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2/29(수)
[21세기] 기독교신학, ­아시아적 재구성을 향하여­  
송 천 성(C. S. Song)


21세기!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더 실감나게 들리며, 한 달 한 달이 지날 수록 더 가깝게 다가온다. 이제는 거의 손이 닿을 듯한 곳에 와 있으며, 카운트다운은 이미 시작되었다. 점쟁이들은 임박한 미래의 징후들을 찾기 위해 유리 구슬을 들여다보고 있다. 자칭 종말 예언자들은 세계의 종말에 관한 경고들을 발하고 있다. 기독교의 일부 교회들까지도, 현대 에큐메니즘의 정력적인 선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J. R. Motto의 유명한 모토를 사용하면서, 마치 새로운 세기가 "이 세대의 세계를 기독교화"할 수 있는 마술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듯이, 새로운 세기의 시류에 편승해 왔다. 20세기의 끝이 임박했다는 것에 대해 갑작스럽게 눈이 뜨인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이 시기는 "종말론적" 시기이다.

그러나 아마도 2000년도 왔다가 지나갈 것이다. 우리 중 일부를 사로 잡아 온 기독교 선교의 열풍도 사라져 갈 것이다. 그러한 예언들과 마지막 날에 대한 예고들도 잊혀질 것이다. 세상은 다시 20세기의 마지막을 향해 오랜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비록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진보를 일사천리로 이루어 갈 것이라고 해도, 우리 인간 존재에 관해 신앙과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 현자(wiser)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교회, 특히 아시아의 교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기회 뿐 아니라 위험까지 등에 업고 빠르게 접근해 오는 21세기의 문턱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 과연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2000년도에 관한 "종말론적" 관심은 차치하고라도, 특별히 기독교에 있어서 21세기는 진지함(soberness)과 자극(excitement)의 시대이다:진지함인 까닭은, 세계의 종교 지도가 다시 그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야만 하기 때문이고, 자극인 이유는 새로운 종교 지도는 진정 뜻밖의 일(surprises)과 새로운 가능성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교회에게 있어서 21세기는 비탄과 조정의 계절이다:비탄인 이유는 세계를 "기독교화" 한다는 야심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요, 조정(adjustment)인 이유는 수 세기 동안 지속된 인생관과 세계관이 쓸모 없게 되어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이 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기독교인들에게 21세기는 에큐메니칼 지평을, 즉 우리가 전에는 우리의 신앙과 신학 안에서 진지하게 평가해 보지 않았던 그러한 민족과 민중과 더불어 하나님의 방식들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는 에큐메니칼 지평을 확장하는 시대이다. 기독교의 미래가 타종교의 미래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과, 교회의 복지는 교회 주변의 더 큰 공동체의 복지와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과, 기독교인들과 이웃들은 삶의 의미 추구와 이를 성취함에 있어서 이 땅 위에서 함께 길을 가는 동료 순례자들(fellow pilgrims)이라는 사실이 분별력 있는 기독교인들에겐 점차로 명백해지고 있다.

우리 시대와 같은 시대는 과거와는 다른 교회의 자기 이해를 요청한다. 이것이 바로 16세기의 종교개혁이 교회에게 강요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이같은 시기는 아시아의 기독교인들에게 우리가 선조들로부터 상속받은 신앙을 재검토하라고 도전한다. 이것이 바로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이 착수했던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그러한 시대(era)는, 하나님이 어제의 세상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세상 속에서 행하고 계시는 것을 향해 열려져 있는, 그러한 기독교 신학을 재형성하고 재구성하는 일에 기독교 신학자들이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개혁된 신학자들이 자신의 신학적 과제에 관해 취해야 할 방식이 아니겠는가?

아시아의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 특히 개혁 전통을 따르는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 의해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형성된 세계에서 기독교 신학을 수행해야 할 힘든 과제를 떠맡고 있다. 우리는 전통 신학이 수 세기 동안 자기 일을 진행해 왔던 방식을 문제 삼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대안도 갖고 있지 않다. 단지 동료 아시아인들과 더불어 공유하고 있는 세계로부터 들려 오는 소리를 경청할 뿐이다. 우리 중 일부는 우리의 성서 메시지와 아시아 세계 사이의 비판적 상호 작용들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 공동체 안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관한 우리의 경험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해 왔다.

우리의 이러한 "신학적" 경험들은 우리가 기독교 신학을 수행하고, 기독교 교회의 본성과 과제를 이해하고, 아시아에서 기독교 신앙을 실행하는 방식에 있어서 일정 부분의 근본적 변화들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놀라운 일들과 신선한 통찰력을 약속하는 신학적 여정­비록 여전히 분명하게 계획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 을 이미 시작하였다. 다음의 내용은 기독교 신학이 어떤 과정을 통하여 아시아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하나의 노력이다.


성서에 따르면?

우선 다음의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대부분의 아시아 기독교인들은 "같은 침대에 누워 있지만, 꾸는 꿈들은 서로 다르다(thun chhuan yi meng)"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는 중국식 표현이나, 신앙과 종교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과는 다르다는 것이 우리의 신념이다. 그러나 만일 그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의 진리는 오직 우리에게만 계시된다는 것이 우리의 확신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진리가 또한 다른 이들에게도 계시된다면? 우리는 구원이 우리처럼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신앙을 양보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우리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구원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구원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거나, 혹은 적어도 예수가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면?

