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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9(수)
[21세기] ­칼빈의 사상에 나타난 실천적 동기­  
교리와 전략

­칼빈의 사상에 나타난 실천적 동기­

크리스토퍼 옥커(Sanfrancisco 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


과학의 변두리에 있는 신학

칼빈은 말하기를,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가장 평범한 책으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도와" "이들을 지도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려 한 바가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고," "기독교 철학에 담겨 있는 중요하고도 가장 무게 있는 주제들을 다루려는" 의도로 쓰여졌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의 해석가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 책은 서로 상충되는 혹은 역설적인 정신, 콤플렉시오 오포니소룸(complexio oppositorum), 곧 하나님과 인간 본성 사이의 차이, 혹은 하나님의 두 가지 얼굴, 곧 가장 준엄한 엄숙성과 가장 커다란 부드러움 사이의 차이 등으로 양극화된, 논리적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사고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통합할 수 있는 정신의 신학을 제공하고 있음에 보편적으로 동의해 왔다. 좀더 폭넓은, 문화적인 용어로는 칼빈 신학의 변증법은 가장 적합하게는 바로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사이의 갈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칼빈의 신학에 대한 이러한 견해들은 칼빈에 대한 기억이 지속되기를 강요해 온, 동정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판에 박힌 묘사들에 대한 환영받을 만한 대안들을 제공해 왔다. 그의 옹호자들은 자의식적인 충성심에서, "하나님의 명예" 혹은 "하나님의 비전과 그분의 장엄함"라는 신학적인 주제­이 용어들은 그 함축된 의미에서 이중 예정론과 엄격한 도덕주의라는 전통적인 신념을 낳았다­가 (다른 주제들에 대해) 갖은 우월성을 고집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루터파 학자들과 그들 가운데 현대 세계의 개신교 문화의 일류 해석가들은 칼빈의 신학적인 업적을 주로 루터에게서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단순히 루터의 개혁에 비교해서는 다소 열등한, 단지 획일적인 성서의 문자 영감설 교리에 추진력을 제공했지만, 현세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루터의 주장을 버리고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저 세상적인 영성으로 탈출해 버린, 종교 개혁의 터전을 공고히 한 (루터의) 대행자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칼빈의 사상에 대한 새롭고도 좀더 난해한 견해는 해석가들로 하여금 이중 예정론이나 성서 영감설 같은 스콜라주의적으로 보이는 교리들 없이도 잘 지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교리들은 기꺼 있다 해봐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미궁"(labyrinth)에 속하며, 그의 휴머니즘과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긴장 관계에 놓여 있거나(Bouwsma), 구속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확고히 종속되는(Dowey),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범주에 불과하다. 동시에, 새로운 견해는 학자들로 하여금 칼빈과 칼빈주의적 정통주의 사이와, 칼빈과 경건주의 사이의 구분을 가능케 했고, 칼빈에게 있어서 그의 계승자들을 능가하는 천재성을 인식하게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해석가들은 여전히 칼빈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수수께끼로 인해 당혹스러워하며, 실제로 대단히 전통적인 설명으로 불리는 것에 자꾸 쏠리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고 있다:칼빈은 그 자신이 {기독교 강요}의 두 번째 판에서 주장하였고, 마지막 판에서 결론 내린 후 자신의 생애 마지막 시기에 이를 불어로 번역한 이후에도 말했듯이, 그의 목적은 최고로 경건하고 실제적인 것이며, 다소 한정적으로 성서에 다가가는 하나의 접근 방식을 제공할 의도였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칼빈이 여전히 비스콜라주의적 신학자라 하더라도, 조직신학자로서의 칼빈의 회복을 거부하는 온건한 비난이거나 혹은 최소한 그의 조직신학적인 합리적 일관성의 한계들을 지적하는 것이다. (여기서) 실천적인 관심이 그 우위를 만끽하고, 반대의 변증법(the dialectic of opposites)보다는 수사학이 방법론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성서 주석은 하나님의 섭리, 기독론, 혹은 하나님의 2중 지식만큼이나 그의 지성의 특징이 되고 있다.

