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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9(수)
[21세기] 신학과 시민사회  
­에큐메니칼 탐구를 위한 하나의 제안­

루이스 머지(Sanfrancisco 신학대학원 학장)

현재의 기독교 교회는 민주적인 참여, 종잡을 수 없는 시민성, 그리고 지구상 곳곳의 다양한 정치적인 문화에서 지금 출현하고 있는 도덕적인 책임성에 관한 대화에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 그 숫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는 "선한 사회"(good society) 연구자들을 포함한, 종교 사회학(religion in society)을 연구하는 미국 학생들은 점차로 그들에게는 신선한 역사적 경험들과 철학적인 가정들을 탁자로 가져오는 해외의 동료들이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교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러시아와 동부 유럽에 막 깃을 달고 날려고 하는 시민 공화국들의 고통스러운 탄생과, 유럽 경제 공동체 내의 서로 대조적인 사회들 사이의 정치적인 협력을 향한 논쟁적인 선취권 문제와, 막 출범한 남아프리카의 인종 포괄적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일과 아시아 국가들에서 대중의 의지를 재 천명하는 다양한 노력들에 연루되어 왔다. 만일 이념적인 장벽들만 극복될 수 있다면,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의 이러한 문제들의 논의는 마찬가지로 곧 어느 정도 접근 가능하게 될 것이다. 시민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에 대한 서구 전통들은 새로운 역사적인 계기와 훨씬 확대된 대화 속에서 비판적으로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평범한 사람들도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류의 이슈들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적합한 정치 기관들 뿐 아니라, 근본적인 도덕적 확신들이 필요하다:그것은 "마음의 습관들"(habits of the heart)인데 이는 이 시대에 있어서 당연시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종교인과 세속인들 모두 마찬가지로­가 함께 시민 영역의 점증하는 분열과 악화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책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은 사실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우리가 모스크바나 뉴욕, 카라키나 보고타 혹은 서울 그 어디에 살든, 사람들의 사회적 정치적 자의식의 뿌리에 접근하는 이슈들을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물음들의 구체적인 형태들은 그 장소마다 다르다. 그러나 진정한 참여적 민주주의는 적합한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후원을 요구한다는 인식은 점점 강하게 다가온다. 이들은 주어진 시간이나 장소에 존재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이러한 통찰을 정치가들의 수사학에서 듣고, 설교자들의 열변에서, 그리고 광범위한 견해들에 대한 신학자들의 반성에서 듣는다.

이 모든 이야기들 속에는,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사회의 방향을 조정하는 수단으로서의 상호 교환이 일어나는 시민 영역의 존재가 우리 시대에 와서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출현하고 있다. 문화적으로 유지된 "삶의 세계들"(life worlds)­전통적인 방식의 생활­은 오랫동안, 정부의 관료 조직, 거대한 스케일의 경제 기업과 우리들의 생활을 통제하기 위해 결합하고 있는 강력한 통신 "시스템"에 의해 "식민지화"(colonized)되어(혹은 침입 받았거나 혹은 점령당해[or invaded, or occupied]) 왔다. 오늘날 경제적인 세력들은 다른 시스템의 구성 요소들을 누르고 이미 권력을 장악한 것 같다. 시장은 자신의 모든 지류들을 통하여 인간 의식을 강하게 점거한 나머지, 공공의 합리성을 위하여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은유적 기반을 공급하고 있다. 시카고의 경제학자 Gary Becker는 최근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는데, 그의 공헌은 모든 인간의 심사숙고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로서의 경제 모델들에 근거한 합리적인 선택 이론의 형태를 발전시킨 것에 있다. "비용-편익 분석"(cost-benefit analysis)은 거의 보편적인 추론방법이 되고 있다. 실로 경제적인 의사 결정(decision-making) 속에 내재해 있는 추론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나타나는 다른 체계적인 요소들과는 상응하지 않는, 냉담한 범세계적 응집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 실존의 다른 측면들을 지배하며 계속 증가 추세에 있는 경제학에 직면하여 전통적인 서구 정치 범주들­대화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들을 표현하고 있는 결론들을 인출하는 장이 되는 몸(a body)을 정치적이고 규정하는 범주들­은 자신들의 적합성을 다시 한 번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대중적인 정치 참여의 전통들은 심각한 문제가 되는데, 그 이유는 이 전통들이 서 있는 문화적인 근거들은 낱낱이 흩어지고 풀리어, 우리의 상상력 안에서 응집력 있는 매입을 상실하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Philip Selznick가 우리들의 소위 말하는 근대 후기성(post-modernity)을 말하고 있듯이, "자아의 통일체들로 알려진 것들, 공동체, 문화, 법률, 예술, 과학, 그리고 기관은 불가피하게 다원적이고, 갈등으로 가득 차 있으며, 분열된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의미 있는 재정의들의 찾으려고 필사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만, "백성"(the people)이 다스리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 질서"(a new world order)에 대해 듣고, 더욱 흥미롭게도 "새로운 사회 이론"(a new theory of society)에 대해서도 듣는다. 그런 이념들이 실체가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은 어떻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참여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지금 그것들을 주의 깊게 바로 보는 것은 분명히 많은 신념들, 민족적⃨인종적 정체성, 그리고 제도적인 연합들(institutional affiliations)을 대표하는 광범위한 범위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 속에서이다. 사회적인 비시민성(incivility)과 분열에 대한 공동의 공격을 소집하는 가능성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스스로를 표현하고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정치적인 의지를 수행하는 장인 삶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도상 위에서, 새롭고 포괄적이며, 문화 교류적이고, 사회적 과정들과 목표들에 대한 국제적인 대화의 선동자와 촉매로서 행동하는 것은, 종종 경멸적으로 중상 모략을 받아 온 미국의 "주요" 교단들과 다른 지역의 동일 부류를 포함한, 교회와 다른 종교 그룹들의 역할이 될 수 있다.