이 마지막 물음은 기독교인인 우리에게 주어지는 물음 가운데 가장 비판적인 물음이다. 말하자면, 그 물음은 핵심을 찌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을 한다;그러나 그 하나님이 과연 예수의 하나님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한다 ; 그러나 그 이름이 과연 예수의 하나님의 이름인가? 우리는 우리가 믿듯이 믿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을 전하고 하나님의 권위로 그렇게 믿지 않는 이에게는 심판을 전한다 ; 그러나 그 신적인 권위가 과연 예수로 하여금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바로 그 권위란 말인가? 하나님은 늘 우리편이지 다른 이들의 편은 아니라고 우리는 믿는다 ;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은 때로 우리보다는 다른 이의 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 일인가?

기독교인 대부분은 늘 이런 방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그런 물음들을 자주 제기하지도 않는다. 바로 그 전형적인 사례가 인도에서 일어난 다음의 일화이다.

한번은 간디주의 지도자가 코히마에 왔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교제를 가졌다. 내가 그의 곁에 앉았는데, 그는 내게 종교적인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인간은 오직 기독교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으며, 다른 길은 없다고 말하는 일부 극단적 기독교인들이 있소이만, 당신 생각은 어떻소?"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는 성급하게 다시 물었다. "세상의 다른 주요 종교들에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럼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거요?" 나는 다시 응답했다. "성서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멸망할 겁니다." 그는 화가 나서 자리를 뜨고 말았다. 우리가 이를 좋아하건 안하건 간에, 진리는 양보될 수 없다는 것이 내 확신이다.

이 이야기를 대하니, 내가 1992년 11월에 베트남의 호치민 市에 있는 불교학교(Buddhist Institute)의 교수들과 가졌던 모임이 생각난다. 우리는 많은 사항들에 관해, 즉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에 불교가 감당했던 역할로부터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 경전들을 베트남어로 번역한 일, 그리고 베트남에서의 사회 정치적 변화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또한 당연히 기독교와 불교의 관계를 다루었다. 80세가 넘어 보이고 그 기관의 長 이기도한 덕망 있는 한 승려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침착하게 내게 물었다:"왜 기독교인들은 그토록 호전적으로 불교도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시키려 애쓰는 것이지요?" 그는 실제로 단순한 질문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었겠는가? 겉으론 태연했지만 마음 속 깊이 고통에 가득차 이렇게 대답했다:"일부는 호전적이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랍니다."

위에 언급했던 이야기에서, 간디주의 지도자는 자신을 영접했던 기독교인들은 우호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와 교제를 나누었다. 그들은 그에게 일격을 가함으로써 개방적이고 친절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 지도자는 여전히 그의 보호자(guard)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그 이야기를 전한 기독교인과 대화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말했다:"인간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을 뿐, 다른 길은 없다고 말하는 일부 극단적인 기독교인들이 있소이다." 그는 그 말을 신중하게 했음에 틀림없다. 그의 목소리의 톤은 주저하는 듯한 것이었다. 그는 대결이나 논쟁, 혹은 말다툼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호치민 市의 덕망 있는 승려처럼, 그는 단지 어떤 관찰적인 평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일부 극단적인 기독교인들"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의견을 제한하였다. 어느 종교에나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 속에서 어떤 선한 것을 찾기를 거절하는 "극단적인" 신앙인들이 있다. 그 간디주의 지도자는 아마도 "극단적 힌두교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인 최초의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극단적 이슬람교인들"도 있다. 바로 이 사실이야말로 아시아의 남부 대륙에서 힌두교인들과 이슬람교인들 간의 반목과 갈등이 종종 피를 불러 온 이유이다. 그러나 힌두교인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극단적인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 중 일부가 그러할 뿐이다. 이슬람교인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극단적인 것은 아니다. 역시 그들도 일부만이 그러할 뿐이다. 그것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일부 극단적인 기독교인들이 있고, 그들은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을 뿐, 다른 길은 없다고 말한다"고 그 간디주의 지도자는 말했다.

일부 기독교인들, 사실은 우리 대부분이 그렇게 믿는다. 이 점이 바로 종종 기독교가 다른 신앙과 다른 종교의 사람들을 향해 취하는 불관용의 사례가 된다. "네 생각은 무엇이냐?" 그 간디주의 지도자는 기독교인인 대화 상대자가 그 점에 관해 취하고 있는 입장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궁금해했다. 아마도 그는, 해명에 불과할지라도, 어떤 설명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설명해야할 것이 많이 있다. 바로 이 점이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신앙의 핵심이 된다. 그들은 자신의 손 안에 쥐고 있는 구원, 바로 그 구원의 수령자들에게 설명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 대화에서 그 기독교인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은 듯 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믿는 바입니다"라고 그는 선언하였다. 그는 자신의 확신을 진술하고 자신의 신앙을 재확인하여, 그 간디주의 지도자에게 "전도"할 기회를 붙잡았다. 그래서 그 대화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의 "선교" 의식이 발동하였다. 그는 자신이 그 간디주의 지도자를 환영하는 파티의 주인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심지어 그에게는 그 파티가 적대감으로 끝난다 할지라도 별로 중대한 문제가 아닌 듯 했다. 이것이 그때 일어났던 사건의 전말이다.

