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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9(수)
[21세기] 텍스트와 컨텍스트에 있어서의 다원주의  
­성서적 이스라엘과 역사적 한국 사이의 역동적 유비의 해석학에 대한 반성­

마빈 채니(Sanfrancisco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개신교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종교적 문화적 다원주의의 문제는 종종 획일적으로 해석되는 권위적인 기독교 성서에로 초점이 집중된다. 성서 신학과 해석 분야에 있어서의 최근의 몇몇 경향­그 가운데 "정경 비판"(canonical criticism)이 특별히 두드러진다­들은 그렇게 해석된 이슈에 대해 몇 가지 이해 관계를 제기하고 있는 것 같다. 성서는 그 의미가 아주 명료한 만큼 엄밀하게 권위적이라면, 성서는 다원주의 논의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나의 첫번째 응답은, 권위를 오직 최종적인, "경전적인" 형태에 부여함으로써 본문을 강제적으로 균질화하는 성서적 통일성에 대한 그 어떠한 견해도 경전의 본문 그 자체에 폭력을 가하는 후대의 신학적 구성이라는 것이다. 거꾸로 경전 내용에 있어서 그 내부에 담겨 있는 많은 목소리의 다양성이 허용될 때, 성서는 다원주의 논의에 내재적으로 그리고 확고히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다원주의는 성서에서도 주변부에 속하는 주제가 아니다. 여기서 잠깐 히브리 성서의 "초기 역사"(primary history), 창세기에서 열왕기하에 이르는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기로 하자. 이렇게 넓게 확대된 설화에서, 신의 현현 주제만큼 두드러진 다원주의의 개념화와 기술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드물다. 그 변화는 마구잡이도 우연한 것도 아니다. 주제와 스타일, 그리고 관점에 있어서 커다란 특징과 응집력을 보여주고 있는 4경의 한 본문 그룹에서는, 야훼(Yahweh)가 단순히 설화 속에서 등장 인물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이야기한다. 이들 본문들의 비자의식적 신인동형론(the unselfconscious anthropomorphism)에는 신의 초월성을 보호하려는 그 어떠한 불안이나 관심에 대한 암시가 없다.

4경의 두 번째 본문 그룹은 마찬가지로 특징적이고 응집력이 있는 것인데, "비전," "꿈," "천사를 통한 고지," 혹은 "예언자"를 매개로 하여 인간에게 나타나는 엘로힘(Elohim)의 현현을 그려내고 있다. 첫 번째 본문들과는 뚜렷하게 대조적으로, 이들은 신의 초월성을 보호하려는 강박 관념에 가깝게 접근해 있다.

4경의 세 번째 그룹은 사제적 관점과 어법, 그리고 형식에 맞게 주기화 된 계약 구조에 의해 특징 지워지고 있다. 이 본문들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과 함께 이동하는 "텐트" 혹은 "장막"에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언어는 신의 임재를 확신시키고 동시에 신의 초월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4경에서의 하나님의 현존을 특징 지우는 이 세 가지 방법 그 어느 것과도 달리, 신명기적 역사­신명기에서 열왕기하에 이르는­는 일상적으로 "야훼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한 장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명기적 역사에 나타난 이 언어의 컨텍스트는, 그 "장소"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준다. 성전을 위해 올려진 솔로몬의 헌정 기도는 하나님의 내재와 초월 사이의 긴장에 대한 이같은 개념화를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야훼의 "이름"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의 성전 안에 독특하게 현재하고, 거기서 그에게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신성을 가두어 놓을 수도, 제한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치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까"

여러분들은 아마도 이제까지 신의 현현을 그리고 있는 이 4 가지 서로 다른 방식들이 오경과 전기 예언서에서 자주 발견되는 4 가지 문학적 가닥의 특징­다른 많은 요소 덩어리와 함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특징들은 단순히 문학적인 것만이 아니다. 최근의 학문적 업적은 이들 본문 자체와 이 본문들을 구성한 배후의 컨텍스트들 사이의 관계에 더 날카로운 초점을 집중시켰다. 지면 관계로 이 논의는 간략하게만 다루도록 하자.

첫번째 4경 본문 그룹­여기서 야훼는 아무런 주악이나 해명도 없이 인간에게 그냥 "나타난다"­은 물론 야훼 문서 혹은 "J"라고 불리우는 가닥이다. "J"에 대한 가장 훌륭한 최근의 분석은 아주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윗 왕궁의 작품이며, 부분적으로는 새로 창건된 다윗 계열의 국가의 정통성을 주장하여 조각난 부분들을 하나로 결합시키려는 의도로 기록되었다고 논증하고 있다(한국의 삼국, 백제, 고구려, 신라는 제각각 이와 유사한 장르와 기능을 가진 작업을 수행했다고 지나가면서 들은 바 있다. 물론 "J"와 마찬가지로 후대의 재구성 작업에서의 삽입에 의해서 보존되었지만 말이다).