1. 주요 도전들:"시민 사회"의 개정

관심의 초점은 이 시민 사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하며, 또 어떻게 후원하고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민주적인 공적 담화(democratic public discourse)이다. 그러한 질문들을 다루기 위해 가장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ready-to-hand) 아이디어의 원천은 의심의 여지없이 "시민 사회"(civil society)에 대한 수세기에 걸친 서구의 논쟁에서 발견될 것이다. 가장 현대적인 용법으로는, 이 용어는 민주주의가 자신의 번창을 위해 필요로 하는 공통적인 관심사­순수한 사적인 영역은 넘어서나 시장 경제의 영역과 국가 관료정치와는 무관한­에 대한 시민적인 대화가 발생하는 공간을 지칭한다. 일련의 시민적 대화를 위한 공간이라는 생각은 오늘날에는 주로 한창 진행 중인 현상의 산발적인 예들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규정적인 이념으로 존재한다. 공유된 시민적 담화는 분명 여기 저기에 존재한다:이것은 라디오 대담 프로그램에 나타난 형태를 따라서 일어난다. 편집자에게 온 편지들 속에서나, 전자 우편(e-mail) 상에서, 그리고 때로는 TV 정치 광고 속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민 대화­만일 이것이 그렇다면­는 일반적으로 너무 뜸하고 응집력이 없으며, 또한 너무 자주 조작되고 정치화되어, 많은 이들을 위해 정의하고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그 어떤 것으로서 끝까지 저항할 수 없다.

하지만 몇몇 원인들은 우리들의 행복에 대해 훨씬 중요할 수도 있다. 공적인 시민성이라는 생각의 역사와 오늘날에 갖는 이의 중요성, 그리고 실행가능한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이의 생존에 대한 현재의 위협 등은 Adam Seligman의 최근 책, {시민 사회의 이념}(The Idea of Civil Society)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정치 종교적인 개념으로서의 이 개념은 John Locke와 스코틀랜드의 계몽주의 철학자들, 청교도들, 그리고 몇몇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주어진 특징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다. Seligman­그의 배경은 유대 배경이고 외관상으로는 세속적이다­이 그토록 강하게 기독교 종교 기관들의 기능과 신앙 백성들의 역할, 그리고 서구의 시민적 실제의 발생에 있어서 신학적인 사유의 영향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목적을 위해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류의 종교성은 더 이상 오늘날 우리의 중요한 정치 무대들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공적인 담화들의 합리성에 관한 계몽주의의 가정들도 과거에 그랬던 바와는 달리 그다지 설득력을 주지 못하고 있다.

만일 시민 사회가 생존할 수만 있다면, 이는 새로운 철학적-종교적 기반을 찾아야 할 것이다:그것은 분명히 과거에 의존하나 또한 매우 다른 인간의 미래를 내다보는 개념성이다. Seligman은 그 문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으나, 해결책을 찾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선택할 수 있는 옵션(options)에 대해 주의 깊게 분석한 후에, 그는 결론을 내리기를, 지금까지의 전통-후기적 환경(a post-traditional setting)에서 시민 사회를 재 개념화하는 노력들은 인간 보편성에 대한 문화적인 연대성을 결합시킨다는 어려운 문제 위에 세워져 왔다. 근대 사회들은 보편적 이성 개념에 도전하는 방식들로 분리되어 있고, 자신이 한 때 기초로 삼았던 종교적인 개념들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워 버렸다. 특별히 Seligman은 Habermas의 의사 소통 행위의 철학의 특정한 또는 다른 형태들을 기대하고 있던 이들의 확신에 구멍을 뚫고 있다. 동일한 비난이 아마도 Andrew Arato와 Jean Cohen의 최근 저서, {시민 사회와 정치 이론}(Civil Society and Political Theory)에 적용될 듯 싶다. 이 책은 시민 질서를 회복하는 과업을 위해 Habermas식의 의사 소통 행위 이론의 협력을 구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이는, Seligman이 인간 과학자들에게 우리의 새로운 도덕 철학자들이 되라고 재촉하는 Alan Wolf의 {누구의 파수꾼? 사회 과학과 도덕적 의무}(Whose Keeper? Social Science and Moral Obligation)에 대해서도 유사한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종교적 원천의 쇠퇴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새로운 형태의 보편 이성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들에는 설득 당하지 않으면서, Seligman은 시민 사회에 현대적인 개념의 형태를 제공하는 그 어떠한 명확한 방법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있다. 제도적이고 문화적인 조건들은 예루살렘이나 부다페스트 혹은 로스앤젤레스­그는 이 세 곳의 시민 문화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같은 곳에는 없다. 늘 따라 나오는 마지막 문단에서, 그는 {존 볼의 꿈}(A Dream of John Ball)이라는 책에서 William Morris의 말을 상기하고 있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깊이 생각한다. 어떻게 남자들이 싸움터에서 싸우고 지는지를. 그들이 싸워 얻으려고 하는 것은 그들이 패배함에도 불구하고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타나면, 그것은 그들이 의미하였던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며, 다른 이들은 또 다른 이름으로 그들이 의미하는 것을 위해 싸워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역사 속에 나타난 모든 류의 진보 개념들의 혼란이요 실망­해체로 인도되는 취약성이라 말하지 않고­이다. Morris의 말에 대한 Seligman의 응답은 진지하다. "금욕과 냉정, 그리고 희망을 잃지 않고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시민 사회는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좀더 시민적인 것(a more civil one)을 미래에 설립하는 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공헌이 된다."

그러나 이게 전부인가? 어떻게 Seligman의 결론을 "아무런 희망의 상실 없이" 고려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이것은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질문인데, 이 질문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우리는 인류 전체 역사의 과정에 대해 무엇을 믿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이다. 이는 우리의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에서 우리가 벌이는 구체적인 싸움의 세밀한 부분들이 더 커다란 몇몇 비전과 연관되어 있는지 묻는다. 그것은 위로부터 아래로가 아니라 밑바닥에서 위 쪽으로 먼저 질문되어져야 한다. Seligman이 종교인들의 공헌과 새로운 종류의, 곧 계몽주의 후기의 공적인 합리성을 위한 가능성들 이 양자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인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 질문은 다시금 개방되어야 한다. 내가 믿기로는, Seligman과 다른 이들은 연대적인 사회 그룹, 곧 종교적 영감을 가진 많은 이들이 그들 자신과 다른 이들 모두를 위해 정의를 추구하는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는 또한, 서로 다른 이해들을 대표하는 사람들도 신뢰의 올바른 조건만 주어진다면, 문화적인 간격(cultural chasms)을 뛰어넘어 서로와 합리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을 수도 있다.

