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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9(수)
[김용복] 민중과 선교  
김 용 복 총장(한일신학대학교)

기독교 선교는 역사적으로 서구 열강의 식민지적, 상업적 팽창의 맥락에서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동방교회의 팽창과 서구 열강의 식민지 침탈에 저항한 선교적 실험들에 대해서는 이러한 단정을 유보할 수 있을 것이다. 동방교회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소위 선교 교회(mission churches)에 반발하여 등장한 민족적이고 토착적인 교회들 역시 그 예외이다. 선교사업(mission enterprise)의 문제는 한편으로는 역사적 상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인들의 기독교 정체성(正體性)을 옹호하려 한다는 점이다. 서구의 선교 단체와 교회들의 기독교 선교는 대체로 역사적 상황의 영향속에서 진행되어 왔다. 오늘날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기독교 교회들의 선교는 상황의 도전과 민중의 구체적인 경험에 부응하려 노력하는 가운데 과거의 역사적 전통과 더불어 씨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일반적 현실의 한 예외가 바로 중국 같은 사회주의 사회의 선교적 상황일 것이다.

근대 서구인들의 기독교 선교의 초기 단계는 ぢ팽창っ이라는 용어로 특징 지워진다고 말할 수 있는데 , 이 용어는 식민지 팽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선교란 ぢ서구적っ그리스도가 이교도의 영토를 ぢ정복하는っ사업이었다. 선교 사업은 이방인들의 저주받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불신자들을 기독교로 전향시키기 위해 부름 받는 선민(選民)들이었다. 통신사업, 성서번역, 기독교적 문서 발간, 의료 및 교육활동, 전도활동,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을 회심시키고 서구 교회의 다양한 교파 형태대로 교회를 재생하는데 바쳐졌던 것이다.

선교 사업을 이런 식으로 전개해 가는 과정에서 선교는 일정하게 굴절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교회들은 자신들의 제도적 타성과 비선교적 교회구조, 그리고 그들의 사회- 문화적 환경에 너무도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던 관계로 자신들의 민족적 한계를 초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각 선교 단체들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혹은 준독립적인 지위를 합리화 하였다. 선교 단체들은 역량을 총동원하여 비기독교 혹은 비프로테스탄트 세계에 보낼 선교사들을 모집하여 그들을 파송해야 했다. 서구인들의 선교 단체들과 교회들이 그들의 독자적이고 준독립적인 선교 사업과 관련하여 아무리 창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더라도, 이들은 여전히 서구인들의 기독교적 틀안에 머물렀고, 그들의 것과 상이한 종교 - 문화적, 사회- 정치적 경험의 맥락에서 복음을 재해석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특별히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에큐메니칼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선교 운동에는 세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 기독교 선교를 선교 단체의 선교가 아니라 교회의 선교로 재규정하게 되었다. 선교론은 교회론에 근거를 두어야 하고, 교회론은 선교론을 포함해야 한다.

ぢ교회의 선교っ라는 개념은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하였다. 선교는 이론적인 차원에서 교회를 토대로 해야 할뿐만 아니라, 실천적 차원에서도 교회의 정상적인 활동에 통합되어야 한다.둘째, 선교 현장의 지리 - 정치적 (goe - political)구분이 없어졌고, 그 대신 6대주 전체가 선교현장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다. 이제는 선교를 하는 사람과 선교를 받는 사람을 획일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모든 것이 선교현장이고 모든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이다.셋째, 선교론적 개념으로 일치(unity)라는 개념이 등장하여 세계 교회의 선교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선교는 전도(evangelism)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참여(social involvement)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ぢ하느님의 선교っ(missio Dei)라는 개념은 인간과 피조물이 생활하고 활동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 교회밖에서 조차 - 하느님의 선교활동이 전개된다고 정의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 민중 가운데서의 하느님의 선교

ぢ오늘의 구원っ(Salvation Today)은 방콕 CWME총회의 주제였다. 이 대회에서 ぢ하느님의 선교っ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선교론적 사고와 실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시아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 주제를 아시아 민중 속에서의 선교 운동의 핵심으로 삼았다.하느님은 아시아 교회의 그들의 역사라는 좁은 테두리 안에서만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역사, 그리고 아시아 민중의 모든 역사속에서 활동해 오셨다. 하느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며 아시아 전체민중의 구속(救續)과 거듭남과 갱신을 위하여 행동하고 계신다.