이미 언급된 4경의 두 번째 가닥은, 좋은 의도에서, 엘로힘의 현존의 매개에 대하여 번민하고 있다. 작가는, 직접적으로 집안에서 길들여진 존재로서의 하나님과, 청중들에게 신의 현존의 증거가 결코 압도적인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때조차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고 싶었던 다윗의 후계자들에 의해, 너무 친숙해진 하나님의 위험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최근까지 강하게 유지되고 있는 바는, 이 엘로힘적 혹 "E" 본문들은 "J"의 논쟁적인 재구성을 구성하고 있으며, 여로보암 1세의 분리주의적 북쪽 왕궁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북왕국의 다윗적 통치로부터의 철수와 북쪽에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려는 여로보암의 시도 이 양자를 정당화하면서, "J"의 엘로힘적인 재구성은 다윗 지지자로 하여금 "자승자박이 되도록" 계산되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구성의 개연적인 연대기적인 순서 속에서 움직인다면, 다음에 오는 것은 바로 신명기 역사이다. 현재 학자들 사이에서 점증하는 합의는 이 작업의 최초의 "편집"을 요시야 왕궁의 산물로 보고 있다. 또한 이는 그 자체로 지역적이고 당파적인 긴장들을 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긴장은 변화된 역사적 컨텍스트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2세기 동안 서로 독립하여 존속한 후, 북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초강국 앗시리아에게 함락 당한다. 또 다른 한 세기 동안, 북 이스라엘의 영토는 여러 개의 앗시리아 지방으로 분할되고, 이 지역을 다스릴 목적으로 파견된 이방인에 의해 통치되었다. 유대 또한 그 기간동안에 앗시리아의 궤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나, 속국으로 남아 여전히 다윗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요시야는 어릴 때 왕위에 올랐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가 친 앗시리아파와 반앗시리아파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 가운데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요시야가 성년의 나이에 다다르게 되자, 이와 동시에 앗시리아의 힘도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요시야는 국가의 독립을 꾀하는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신명기 왕궁 역사가(들)은 요시야 "개혁"의 성공에 대한 많은 중요한 이슈들을 제기하였다. 이전의 북 왕국을 지배했었고, 유대 자체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외국의 영향들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북쪽에서 무려 3세기 동안이나 거부되었고, 유대에서조차 1세기에 걸친 앗시리아의 속국 시절까지 심하게 지워진 다윗 왕조의 중심적 권위는 반드시 강화되고 다시 세워져야 한다. 예배자들과 조세 수입들, 충성 의무, 그리고 사법권 등을 예루살렘의 다윗 왕조의 예배 처소로부터 분리시켰던 지방과 각 지역의 예배 처소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한 지방의 예배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와 북 이스라엘 사이의 국경 바로 북쪽에 위치한 벧엘이었다. 여로보암 1세에 의해, 그의 분리주의적 국가를 합법화시킬 예배의 주요 장소로 선택된 이래로, 벧엘은 요시야의 왕궁 역사가(들)에 의해 우상숭배적이고 배교적인 것으로, 백성, 국가, 그리고 예배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의 통일성을 가르는 모든 것의 바로 그 요약으로 해석되었다(왕상 11-13장). 신명기적 역사가 무자비하게 비난하는 그러한 다원주의에 대항하여, 예루살렘은 그의 왕조적 성전과 함께 야훼의 합법적인 예배를 위한 유일한 장소로 제공된다. 다음의 구절, "야훼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한 장소"가 신명기적 역사를 일종의 북소리처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논쟁적인 컨텍스트 안에서이다.

위에서 기술된 네 번째 문학 가닥은 4경의 최종적이고 사제적인 재구성을 통하여 현재의 형태에 접근하려는 것이다. 여기 "P"에서 구성 내용에 대한 지식은 신의 현존을 표현하기 위해 발탁된 명명법을 설명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이 사제적인 층이 분명히 훨씬 광범위한 고대의 자료들을 포함하는 반면, 비판적인 학자들의 다수는 이 층의 최초의, 조직 구성 단계를 바빌론으로 유배당한 사제들 사이로 위치시킨다. 성직자의 세계관이 이 작품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유배된 성직자들의 개인적이고 동시에 직업적인 정체성은 예루살렘 성전과 그 예배에서 그들의 주된 뿌리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 성전은 다윗 왕조가 바빌로니아에게 패배함으로써 파괴되었다. 유배로 인해 이전에 그들의 우주의 중심이었던 것을 폐허로 남겨 두고 그곳을 떠났던 유배된 성직자들은, 공간적으로 이에 결합되지 않는, 그러나 여전히 성전 제도에 근거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러한 개념화를 "장막" 혹은 텐트와 여기서의 예배에 대한 왕정 이전, 성전 이전 전통에서 찾았다. 여기서 희생 제단 위로 올라가는 자욱한 연기 구름은 하나님의 현존과 무제약성의 상징으로 기능하였다. 이 하나님의 "영광"은, 한 때 예루살렘의 성전에 독특한 방식으로 현존하셨으나, 이제는 광야를 유랑하던 때처럼, 이동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심지어는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도, 이것은 "텐트" 혹은 "장막"을 이스라엘과 그의 사제직을 연결시킬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북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많은 유대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예루살렘의 유배당한 엘리트와는 공간적이고 개념적으로 분리된 기관들(institutions)에 의해 매개되는 하나님의 현존을 추구하였다. 후에 페르시아의 정책이 포로 생활로부터 고향 땅으로의 귀향을 허락하고 심지어 성전 재건축을 격려하였을 때, 그같은 경험적이고 개념적인 차이는 또 다른 형태의 당파적 갈등 속에서 현저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현존을 개념화함에 있어 간단하게 살펴본 초기 역사의 다원주의는 당파적 긴장과 갈등이 매 각각의 경우에 연루되어 있는, 특정 컨텍스트들의 복합적인 다양성 가운데에서도 공통의 상수를 산출해 내었다. 구약성서 본문에 나타난 서로 다른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재현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중립적이든지 혹은 진공 속에서 규정된 것은 하나도 없다. 각각은 당파적 반대자들에게 상대적으로 논쟁적이고, 그 반대자들의 본성과 정체는 어느 정도의 개연성을 지니고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성서적 이스라엘과 역사적 한국 사이의 "역동적 유비"의 해석학을 위한 정지 작업을 하고자 한다. 이스라엘과 한국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나고도 명확한 구체적인 차이들 아래에는 그 수에 있어서, 깊이, 그리고 중요성에 있어서 보편적인 유사성이 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히브리 성서들에게 오랫동안 가깝게 다가온 만큼, 이같은 비교를 직관적으로 느껴 왔다. 비교 사회 과학의 범주들을 사용하여, 이제부터 나는 그 직관적인 통찰 반복 작업을 좀더 분석적으로 수행해 보려 한다. 이 일을 함에 있어서 나는 다소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나의 지식이란 그야말로 갓 깃을 달고 날아 보려고 하는 어린 새처럼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벗들이 보내 준 끊임없는 격려는 나로 하여금 이 일을 과감하게 시도해 보게 하였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내가 여기서 받게 될 어떠한 비판이나 반박이 나에게는 계몽적이고 자비가 넘치는 것이 될 것을 확신한다.