이 신학자 안에 내재해 있는 이같은 분명히 겸손한 속성들이 지니는 엄청난 중요성을 이해될 수 있기 전에, 이것들은 그 어떠한 종류의 꾸밈이나 장식도 결여하고 있음이 먼저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것들은 아마도 이전에 칼빈의 사상과 결합된 엄청난 주제들­예를 들면, 자본주의의 발흥과 근대 세속성, 재산의 우위와 절대 군주에 대한 암시적 저항, 혹은 성서 역사주의의 발흥­과 비교해 본다면, 이에 훨씬 못 미치는 공헌들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결합은, 백 년 전, 독일(과 루터교의) 역사가들의 논쟁들이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종교 개혁의 중요성을 재는 척도를 정하던 100 년 전 당시의 인본주의에 매우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들은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인정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근대 유럽의 문화와 정치의 중세적 기원에 대한 갱신된 인식의 결과로서 그렇고, 부분적으로는 근대 과학의 중세적 기원에 대한 우리의 증가하는 인식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면밀한 조사에 있어서 인본주의­근대 과학과 계몽주의의 전조가 되는 모든 것으로서의­와 스콜라주의와의 전통적인 분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의 결과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면밀히 조사함에 있어서, 더 이상 칼빈과 자본주의, 민주주의와 역사주의 등에 대한 가장 커다란 전통적인 주장들을 유지할 수 없음의 결과로 인해 그렇다. 개신교인들의, 특별히 칼빈의 혁신이 교리를 뛰어넘고 유럽 문화의 중추를 건드린 것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종교 개혁의 업적을 왜곡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정신(minds)이 형이상학과 사변을 참으로 싫어하기에, 지성(intellectuals)이 이전에 자신의 사회적, 물질적 세계에 부여한 기본 구조를 바꾸기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했다고 하는 것을 믿을 이유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칼빈이 자유 시장과 민주주의, 과학, 그리고 비판 이성의 발흥의 공로자로 간주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만일 우리가 Heinz Schilling과 더불어 저항 이론의 형성에 있어서 환경의 역할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Quentin Skinner에 동의하여 칼빈주의적 저항 이론가들의 스페인적(가톨릭) 원천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Anneliese Meier와 Amos Funkerstein과 함께, 14세기의 신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17세기 그 언젠가 아주 신학적인 철학자들에 의해서야 간신히 극복된 형이상학과 과학 사이의 갈라진 틈을 받아들인다면,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만일 웅장한 주장들이 잘린 상태로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면, 우리의 저자가 {기독교 강요}의 독자들에게 확신을 갖고 제공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안내라는 문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리라. 칼빈의 동기는 종교 내에서의 변화를 꾀하는, 지극히 경건한 욕망이었다. 이 겸손한 야망은 우리들의 초점을 변화시켜야 하고, 그로써 {기독교 강요}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필경 바꾸어 놓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초기 칼빈주의의 그림을 좀 색다르게 구성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비전의 목적을 변경시킬 필요가 없을 뿐더러, 심지어 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더 증진시킬 지 누구 알겠는가? 하지만, 관점의 변화는 그러한 지식을 좀더 진정하고도 참된 것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종교 내에서의 변화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사회 생활에 더 깊은 영향력을 끼친다. 그것은 우리가 세속주의의 거장들과 비판적인 사고,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들에 크게 매혹을 느끼는 영향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 제네바에서도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16세기로 접어들 무렵, 제네바는 거의 고전적인 중세 도시였다. 아마도 사보이 공국의 남쪽에 있는 이와 비슷한 도시보다는 페이즈 드 바우드(Pays de Vaud)나 중앙 유럽의 도시들에 한층 더 가까웠다. 이 도시의 시민들은 자신들이 얼마 되지 않는 교회 제도들과 성직자들­이들은 성직자의 지위 덕택으로 여러 이득을 톡톡히 누리고 있는 부류들로, 다소 불안정한 평형 상태를 유지하며, 서로를 다소 부드럽게 경쟁 상대로 여기고 있었다­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외국의 사보이 혈통이 섞인 기존의 기반, 곧 대성당 참사회(Cathedral chapter)와 베네딕트 수도원(Benedictine cloister) 등이 있었고, 새로운 기반으로는, 그 기원에 있어 토착적이라고 볼 수 없는 홀리 클레어스를 제외한, 도미니크 수도원, 프란시스코 수도원, 그리고 어거스틴 은자단(the houses of Dominicans, Franciscans, and Augustinian Hermits) 등이 있었다. 제네바 정부는 다소 유별난 구석이 있었지만, 여전히 이백 년 이상 독일의 소도시에서 계속되었던 지도력의 전형적인 경향을 따랐다. 제네바의 과두정치 체제는 4 명의 집정관 혹은 그 우두머리로 (단일 뷔거마이스터[Burgermeister] 대신) "신딕스"(Syndics, 지방행정 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역자주)로 구성된 "소위원회"(Small Council)로 제한되었고, 시민들을 더 적절히 대표하는 다른 기구, "200인 위원회"(Council of Two Hundred, 독일의 신흥 도시 혹은 제2라트[Rat]와 비슷한)와의 권력 공유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위험 부담이 많은 단일 비단 시장이었지만, 이의 성공에 고무된 시민들은 그 도시의 성직자들과 사보이 대군주들로부터 더 많은 독립을 추구하였다. 프랑스 왕이 그 시장들을 리용으로 옮김으로 인해 왕의 경제 술책의 희생 제물이 되자, 북쪽에 위치한 가장 가까운 독일의 이웃 도시인 베른시는 제네바에 열심히 접근하여, 자신이 독립의 수단으로 채택한 새로운 개혁을 제네바에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새로운 동맹의 제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회 제도의 제거에 대한 신학적인 이유는 중앙 유럽에서 그 이전에도 200 년 동안이나 존재하고 있었다가 이제는 개신교의 한층 설득력 있는 도전들 속에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독일의 제국 도시들에서처럼, 그러한 급진적인 변화는 그 고을의 상류층 시민들의 의미심장한 저항을 만나게 되었다. 칼빈의 경우, 그러한 저항은 오랜 기간 강하게 계속된 나머지, 제네바에서 그가 보낸 세월의 대부분을 채색하였다. 오직 그가 {기독교 강요}의 마지막 서문을 썼을 무렵에만, 성공한 노인으로서 만족할 수 있었고, 칼빈의 권력과 개혁들이 결합된 이후에야, 제네바는 이제 난민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최초의 개혁 종교회의(synod)가 파리에서 구성되었으며, 칼빈의 고향인 프랑스와 영국, 스코틀랜드, 독일, 베네룩스 국가들(the Low Countries), 보헤미아, 폴란드, 그리고 헝가리 등지에 칼빈주의적 목사들을 안정하게 공급할 수 있었다.