분명히, 우리는 17세기부터 계속하여 오늘날의 개신교 "주류"(mainline) 교단들의 선조들의 밀접한 협력과 더불어 영국과 미국에서 주로 발전해 온 "시민 사회"의 서구적 개념이 현대 범 지구적 사회를 위한 해답들을 가지고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가정하는 일은 단순히, 더 호전될 지 악화될 지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환에 의해 특징지워지고 고도로 불확실한 예지를 직면하고 있는, 범 지구적으로 퍼져 있는 근대 후기적 질병에 대한, 본질적으로 근대 이전의, 서구적 처방을 기술함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적, 민족적, 인종적, 그리고 이념적인 특성들을 인정함에 있어 우리의 질서가 간 것만큼 나아간 세계 질서는 다소 공동의 인간 번영의 조건들에 관한 대화를 향하여 다시 한 번 전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서로 다름(difference)에 대한 우리 자신의 "후기 계몽주의적"(post-Enlightenment) 주의 집중(attention)으로부터 중요한 통찰들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주의 집중은 우리가 범 지구적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상호 의존적인 관계가 감소되는 것이 아닌,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포괄적인 인간의 범주들을 속이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이는 계몽주의와 혹은 계몽주의와 나란히 번영하였고 또 이를 자라게 하였던 종교적 신앙의 제 형태들과 결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들의 자리를 더 나은 어떤 것으로 대치하지 않고서는 말이다. 그러나 이 원래의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내용은 오늘날 실천적인 적용을 위한 보충이 없이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원래의 아이디어들은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져야 한다. 필요로 하는 내용은 오직 지구상의 많은 문화들 사이에서 도덕적 비전들에 관한 대화로부터 이제부터 나올 수 있다. 수세기 동안 주로 유럽과 북 아메리카 위주로 이루어졌던 논의가 이제는 그 논의를 복잡하게도 하고 또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제공하게 될 국제적인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처음에 시민 사회 아이디어를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선조들을 갖고 있는 종교 그룹들은 이제 지구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문화적 컨텍스트 안에서 존재하게 되었다. 이 대화를 지배하려 하지 않는 한, 그들은 대화의 결과에 절대 필요한 공헌을 하게 될 것이다.


2. 새로운 사회 현상들과 실천적인 응답들

오늘날의 수사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사회 이론"을 추구하게 한다. 우리는 우리를 그러한 사고로 이끄는 여러 종류의 사회 현상들 뿐 아니라 동시에 이 사고들의 전달을 위해 고안된 토대(ground)에 대한 많은천적인 선취권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재해석된 종교 전통들이 사회적 추론 과정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결합하여 이제껏 보이지 않던 가능성들을 열어 줄 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야 한다.

정치적인 스펙트럼을 뛰어넘어 우익에서 좌익에 이르는 무수한 대중 정치 운동과 사회 운동들은 이제 공공 무대에 출현하고 있다. 철학자와 신학자들의 침묵 그 이상으로, 이 선취자들은 시민 사회에 대한 물음을 우리 시대에서 주요 주제로 만들고 있다. 국제 인권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옥스팜(Oxfam), 그리고 세계 비전(World Vision) 같이 나라와 문화, 계급과 인종, 그리고 남녀의 성 구분을 떠나서 인간 사이의 계약을 통한 연합의 비전(visions of covenantal ties)을 암시하는 국제적인 운동들이 있다. 그 조망에 있어서 미국 국내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정치적인 경향을 대변하는 운동들­the American Organization Sane⃨Freeze, Common Cause⃨People for the American Way, the Good Society, 여성해방운동 그룹과 여러 종류의 공산주의 그룹­도 있다. 미국 이외의 지역에는 다른 많은 발기들이 있는데, 그들도 마찬가지로 독특한 환경과 목적에 의해 형성된 것들이다. 우리는 또한 연대성 운동(the Solidarity movement)의 도래를 이끌어 냈던 폴란드의 민주적 저항과, 70년 중반에서 그 이후로 프랑스에서 "제2 의 좌익"(the Second Left)에 의해 발생한 담화, 처음에 서독에서 시작된 "녹색당"(Greens)의 사유 방식, 라틴 아메리카에서 권위주의적 정권에서 유연한 민주주의로의 변혁을 이끌어 냈던 세력들, 그리고 동부 유럽의 국가 사회주의의 몰락 배후에 자리잡고 있던 여러 기관들의 복잡한 그물망 등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민중"(Minjung) 운동이 그 성격상 프롤레타리아적이고 신학적인 형태로 민주주의 이념의 회복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목록은 계속 늘어갈 것이다.

그러한 문제들에 관한 조직적인 사유는 그 자체로 성장 산업이 되고 있다. 종교 단체의 대표들을 연관된 다른 그룹­재단들, 두뇌 집단들, 사회 과학자들, 윤리학자들­과 함께 하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협의회들이 선진 국가들의 전망에 점을 찍고 때로는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한다. 독일의 교회들과 연합한 평신도 학교들은 이러한 류의 대화를 위한 중요한 센터가 되고 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각 나라의 문화와 사회 체제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다수의 지역 프로그램들은 공공 교육을 개선하고 의료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범죄를 줄이고, 경제적인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이들은 방송 매체에 스스로를 알리고, 많은 보조금 신청서를 준비하여 기존의 종교 단체들과 다른 기관들로부터의 후원을 모집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자국 내에서와 국제간에 일어나는 논쟁들인데, 이 논쟁들은 형식적으로 그렇게 정의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우리의 계약을 통한 사회적 결속을 시험하고 잠정적으로 재정의하는 역할을 한다. 해양법(the Law of the Sea)을 둘러싼 영해의 범위에 관한 논쟁들과 무역과 관세에 관한 일반 협약(the General Agreements on Tariffs and Trade)에 관련된 연속적인 중재 회합은 범 지구적 단계에 이른 시민성의 차원을 예증해 주고 있다. 미국에서는 정부의 건강 프로그램 논쟁이 이 글을 쓰고 있는 현 시점에 가장 중요한 이슈이다. 유럽 사람들은 외국 노동자와 난민의 존재가 귀찮은 짐이 되는가 아니면 경제적인 이득이 되는가 하는 이슈들에 직면하여, 국가의 자기 결정과 유럽의 일치가 함께 갈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구 소련에서의 문제는 가능한 경제적인 붕괴 쪽으로 급히 기울어지는 무정부적 자본주의(anarch-capitalism)의 한복판에서, 민주적 개혁 대 신독재주의(neo-fascism)의 대결이다.