성서의 팔레스타인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경작할 수 있는 땅은 상대적으로 작은 지역 단위로 나타난다. 구획 부분은 다양한 지형적인 방해물들로 서로 분리되어 있고, 기후, 토양, 그리고 생존 수단의 차이로 인해 특징 지워진다. 팔레스타인과 한국 양자의 경우, 이러한 상황은 가장 오래되었고 더 커다란 접경한 이웃과는 대조를 이룬다­팔레스타인의 경우는 이집트가 되고, 한국의 경우는 중국이다. 이집트와 중국에서의 주요한 하천의 시스템은 멀리 확장되어 있는 내륙 지역을 위한 통신과 수송을 촉진시켰다. 반면 동시에 주요 하천의 계곡에 농업 생산의 잠재성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정치적인 경제의 중심 집중적인 통제를 위한 강력한 자극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집트와 중국은 따라서 사회 역사학자들에게 "1차 국가 형성"(primary state formation)의 주요한 실례를 제시하고 있다.

다른 한편, 이스라엘과 한국은 "종속 국가 형성"(secondary state formation)의 교과서적인 예증을 제공하고 있다. 양국 정치사의 초반 부분은 더 크고 오래된 이웃 국가들의 영향 아래서 도시 국가(city-states)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지방의 권력층은 훨씬 후에 출현하였고, 더 넓은 지역의 통제를 위하여 서로 경쟁하였다. 국가 통일­이스라엘의 다윗 왕국과 한국에서는 소위 신라의 통일­은 군사적이고 외교적인 수단을 통한 한 지역의 다른 지역 정복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로 나타난 양국의 국가-체제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중앙의 통제가 약해질 때마다, 그 지역에서 탄생한 지방의 정체성과 충성이 국가의 지배권을 위한 까다로운 후보 패거리들을 산출하였다.

더욱이 더 광범위한 지정학적 위상이 이스라엘과 한국 양국의, 당파로 갈린 엘리트들을 지지하는 이러한 지형적인 성향을 강화시켰다. 성서의 팔레스타인은 그 자신보다는 훨씬 인구가 많고 강력한 사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정치 경제에 있어서 이러한 초강대국들의 주요 역할은 이스라엘과 유대의 국가 지도자들의 패배와 유배와 함께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이 강대국들이 이스라엘과 유대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기 오래 전부터, 그들은 강대국들의 이해가 만나고 충돌하는 곳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주변의 작은 이웃들의 일에 끊임없이 간섭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다른 외국의 외교관들은 이스라엘과 유대의 엘리트들의 다양한 파당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분명하게도 후자는 강력한 국제 관계를 통하여 자국에서의 그들의 영향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그들의 외국 동맹국들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자율을 유지하려 하였다. 포괄적인 역동성이 확장된 기간동안에는 일정한 것만큼, 특정한 협력들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였다.

이와 유사하게, 농업 중심의 한국 엘리트들의 파당성은 "고래들 사이의 새우"로 대변되는, 한국의 동북 아시아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더욱 악화되었다. 한국은 지역의 초강대국들­중국과 일본, 그리고 후에는 러시아, 서유럽 국가들, 그리고 미국­이 서로 충돌하게 되는 "영역"을 점유하고 있었다. 기존의 한국 엘리트 파당 하나와 외국 세력 가운데 하나 사이의 특정한 연결은 언제나 단명하는 것으로 증명되었지만, 그같은 동맹 관계의 보편적인 형태는 한국 역사에서 하나의 권력 상수(a power constant)를 기술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한국 이 양국의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당파주의의 역학과 거의 분리가 불가능하였다. 구약성서 초기 역사의 네 주요 부분은 긴장과 갈등의 견지에서 이미 간략하게나마 설명되었다. 역사적 한국은 동일한 방법론적인 렌즈를 통해서 보여질 때 일련의 평행 사례들을 제공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한국의 "삼국"이 제각각 자기 나름의 국가 역사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된 바 있다. 대부분은 손실되었으나, 나머지는 김부식의 {삼국사기}(History of the Three Kingdoms)에 모여 보존되어 있다. 장르와 목적에 있어, 이 역사들은 성서의 "J," "E," "P," 그리고 신명기 역사와 함께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이 국가들의 역사 편찬은 삼국의 왕들의, 그들의 중앙 집권적 귀족 국가들의 장엄성을 그 시대와 후대에 표출하려는 공통된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각각의 경우, 이 합법화시키는 기능은 지역적인 그리고 당파적인 경쟁자들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한 종교적 구성 성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일종의 혁신 같은 것으로 지배자에 의해 수행되었다.