그러한 것들은 정적이고 무관심한 하나님 개념을 {기독교 강요}에서 배제하려 했던 즉각적인 관심이었다. 이는 단순히 이러한 일들에 우선적으로 몰두하는 신학을 구성하려는 칼빈의 신중한 의도요 그의 노동이었다:"나는 그저 간단하게 이 작업({기독교 강요}에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확고히 주장할 것이다. 이는 나 자신에게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따라서 진리 안에서 이에 대한 찬미는 하나님께로 돌려져야 한다." {기독교 강요}는 그의 "작업"의 종합이었다. 이는 특정한 사고 형태의 전형적인 모습이고, 더 나아가, 이러한 사고 형태는 16세기의 개신교 신학의 뚜렷한 특징을 예증하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흔히 누군가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전략적인 관심을 갖고 교리를 발전시키는 일반적∕습관적인 방법이었고, 그래서 그 정의 상 공공 환경에서 무척이나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이것들은 도그마의 논리적인 요구에 대해서는 주변적인 것일 수 있었다. 그것들은 칼빈의 직접적인 관심들, 곧 제네바의 종교적인 변혁과 개신교를 프랑스와 다른 여타의 가능한 지역에로 전파시키는 일 등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것들은 칼빈을 조직신학자로 보려는 인식을 약화시키며, 또한 그의 교리 형식으로부터 곧 결별했던 칼빈주의자들에 대한 개인의 경멸을 확증해 주지만, 그러나 아마도 또한 16세기의 막바지에, 칼빈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관심들을 무시한 가톨릭과 루터교 반대자들이 열정적으로 씨름하기를 즐겨 했던 지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도전들과 정면으로 대결했던 그런 개신교 신학자들에 대한 우리들의 존경을 증폭시킨다.


교리의 공적인 얼굴(The Public Face of Doctrine)