아시아에서의 선교론적 사고는 두 개의 극에 의하여 결정되어 왔는데, 그 하나는 ぢ하나님의 선교っ(missio Dei)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새 생명과 새운명을 위하여 고난당하고 투쟁하고 있는 아시아 민중의 이야기이다. 아시아 에큐메니칼 운동, 특히 아시아 기독교 협의회(CCA)의 최근 주제들은 이러한 경향을 매우 분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주제들은, 하느님은 민중의 사회- 경제적, 종교-문화적 생활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생활 가운데서도 활동하고 계신다고 천명하였다.

아시아인들의 선교적 사고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주제는 아시아에서 고난받고 투쟁하는 민중들의 종교적 경험이었다.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에 있어서 전통적인 서구적 선교론은 아시아 민중의 종교적 경험을 충분히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최근에 아시아 신학자들은 아시아 종교들 안에서 하느님의 역사를 분별하려고 노력하는 ぢ종교 신학っ에 관하여 논의하고 있다. 아시아 민중의 종교적 경험에 관한 문제는 교회와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행하는 선교론적 사고와 실천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다.

선교론에서 또하나의 핵심적인 주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철학, 과학을 포함한 아시아 민중의 세속적 경험들이다.문명의 세속화는 전세계 모든 민중의 핵심적인 경험들 가운데 하나이다.어떻게 기독교인들은 세속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과학에 의하여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사람들과 의사 소통할 수 있는가 ? 이것은 진실로 우리의 선교론적 성찰에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이다.

선교적 실천과 이론의 맥락을 제공하는 것은 고난받고 투쟁하는 민중과 그들의 모든 경험이다. 이러한 맥락은 가난한 자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파하고 나누는 방식을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한다. 지금까지 기독교 선교, 교회의 선교, 그리고 하느님의 선교 같은 것들은 선교의 컨텍스트, 선교 파트너(민중) 그리고 그들의 역사적 경험을 기준으로 하기보다는 선교 주체들과 그들의 제도적 환경을 기준으로 하여 서구인들의 역사적 상황속에서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컨텍스트가 선교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컨텍스트를 결정하고 컨텍스트에 비추어 복음의 의미를 재해석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2. 현대 세계에 있어서 선교의 컨텍스트와 연대

아시아인들은 고난당하고 투쟁하는 민중이 선교의 가장 구체적인 컨텍스트이며 선교의 파트너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인식해 왔다. 아시아 민중의 경험은 권력 당국(the powers - that - be)에 의하여 결정되고 있다. 분석적으로 말하면, 아시아 민중의 경험을 결정하는 요소는 종교- 문화적 가치, 정치적 이데올로기, 사회- 경제적 제도, 그리고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분석적 사고는 언제나 한편으로는 추상적 개념 정의에 치우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수한 것을 선택함으로서 전체적인 역사적 컨텍스트를 모호하게 하여왔다. 컨텍스트는 통전적(統全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컨텍스트와 경험이 얽혀있는 민중의 이야기를 최선의 포괄적인 표현으로 제안한다.

기독교 선교, 교회의 선교, 그리고 하느님의 선교의 선교학적 개념은 기독교 확장, 교회적 중심, 그리고 전체 세계를 컨텍스트로 삼아왔다. 이러한 컨텍스트들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종종 중복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세가지는 모두 기독교, 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교 활동에서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 모든 선교학적 논쟁에서 두가지의 이분법이 선교 운동에 적용되었는데, 그중 한가지는 개인적 차원과 공동체적 차원의 이분법이고, 다른 한가지는 피안적인 것과 차안적인 것의 이분법이다. 최근의 선교사(宣敎史)에서는 선교론적 컨텍스트를 새롭게 설정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바로ぢ가난한 자들 가운데서의 선교っ라는 컨텍스트이다. 혹자는 가난한 자들 가운데서의 에큐메니칼 선교를 사회적 행동(social action)으로만 이해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복음주의(evangelism)와 사회적 참여(social involvement)를 결합시킨 형태로 진행되어 왔다. 그리하여 복음주의 집단들은 이제 사회적 책임을 선교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에큐메니칼 집단들은 복음주의가 ぢ개인의 영혼っ이라는 세계로 후퇴하는 것이 아닌 한 그것은 선교의 진정한 내용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ぢ부자들 가운데서의 선교っ에 대하여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질문들은 부자들에 대한 선교적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부자들과 관련된 교회의 입장이 무엇이냐에 관한 것이다.어쨌든 가난한 자들 가운데서의 선교는 배타적이고 당파적인 문제가 아니라,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주제이어야 한다.

우리는 본래 성서에서 하느님의 행동과 복음이 가난한자, 억눌린 자, 병든자, 소외된 자들을 편들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의 기독교 운동들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복음주의자들까지도 사회적 참여를 선교의 본질적인 요소로 인정한다.