삼국에서의 불교 전래는 모두 왕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왕권의 권위에 집중된 새로운 통치 구조를 든든히 하는 일에 적합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부처의 도를 준수하는 일에 헌신적인 모든 신자들의 단일체 개념은 백성 전체가 오직 하나의 왕을 섬긴다는 개념과 결합되어 초기 한국의 고대 국가 시대에 통일성과 단결의 힘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음에 틀림없다.

다윗, 여로보암 1세, 그리고 요시야는 모두 이러한 역동적인 근원에 대한 자신들의 상대편을 이해하였다.

불교는 "통일 신라의 지배적인 사고 체계"로 남아 있었다. 그 기간동안의 다양한 불교 종파들 가운데, 화엄(Hwaom)은 "신라가 가장 왕성하게 부흥하였을 때, 귀족 사회로부터 가장 신심 깊은 지지를 받았다." 불교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조화의 교리­곧 일(一)은 다(多)를 포함하고 다(多)는 곧 일(一)이다­를 가르쳤"기에 이는 "권위주의적 군주의 지배하에 있는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의 국가와 잘 들어맞았다." 그러나 통일 신라의 지배 계층은 점점 퇴폐적이 되어 갔고, 자기 기만적이고, 다수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정책들이 부과한 고난에 대해 무관심해져 갔다. 이 당시 주로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정토 불교(Pure Land Buddhism)가 유행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이의 수행이 수월했던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이것이 권위주의적 통치 아래에 있는 신라 사회의 엄청난 불의가 가져온 매일의 고난으로 가득 찬 삶의 절망감에서 탈출할 희망을 제공하였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지방 귀족 시대"(The Age of Powerful Gentry Families)에 통일 신라의 쇠퇴가 중앙집권적 권력의 붕괴를 이끌어 내자, 이번에는 선(禪)불교(Zen Buddhism)가 유행하게 되었다. "선은… 기본적으로 지방 귀족의 종교로 발전하였고 또 그렇게 이해할 수 있게 발전되었다. 왜냐하면, 선에 나타난 개인주의적 요소는 수도에 집중된 권력 구조부터 독립을 주장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인 근거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권력의 분산은 그 다음에 출현한 고려 사회 질서에서 그 나름의 반응을 낳았다. 새롭게 규정된 귀족정치적인 질서는 응집력의 많은 부분을 그 자녀들이 사립 유교 서당에 다니면서 자연스레 이루어진 지속적인 인간 관계에서 획득하였다. 이 기간에 일어난 유교의 점증하는 수용은 "인간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합리적 접근"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만일 합리적인, 유교적 사고 형태가 고려 지배층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불교는 여전히 그들의 감정과 돈주머니 양쪽의 충성을 잡고 있었다.

고려 사회에서 불교는 일상의 삶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었고, 사회의 문화적인 업적들을 형성한 가장 주요한 창조력이었다. 특별히 개인과 국가의 안녕은 경건한 행위가 축적되어 나타나는 효과에 의해 확립된다는 믿음은 고려 사회가 그토록 많은 절과 사찰을 세웠던 것과 다양한 불교 행사를 열심히 준수한 것을 배후에서 자극한 숨은 추진력이었다.

왕실과 귀족 정치 이 양자는 불교 사찰에 많은 토지를 기부했으며, "이렇게 기부된 토지는 세금 감면의 혜택을 받았기에, 불교 시설은 경제적으로 더욱 강성해졌다."

그러나 고려의 귀족 지배자들은 군신들에게는 훨씬 적은 상급을 주었던 관계로 결국은 군사 반란과 "강한 군사력을 지닌 이에게서 다른 이에게로 끊임없이 권력이 이양되는" 시기를 낳게 되었다. 내적인 혼란과 외부의 침입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군사 지배의 붕괴로 인해 남겨진 진공 상태는 부분적으로 신유교의 지식 계급의 발흥으로 채워졌다. "신 유교의 확산은 지식 관료 계급(the literati-bureaucrats)에 의해 한층 더 강화된 불교의 거부"를 낳았다. 이들은 "불교 시설들의 오용, 곧 부와 권력 장악의 욕심과 승려들의 부도덕한 행위를 공격하였다." 이성계가 권력을 잡고 조선 왕조를 세우자, 한국에서의 신 유교의 상승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었고, 기존의 불교는 고립된 산악 지대의 은신처로 제한되었다. 정치적인 힘과 화려한 의상들을 박탈당한 채, 불교는 많은 한국인들의 개인적인 영성 안에서만 살아가게 되었고, 조선 왕조의 몇몇 왕들은 불교의 제도적 형태가 가정의 미풍을 파괴하고 국가의 파멸을 초래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추방하였다.

조선 왕조가 이룩해 냈던 많은 영광스러운 업적들­이는 자기 시대를 앞서간 뛰어난 통치자였던 세종대왕의 통치에 잘 요약되어 있다­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는 상대적으로 연약한 중앙 정부와 당파주의, 그리고 이의 탐욕적인 성향으로 유명한 신유교적인 양반 귀족정치로 특징 지워지는 국가를 창조하였다. 이 엘리트 양반 계급은 특출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국고에 대한 중대한 공헌은 회피해 가면서, 이를 지원하였던 다수 농민들을 착취하는 일에는 무자비하였다.