{기독교 강요}에 담겨 있는 칼빈의 사고의 활기 있는 특성을 관찰하고 정신의 노동 속에서(in the labor of the mind) 현실 세계의 개혁을 위한 노동을 인식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그것은 하나님이나 인간 본성에 관한 자족적인 진술들을 피하거나; 인간을 향하시는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향하는 인간에 의한,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행위에 집중하는 기술 방식을 채택할 수도 있고; 신적인 삶과 인간 사회를 평범하게 연결시키는 다리들을 기술하고 있는 3권과 4권에 집중되는 독자의 주의가 작용하는 방식들에 집중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또 다른 분별 가능한 경향, 곧 하나님의 경험으로부터 사회 환경으로 옮겨가는 불가피한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칼빈은 인간 영혼에 있어서 어떠한 진보, 상당히 인간적인 진보를 가정하였고, 이는 신학자들의 기준에서 본다면 대단히 비전통적인 것이다. 그는 가정하기를, 진정한 경험(the genuine experience)은 내적이고, 거기서 외부 방향으로 진보한다고 생각하였다. 곧 인간의 참된 특성에서 개인의 행동과 이에 의해 창조되는 환경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간성에서 주변 환경으로의 진보(progress from personality to circumstance)이다. 전통적인 기독교인, 곧 그가 반대했던 로마 가톨릭 교인들처럼, 칼빈은 개인과 환경 사이의 도저히 풀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얽혀진 결합을 믿었다. 이때의 환경이란 언제나 신중하게 그 구조가 세워졌고, 신중하게 유지되었던, 곧 "영적"이면서 또한 시민적인 정부의 두 형태를 통하여 유지된 환경을 뜻한다. 전통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칼빈은 "영적인" 정부의 우월성을 믿었고, 이는 그 어떠한 사회적 혹 문화적 사태에서든 종교 지도자가 우월함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종교 지도력은 성직자 계급을 구성하였으나, 칼빈의 제네바(와 이의 모범을 따랐던 개신교 지역)에서는 이는 성직자와 평신도 엘리트("장로들") 계층 모두를 포함하였다. 새로운 것, 곧 칼빈이 16세기의 그 누구보다도 유럽인들을 위해 더 명확하게 해 놓은 개신교의 태도(만일 우리가 그의 영에 근거하여 이를 판단한다면)는 개인과 환경은 서로 뒤얽혀 있다는 가정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정을 전제로 하여, (이 양자, 곧 개인과 사회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칼빈의 생각으로는, 이것들은 자의식적 합의에 도달한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 사람들의 주관적인 조건으로부터 사회적 문화적 평형 상태가 현실화되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그의 도시의 교회들에서 울려 나오는 찬송가 같은 것이다. 각 개인의 마음으로부터 기쁨으로 가득 차 각 나라 말로, 그러나 여러 소리가 아닌 한 목소리로 울려 나오는 찬송가와 같은 것이다. 회중들은 반드시 장엄하고도 엄숙한 노래들을 부르되, 세속적인 곡조는 배제되어야 한다.

그러한 가정은 사회적인 위계 질서들이 지니는 구성적 역할을 감소시켰고, 사제적 위계 질서의 대부분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통치 계급(영적 혹은 시민적인)을 멸절시키려는 의도는 없었다. 세상의 권위에 대한 이러한 양면 가치적 관점은 다분히 중앙 유럽에서는 사회 불안(civil unrest)에 뒤따른, 전형적인 사회 비판이었다. 이는 특정한 불만의 원인에 집중되어 종교적인 고백이 아닌, 가장 일상적인 불만인 과세 제도를 교정하려 하였다. 그리고 일반적인 사회 비판 형태는 혁명을 옹호하기보다는 권력 구조를 재치 있게 남겨 두었고, 좀더 제한된 변화, 즉 기존 정부에 다른 이의 그룹을 포함시키는 정도의 변화를 겨냥하였다. {기독교 강요}에서 협정(convention)이 우세한 그 정도(degree)는 참으로 간과되기 쉽다. 물론 칼빈은 그 도시 외부의 통치 집단의 특정 권위를 감소시켰고, 집정관들의 권한은 세속적인 일에 제한시켰지만, 목사들의 권위는 (거꾸로) 부과하였다. 이 두 방향으로 움직여 가는 경향, 즉 시민의 독립과 지방 교구의 통합은 다소 낡은 형태의 것이요, 2세기 동안 가톨릭교인들 사이에서 일상적인 것이었으며, 이제는 모든 교파를 망라하여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전형적인, 오직 판에 박힌 의미에서 혁명적인 것이었다. 도시들은 오랫동안, 지방 교구를 영적인 목양의 중심으로 만들었던 주교들을 포함한 교회를 이방 세력으로 인식해 온 나머지, 교회 권위의 간섭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 왔다. 교구의 성직자들은 오랫동안 그들의 영적인 권한­1215년의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교령, 우트리우스크 섹수스[Utriusque sexus]에 근거하여 세워진 것으로, 이 정전법은 각 교인의 "적법한"(proper) 성직자, 다시 말해 교구의 성직자에게의 연례 고해성사를 규정하였다­에 의존한 기독교 사회의 민초들의 단결을 알고 있었다. 개신교도들 역시 다음 두 가지에 의존하는 마을 혹은 지방의 사회적 응집력을 인지하고 있었다:영적인 문제들에 있어서는 "이방" 사제들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그 지방 교구 성직자의 통전성과, 도시건 시골이건 영적인 정부에 있어서 그 지역의 귀족 특권층­주교나 교황, 혹은 수도원들(세속 지배자들이 어느 정도 교회를 통제할 수 있는지 없든지에 상관없이)­과의 연결이 빈약해 보이는 사회 신분을 지니고 있는 성직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경우,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개인이 거주하고 있는 사회의 자율성에 의존하게 된다. 교황권과 참회 제도(결과적으로는 가톨릭 사제들에 반대하는 논쟁이 되어 버렸다)에 대항하는 칼빈의 논쟁은 만인 평등 원칙에 근거하여 확정된 것이 아니라, 진위가 의심스러운 종교적 오용에 근거한 것이었다. 종교의 오용은 일종의 노예제였고, 이는 불법적으로 사람들의 양심을 구속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성직자가 사람들에 권위를 행사한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닌, 불법적인 (illegitimate) 권위를 행사했기 때문에 기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서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의 능력을 말로 표현하는(voice) 데 실패했음을 뜻한다. 칼빈은 분명히 믿기를, 사제들은 종교 법원(the Consistory)에서 평신도 장로들과 제휴하여 다스려 나감에 있어,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를 행사할 수도, 또 전형적으로 그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성직자와 그들의 교사들은 성서를 정확하게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위계질서는 단호히 거부된다. 하지만, 종교 법원의 감독 아래 있는 확고한 원칙은 강조되어 부과되었다. 고해 성사는 거부되지만, 단식과 개인적인 죄 고백의 열정을 포함한 참회의 생활은 목사의 지도 아래 하에 그대로 유지된다.