그 기독교인의 응답은 간디주의 지도자를 놀라게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그런 말을 여러 번 들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말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이 과연 조리 있는 것이며, 그러한 확신이 과연 현실적인 것이며, 그러한 신앙이 과연 이성적인 것이란 말인가? 그 간디주의 지도자는 알기를 원했다. "세계의 다른 종교들에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있소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통계를 인용함으로써 더 간결하게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82년에 만들어진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14억 명이고, 이슬람교인은 7억 2천 4백만명이고, 힌두교인은 5억 8천 3백만명이고, 불교인은 2억 7천 8백만명"이라고 한다. 만일 유교인들과 神道교인들(Shintoists), 자기 조상들의 의식과 원시 종교와 샤머니즘을 따르는 사람들까지도 계산에 포함시킨다면, 세계 인구의 3분지 2 이상이 기독교인들이 아니다. 그들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라고 그 간디주의 지도자는 물었던 것이다.

이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단 한 사람의 말도 진지한 것이며, 단 한 사람의 마음도 중요한 것이다"(yu chung sin ch'ang)라는 중국의 경구로 묘사될 수 있는 그런 물음이다. 현세에서는 고통 당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일지도 모르지만, 내세에서는 운명의 변화를 갈망한다. 이것은 대부분의 아시아인들, 불교인이든 유교인이든, 힌두교인이든 혹은 이슬람교인이든, 심지어 기독교인에게도 해당되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극단적인 기독교인들"이 확언하듯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구원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들에게는 구원이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삶을 의미한다면, 그렇다면 아시아의 대다수의 민중들, 혹은 온 인류의 3분지 2이상이 넘는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간디주의 지도자는 이를 알기 원했다. 그것은 단순히 호기심의 문제이거나 기독교를 논박하려고 제기된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사실에 그가 놀라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진지하게 관심을 가진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관심은 전해져야만 한다. 그의 불안은 진정되어야 한다. 그의 물음이 오직 자비롭고도 민감하게 논의되었어야만 옳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대화에 임하는 기독교인들은 오직 남을 비판하는 일에만 급급한듯이 보인다. "성서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멸망할 것이다"라고 그는 천명하였다. 이것은 최후 통첩이요, 기정 사실(fait accompli)을 천명하는 것이요, 평결을 공표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배타적인 것이요, 이 결정은 최종적인 것이다. 더 이상의 논의는 필요치 않다. 더 높은 권위를 향한 어떤 호소도 허락되지 않는다. 이 문제(matter)는 지상에서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간디주의 지도자는 첫째로 충격을 받았고, 그리고 나서 격노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화가 나서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어느 누가 그 경우에 그렇지 않았겠는가? 적어도 그는 더 이상의 대립을 피하기 위해 옳은 행동을 취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기독교인은 "성서에 따르면"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성서의 어느 부분을 말하는 것인가? 그 부분에 대해 누구의 해석을 따른다는 것인가? 그것은 "문맥을 벗어나 인용된 (중국어로는 tuan chang chu yi)" 것인가 아닌가? 사실상, 그리스도 밖(이것은 기독교 밖을 의미한다)에서는 어떤 구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성서는 거의 언제나 문맥을 벗어나 인용되고 해석된다. 그런 주장을 하는 기독교인들은, 많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바로 그 (동일한) 성서 안에 과연 다른 통로들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묻기 위해 멈추는 법이 없다. "성서에 따르면"이라는 말은 너무도 일반적이어서, 어떤 확정된 의미를 갖기 어렵다. 이는 또한 매우 무책임한 말이다. 어떤 구절이 구원과 영생 같은 진지한 문제들과 관련된 것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일반적이고 무책임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예수 이전 시대의 사람들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수십 억에 달하는 사람들 -은 영원히 멸망할 것이라고 선고하는 그들의 하나님은 과연 누구인가? 그 하나님이 과연 예수의 하나님이란 말인가? 혹은 예수의 하나님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하나님을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위에 언급한 이야기 속의 기독교인은 그러한 물음들은 전혀 묻지 않는다. 간디주의 지도자가 화가 나서 떠나 버리는 것을 보면서도, 그 기독교인은 당황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그는 후회하는 듯한 인상도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확신했다. "내 확신은,우리가 그것을 좋아하건 안하건 진리를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요"라고 그는 말했다. 물론, 그 누구라도 진리를 양보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누구의 진리란 말인가? 하나님 자신의 진리란 말인가? 예수가 선언한 진리란 말인가? 혹은 특정한 기독교 교회의 진리란 말인가? 특정한 기독교 교파의 진리란 말인가? 특정한 집단의 기독교인들에 의해 주장된 진리란 말인가? 그 기독교인 자신의 진리 이해란 말인가?

우리가 이 기독교인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다시 중국말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한 사람일지라도 올바르다(li chi ch'i chuang)는 확신과 지식을 가지고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 이다. 그러나 누가 그에게 그가 정확하다고 말하였는가? 기독교의 특정한 전통이 그에게 그렇다고 말하였다. 그가 속한 특정한 교회가 그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만일 그 전통과 그 교회가 전적으로 옳지 않다면 어찌할 것인가? 만일 예수 자신이 그것을 불법이라고 간주하신다면 어찌할 것인가? 만일 하나님이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기독교인들에게 좋은 톤(Good Tone)?

