽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계몽주의는 이해적 측면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예배의 신비성을 벗겨버린 결과를 빚었고 인간의 영성에 분석적 칼을 너무 예리하게 댐으로써 포괄성보다는 분파성을 조장하는 위험성이 있다. 칼 융(Karl Jung)은 종교의 신화적 요소는 무의식세계와 의식세계를 잇는 하나의 다리역할을 하기 때문에 의식세계속에 있는 인간이 무의식의 세계와 교류(Communication)하기 위해서는 종교의 신화적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며 이것의 매체는 상징(Symbol)이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런 측면에서 불트만의 비신화화를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예배의 예전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이러한 종교적 제의의 독특한 영역인 신비성을 회복하는 길과 연결되기 때문에 필요하며 특히 한국문화적 토양을 감안할 때도 예전성의 회복은 필요한 것이다. 예전성의 회복은 한국인의 영성의 엄연한 실체로서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 되고 있는 주정주의를 건장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예전성의 회복은 또한 부성적 형태의 경직된 예배분위기와 모성적 형태의 혼란한 예배분위기 양쪽을 다 그 장점을 살리면서 약점을 보완하는 해결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예전성의 회복에 있어서 물론 예전적 예배의 외식적 위험성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4.3. 축제적 예배


4.3.1. 기독교 예배의 중심주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부활의 축제이다. 매주일의 예배는 부활의 축제이다. 신랑이 온 이후에도 금식하거나 슬픈 얼굴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예수의 말대로 부활의 영광을 축하하게 되어 있는 예배가 항상 참회와 탄식으로 일관할 필요는 없다. 한국교회예배는 그 감정적 차원때문에 항상 애수가 띠어 있는 형태이고 전도와 회개가 예배에 상당히 강조되어왔기 때문에 예배가 비축제적이었다. 한국교회 예배는 축제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 축제성은 분위기를 축제적으로 만들자는 뜻이 아니라 예배의 내용이 부활의 영광을 축하하는 축제적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분위기도 축제적이 되어야 한다.



4.4. 말씀과 성찬이 균형잡힌 예배


4.4.1. 최근 세계교회의 예배갱신의 중요한 동기가 된 것 중에 하나가 신약성서연구의 업적이다. 신약성서연구의 업적이 예배분야에 끼친 중요한 기여중에 하나가 초대교회의 예배는 반드시 말씀과 성찬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성찬의 중요성은 사실 기독교역사속에서 부정된 적은 없었다. 종교개혁자 칼빈(J. Calvin)까지도 모든 예배에 성찬은 행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이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말씀이 배타적으로 강조된 교회의 분열은 상당히 쉽게 이루어지는 반면 성찬으로 연결되는 교회의 분열은 심하지 않고 있는 현상을 볼 때 성찬은 교회의 공동체성을 굳게 붙들어 매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4.5. 문화와 조화되는 예배


4.5.1. 한국교회예배는 한국문화와의 화해를 시도해야 한다. 토착화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토착화를 강력히 거부한다 하더라도 문화적 영향아래 있는 한, 솜에 물이 스며들듯이 이루어 진다. 문제는 토착화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다. 모든 문화가 선한 것은 아니다. 문화에 대한 비판은 문화를 건전하게 창조하고 형성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예배(Cult)와 문화(Culture)의 관계는 그 어원적 관계에서 보듯이 불가분의 관계이다. 예배가 문화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예배가 문화를 형성하기도 한다. 영향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토착화의 당위성이 있고 문화를 형성한다는 측면에서 비판적 접근의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에 깊숙히 스며들어 와있는 무속적 영향은 기독교 교리와 윤리적 입장에서 비판적 정리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무속제의의 사회성이나 전통종교나 문화적 영성, 문화예술적 표현은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부분이다. 예를 들면 시편송의 제작인데 이는 시편의 히브리식 낭송을 볼 때나 한국영성을 잘 표현하는 한국전통가락 양쪽을 볼 때 시편송은 반드시 한국가락으로 작곡되어야 한다. 감사시, 탄식시, 찬양시, 참회시 형태에 맞는 한국민속가락은 서구의 음악적 가락보다 히브리시편의 영성을 나타내는데 훨씬 더 월등한 곡조이다. 반면 지금까지 통상 이루어져 온 한국찬송가작곡의 시도는 가락의 극히 일부만이 약간의 한국적이지 음악의 형식이나 화성은 서구찬송의 형식을 따고 있다. 이는 토착화에 있어서 문화적 대체(Accomoddation)의 수준에 머무는 것인데 이는 진정한 토착화는 아니다. 토착화는 거의 무의식적인 교감이 이루어지는 정도로 깊이 접목되어야 한다.



4.6. 회중참여적 예배


4.6.1. 한국교회의 예배는 인도자도 아닌 설교자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종교개혁전통의 예배의 특징중에 하나가 만인사제설에 근거한 회중참여적 협동적 예배이다. 회중이 예배를 드리는 주체로서의 상응한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예배의 기획에서부터 순서진행에 이르기까지 문이 확대되어야 한다.



4.7. 예배의 역사성과 영성이 조화되는 예배


4.7.1. 한국교회예배의 특성중의 하나는 강력한 타계적 성향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고 예배의 정치적 의미(Political implication)가 강력하게 부각되는 예배, 이 두 양면성이 공존하고 있다. 1919년 삼일운동이나 신사참배와 같은 사건속에서는 신비하게도 이 두 극단성이 결합하는 형태를 보이기도 했으나 그 이외에는 대립적으로 존재해 왔다. 예배가 일방적인 정치적 선택을 하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하겠으나 하나님의 주권은 이원론적 영적 세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만물을 그 행사의 대상으로 삼기때문에 인간의 삶에 가장 영향력을 깊이 행사하는 정치적 영역이 배제될 수 없다. 역사적 기독교의 예배에는 예배의 정치적 의미가 강하게 행사되어온 수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4.8. 에큐메니칼 예배


4.8.1. 한국교회예배는 너무 교단적으로 배타적이다. 세계교회가 한 하나님, 한 그리스도, 한 성령을 고백하며 한 세례속에 있는 한 모든 직제와 예배가 다른 교회들이 하나의 교회라는 명령법앞에 일치의 노력을 하고 있다. 자신의 고유한 예배도 지켜져야 하지만 다른 교회와의 공동예배에의 문도 열어놓아야 하며 더 나아가서 교회의 가시적 하나됨을 위해 공동의 예배모범 작성을 지향하는 길도 바람직하다.



4.9. 삶과 연결되는 예배


4.9.1. 한국크리스챤들의 단점중의 하나가 예배와 삶이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배는 예배대로 삶은 삶대로 다른 원칙에 의해 인식되고 시행된다. 예배는 성전예배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파송을 받아 세상의 삶으로 연결되며 신약성서의 광의적 예배개념은 삶도 예배의 한 부분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예배(Worship)와 삶(Ethics)과 신학(Theololgy)가 상호 관련을 맺고 서로 영향을 주는 방향으로 심도있게 접근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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