칼빈은 현재에서 교회가 교회되는 과정(the making of the church)에 집중하였다. 로마 가톨릭 주의에 대항하여, 그는 위계 질서가 기독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제네바에서 기독교는 대서특필된 사회(society writ large)였다. 교회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머리"의 정신과 마음에 복종하는 몸­으로 만든 신앙을 통해서 주체적으로 형성되었다. 이 조건은 사람들 가운데 엄청난 정도의 일치성­사고나 행위에서 뿐 아니라 느낌에서까지­을 암시하였다. 칼빈의 신앙은 개개인에게 엄청나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주의적 위계 질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한층 개인적이며 산만하였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 자신을 독특한 종류의 주체성­이 안에서 한 개인의 자아 감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삶에 의존하게 된다­으로 인지한 어느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을 보고 가늠하게 해 준다.

이 주체적 조건은 실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은총은 진정 존재하였고, (인간) 의지의 선택에 작용하였다. 신앙은 확실성이었고, 의심과 무지를 극복하였다. 내적인 조건으로부터 환경에로의 진보는, 그러므로 불가피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그 인식은 은총에 의해서만 산출되었다. 은총은 그의 불가피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진정한 교회, 복음적 교회는 이 진보를 위해 봉사하였다. 그리고 그 교회는 그가 행하는 정확한 설교에 의해, 성서에 근거한 두 가지 성례전, 세례와 성만찬을 집행함으로써, 그리고 훈련을 부과함으로써 쉽게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개신교도들의 신앙이 진정 참된 것이라면, 신앙인은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일치하여야 한다.

Benjamin Warfield가 아마도 지적했듯이, 인간 개인의 실존과 인격성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우월성에 대한 칼빈의 감성은 어거스틴에게 크게 의존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회와 교회에 대한 감성은 어거스틴으로부터는 멀리 멀어져 있었고, 이 점에 있어서 그 히포의 감독(어거스틴)과는 달리, 칼빈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가늠하는 데 사용하는, 전통적인 기준으로서의 평범함을 거부하였다. 어거스틴은 세계를 새쿨룸(saeculum), 곧 현재 시대로 알고 있었다:이는 지리적으로 보면, 이미 알려진 세계요, 시간적으로는 원죄와 최후의 심판 사이의 모든 시간을 뜻한다. 이 세계에서 죄는 실재하고, 실망은 규범이다. 성례전은 처음부터 왜곡된 영혼들을 위한 안정된 치료약이다. 칼빈은 세계를 그의 생애 최후의 9 년 동안의 제네바로, 곧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제네바로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은총은 실재하고, 신의 정의는 규범이 된다. 성례전은 하나님의 역사의 물적인 표지이며 도구이다.