완고한 신앙과 양보를 모르는, 그렇게도 독특한 태도는 차치하고라도, 동서구의 기독교인들과 신학자들에게는, 서구인들이 불교인과 유교인, 혹은 이슬람교인이, 자신이 태어난 땅 안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와 개인적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 왔던 장소인 서구 사회 안에서도 역시 그들 나름의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점점 더 명백해진다. 단지 기독교인들인 그들은,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우주 안의 인간 공동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구성원을 이루고 있다.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다원주의 세계에 매혹된 채, 그러한 다원주의 세계를 향해 개방된, 그리고 자신들의 신앙을 실천하는 대안적인 방식을 실험하기를 열망하는 일부 기독교인들과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새롭게 발견한, 다른 신앙을 가진 친구들과 이웃들과 더불어 제2, 제3의 마일을, 심지어 몇 마일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가고 있다. 많은 신들과 많은 주님들(lords)의 세계는, 그들의 기독교적 민감성을 해치거나 그들의 기독교적인 정통성을 반박하는 대신에, 다른 형식의 예배와 명상을 가지고 실험하도록 그들을 초대하고 있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버링겜에 있는 로마 가톨릭의 자비 센터(Mercy Center)에서 명상 센터를 책임지고 있던 예수회 소속의 어느 사제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여기에 있다. 그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자신의 "주된 연구 영역은 마하야나 불교, 특별히 선 불교"였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진지하게 바라야나 불교와 고전적 도교(Lao Tzu and Chuang Tzu)를 연구했다." 이러한 그의 多종교적인 경험과 배경은 그의 센터에서 그가 행하려 하는 것을 특징짓고 형성하고 있다. 그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외적이고 육체적인 것(the external and the bodily)을 가지고 시작하기 때문에, 이 곳 자비 센터에서 명상의 대부분이 행해지는 주요 장소는 장미실(Rose Room) 이다(동방에선 연꽃이 그러하듯이, 서구에서는 소위 개화된 장미꽃이 계몽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벽 표면에는 중국과 일본 간의 표의문자들로 쓰여진 선불교의 경구들(Zen sayings)이 있는 일본의 시키히(shikihi, 세련된 정사각형 종이)가 걸려 있으며, 도교 그림 두 점과 도쿄의 코류지에서 가져온 미로쿠 부샤추의 그림 한 점이 걸려 있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있으며, 그 방에 좋은 톤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주요 자리와 중심부 장식으로는 십자가가 놓여 있다. 얼마 안가서 이 십자가는, 단순성과 감각에 있어서 불교의 彫像으로부터 영향받을 것이 분명한, 명상에 잠긴 그리스도 像에게 그 길을 양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예상된다.

이러한 기독교의 명상 센터 안에 있는 불교적 이미지와 상징들은 어떤 세팅과 분위기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들은 예배드리고 명상하러 오는 기독교인들을 위해 "좋은 톤"을 만들어낸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들었듯이, 기독교의 주요 상징인 십자가가 중심에 있다. 우리가 듣지 못한 것은, 그 센터에 오는 기독교인들이 불교적 이미지와 상징들로 둘러싸인 십자가를 보며 과연 어떻게 명상할 수 있는가이다. 기독교와 불교의 주요한 종교 상징물인 십자가와 연꽃이 어떻게 그 자비 명상 센터의 신학에 있어서 서로에게 상호 작용을 하고 있는가? 그것들은 서로를 특징 지우고 있는가? 그러나 그것들이 서로에게 특징 지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서로를 풍요롭게 하고 있는가? 그러나 그것들은 어떻게 서로를 풍요롭게 하고 있는가? 그것들은 서로에게 비판적인가? 그렇다면, 십자가가 연꽃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것은 무엇에 대해서이고, 연꽃이 십자가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것은 무엇에 대해서인가? 그들은 서로에게서 부족한 어떤 것을 발견하고 있는가? 서로가 서로에게서 발견해 내는 부족한 것이란 어떤 것인가? 십자가와 연꽃은 각각 커다란 종교적 문화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영적인 추구의 깊은 우주가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오랜 역사가 그들 각각의 뒤에 숨어 있다. 그것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바람들이 생겨났었고 좌절되었던가!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려졌으며,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사라져 갔던가! 감각적인 파악을 뛰어넘는 그 어떤 것 속으로 들어갈 능력이 있는 종교적 마인드 때문에 십자가와 연꽃이라는 이 상징들은 교훈적인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고통스런 이야기들을 말하고 있으며, 희망 속에서처럼 절망 속에서도 외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들이, 비록 종교적 이미지와 상징을 단순히 장식물로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할지라도, 단순한 장식물에 불과한 종교적 이미지와 상징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 이상을 물어야 한다. 사람들이 예배와 명상 때 느끼는 종교적 의식 속에서, 불교의 이미지와 상징들의 한가운데서 십자가는 어떻게 인식(perceive)되고 있는가? 십자가는, 동방에서 연꽃이 그러한 것처럼, 서방에서 계몽의 상징인 "개화된 장미" 때문에 놀라움과 고통이 감소한다는 말인가?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십자가는 예수가 그 위에서 고통스럽게 죽었던 그 십자가보다 열등한 것이 되는 셈이 아닌가? 또한 그 명상 센터에는 "미로쿠 보사츄의 그림 한 점"이 있다. 예배자들이, 평화롭고 자비로운 특색을 지닌 그림 마이트레야 보드히야타바 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의 경련을 겪으며 육체가 뒤틀린 채 수척해 있는 예수 사이의 명백한 대조를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들은 양 방향에서 실패하고 있지 않는가? 즉 한편으론, 고통의 세계에 있는 모든 만물들을 향해 보드히사트바가 가지고 있는 자비뿐만 아니라 고통을 이해하는 데 있어 실패하거나, 다른 한편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는 예수의 고통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파악하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기독교적인 명상 센터에서, 서구 안에서의 동양의 만남을 지향하는, 호의적이고도 심지어 순진하기까지 한 노력으로 여겨지는 것 안에는, 위에서 물었던 것과 같은 그러한 어떤 근본적인 신학적 물음들은 제기되지 않는 것 같다. 그 센터의 사람들은, 종교 다원주의가 갑자기 우리를 엄습할 때와 같은 그러한 때에 유행하는 양식인 배타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포괄적이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다른 종교들의 이미지와 상징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제공하는 전부 라면, 이는 그것들을 오용하거나 남용하는 것이다. 원래의 불교적 세팅들로부터 뽑혀나와 "색다른" 기독교의 세팅에 옮겨진 채, 그들은 본래 자신들의 모습 -즉 특정한 사회적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해방을 위한 인간 영혼의 투쟁의 표현이 되기를 멈추고 있다. 그리고 경우에는, 그들은 자연과 인간에 의해 고통과 곤궁을 겪으며 수 세기를 살아온 아시아의 인간성(humanity)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이 되고 만다. 그것들은 오늘날 가난 혹은 풍요함 속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계속하여 추구하는 아시아의 여성들과 남성들과 어린이들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져 버리게 된다. 그러한 종교적인 이미지들과 상징들은 아시아 민중들의 영적인 여정, 즉 그들을 현재의 그들(what they are)로 만드는 그러한 여정으로부터 분리되어 왔다.