이 모든 소란으로부터 응집력이 있는 정치적 통찰을 지닌 기관(a body)이 출현할 수 있을지 없을지, 그리고 이러한 통찰들이 유사한 주제의 재연이 될지 아니면 "근대 후기적" 성격을 지니게 될 지를 묻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다. 새로운 사회 운동들에서의 기술적 용어 사용(descriptive terminology)과 현재 사용되는 용어(vocabulary-in-use) 양자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을 파악하기 위한 일에 가치가 있으나, 아직 충분한 것은 아니다. 사회의 이익을 위하여, 이 모든 노력의 배경에 숨어 있는 가정들­검사되지 않은 혹은 겉에 드러나 있지 않은 철학적인 전제들­도 중요하다. 미국 정치 철학자들은 "공산 사회적"(communitarian)이라고 기술된 선취자들의 많은 것을 그 단어의 여러 가지 의미에서 분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용어는 많은 것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시민 문화"(civic culture)의 출현을 이끌어 내려는 노력과,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분열과 싸움에 지친 이들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시민적 "마음의 변화"(change of heart)에 대한 희망에 대해 듣기도 한다.

종교적인 그룹들은 의미심장하게도 그러나 아직은 그렇게 깊게 이러한 범위로 퍼져 있는 사회적 선취자들에 연관되어 있지 못하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많은 것이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 있다. 어떤 경우, 아무런 대안이 없이 연루되게 된다. 동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의 국가 사회주의의 몰락 과정에서 교회가 한 역할에 대한 전체 이야기는 서방에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세계교회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는 (이 부분에 관해) 모든 문건을 소장하고 있다. 아마도 남아프리카의 해방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나라의 일반적인 종교성은 북 아메리카의 것과는 그 문화적인 성격에 있어서 크게 다르겠지만, 고도로 다원화된 정치 집단 내에서 용서와 상호 신뢰의 수단, 이 양자에 공헌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들은 확실히 결함이 있고 깨어지기 쉬운 것이기는 하나, 분명한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다.

서유럽과 북미에서는 문제들이 다소 복잡한데, 그 이유는 이슈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종교 세력들은 분열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나 복잡한 만큼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이다. 나는 시민 사회 운동은 종교 단체 일반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약자와 기가 꺾인 이들, 그리고 혼란에 빠져 있는 종교적 "주류"(mainline) 단체를 대표하는 그룹들이 이러한 시민-문화적 선취자들 가운데 독특한 비판적⃨건설적 역할을 떠맡음으로써 그들 자신의 전통과 20세기 후반에도 계속 존속하여야 하는 그들의 명분∕이유 모두를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논증하려 한다.


3. 북미의 특징적인 상황

범지구적 이해를 추구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분명하게도 북미적인 관점에서 이 글을 쓰고 있음은 이미 명백한 사실이다. 종교와 시민 사회에 대한 나의 사고들은 분명 그러한 북미적 컨텍스트에서 나온 것에 틀림없다. 또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하늘로부터 떨어진 견해"(the view from nowhere)란 존재할 수 없다. 작가의 사회적인 정의는 다음에 나오는 분석에 대단히 중요하다.

이 후반부의 논의에서 우리는 미국의 종교 단체들의 가능한 역할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한편으로, 시민 사회와 연관된 최근의 사유와 실험 중 많은 부분이 북미에서 행해졌고, 그 자료에서 나올 수 있는 범 지구적 이해에 대한 공헌은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다른 정책이나 문화에서 사는 사람들과 고립되어 생각함으로써 홀로 시민 사회의 문제들의 해결에 공헌하게 내버려둔다면, 미국은 자기 자신의 사회 문제조차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실제로 미국인들은 때로 시민 사회와 민주주의의 전체 문제가 그들에게만 배타적으로 속해 있다는 투로 생각하고 글을 쓴다. 아니면 최소한 이 주제에 대한 통찰은 미국에서 최고점에 달해 있다는 듯이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주장하기를, 지구상에서 가장 발달한 정치 기술은 더 원시적인 것을 연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들은 점차로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는 유럽이나 아프리카, 아시아로부터 배울 수 있고, 의심의 여지없이 다른 지역에서도 배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새로 제정된 남아프리카의 헌법이 부분적으로는 우리 미국의 것을 본뜬 것이기는 하나, 우리가 현명하기만 하다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시련들을 거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잠재적인 학습의 예는 더 증가될 수 있으리라.