신앙, 지식, 일치, 시행:"암시된 신앙"이나 무지한 신앙, 강제된 신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단속될 뿐이다. 이와 동일한 것이 신앙으로부터 의지로, 신앙으로부터 올바른 행위로, 그리고 신앙으로부터 시행으로의 진보에도 유지된다: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자의식적 욕망으로부터 분리된 신앙이란 존재하지 않고, 의지는 이를 강제 없이는 행하려 하지 않기에 훈련의 위협에 의해 고무되는 것이다. 이단과 비기독교적인 행동들을 견딜 수 없는 것, 이는 권위주의적 종교였다. 불의한 행동들은 대중 문화의 대부분­어린이들에게 주어진 이름들, 축제와 결혼식 때 행해진 춤, 축제를 표시한 달력, 심지어 집과 선술집에서 불려지는 노래들과 게임들­을 포함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과거 제국의 견지에서 본다면 권위적인 것이 아니었다. 의지만 있다면, 바로 그 과거 제국의 견지에서, 종들은 그들의 세금을 내고 황제의 법을 지키지만, 그 법을 증오하고, 세금 징수자들과 황제를 미워한다 : 자기 몫의 세금을 내고 황제의 법을 지키는 한, 그들은 자신들의 증오로 인해 고통받지 않는다. 제네바에서의 규범은, 적어도 이상적인 규범은 만족(contentment)이었다. 그 정권은 정의상 착취적이 아니라, 그 방법에 있어서 대표적(representative)이었다. 그 정권은 바로 자신이 대표했던 것, 즉 복음적 도시를 결정하기 위하여 단지 그 많은 일을 했던 것이다.

칼빈이 자유에 부과하였던 이러한 이상한 자격들, 곧 종교적인 일치성이라는 자격은 칼빈의 제네바에서 신앙이 획득했던 새롭고도 독특한 힘을 구성한다. 신앙은 여전히 세속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을 가정하였고, 여전히 양쪽에서 강한 목소리를 행사하였다. 그러나 이는 좀더 분명하게 강제력 덕택이 아니라 합의(consensus) 덕택에, 정부 덕택이 아니라 신앙 덕택에, 사회와 문화의 무언의 실체가 되었다.