"내 마음 속에는 아무런 예수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종교적 신앙은 한편으로는 신적인 것에의 위임(commitment)의 문제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위임에 의해 고취된 인간적인 창조성의 문제임에 틀림없다. 각각의 종교 이미지와 상징은 예외 없이 신앙인과 신앙 공동체의 위임과 창조성으로부터 생겨난다. 어떤 종교적 이미지와 상징도 그것이 진정한 것이라면 단순히 어떤 장식품으로 착상되거나 혹은 어떤 장신구로 고안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좋은 톤"을 예전적인 목적과 명상적인 목적에 공급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 안에서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최고의 상징인 십자가에 대해 그런 식으로, 즉 그런 수단으로 행해져 왔다. 교회 건물의 지붕 위에서 번쩍이는 십자가나 혹은 교회의 제단 벽에 걸려 있는 화려한 십자가는 본래의 십자가가 갖고 있는 찔린 상처(sting)를 퇴색시켰고, 결국 본래의 십자가를 자극 없는(innocuous)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은 기독교 교회의 십자가일 수 는 있어도 예수의 십자가는 분명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깊게 상처받은 민중들의 영혼과 마음에 말을 걸 능력이 없다.

아시아의 일부 기독교 예술가들은 그런 사실을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아시아의 종교에 풍부하게 나타나 있는 이미지들과 상징들의 경외스런 힘에 깊이 매혹되어 있다. 그들은 다음 사실을 잘알고 있다: "아시아는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의 중심으로 남아 있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불교, 신도교와 많은 소종교들이 아시아의 토양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그런 종교들은 여전히 사회에 대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한 세팅 속에서 기독교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다른 종교들의 예술 형식들과 이미지들과 절충함을 의미한다. 아시아의 예술가들은 서양의 예술가들이 숙고조차 해보지 않은 많은 문제들과 씨름하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 예술가로서 자신들에게 기대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기독교 복음의 메시지를 표현하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종교들의 형식들과 이미지들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의 기독교 예술가들에게는, 종교적 형식과 이미지라는 두 개의 우주가 서로 함께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형식과 이미지. 그러나 다른 종교의 형식과 이미지가 의미,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명백한 의미가 아니라 다른 종교의 오랜 전통 속에 깊이 새겨져 있으며, 그 종교의 신앙인의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는 어떤가? 아시아의 기독교 예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나는 때때로 그런 작품들의 일부가 과연 그러한 형식과 이미지들에 의해 상징화된 내적인 의미를 희생시키고 다른 종교의 형식과 이미지를 외적으로만 재생산해 왔는지의 여부를 생각하게 된다. 전통적인 기독교 예술의 형식과 이미지들을 아시아 종교들의 작품으로 대체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명백히 아시아적인 것과 아직은 뚜렷이 기독교적인 어떤 것을 종교적 의미라는 다른 우주와의 만남(encounter)으로부터 창조해 내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일이야말로 창조적이고 독창적(original)인 것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예술가들이 진지하게 고려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시아의 기독교 예술가는 이제 막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기독교 예술을 표현하기 시작한 단계에 와 있다. 그들에게는 아직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 신앙인들의 삶과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는 인간의 영적인 우주, 곧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인간의 마음과 영혼의 복잡성(complexity)을 꿰뚫을 수 없는 정신(mind)으로는 파악이 불가능한, 그러한 우주가 갖고 있는 신성불가침의 것(holy of holies)을 관통하려고 노력해야 할 숙제가 바로 그것이다.