이들 양반 지식 계층의 신 유교주의는 그 이전에 한국에 유교가 침투하면서 보여주었던 합리적인 정치의 실천적인 지식(the practical lore of rational statecraft)이 아니었다. 이것은 일종의 철학 체계로서 형이상학적인 용어로 인간과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다른 가르침들을 거부하는 일에는 재빠른, 용납을 참지 못하는 교리"인 이 신유교는 이미 이스라엘과 한국의 엘리트들을 특징 지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당파주의를 강화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특정 당파들의 윤곽이 변하고 있고, 기존의 당파의 정치적인 운이 일어났다가는 이그러지는 동안, 내부 항쟁의 역학은 보편적인 상수였다. 일어나지 않았을 때보다 더욱 심하게, 갈등은 이데올로기적인 근거 위에서 수행되거나 정당화되었다. 서로 달리 해석되었지만, 동일한 신 유교 경전에의 호소는 논쟁에 참여한 모든 파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이러한 역동성은 개신교 기독교가 서구의 정치, 경제, 과학 기술, 그리고 군사적 힘의 유입의 결과로 한국에 도입되었을 때인 19세기의 후반부에 유행하였다. 국가로서의 이씨 조선은 이러한 세력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국고와 군사력­사실상 통치 능력­은 수 세대에 걸친 (관리들의) 부정과 타락, 그리고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던 상대방에 대한) 부정으로 인해 고갈되어 있었다. 서구 열강과 일본의 과학 기술과 군사력의 우월성에 대한 조선의 상대적 취약성이 더욱 분명해지자, 이데올로기적으로 무장된 한국의 지배층 사이의 당파적 내부 항쟁은 외세의 침입 세력들 가운데 하나와의 오래가지 못할 동맹에 의해 재촉되어 더욱 강화되었고, 각 당파는 번갈아 자신의 세력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결정적인 실예를 증명하려 함에 있어, 루우즈벨트 대통령은 러시아가 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사실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미국이 한국의 중립성과 국가적 보전을 수호하기로 맺은 조약을 무효화하였다.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주장을 일본이 인정해 주는 대가로, 루우즈벨트는 적절하게 한국을 큰 접시에 담아 일본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공식적인 합병이 몇 년 후에 뒤따랐고, 수십 년에 걸친 잔인한 식민지 통지가 예고되었다.

개신교의 전래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끝 무렵까지 지속되었던 일본의 식민지 통지가 끝날 때까지의 한국에서의 개신교 기독교의 역사는 복합적인 것이어서, 그 기록은 아직까지도 완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현재의 논의에 관련된 그 어떠한 일반화도 위험스러울 수 있다.

조선 왕조 말기 무렵의 수십 년 동안, 한국의 지배 계급들이 보여준 연약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타락은 기가 꺾인 많은 한국의 하층민들로 하여금 오랜 세월 한국 문화를 하나로 묶어 주었던 상징 체계 역할을 해 온 것에 대한 신앙을 상실하게 하였다. 한국의 토착 종교인 천도교의 발흥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었다. 구질서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일에서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느낀 다른 하층민들은 개신교 기독교의 초기 개종자의 다수를 구성하였다. 여성들은 이 그룹에서 불균형적으로 대표되었고, 그들이 져야 하는 부담 또한 불공평하게 책정되어 있었다.

점점 호전적이 되어 가는 한국에서의 일본의 존재는 한국 개신교의 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일본 총독부가 한국의 국가적 정체성과 저항을 결합시킬 수 있는 대부분의 기관들을 금지 혹은 제한하려 하는 동안, 서구 열강으로부터, 한창 성장하는 교회를 탄압하지 말라는 외교적인 압력이 들어옴을 느꼈다. 그 결과, 교회는 상대적으로 그다지 심하게 저항하지 않은 몇 개의 기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교회는 상당수의 애국 지사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들은 서양의 종교와 민주주의에서 한국의 병에 대한 해답을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개신교는 서로 다른 몇 가지 경향을 발전시켰는데, 그들 가운데 몇몇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었다. "이 세상적"(this-worldly) 행동가들에게는, 기독교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의 종교였다. 출애굽기는 일본 총독부가 특별히 거칠어진 때에 한국어로 읽을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의 한국 교회에서는 매 설교 때마다 바로로부터 탈출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이야기­이에 함축된 의미가 너무도 명확한­를 다시금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일본 정부는 그같은 함축성을 전달하는 종교를 승인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서양 개신교 선교사들은 애매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많은 이들이 한국 기독교인들의 곤경에 깊은 공감을 나누고, 어떤 이들은 한국 친구들을 옹호하면서 영웅적 행위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지만, 그들이 지니고 있는 개인적 신앙은 많은 이들에게, 서양 교회와 일본 관리들에게 편지를 보내 기독교를 단순히 개인의 구원에 관한 문제에만 한정시키도록 압력을 가하는, 그릇된 자세를 남겼다. 이러한 영향들의 결합 아래에서, 많은 한국 개신교도들은 "저 세상적인"(other-worldly), 방어적이고 절대주의적인 신앙을 받아들였다. 일본의 통치의 잔인성은 종교적인 관용이나 대화를 위한 양육의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신유교의 유산 역시 이 혼합에서 그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 이유는 개신교가 한국에 전래되었을 때, 그 구조와 기능들의 많은 부분이 오랫동안 한국의 유교에 남아 있던, 이에 상응하는 경향들에 의해 강하게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신유교와 마찬가지로, 서구의 개신교는 여러 파로 나뉘어졌는데, 그 당파의 많은 부분이 그들의 주장에 있어서 절대주의자가 되었고, 상대편 견해를 용납하지 않았다. 마치 동일한 권위 있는 본문을 서로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며 경쟁하던 신유교 당파들처럼, 서로 다른 개신교 교단들도 동일한 권위적인 성서를 다르게 해석하여 각기 자신들의 신학과 교회론을 합법화하였다. 역사적으로 선교를 목적으로 한 서양 개신교 교단의 한반도의 지리적 분할은 이러한 경향을 악화시켰다­물론 최초의 분할은 협력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많은 한국 개신교 교인들과 현장에 있던 서구 선교사들은 하나의 연합 교회를 선호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서양의 교단 내의 질투와 반대는 그러한 연합은 태어나기 직전에 죽을 것임을 보증하였다.