미국의 현장 그 자체는 우리의 역사가 종교 전통과 시민적 질서의 문제에 부여하고 있는 독특한 형태를 위해 중요하다. 몇 가지 방식으로 "교회와 국가" 문제와 연관된 미국적 선입관은 가능성의 범위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편협하게 한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의 권리 장전(Bill of Rights)에서 성취된 조정은 오랜 기간을 걸친 이의 해석과 더불어 독특하고도 매우 중요한 역사적 업적이다. Jefferson의 상상력 뛰어난 (그리고 오해하기 쉬운), "교회와 국가 사이의 벽"(wall between church and state)에 관한 언어인 첫 번째 수정안은 여전히 적절하다. 첫 번째 수정 조항의 틀을 세운 이가 하려 한 것은 정부로부터의 교회의 보호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 경향이 있다.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섭리적으로 질서 지우는 일과 인간 공동체의 도덕적 성격과 연관이 있는 종교적인 개념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한 때는 미국의 시민 담화를 위한 지배적인 준거틀(frame of reference)이었다. 그러한 잊혀진 세계의 문학은 오늘날 잠재적인 가치의 통찰들을 위해 참고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그 성격상 다른 것들이고, 행동 중심적 사유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반성을 필요로 한다. 미국 사회는 한 세대 이전과는 다르게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와 함께 교회와 회당, 모슬렘 사원과 다른 신앙 공동체에 대해 새로운 환경과 도전이 되고 있다. Steven Carter는 우리에게, 오늘날 우리의 권력의 센터를 장악하고 있는 지식인들과 방송 매체의 엘리트들은 이전보다 종교에 관해서 아는 바가 적고, 그들이 알기에 자신들이 평범하게 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듣는 영적인 에너지들은 권력의 주변부에서 싹이 트고 있다. 이전에는 주로 밖에서 겉돌았지만, 이제는 공공 장소 안으로 밀려들어오면서, 배제된 그룹들의 열망과 정치적인 우익들의 야망과 스스로 동맹을 맺는다. 이 세력들은 그들의 전체 영향에 있어서 통합적이기보다는 분리적이며 시민성을 후원하기보다는 파괴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지닌 가치와 목적에 대한 종교 전통들이 헌법이 반성하고 보호하려 하는 공동 생활을 유지함에 있어 새로운 역할을 담당하게 할 미국적 세속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근대 후기 시대에서 새로운 사회 시민성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참신한 방식으로 공공 장소에서의 추론의 본성과 구체적인 삶의 전통들이 이 추론들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들 이 양자를 새롭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종교 제도들에 의한, 그리고 종교 제도들에 관한 그같은 참신한 사유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제껏 미국에서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에 관한 Sheldon Wolin의 논증은 여전히 설득력을 잃지 않고 있다. 종교 제도들의 협력과 더불어 계몽주의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진 사회 시민성의 비전은 고전적인 희랍과 로마의 민주주의 개념을 귀족 정치러부터 백성들의 삶에로 확대시켰고, 우리에게 공화국 초기에 참으로 참여적 민주주의를 제공하였다.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백성이 주권자가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할 수 있었다. 백성들은 개혁이든 혁명이든 간에 정치적인 삶의 재구성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정책과 헌법의 창건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결과적으로 백성의 힘에 대항하여 중심주의적, 엘리트적, 거대 권력 경쟁자들이 나타났고, 여러 가지 형태로 번창하였다:노상 강도 귀족적(robber-baron, 자기 영지를 지나는 여행자를 털었던 귀족)인 기업들은 성장하여 근대적인 법인체가 되었고, 내전에서 싸우는 법을 발견했던 연방 정부는 곧 권위와 통제를 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장을 찾았다. 정치와 경제의 영역에서 권력의 집중은 백성들에게서 진정한 정치적인 참여를 탈취하여, 여전히 그들이 이를 소유하고 있다는 환상 속에 가두어 두었다. 진정한 백성에 의한 정치와 점증하는 세계 권력의 중앙집중적 정치 경제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사람들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들에게 원래의 사회 계약의 최종적 개정을 맡기고 수동적인 비정치적 혹은 반정치적 형태의 시민권­사람들에게 아무런 주요 역할도,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그리고 그러한 이해를 형성하기 위한 아무런 언어도 남기지 않았다­을 받아들였을 때까지 미국 내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주류" 종교의 실패 가운데 몇몇을 설명하는 일에 도움을 준다. 이들 종교 집단의 구성원들은 오늘날 2차 대전 이후 다수가 되었다가, 끝내 미국에서 시민으로서, 진정한 정치적 행동가로서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한 때 자신의 공동체에서 소수였지만 최소한 운동가였고 행동의 주체들이었다. 자라면서 교회에서 배운 도덕적인 가르침과 자신의 중산층으로서의 사회적 역할 안에 내재해 있는 가능성들 사이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책임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던 이들이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학교 교장도 있었고, 상인, 소도시의 법률가와 의사, 운동 경기 코치, 자동차 판매원, 보험 외판원, 그리고 기타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아마도 그들이 살아가는 동안­그들의 도덕 행위는 무언가 영향을 끼치리라는, 그들이 편들었던 것은 신뢰할만한 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형성해 내었고, 계속 그들의 충성을 요구했던 종교 제도들은 이러한 의미에서 공공의 책임성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교회들은 교인들을 비밀스러운 영적인 훈련이나 불가해한 신학적인 이슈 안으로 깊게 몰아넣을 필요가 없이, 책임적인 삶을 지지하는 복음을 설교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주류 교회들이 지원하였던 공공의 세계는 그 자체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배웠던 세속적인 직업의 교리들을 직접 수행할 수 있도록 이끈 도덕적 가치의 영역으로 이해되었다. 이 세계가 좀더 복잡해지고, 다원적이며, 도덕적으로 모호해지고, 중심가 도로 위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었던 것과는 다른 영향들이 사건들의 흐름을 결정하였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을 때, 옛 가르침들과 그 가르침을 가르쳤던 제도들은 적합성을 잃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들 "주류" 그룹들 가운데 백인, 앵글로색슨 계열의 개신교도들은, "소수" 개신교도들, 로마 가톨릭, 유태인들, 그리고 아무런 종교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사회 내에서의 그들의 상대적인 지위를 개선하였을 때, 다른 쪽에서 문화적 경제적 일식 현상을 겪고 있었다. 결과는 오늘에까지 이르는 환멸과 혼란이었다. 기존 지위의 상실에 마주치지 않으려 하면서, 곧 홀로 창조적으로 응답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서, 주류 종교 집단의 평신도들은 비효율적으로, 비조직적으로, 기가 꺾인 상태로 그리고 자신들을 계속해서 약화시켰던, 주의를 다른 곳을 쏠리게 하는 내부 갈등으로 기울어졌다. 사건들은 오직 멀리 떨어져 있는 대단위의 경제 혹은 정부 세력에 의해 영향받을 수 있거나 혹은 우익이나 좌익의 극단적인 정치적 기선을 잡은 세력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느낌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중산층에서 중요한 도덕적 행위를 수행하여야 한다는 느낌은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모든 사회적 변화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교단의 책임자들, 신학교 교수들, 교구 목사들)의 응답은 전혀 달랐다. 평신도들은 그들의 중요한 사회적 역할의 상실 때문에 혼란스러웠지만, 대체로 그들에게서 힘을 빼앗아 갔던 그 시스템을 계속해서 후원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도자들은 신학적이고 도덕적인 이유로 새롭게 출현하는 대중 문화의 상당 부분과 경제 시스템, 그리고 그 시스템의 정치 지도자들의 작업의 많은 부분­특별히 군사적인 모험들­을 거부하였다. 그러한 사회를 예언자적인 견지에서 비판적 입장을 유지하는 과업은 교회의 제도-관리 보다 훨씬 더 중요해 보였다. 어떤 종교 지도자들은 온건하게 우익으로 움직였으나 다른 이들은 좌익으로 움직임으로써 그들이 원했던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극단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이 현재 (싸움을 위한) 진용을 정비하는 것으로 보여 평신도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온건한 우익 쪽에서는 전형적인 평신도의 관심들로부터의 철수를 가져온 전략이 나왔다:지도자들은 비밀스러운 주제들과 예전적 갱신의 촉진, 개인적 경건성의 증진으로서의 복음 전도, 그리고 신학적인 골동품 수집처럼 보일 수 있는 전통 유지에 대한 교회 연합적 대화로써 스스로를 바쁘게 하였다. 온건한 좌익에서는 지도자들이 좀더 모험적인 활동 영역을 위해 평신도들의 관심을 우회하여 지나쳐 버리는 듯 싶은, 사회의 주도권을 잡은 세력에의 참여를 추구하였다:집에서 시민권과 반전 운동을 지원하고, 아프리카의 인종차별주의와 싸우는 에큐메니칼한 노력들을 후원하며, 광범위한 이슈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좀더 "자유주의적"(liberal)(그 단어의 대중적인 의미에서) 입장을 지지하는 등을 일을 수행했다. 많은 종교 지도자들과 사상가들은 이러한 구체적인 우익 지향적, 좌익 지향적 헌신들을 창조적인 방법으로 결합시켰다.