예술가가 종교적 헌신의 외부적 형식들은 개작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종교적 헌신의 내부적 의미들은 예술가의 이해의 범위를 벗어날 수도 있다. 이는 기독교의 세계와 다른 종교의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기를 갈망하는 일부 아시아의 기독교 예술가들에게 나타난다. 그러나 육감과 경험에 의해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예술가들이 교회의 밖에도 존재한다. 다음은 일본에 머무는 동안에 일본의 거장 목각사(巨匠 木刻師, master woodcarver)와의 만남에 관한 어느 화란 선교사의 이야기이다.

일본의 북쪽에 있는 호카이도 섬의 동쪽에, 높은 산들과 울창한 원시림으로 둘러싸인 아칸(Akan)이라는 호수가 있다. 많은 솜씨 좋은 아이누 족과 일본 조각사들이 그 호수의 경계를 이루는 아탄이라는 작은 마을에 살며 일하고 있다. 우리 선교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목각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일정 부분 선교 하기를 희망하면서, 1969년 여름에 그곳으로 갔다. 그러나 그들이 너무도 바쁜 것 같았기에 우리는 그들의 가게에서 그들을 돕기로 자원하였다. 나는 거장 기예가인 목각사 타다오 니시야마의 가게에서 마루를 청소하고 박스들을 우체국으로 나르는 등등의 일을 하였다. 나는 그의 작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나는 그에게 예수의 머리를 조각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흔쾌히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한 달이 흐른 후에 그는 내게 예수의 그림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결국 또다시 한두 달이 흐른 뒤에 그는 내게 조각칼을 넘겨주며, 당신이 예수의 머리를 조각하라고, 내 마음 속에는 아무런 예수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생소하지만 얼마나 뜻깊은 이야기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기독교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을 분리시키는 경계선들을 뛰어넘으려 애쓰는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 해준다.

왜 타다오 니시야마는 자신이 거장 기예가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머리를 조각할 수 없었는가?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는데도, 왜 처음엔 그 일을 하겠다고 동의했는가? 그는 예수의 머리를 나무 조각에 조각하는 일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었음에 틀림없다. 그가 자신이 종교적인 계획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시 한 달이 흐르면서 그의 마음은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는 많은 시도를 해보았음에도 예수의 머리를 생각해 낼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왜 그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일로 판명되었는가? 그는 적어도 일본의 기독교인들에게 유사하게 여겨지는 어떤 막연한 예수의 아이디어조차도 갖고 있지 않았단 말인가?

만일 예수에 대해 가진 그의 아이디어가 신뢰할만한 것이 아니라는데에 그의 문제가 있었다면, 그는 예수의 머리를 조각해 달라고 그에게 요구했던 그 선교사에게 예수의 그림을 요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그에게 주어진 예수의 그림을 가지고서 그는 자신의 작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한 달이 지나갔음에도, 그는 여전히 예수의 머리를 조각해 내지 못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그 그림을 응시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하여, 자신의 계획을 실행해 나갈 방법들을 모색했음에 틀림없다. 결국 그는 예수의 머리를 조각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감수성과 창조적 상상력을 가동시켰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결국 그는 여전히 빈 손으로 돌아와서는 그 선교사에게 말한다:"대단히 미안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아무런 예수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소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짧은 한 문장으로 말하였다. "내 마음 속에는 아무런 예수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것은 변명이 아니었으며, 설명도 아니었다. 그것은 고백이었다. 자신의 예술에 몰두한 거장 기예가 이었기에, 그는 예술이란 것은 단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이며, 단순히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것을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구체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음에 틀림없다. 그에게 그것은 그의 머리 속에 있는 예수의 이미지를 형성하거나, 그것을 나무 조각 위에 베끼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었기에 그는 예수를 자신의 마음 속에 이미지化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예수의 그림조차도 그에게 거의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는 너무 훌륭한 예술가였기에, 다른 종교의 세계로부터 온 어떤 것을 재생산할 수 없었다. 그것을 모방하는 일 조차도 신성모독이 될 셈이었다. 그는 창조적 예술이 가진 영적인 힘을 너무도 정직하게 믿는 사람이었기에, 마음 속에 형성되지 않은 이미지를 조각해 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너무도 민감하였기에, 그는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의미하는 바를 잡지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리스도가 갖는 깊은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도저히 그것을 파악할 수 없었다. 예술가로서의 자신과 기독교의 신앙과 헌신의 주체이신 그리스도 사이의 영적인 교섭 없이는 그는 그리스도의 머리를 조각할 수 없었다. 그는 그 기독교 선교사에게 조각칼을 넘겨주며 이렇게 말했다:"당신이 그리스도의 머리를 조각하시오. 내 마음 속에는 아무런 예수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소."