이러한 한국 종교사의 요약은 분명히 아무런 설명이 없이 많은 것을 남겨 놓았다. 몇몇 개념적인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지나친 일반화가 훨씬 더 복잡한 역사적인 실재들을 왜곡시킬 위험이 다분히 있다. 그리고 1945년 이후의 한국 교회사는 여태껏 내가 여기서 스케치하였던 그 어느 것보다도 흥미롭고 중요한 많은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선택의 기준은 체계적인, 사회-역사적 컨텍스트에서 한국의 종교 다원주의의 이해를 돕고, 성서의 이스라엘의 종교 다원주의와의 포괄적인 비교를 허용하는 역동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양쪽을 비교하면서, 나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라는 "머리"를 제도적 컨텍스트(the institutional context)라는 "몸"과 연결시키려 노력하였다.

이 비교 분석은 내가 "역동적 유비"의 해석학(a hermeneutic of "dynamic analogy")이라고 부르는 것을 위한 기초가 된다. 용어 자체는 James A. Sanders에게서 유래된 것이지만, 나는 이를 Sanders보다는 더 풍부한 사회 과학적 전략들과 범주들의 실행을 함축하는 것으로 사용하며, 비교되는 컨텍스트들의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차원에 더 커다란 관심을 갖는다. 이 차원에 대한 해석학적 호소는 다른 것들, 성서 해석학에 있어서의 더 친숙한 범주들을 대치하기 위한 의도로가 아니라, 과거의 과잉과 불균형을 교정하려는 의도이다.

과거에는 해석학의 다리 위를 통과하는 대부분의 차량은 "보편적"(universal)이라고 이름 붙은 차선으로 여행하였다. "보편적인" 진리라고 소문난 것들은 성서에서 걸러지거나 뜻이 파악되고, 그 다음에는 특정한 시대의 컨텍스트에로 "적용되었다." 최소한 서양에서는 개인이 의미의 근원적 단위로 이해되고 있으며, 선호된 범주들은 관념론 철학이거나 심리학 형태의 범주였다. 내가 위에서 스케치해 온 한국 종교사의 흐름 가운데 어떤 것들은, 이와 동일한 개인주의적이고 관념론적 경향들은 마찬가지로 한국 기독교인들 가운데에서도 깊은 반향이 있음을 제안하고 있다. 이러한 "보편적인" 차원에서 우선적으로 성서 본문에 담겨 있는 의미를 찾으려는 모든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때늦은 지혜의 도움으로 검토해 본 결과, 그러한 "보편적인 것들"을 명확히 해보려는 대부분의 시도들은 그 스스로가 단지 지나치게 시간과 문화에 치우쳐 있음(time- and culture-bound)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성서 본문들의 "의미"의 많은 부분들은 분명하게 혹은 필연적으로 "무시간적인" 혹은 "보편적인" 형태로 본문들 그 자체에 의해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의미의 많은 부분 또한 역사적 자기 중심주의(historical particularism)­성서학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통용되는 또 다른 관점­의 초점인 독자적인 특성들(the sui generis specifics) 속에 갇히지 않는다. (주장된) 보편주의와 (골동품 연구 같은) 배타주의의 해석학적 양극단 사이에 광범위한, 그러나 대체로 활용되지 않는 "포괄적인 중간"이 놓여 있다.

"포괄적 중간"이란 광범위한 계층의 사람들의 직접적인 문화 경험의 일부분에 속하는 (그러나 하나의 시간, 공간, 사건, 혹은 문화의 특성에 고유한 것은 아닌) 의미의 범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 인간의 직접적인 문화 경험에서는 보편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왕실을 종교적으로 변호하는 형태로 기록된 국가 역사는 농경 국가­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농경 국가인 이스라엘과 한국을 포함하여­에 포괄적으로 공통적인 것이나, 종교적인 표현의 형태로서의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한 본문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의 많은 부분은 사용된 장르와 그 장르가 전제하고 있는 포괄적인 컨텍스트의 전이해에 대하여는 상대적이다.

이미 다루어진 자료들을 활용 혹은 확대하는 예들을 사용하여 간단하게 예증해 보자. 모든 예증들은 분명히 시험적이고 부분적이다. 왜냐하면 나는 한국 상황을 말하는 일에 관심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오직 한국 기독교인들만이 자신들의 상황 안에서 자신들의 상황을 위해 성서가 의미하는 바를 결정할 수 있다. 나의 의도는 오직 다른 사람만이 수행할 권리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해석 작업을 나 자신에게 넘기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작업에 유용할 지도 모를 해석학적 도구들에 관심을 돌리게 하려는 것뿐이다.