여기서 환멸과 오해가 가져다 줄 잠재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엄청난 숫자의 평신도들이, 자신이 중요한 도덕 행위자가 될 수 있다고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그런 공공 세계와 마주치고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자기 교단의 지도자들이 겉보기에 좌익 쪽으로 기울어지는 이데올로기나, 의미는 좋으나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전통 유지에, 혹은 이 양자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였다. 어느 쪽이든, 진용을 갖춘 종교 지도자와 사상가들은 평신도들의 세속적인 소명을 지원하는 과업에서 도망하였든 혹은 우회로를 택한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이 공공의 세계, 사람들이 혼란을 느끼며 감소된 영향력을 지닌 채 삶을 꾸려 가고 있는 그 세계에서 그들 백성의 영성에 양식을 공급하는 과업을 포기했던 것 같아 보였다. 이전에 주류 교단에 속했던 많은 평신도들은 전통적인 가르침들을 단순화시키고 동시에 시장 지향적인 세속 세계와 외관상으로나마 잘 공명하는 수단을 사용하여 그 가르침들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복음전도의 제 형태로 이동했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떤 희망, 곧 이러한 엄청나게 규모가 큰 그러나 대부분이 혼란에 빠져 있고 침묵하고 있는, 미국의 종교 중심지가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과거에 그가 이룩했던 가치를 지닌 공공 시민성에 공헌하게 그런 희망은 과연 존재하는가? 오늘날 그같은 가능성은 수많은 실천적인 난제로 인해 모호해져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상의 논의 파트너가 지니고 있는 선입관이다:여기에는 혼란에 빠진 신학적인 자기 이해, 그룹의 생존, 그리고 일상적인 정치적 내분 등이 있다. 미국에서의 시민성의 회복과 도덕적 책임성의 증진을 위해 협력할 수 있었던 세력들은 나라 자체가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다. 또한 우리는 감히 오해들과 갖가지 공포증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 오해와 공포의 많은 부분은 종교인들이 대중 매체에 나타난 자신들의 자화상으로부터 내화(internalize)한 것이며, 대중 매체는 대중의 필요에 관한 대화에서 종교적인 통찰들의 충만한 공헌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미국에서 시민 사회를 회복하기 위해 적합한 반성적 자기 이해를 가지고 선취권자들에 참여하는 것은 그 요구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며, 같은 종류의 도덕적인 의미와 이 공동체들이 과거에 계속 대표해 왔고 지금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계속 하고 있는 그러한 종교적인 뿌리들을 찾고 있는, 도상에 있는(middle-of-the-road) 수백만의 시민들의 세계 내적 영성(the worldly spirituality)을 작동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미국의 종교 센터는 잠자고 있는 거인이요, 엄청난 원천이며, 이의 활용은 종교 공동체들의 이해와 동시에 정치 집단의 이익 또한 봉사하게 될 것이다.


4. 우리는 어떻게 이 이슈들을 신학적으로 전달하기 시작하는가?

이 글은 이 모든 문제들을 직접 다룰 수 없다. 그저 앞으로 수행되어야 할 주요 과업에 대한 배경으로서 머리 속에 담아 두어야 할 것이다. 이 과업은 신학자들과 인문 과학자들이 전통적인 공동체들과 다른 인간 결합체들을 더 커다란 계약적 유대 속으로 끌어갈 수 있는, 새로운 시민 사회 개념을 형성하려 할 때, 이 두 부류의 상호 작용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한 비전은 이 지구상의 인류를 괴롭히는 새로운 도전들에 응답하면서, 양자를 고전적인 정치-종교적 개념들과 관련된 전통적 공동체들 안에 보존되어 있는 종교적 통찰들에 의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더 광범위한 논쟁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러한 노력에 연루되어 있는 공동체­실제로 나는 이러한 장면을 보기를 희망한다­가운데 하나에 속해 있는 한 사람의 신학자로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이미 나에게는 이 프로젝트를 위한 어느 정도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는 하나의 관점을 스케치하였다. 최근 출판된 책에서, 나는 하나님은 전체 인류를 일치에로 모으시고 계시며 기독교 교회­그리고 다른 종교 그룹의 구성원들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의 소명은 표지로, 성례전으로, 그리고 그같은 궁극적인 인간의 대화를 위한 도구로서, 인간의 의미에 대해 그같은 포괄적으로 수행된 응집력을 위한 도구로서 이 세계에 현존하는 것이라는 확신 주변에 세워진 교회론을 요청하였다. 올바로 이해된 그러한 소명은 새로운 정체성과 목적을 추구하는 기독교의 교단들에 활력을 돋구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연관된 종교 전통들을 흩뜨리거나 그들의 영향력을 무디게 하는 일없이, 그러한 소명은 오로지 신학적인 특수성을 회복함으로써 추구될 수 있다:인간 삶 전체를 위하여 "특징적으로 전통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원천들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또한 이 과업의 효과적인 추구를 위해 요구되는 사회적 정치적 이론에 대해 공헌하고 싶다. 그러한 문제들에 있어서 종교 단체들은 그들 나름의 복잡한 이론이 필요하다. 그들은 또한 우리 사회 안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전문적으로 일하는 이들­무엇보다도 인문 과학과목들을 철학적인 책임성을 가지고 추구하는 이들­과 대화에 임할 필요가 있다. 인문 과학에 대한 나 나름의 접근 방식의 중심에는 종교적인 뿌리와 철학적인 뿌리 이 양자가 자리잡고 있다. 나는 믿기를, 사회적인 개념들과 실제적인 정치적 추론에의 이의 사용은 언제나 문화적으로 유지된 상징들과 은유들 속에 그 출발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상징이 사고를 일으키는 것이 참이라면, 문화적인 기원으로부터 느슨해진 사회적인 사유는 결국에는 얇아져 왜곡될 터이고, 종종 비참한 실제적 결과들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현대 서구 사회와 더불어 너무도 그릇된 것들­급진적인 개인주의, 소비주의,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의 찬양­은 처음에는 풍부했던 종교적 이미지들과 철학적 아이디어들의 저하된 제정을 대표한다. 이러한 이해들이 회복될 수 없고, 우리 가운데 있는 새로운 문화들의 이해들과 함께 공유되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분열되고 깨어지기 쉬운 사회에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시민성을 위한 열려진 사회 공간을 유지할 도덕적 내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한 때는 사회에 의존할 만한 시민성 조직을 제공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확신들을 대치할 만한 세속적 대체물을 통과하지 않는 사고는 아직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될 것 같다. 그 어느 것도 자력으로 일어서는 철학적 논증으로서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이 문제는 여전히 주의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공공의 영역에 있어서 공유된 목적에 대한 응집력 있는, 후기 종교적 센스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하리라. 내가 믿기로는, 이 상황은 신학자들이 계몽주의 사상의 무덤 위에서 춤을 추어도 좋다는 초청장은 아니다. 그러한 방법은 암흑이지 빛은 아니다. 이는 구성적으로 공공의 대화에 다시 들어가라는 초청장이다. 더 많은 사고가 어떻게 이것이 수행되어야 할지를 명확하게 하는 데 필요하다.