종교들의 한복판에 있는 기독교 신학

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아시아의 기독교 예술가들과 신학자들에게, 우리는 종교의 이미지와 상징들, 그것이 기독교의 것이건, 불교 것이건, 힌두교 것이건 간에, 그것들을 소홀히 다룰 수 없음을 말해 준다. 종교의 이미지들과 상징들은 우리 내부에 깊은 존경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것들은 또한 그들 안에 간직되어 있는 신비를 우리에게 생각나게 해준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 존재의 깊이로부터 나오는 빛의 불꽃을 감지하도록 하며, 그 빛의 불꽃에 숨겨지는 어두움을 감지하도록 만든다. 그것들은 한편으로는, 삶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의 능력을 예증해 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간과 시간의 제한 속에 갇혀 있는 인간 존재의 무상함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그것들은 인간이 가장 큰 황홀경을 겪을 수 있으며, 또한 가장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음을 드러내 준다.

종교적 이미지들과 상징들 모두는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 존재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한다. 종교적 이미지들과 상징들이 독자들 목전에서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낼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여러분은 그들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사실상 그들은 외부의 침입자(intruder)에게 드러내려고 하기보다는 훨씬 더 자신을 숨긴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종교적 리얼리티에 대해 눈이 깨어 있는 우리 아시아의 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딜레마를 제공한다. 우리 자신의 땅과 민중으로부터 괴리된 기독교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일부분으로서 어떻게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가? 기독교의 문화와는 다른 종교의 문화에 의해서 형성된 사회 안에서, 예수와 하나님과 성령과 교회와 교회의 과제와 선교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make of)할 것인가? 그것이 어떤 역할이든지간에 만일 있다면, 우리의 동료 아시아인들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경험들은 우리가 기독교 신학을 행함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해, 우리 아시아 기독교인들은, 비록 그 시작과 발전 과정에 있어서 기독교와 관계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정체성과 신분(who we are and what we are)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문화와 종교와 역사의 세계 안에서 어떻게 우리의 신앙 이야기들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신학적인 딜레마를 자각하는 일은, 아시아에서의 기독교 신학하기 작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 딜레마로부터 벗어나는 쉬운 길은 없다. 기독교 신학을 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이며, 교회 안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의 삶과도 연대(engagement)하는 것이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뿐만 아니라 더 넓은 인간 공동체 안에서도 하나님의 백성과 상호 작용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이 딜레마는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기독교 신학을 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며, 민족들과 민중들의 주인이시며,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전체 피조물의 궁극적인 목적을 쥐고 계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우리와 관계된 이 신학적 딜레마는 해결될 수 없다. 그러나 그 딜레마는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인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뛰어넘어 우리의 신앙의 지평(horizon)을 끌어올리도록 요구하며, 우리의 신학적 영역을 확장하도록 하며, 하나님이 자신들을 어떻게 취급하여셨는지를 우리에게 말할 내용을 많이 가지고 있는,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이들의 삶과 신앙에 우리로 하여금 연대하게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학을 한다는 것은 민중들의 이야기들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한 이야기들을 예수의 삶과 선교에 관한 이야기들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두 부류의 이야기들을 연대시킴에 있어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이야기들 속에서 일어나는 것과 전혀 무관한 이야기꾼이 아니다. 좋은 이야기꾼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좋은 청취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듣고 또 들을 때, 그 이야기들 중 많은 것들이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여성들과 남성들, 그리고 어린이들의 절망과 희망들을 공유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그들의 고난이 우리의 고난이 되고 그들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이 되며, 그들의 염원이 우리의 염원이 되고, 그들의 해방이 우리의 해방이 된다. 그러한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와 민중들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며, 정신과 영혼의 교제가 생겨나게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발견한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교제의 깊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민중들의 이야기와 예수의 이야기들이 연결됨으로써 하나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점점 분명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 신학을 한다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기독교 신학자가 된다는 것에 관해 변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 진술, 즉 " '기독교 신학' 이라는 구절은, 일단 그것에 관한 성찰을 중지하기만 하면, 용어에 있어 모순된 것이다. 최소한 그것은, 그 말의 의미를 진지하게 따져 볼 때, 비-기독교적인(un-christian) 것이다"에 동의할 수가 없다. 여기 표현된 관점은 먼저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결국은 오해된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 아시아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아시아 인간성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러한 현실을 자각하는 일은 우리 중의 많은 사람들에게서 무지와 오만을 떨어내 버리게 한다. 물질적이고 문화적으로 뿐만 아니라 종교적이고 영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우리의 이웃인 불교인, 힌두교인, 혹은 이슬람교인의 "영적인 동반자(soul-mates)"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선택의 여지 없이, 우리의 기독교 신앙을 재고해야 하며, 우리의 기독교 신학을 근본적인 방식으로 재형성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불교인도 아니고 힌두교인도 아니며, 이슬람교인도 아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다.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이해는 매우 부적절할 수도 있고 부정확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왜곡의 위험도 있다. 우리 가운데 일부는, 우리가 해야 할 많은 숙제를 갖고 있으며, 우리의 신앙과는 다른 신앙들을 실천하는 이웃들로부터 배워야 할 힘든 과제를 감당해야 함을 이미 알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아시아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행동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탐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가 바로­많은 한계와 결점이 있지만, 아직은 아시아의 영적인 세계 속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 ­기독교 신학이다. 아시아의 인간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방식이 기독교 신앙의 관점으로부터 탐구될 때, 어떻게 이와는 다른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참으로, 기독교인들은 "교회 밖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고, 신앙은 "기독교적인 것과는 다른 형식으로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종종 주장해 왔다. 얼마나 그와 같은 주장들이 사실과 현실을 거슬러 날아다니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여 왔는지! 나는, 전통적인 신학의 명세표(specification)를 따라 맞추어진 신학적 구속복(straight-jacket)을 벗어버리기를 원하고, 더 편안하고 누구에게나 잘 맞는 그런 신학적 장비를 갖춰 입기를 원하는 그러한 기독교 신학자들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그들은 "우주적인" 신학, 즉 기독교의 특징들을 따르지 않는 신학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러한 신학은 하나님의 진리를 향한 인간의 종교적 노력 안에서 가장 최선의 것과 가장 숭고한 것으로써 만들어질 것이라고 예상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교회밖에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 도 없다"고, 혹은 "신앙은 기독교적인 것과 다른 형식으로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예수 자신은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무자비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주장은 예수가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해, 하나님이 세상을 다루시는 것에 관해 말씀하신 것과는 모순된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기독교 신학자들이 기독교 신학을 그만두어야만 한다는 결론으로 이끌지 않는다. 사실상 불교의 신학자들은 불교 신학에 종사하며, 힌두교 학자들도 힌두교 신학에 종사하며, 이슬람교의 이맘(imams)들도 이슬람의 신학에 종사한다. 그렇다면, 왜 기독교 신학자들은 안되겠는가? 물론 우리는 편협하고 분파적인 기독교 신학에 동의할 수 없다. 그 문제에 관해서라면, 편협하고 분파적인 불교 신학이나 이슬람 신학에 대해서도 찬성할 수 없다. 그러나 겸손과 개방성의 정신으로 종사하는 불교인, 힌두교인 혹은 기독교인의 신학적 노력은 편협할 수도 없고, 분파적이 될 수도 없다.