내가 스케치했던 구약 성서 전통의 첫 번째 흐름은 "야훼 기자"의 전통이었다. 포괄적인 용어로 하자면, 이 흐름은 새롭게 형성된 군주 국가-체제의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최근의 성공들을 기뻐하고 다윗의 경쟁자와 비난자를 모욕하고 있다. 이의 중심 사상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과 세계사에 선조들이 뽑힌 "축복"이다.

우리가 지적하였듯이, 한국의 역사에 나타난 몇몇 농경 군주 국가들은 장르와 목적에 있어서 유사한 문서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오늘 한국 교회에 의해 야훼 기자의 본문 해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한국은 이제 더 이상 농경 군주국이 아니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역동적 유비들이 존재한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 기간의 한국의 산업 발전은 한국인의 이익이 아닌, 일본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심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한국은 2차 세계 대전의 폐허로부터 예전과 다름없는 농경 국가로서 일어났다. 무지, 겸손, 무시, 그리고 전쟁 후 미국 관리들의 편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유발된 조작은 국토의 분할과 참담한 내전,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침체와 타락을 도왔고 선동하였다.

이같은 배경에 대항하여, 1960년대부터 시작하여 한국은 놀랄 만한 국가적 부흥을 경험하였다. 이 시기의 초반에는 자신의 농경적인 뿌리에 매우 근접해 있었지만, 한국은 급속도로 성장하여 곧 국가적인 재탄생에 이르는 것을 수행할 수 있는 산업 세력이 되었다. 다윗의 전례 없는 성공으로 가득 차, 원기왕성한 야훼 본문들은 현대 한국 교회 안에서 반향을 발견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일까? "축복"의 신학(a theology of "blessing")은 과거의 다윗 왕궁의 역사가에게보다는 오늘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더욱 분명한 것 같아 보인다. 그렇게 오랜 세대에 걸쳐 겪어 온 모든 고난을 고려해 본다면,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는 기뻐 날뛸 필요도 권리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야훼 기자에게는 축복의 모티브 이상이 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성서의 이 부분의 목표와 최고조는 출애굽 사건, 곧 국가의 탄생으로 비추어진,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국가 노예로부터 해방시키시는 야훼의 사건이다. 일본의 식민 통치 기간을 견디고 살아남은 한국인이라면, 그 누구도 "역동적 유비"를 그곳에서 파악하기 위해 한 미국인 교수로부터 나오는 이야기들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야훼 기자의 출애굽 사건의 보도는 억압이라는 악을 외국의 폭도들에게 투사하였다. 여기서 다윗과 그의 계승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내부적 억압은 아주 편안하게도 시야에서 사라져 있다. 그러나 정경에 나타난 다른 목소리들은 이러한 억압들을 추적하여, 공개적으로 그것들을 다윗가의 통치로부터 북이스라엘의 분리의 정당한 원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여태껏 보아 왔듯이, 성서는 엘로힘 기자의 논쟁적인 재구성에서 뼈대가 세워진, 야훼 기자의 승리주의적인 설화를 제시하고 있다. 이 엘로힘 기자의 재구성은 다윗 가문이 그들의 억압적인 게임에서 바로를 패퇴시켰다고 노골적으로 암시한다. 더욱이 야훼 문서에 나타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하신 야훼의 무조건적인 약속과는 대조적으로, 엘로힘 기자의 모세적 계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여러 가지의 윤리적 규정에 근거하여 조건적으로 만들고 있다.

한국의 동료들에게 정경 내에 있는 이 논쟁적인 대화가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감히 말하려 하지 않은 채, 나는 현대 한국에서의 유성과 같은 급속한 발흥 안에 나타난 다음의 실재들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의 전 지역과 모든 국민 계층은 이러한 경제적인 "기적"에 동등하게 참여해 온 것이 아니다. 소수를 위한 풍요는 다수의 노동자들과, 숫자에 비해서는 불균형적으로 대표된 젊은 여성들에게는 노예와 다름없는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다. 한국의 개신교의 초기 개종자들 대부분이 하층 계급에서 나왔던 반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새롭게 풍요를 만끽하는 도회지 가운데에서 지나치게 대표되고 있다. 역동적 유비의 해석학에 따르면, 이러한 실재들은 성서에 나타난 야훼 기자적, 엘로힘 기자적 본문의 한국의 기독교적 해석을 어떻게 특징 지울 것인가?

신명기적 역사 또한 한국인의 경험에 많은 역동적 유비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 안에서 우리는 작지만, 긍지에 가득 차 있는, 오랜 세월의 외국의 지배를 끝내고 다시 독립한, 한 국가의 음성을 듣는다. 신명기적 반응의 일부분은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단일체로서의 유대의 정체성을 훼손해 온 이방 세력들에 대항하는 지속된, 정의가 넘치는 분노를 감싸고 있다. 한국의 역사를 고려해 보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본문의 이러한 차원에 깊은 감정 이입의 느낌을 거의 피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미국에서 내가 학생들에게 말할 때에, 역동적 유비의 해석학은, 우리 미국인들이 신명기 역사가의 분노를 "우리 앗시리아적인 모자를 쓰고" 읽고 있다고 말한다. 힘의 역동성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우리는 유대라기보다는 앗시리아에 상응한다. 다른 조그마한 국가들을 볼모나 대용물로 보고 사용해 온 이들이 바로 우리이다. 이 단계에서 신명기 역사는 미국과 연관된 한국의 역사에 대한 신랄한 주석을 제공한다.