내 생각으로는, 문제의 중심은 문화들과 다양한 이해(interests) 사이에 있는 간격을 뛰어넘는 사람들 사이의 신뢰의 가능성의 기초를 세우는 일에 놓여 있다. Adam Seligman은 이를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H. Richard Niebuhr가 제일 처음 이를 말했고, 그의 언급이 더 낫다. 어떻게 신뢰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직접적인 관계, 혹 실제적인 연대성의 조건들 안이라는 그의 최초의 위치에서 확대되어, 사랑이라는 견지에서는 약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고, 정의라는 견지에서는 강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다른 이들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인가? Habermas는 자신의 의사 소통 행위 이론에서 연대성과 보편성의 모순을 극복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이론 자체가 이를 해냈는지는 의심스럽다. Seligman은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수준 모두에서 의혹을 표시한다. 이러한 반대들은 적절한 장소에서 대답될 필요가 있다.

나는 교회와 다른 종교 제도의 경계를 초월하여 인류 전체라는 포괄적인 집단으로 이해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기독교적 비전이 더 나은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이 모델은 바로, 인간과 인간 공동체 사이의 "의사 소통 행위"가 의미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우리의 포괄적 개념의 기초가 되고, 이를 변혁시키도록 허용될 때, 인간의 지성의 한계와 설득력은 증가된다는 것이다. 백성이라는 개념­예를 들어 민중 같은 것­과 소규모의 운동과 그들을 대표하는 선취권자라는 개념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아 부분적으로는 좀더 커다란 정치적인 집단 내의 사회적 실재로서의 교회에 대한 하나의 신학적 평가라는 의미에서 사회-교회적(social-ecclesial) 비전이고, 부분적으로는 내부에서 수행되는 종말, 그리고 인간 역사를 넘어 확대되는 종말의 비전이라는 의미에서는 종말론이 된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 내용이 지금 이념화시키는(ideational) 중심을 상실하고 있는 사회에서 회복될 것인가? 나는 사회적인 정복 혹은 내가 속한 그룹을 포함하여 그 어떠한 종교 그룹이 다시 정복한다는 개념을 거부한다. 현대의 조건들은 오랜 기간의 종교적 발전 속에서 그러한 조건들을 가능케 했던 종교 이념들의 하부를 잘라 버렸다. 그러나 종교 그룹들은 계속해서 우리의 다원주의적 사회들에서 그들이 구체화하는 사회적 비전들의 "표지"나 혹은 "성례전"으로서 존속할 수 있다. 우리에게, 그러한 원천들은 여전히 책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의 과업은 단순한 학문적인 세미나에서는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현실적인 사회적 세력들은 그 회복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집합되어야 한다. 모든 사회적 선취권자들 혹은 프로그램에는 배경이 되는 가정들, 언제나 명확히 규정되지는 않았으나 항상 당연시되는 개념들이 존재한다. 이것들은 실제로 수행됨으로 해서, 그 자리에 있는 특정 종교 그룹에 의해 드러날 수 있다. 집단적인 결정들 그 자체에는 언제나 이론이 실려 있으며(theory-laden) 다양하게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시민 사회의 개념 그 자체가 바로 그러한 다중 가치적 개념이다. 나는 새로운 시민 문화를 창조하는 노력들의 전제로서의 시민 사회의 현존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대화에 참여한 종교 그룹에 의해 알려질 수 있고 성례전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은유들과 비전들은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으리라. 종교 그룹들, 특히 그들이 자신들 내부에 의미심장한 문화적 다양성을 포함한다면, 그들은 Richard Mouw가 말하고 있듯이, 시민성의 열도(islands), 곧 민주적인 상호 교환이 설계될 수 있고 더 커다란 정치 집단을 위해 생생하게 보존될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다. 나는 때때로 이러한 종교-시민적 고립 지대를 화상 입은 부분을 (피부 이식으로) 치료하는 의사들이 이식된 부분이 부작용 없이 접착되어 정상적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그러한 피부 이식(skin grafts)으로 생각한다. 종교 공동체들이, 영적인 시민성의 부서진 고립지와, 증오의 말과 오해 그리고 불신으로 가득 차 파괴된 우리 이웃들 안에서 대화적인 피부 이식과, 우리의 설득을 통한 잠정적인 모임 등에 대해 선한 의지를 지닌 다른 사람들과 협력한다면, 아마도 무엇이 연루되어 공동선 추구의 모델이 될 수 있겠는가?


5. 성취를 위해 필요한 것:하나의 개괄

방금 제안된 은유는 우리에게 장기적인 탐구를 착수시킨다. 신학자와 목회자로서 우리는 실천적인 과업들을 지원하기 위해 요구되는 아이디어들을 형성하고 명확히 규정하도록 압력을 가할 필요가 있다:이 경우에는 파괴된 인간 사회들을 치료할 수 있는 시민성의 피부 이식을 제공하는 작업이다. 실천적인 전략들은 언제나 암시적 혹은 명시적인 지적 작업에 의존한다. 지적인 작업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실제적 전략으로 발전한다. 우리는 반드시 요구되는 이해를 추구해야 하고, 역사적인 실체와 상징적인 공들임(symbolic elaboration)을 대화에 공급하여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시민 사회 논쟁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사회학적이고 철학적인 여행을 떠나야 한다. 우리의 항해는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선한 신학적 양심을 가지고 이 논쟁에 활력 넘치는 참여를 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실체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줄 수 있다.