강제력과 합의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중세 교회법 전문가 또한 인정하였듯이, 진정한 신앙은 강제될 수 없고 자유롭게 주어졌어야만 했다. 강제력은 신앙을 산출할 수 없었다. 이는 단지 신앙을 지지하고 격려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가톨릭의 유럽에서 그랬듯이, 칼빈의 제네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믿음의 전통적 단계들 - 가장 순수한 것은 일반적으로 "암시적 신앙"(implicit faith)이라고 불리웠다 - 은 부드러운 확신과 일상적인 교리적 문맹에 대한 용인일 뿐 아니라, 또한 약하게 선언된 정부, 엄밀히 말해서 영적인 정부의 역할을 뜻하였다. 교육받은 신앙은 성직자 계급의 중간이나 상위 계층의 교육받은 사제들에 속한 것이었다. 전통 신학에 의하면, 사제직의 일상적인 인정은 난동의 부재와 더불어 구원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것은 적법한 믿음의 단계였고, 상위 권위들을 인정하였고, 자신의 의무­멀리 떨어져 있는 황제를 대신한 관리에게 매우 상쾌한 공물 같은­곧 십일조와 연례 고백, 참회, 그리고 성만찬의 소비(comsumption) 등의 의무를 잘 이행하는 단계였다. 전통적인 신앙 그 자신으로서는 점진적이고 지속적이기 하지만, 결코 지각변동과 같은 엄청나지는 않았던, 전통 유럽 문화와의 긴장 속에서 존재하였다. 성직자를 다스리는 법인 교회법(canon law)은 지방의 관습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교회의 법과 지방 전통들 사이에는 여전히 갈등이 있었다. 이들은 친족 관계와 결혼, 적법한 자식에 대한 정의 같은 이슈들과, 성관계­전통 유럽 문화에서는 월경 기간에도 허용되었으나 교회법에서는 아니었다­의 적합한 횟수 같은 사사로운 일들에 대한, 모호하고도 다소 미확정적인 운동 속에 표현되었다. 교육받은 성직자들은 문화 속의 기독교의 영향력을 증진시키고, 그 지방의 성인 남녀(local holy men and women) 대신 보편적이고 성서적인 성인 숭배를 증진시키고, 그리스도의 몸 축제(feast of Corpus Christi) 같은 대중적인 헌신의 요소들을 강하게 담고 있는 보편적인 축제들과 전례들을 증진시키면서, 그 지방의 관습들을 보다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기독교 문화의 관습으로 대치하는 작업들을 해 왔다 16세기 기간동안, 성직자들은 대중 문화를 점점 더 심하게 착색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개인 고백과 자선 단체들, 그리고 상상력을 통하여 일어났는데, 민간 요법 같은 전통적인 관습들에는 마법이라는 누명을 씌우기도 하였다. 자의식적인 신앙, 곧 주관적인 경험으로서의 신앙은 교육받은 모든 성직자들­개신교 뿐만 아니라 가톨릭 성직자들도 포함한­에게서 가장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성직자들의 경우, 이것은 사제직과 전통적인 영성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 영성은 칼빈의 독특한 영성보다는 대중 문화에 더 접근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칼빈의 제네바와는 달리, 이러한 류의 주체성은 사회를 형성하지 못했다. 아마도 이는 개혁자의 종교라기보다는 순례자의 종교(a religion of pilgrims)였다. 가톨릭 사회는 다음과 같은 최소한의 합의에 의존할 수 있었다:모든 주체자들은 그들이 주체이기는 하나, 그것이 그들 자신의 선택 덕택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하여야 한다. 가톨릭 교인들은 그들의 교구 신부들과 교회법에 종속되어 있었고, 그것은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세례 때문이었다. 성숙한 선택에 대해서는, 교회의 통치를 인정하는 것으로도 족하다. 신학자들에 관한 한, 이것은 어리석으며 동시에 충분하다. 평신도들로 말하자면, 더 낫고 더욱 내적인 신앙을 추구하려는 선택은 전적으로 그들의 손에 달려 있다. 권력(power)이란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사용되기로 되어 있었고, 신학자들은 적법한 종교적 힘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 위에 이 힘이 세워진다면, 그렇게 될 도리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명석함만 있으면 그뿐이었다.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이 암시적인 신앙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는 상당히 냉소적으로 무언가를 형성하는 힘은 훨씬 멀리 떨어져 있고, 그래서 종교 법원(the Consistory)에 유리한 것으로 생각할 지 모르나, 칼빈의 생각으로는 그 힘은 훨씬 직접적이며 효과적이었다. 이것은 모든 믿는 이들을 그 손안에 쥐고 계신 그리스도의 능력이었다. 다시 한 번, 이 힘은 교회에 의해서 매개되기는 하나, 위계 질서적으로는 아니다. 고대의 순교자들을 현재 계승하고 있는 주교들로부터도 나오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 사도를 계승하고 있는 교황으로부터도 아니다. 교회의 통전성은 교회의 건강한 부분, 곧 불가피하게 영적인 폭군들 아래에서 살아남은 신실한 남은 자들을 다 합한다고 해서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칼빈은 가톨릭 교회의 실패를 가톨릭 교인들에게 돌린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구조적인 권위, 곧 적그리스도적인 교황권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의지의 해석자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인격을 대표하는" 이들을 통해서만 전달되었다. 제네바의 목사들의 영적인 권위가 그 어느 주교의 권위만큼 위대하고, 칼빈주의적 신앙의 주체성이 그 어느 수도승의 것만큼 금욕적이라 하더라도,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행사된 능력의 기술(the technology of power)은 사제직과 그 사제가 행하는 종교적 행위, 곧 성례전의 기술이 아니고, 주체적인 경험은 또한 신비적인 것이 아니다. 권위는 직무(office)나 인격(person)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수행하도록 기름 부음 받은 바로 그 일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 목사가 (그 일을 행함에) 효과적이라는 것은 그가 교육을 통해 획득한 해석적 기술(the interpretive skills), 그로 하여금 성서 안에 나타난 겸손의 필연성과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 "약속들"­교황의 교서에 찍힌 인장에 의해 눈에 보이도록 증명되지도 않고, 교회의 사법적인 권력에서 세워진 것도 아닌, 주신 이(the Giver)에게로 되돌려지는 경건성에서 확증되는 약속들­을 보도록 가르친 바로 그 기술들 때문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적어도 이상적으로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은 제네바 목사들의 개인적인 힘이나 그 힘에 그들이 다가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설교에 대한 청중들의 이미 이루어진 동의 때문이었다. 바로 이 종교적인 사회에서는 더 많은 것들이 신자 개인에게 의존되어 있었다:그 공동체는 개인이 이를 개념화하는 정도까지만 존재했던 것이다. 개인은 거꾸로 그 환경에 더 커다란 이해 관계를 갖고 있었다:개인은 그가 그 공동체에 속하고 있는 정도까지만 존재하였다.