우리가 우리 시대로부터 배운 것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을 실천해야만 하고 실천할 수도 있다는 것이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향한 자비와 존경의 정신으로 우리의 신앙에 대해 성찰해야 하고 성찰할 수도 있으며, 또한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각각의 종교가 우리를 자부심 갖게 만들기도 하고 부끄럽게 만들기도 하는 기록들(records)을 전하고 있음을 인식해야만 하고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인간에 의해 무자비하게 수탈 당한 우리의 어머니 대지(Mother earth)의 생존을 위해서, 분열과 편협함으로 찢겨진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인간 공동체 안에 널리 보급되어야 할 사랑과 정의를 위해서,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공동체에 평화를 가져오시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이전보다도 더 깊이 참회하기를 배워야만 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였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나 회개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우리는 우리의 회개를 행동으로 옮겨야만 한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를 바로 잡아 주며, 희망과 미래의 세계를 향해 노력하는 책임성을 함께 감당해야만 한다.

다음 한 가지, 즉 세계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할 적으로, 혹은 지구상에서 박멸시켜야 할 적으로 취급하는 광신적 신앙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사실 한 가지는 확실한 것이다. 그것이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혹은 기독교 중 어느 종교의 것이든, 분파적인 신학, 즉 하나님의 계시(oracles)를 위해서 자신의 경험과 전통을 취하는 그런 분파적 신학을 위해서는 그 어떠한 여지(room)도 있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우리가 "우주적" 신학 쪽으로 가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브랜드를 가진 신학이든지 방향에 있어서 특별해야하고, 상황에 있어서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신앙한다면, 다른 신앙의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 여정과 신학 여정의 횡단면(cross-sections)에 계시는 바로 그 하나님을 때때로 만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일까?

아시아 안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는 기독교 신학은 다른 삶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과 다양한 종교적 전통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여지를, 그것도 풍부한 여지를 가져야만 한다. 그 무대는 아시아라는 세계이다. 즉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간적 자원과 천연 자원의 은총을 입었으며, 또한 끝없는 자연 재해와 인간적 비극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아시아라는 세계이다. 아시아의 기독교인으로서, 선과 악, 희망과 절망, 기쁨과 번민 그 모두를 지니고 있는 이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시아의 기독교 교회가 걸머진 중요한 신학적 과제이다.

이제 그 과제에 맞서 보자. 제3 세계에 대한 서구의 식민적 지배가 종지부를 찍으면서, "기독교 제국"(Christendom)의 꿈은 소멸되었다. 기독교 교회 혼자만으로는, 인간 공동체의 도덕적 구축(fabric)을 허물려고 위협하는, 더욱 증가하는 문제들을 다루어 낼 수 없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인간성의 새로운 비전을 창조하는 영적인 힘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것은 가망성과 도전 모두를 가진 신학적 실험이다.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가진 아시아는 그 실험을 위해 가장 흥미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다가올 21세기에 아시아에서 행해질 우리의 신학적 실험이 변천과 무상성의 세계 속에서 삶의 의미와 영원성을 향한 인간의 탐색에 적절한 공헌을 하게 되기를 나는 희망한다.


  이름   메일   회원권한임
  내용 입력창 크게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