나는 어떻게 나의 이미지가 신학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개념으로 번역될 지, 그리고 어떻게 이러한 개념들이 교회가 자신들의 상황에서 마음에 품을 수 있고 행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현실적인 전략들을 조명할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른다. 단지 이 시점에서는 진부한(ready-made) 해답을 제안할 준비가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다. 내 생각에는 이렇게 말하는 정도가 좋을 것 같다. 말하자면, "냉정히" 준비된 제안은 종종 비판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현재 있는 곳에서 우리가 있고 싶은 곳에 이르기까지 함께 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몇 가지 공통적인 질문들을 제기해 보도록 계획되었다. 나의 제안은 우선 그 질문들을 잘 정하고, 그 다음에 오랜 기간에 걸쳐 함께 일하며 우리들의 다양한 지역 혹은 국가 상황에 적합한 해답들을 찾자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인 접근 방식은 미국의 법학자 Ronald Dworkin이 "안에서부터 바깥으로의 철학"(philosophy from the inside out)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우리는 구체적인 상황들로부터 공평하게 구체적인 결론으로 나가는 논증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 여행을 오늘 혹은 내일이면 끝낼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도중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신학이나 윤리학, 사회학, 사회 철학,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법률의 이슈들을 논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단지 우리가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경우와 간단히라도 언급해야 하기에 설득력이 필요한 경우에만 그렇다. 때때로 우리가 전문적인 철학적 문제를 다루게 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근본적인 인간적 중요성이 지니고 있는 이슈로 시작하고 초점이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현대 정치 철학의 맥락에서 일반적인 시민 사회 이론을 구성할 필요는 없다:이는 서로 다른 입장들과 그들을 지지하고 변형시키거나 혹은 반대하는 문헌들 속에 나타나는 무수한 시도들에 대한 끝없는 논의에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가로지르는 참여적 민주 사회를 다시 닦아 윤을 내거나 혹은 새롭게 세우는 시도 속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역할의 실천적 질문들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 후에 이러한 실천적인 관심에 연루되는 것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더 커다란 이슈들이 제기될 필요가 있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시민 정책들의 현실적인 상황들을 보고, 서로 다른 문화적 관점에서 나오는 범세계적 정치 상황에 대한 진단을, 그리고 사회적 질병을 만나는 데까지 뛰어오르는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운동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구 "시민 사회" 사유의 이러한 필요들에 대한 적합성을 이의 역사와 질문의 현 상태에서 조사해 볼 수 있다. 그 방법을 따라서, 우리의 교회와 그들의 사회적 사유의 조건, 종교적 삶의 관점들에 대한 현재 정치 철학과 사회 철학의 개방성의 정도, 변형된 의사 소통 이론에서의 종교적 사유와 사회적 사유의 결합 가능성, 그리고 이러한 결합을 공적인 중요성에 대한 도덕적 질문들과 연관지어 시험해 보는 가능성 등을 고려하여야 한다. 결국에는, 성격에 있어서는 숨김없이 신학적이며 사회적 비전, 곧 사랑 받는 공동체의 비전(a vision of the Beloved Community)에 이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작업의 첫번째 부분은, 현실적이 되려면, 신학적인 양식 뿐만 아니라 "종교적 연구" 내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내적으로 동기를 유발시키는 요소들로서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제시하는, 실재 속의 재료들로서 교회 그룹들 안에서 발견되는 헌신과 사유의 종류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의미로는 다른 이들이 우리를 보듯이)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동시에, 우리는 인문 과학의 범주들을 그들의 철학적 기초에까지 밀어붙이는 대담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는 이러한 영역들의 밑을 떠 받히는 가정들이 어느 범위까지 종교적 형성과 동기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허용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공공 신학(a public theology)의 양식에서 함께 생각해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공공 신학이란, 궁극성의 상징을 사용하나 또한 이의 주장들에 대해 공적으로 협상 가능한 근거를 추구하는 담화의 형식을 말한다. 우리는 이 신학적인 작업을 반드시 이를 짊어지기 위해 가져올 수 있는 철학적인 엄격함과 함께 행하여야 한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개신교 기독교의 종교 전통의 관점­그 자신의 역사와 다른 종교 전통에 대한 개방성 이 양쪽에서 이해된­에서 작업해야 한다. 우리 작업 안에는 반드시 공적인 의미에서 신학적일 뿐 아니라 공동체적이고 개인적인 고백적 요소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궁극적 헌신은 강력한 것이다. 그것들이 명시되어야 한다는 것은 정언 명령이다.

Ronald Dworkin은 중력이 어느 쪽으로든 이미 알려져있는 행성들의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발견되지 않는 행성들"에 대해 쓰고 있다. 따라서 그것들이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든 간에 의론적으로 움직여 가는 것은 우리의 존재에 아주 기본적인 이러한 전제들과 함께이다. 모든 인간 존재는 인간의 역사를 뚫고 달려가는 목적에 대한 궁극적인 가정들과 더불어 인간의 시민성의 영역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시민 사회는 그러한 가정들이 수행된 결과들이 서로 만나게 되는 공간이다. 이 주제에 관심 있는 모든 작가들은 자신의 기본적인 관심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작가들이 매순간 펜을 종이에 대는 순간, 속에 숨어 있든 그 자체로 인식되는 간에, 그들은 현재한다.

시민 담화에 중심적인 신뢰의 요소는 회피할 수 없는 신학적인 차원들을 지니고 있다. 기초가 잘 닦인, 정당화된 신뢰 위에 근거한 시민 사회의 회복과 확장은 이것이 시민적인 것인 만큼 종교적인 추구이다. 인류의 비전에는 인간이 능동적인 책임성 속에서 성취되는 영역인 도덕적 질서로서의 거룩한 특성이 존재한다. 이것은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을 밑에서 떠받치는, Hannah Arendt가 말하는 개인의 헌신의 중심이다. 나는 이것이 종교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정식 속에 나타난 충분한 단서들을 고려한다면, 그녀가 동의하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거룩성에는 Arendt가 보았던 것 이상이 있다. 인류의 담화는 자기 반성적 상징화의 영역이다. 이 안에서 우주는 최소한 그 자신의 제한된 자각에 도달한다. 인간의 포괄적인 행복, 곧 공동선의 추구는, 그러므로 역사 안에 존재하게 되는 이러한 자의식의, 요구된 도덕적 근거이다. 역사의 궁극적 목적에의 인간의 참여는 이 선의 실현에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 선은 거꾸로 우리의 제한된, 그러나 존재(Being)에 대한 인간적 암시의 진정한 자각에 필수적이다. 그러면 민주주의에는 신학적인 목적이 있다. 자신들의 자각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보이는 사람들의 출현은, 진리의 집단적인 상징화가 마찬가지로 존재할 것이라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시민 담화의 궁극적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또한 동반자로서 서 계신 그분(One who stands as Partner)을 대화 안에 그리고 그 대화 너머에 모셔 놓을 필요가 있다:그 분은 현재와 시간의 끝에서도 대화자(an Interlocutor)가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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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명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