틀림없이 20세기 후반을 살고 있는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위협적인 개인과 사회의 공생(symbiosis)은, 칼빈이 모든 인간 삶의 목적이라고 이해한, 인간 자아와 하나님의 공생을 다른 말을 바꾸어 쓴 것에 불과하다. 이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이의 배음(overtones)은 노골적으로 전체주의적이다. 그러나 이 판단은 칼빈의 종교적인 야망을 세속적으로 읽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한 세속적 해석들에 대항하여 Ernst Troeltsch는, 우리들에게 종교는 그 자신의 경로를 따르는 법이며, 자기 자신을 위한 의미, 곧 진지하게 취급할 가치가 있는 이유를 지니고 있다고 상기시킨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종교의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의 기능이 자신의 주장과 동등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말들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 경우의 사건들은 분명하다." Troeltsch가 생각하고 있던 사실들, 곧 "칼빈주의적" 나라들에서의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의 성공이라는 사실은 그것들이 우리들에게 분명할 수 있는 것보다 Troeltsch에게 더 분명하였다:그것들은 일반화된 고백적 특성들에 의존하고 있고, 그 중 몇몇을 역사가들은 칼빈주의의 아주 독특한 특징이라고 간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증거는 충분하여, 우리는 개인과 하나님의 공생 관계,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금욕주의는 이의 많은 추종자들에게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이에 Weber는 이의 영향을 경제적인 태도, 곧 자본주의 "정신"에서 추적하였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창조하였고 그곳에서부터 전파시켰던 사회 프로그램은 너무도 종교적으로 전문화된 것이었고, 지나치게 종교적으로 사로잡혔던 것이어서, 어떠한 형태로든 정치 이데올로기­전체주의적이건 민주적이건 간에­로는 적합하게 사용되기 어려웠다. 그의 영향 아래 가장 강력하게 섰던 교회들은 점점 분파적으로 되어 갔고, 16세기 영국에서는 장로교들로 시작하여 20세기 북 아메리카에서는 전천년주의 근본주의자들과 현재 한국에서 한창 꽃피고 있는 칼빈주의적 교단들로 마감하고 있다. 보전과 절충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을 때는 칼빈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분열을 선택해 왔다.

이에 덧붙여, 권위의 기술(the technology of authority)은 이것이 권위의 공적인 성격과 일치에 대한 공공연한 기대 때문에, 정치적인 측면을 지니게 될 때에조차 노골적인 정치적 사용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그 기술은 학습(learning)이다. 이를 통하여 종교 지도자들은 조심스럽게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알려져 있어 감격에 넘쳐 있는 일치를 세우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Mein Kampf나 Muammar Qaddafi의 Kitab alakhdar(the Green Book)보다 훨씬 복잡한, 그리고 16세기 설명에 의하면, 덜 편향적인 자료인 성서 위에 세워진 학습(learning)이다. 권위의 책으로부터 사람들의 고지에 입각한 동의(informed consent)에로의 움직임은 복합적이고 상호작용적이었다. 이것은 목사의 지성에 의해 매개되었지만, 그 역시 목사와 평신도 장로 그룹에 참여하고 있는 개인이었다. 그의 작업은 동료와의 신중한 상호 작용을 포함하였다. 이는 일치된 결정을 향하여 그룹이 점진적으로 움직여 가는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한 환경에서는 수사학적 기술과 일반 교양 교육이 권위에로 지속적으로 다가가기 위한 과정에 참여하는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작업을 잘 수행하도록 도움을 주는 공통 언어를 확신케 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칼빈의 생각에 전체주의적인 것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초월적인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의해 조절되었고, 또한 지금도 조절되고 있다. 만일 기독교인, 유대인, 그리고 모슬렘 교도가 옳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고, 완벽하게 선하고 동시에 의로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칼빈의 주체성과 그 결과들은 하나님의 존재의 진리라는 신학적인 술어 위에서 단언된다.

그러나 칼빈의 생각 역시 칼빈 자신이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분명한 결과­단순히 삶과 구원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자아 됨 모두를 위한, 하나님께 대한 인간 존재의 철저한 의존­로서 간단히 처리하였던 인간론적인 술어에 의존하였다. 그의 계승자들은 결정론이라는 비난을 떨구어 버리기 어려운 난점에 봉착하였으리라. 이는 칼빈이 깨달았었을 지도 모를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사실상 17세기 초반에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의 알미니우스파(Romonstrants)와 몇몇 로디안파가 다루었던 바대로의, 단순한 구원의 "경세"(economy)에 관한 이슈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는 칼빈이 스콜라주의적 허튼 소리라고 간단히 취급해 버린 그런 류의 형이상학적인 가정들의 심장부를 건드린 문제였다. 누가 바로 칼빈이 그렇게 열심히 의존했던 완전한 존재였는가? 어떻게 자연 세계는 이 존재의 실존에 의존해 있는가? 하나님의 완전은 창조 세계에 제한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됨으로 해서 완성된 창조 세계가 전적으로 완전한 것이었는가? 칼빈의 계승자들은 언젠가는 스피노자의 신비적 범재신론에 나타난 신의 설득적인 본성과 Ralph Cudworth 같은 플라톤주의자에 의해 신빙성 없이 주장된 인간 존재의 창조된 의지의 보전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다시 한 번 그 물음들을 무시하고는, 실증적으로 선택하여 교리에 있어서의 전략의 우월성을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안에서의 (인간) 자아 됨의 복종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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