신명기 역사의 또 다른 차원은 한국과 미국의 기독교인들 사이의 관계에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미쳐 왔다. 우리가 보았듯이, 요시야의 왕궁 역사가들은 외국인들에만 대항하여 논쟁한 것이 아니라, 왕실의 집중화라는 그의 계획에 참여하지 않는 모든 지방의 지도자들에 대항하여 논쟁하였다.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 왕조의 예배실 이외의 예배 처소들은 비합법적이고 그들의 예배는 배교적이며 우상숭배적인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신명기적 역사에서만 아니라, 다수에 달하는 예언서들의 신명기적 편집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개신교 기독교를 한국으로 가져온 역사적인 역동성 속에서, 이 신명기적 논쟁은 복음화의 과정에서 한국 문화를 광범위하게 부정하기 위한 근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기의 대부분의 서양 선교사들의 머리 속에는 서양의 문화와 정치 제도들, 산업 기술, 자본주의적 경제, "진보," 그리고 기독교는 하나의, 분리가 불가능한 한 묶음이었다. 실제로 그것들은 종종 동일한 인격들 안에서 구체화되었다. 그같은 승리주의적이고 자기 비판을 결여한 관점으로부터 아주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리고 그 상황을 위해 틀이 짜여졌고, 정경 내의 다른 목소리들에 의해 반격 당하는 신명기적 논쟁은 "이교도적"이고 "이방적인," 다시 말해서 서구적이 아닌 종교적 문화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제약적인 저주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국 교회들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토착화"라는 문제를 유산을 받았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 번, 신명기 역사가의 견해들은 성서 자체 내에서도 도전 받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엘로힘적 본문들은 신명기적 본문들에서 정죄된 바로 그 장소들과 예배들의 합법성을 가정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시조가 되는 조상에 의해 그들이 창건되었다는 합법화하는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 신명기 역사가에 의해 분명한 우상으로 비난받은, 단과 벧엘의 "황금 송아지"는 대부분의 종교 역사가들에 의해 주춧대­이 위에서 야훼가 눈에 보이지 않는 왕좌에 즉위된 것으로 인식된다­로서 간주되고 있다. 이 경우, 그것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법궤­도상학적으로 법궤는 평행한 형태로 기능한다­가 그랬던 것 이상으로 더 이상 이방의 우상이 아니다. 그 논쟁은 정치적인 것이다. 다윗 가문이 법궤를 소유하였다. 여로보암 1세는 자신의 왕궁 성지에서의 하나님의 현존을 표현하기 위하여 더 오래된 족장의 도상학에로 되돌아갔다. 여기서 역동적 유비의 해석학은 "이방의 성소"에 대항하여, 신명기적 논쟁은 개신교인들에 의한 한국의 토착 종교 문화의 서구적 정죄가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국부적이었고 논쟁적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한 관찰은 제기된 이슈 가운데 그 어느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하지만, 새롭고 전혀 다른 성서의 빛에서 그 이슈들에 집중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컨텍스트에서 읽혀지는 4경의 제사장적 본문들 또한 한국인의 경험에 몇 가지 제안적인 유비들을 제공한다. 제사장적 문서의 작가들은 현대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변형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살았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의 제도에 확고히 뿌리 박힌, 그러나 자신들의 직접적인 선조들에게조차 상상이 불가능했을 법한 컨텍스트적인 역동성을 전달함에 있어 생명력 넘치는 신앙의 표현들을 분명하게 하고자 투쟁하였다. 그같은 환경 아래에서 관점에 있어서의 수 세대에 걸친 변화가 표시되어 있었고, 이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서로 다른 무리 사이의 이러한 긴장들을 약화시킨 것은 유대에 남아 있었거나 되돌아온 유대인들의 경험과, 유배되어 살거나 다른 나라와 문화 속에 남아 디아스포라로 살던 사람들의 경험 사이를 계속 넓히는 갭이었다. 현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그런 것처럼, 제사장 문서의 작가들과 그들의 후원자들에게 있어서, 신앙적인 선택은 전통이나 변화가 아니라, 오히려 이 두 실재들에 책임적인 종교적 표현이었다. 실제적인, 목회적인 용어로는 하자면, 그러한 작업은 종종 서로 다른 그룹들과 세대들이 서로의 삶의 실재를 이해하도록 돕는 일을 수반한다. 오로지 이념적인 절대성에만 집중되는 초점­이는 종종 그룹 내의 하나의 경험을 표현하는 반면에, 많은 다른 이들의 경험은 모욕하거나 부정한다­은 세분을 강화할 뿐이다.

이제껏 나는 그러한 세분화라는 형태로 다원주의가 어떻게, 왜 성서적 이스라엘과 역사적 한국을 특징 지우는가에 대한 암시를 시도해 왔다. 이 양자의 경우, 서로 다른 종교적인 개념화는 그들이 명확히 표현되는 컨텍스트에서 검토되는 경우, 더욱 이해 가능하고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이러한 종교적 표현들 어느 것의 진리에 대한 충성은 모든 것은 부분적이고 그들이 전하는 컨텍스트에 의해 조건 지워짐에 대한 인정을 요구한다. 그 어느 것도 저 홀로 모든 컨텍스트에 적합하다거나 충분하지 못하다. 자신의 다원성 안에서 서로를 보충하고 보완하며 서로 교정해 줄 때에만, 복음에 대한 우리의 증언은 충만할 수 있고 신실할 수 있다. 아마도 다원주의는 신학적인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당파적 내부 항쟁을 일으키는 무감각한 저주가 아니라, 서로를 변화시키는 대화를 요청하는, 환원 불가능한 하나의 신학적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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