이처럼 새롭게 등장한 선교론적 컨텍스트에서 그 동안 교회의 일치를 촉진하는데 기여해 온 일치(unity)라는 에큐메니칼적 개념은 오늘날의 선교의 컨텍스트를 규정하는데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 개념은 기독교 교회들 간에 적대감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교회간 협력을 촉진하고 신앙과 직제에 관한 토론의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교회들로 하여금 다른 교회를 수용하고 존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난한 자들 가운데서의 선교의 핵심적 추진력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였다. 즉 일치의 개념은 사람들 가운데 존재하는 분열, 다시 말해서 가난한 자와 부자, 남자와 여자, 흑인과 백인, 선민과 이방인, 자유인과 노예,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들 간의 분열의 역학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최근에 열린ぢ정의, 평화, 창조 질서의 보전っ(Justice, Peace and The integrity of Creation)에 관한 세계대회(1990년, 서울)는 각교파의 입장과 교회론적 토대가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하여 고난받고 투쟁하는 민중과의 연대를 환영할 만큼 충분히 개방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교회들간에 교회론적 문제에 관해 가까스로 ぢ합의"(consensus)를 이룬다고 해도, 만약 그것이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떤 경우에는 계약의 개념 같은 역사적이고 교리적인 전통이 그 주제에 관한 성서적 가르침보다 훨씬 중요하다.에큐메니칼 운동이 상이한 신앙고백적, 교회론적 전통을 가지 상이한 상황에서 공동의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강력한 신앙적 투신을 필요로 한다. 일치 - 합의(unity-consensus)에 의한 방법은 너무 약하고 제한적이다. 이러한 방법은 교회밖의 사람들과의 연대성을 배제하는바, 그것은 민중 속에서의 선교의 개념에 어긋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난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고 경험하는 교회들 간의 일치 그 이상이다. 그것은 적대감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과 협력하며, 신앙과 교리와 교회 직제 문제에 관해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것 이상을 포괄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그의 생 전체를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나눈 것처럼 우리 생의 모든 것을 나누는 신앙의 연대(bond of faith)이다. 고난받고 투쟁하는 세계 민중은 그들의 투쟁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연대 그 자체, 곧 그리스도의 현존을 요구한다.

3. 하느님의 백성은 고난당하고 투쟁하는 민중이다.

이 세계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상황이 극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역사적 순례의 장도에서 고난당하고 투쟁하는 민중의 경험은 새로운 지평과 비젼을 열고 있다. 민중의 이야기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민중의 이야기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개념에 제한되지 않고 열린 미래로 끊임없이 펼쳐져 나간다.

민중은 땅에서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일어서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악한 권력 아래서 생명의 왜곡과 오용, 그리고 죽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끊임없이 새롭게 전개되는 민중의 떨쳐 일어섬은 구태의연한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고난당하고 투쟁하는 민중의 경험을 분별할 수 있는 새로운 눈을 필요로 한다.

민중은 모든 차원에서 자신들의 삶의 주체가 되고 있으며, 반면에 권력 당국자들과 그들이 세운 제도는 갈수록 민중의 고양된 의식과 그에 따른 운동을 경계하고 있다. 권력 당국자들은 세계의 전지역에서 떨쳐 일어서고 있는 민중을 탄압하려 할 것이고, 민중의 고난은 더욱 심화될 것이며, 그들의 투쟁은 더욱 고양될 것으로 예견된다.

민중의 삶을 파괴하는 세력은 대단히 복합적이고 강력하다. 굶주림과 가난은 여전히 가장 강력한 파고 원인이다.불안정한 세계 경제 질서는 지구 북반구와 사회 피라밋의 상층 계급에 부(富)와 경제력이 집중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굶주림과 가난은 식량 부재나 재화결핍의 문제가 아니다.그것은 세계의 강자들이 지배하는 세계 경제와 경제문화의 필연적 결과이다.굶주린자, 가난한자, 힘없는 자들이 죽어 가는 오늘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으로 경제적 생활을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차원에서 재편해야 한다. 생산의 증가, 분배의 개선, 그리고 시장의 조절만으로는 가난한 자들을 지배하는 죽음의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

불행하게도, 사회- 경제적 안전과 국가적, 세계적 차원에서의 경제 생활의 재편을 요구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외침은 권력 당국자들로부터의 사회적, 정치적 폭력에 부딪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사회적 갈등은 심화되고 민중의 고난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러나 민중 역시 가열차게 투쟁할 것이다.

냉전시대의 군사체제는 구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로 재편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냉전적 군사 질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그 당사국들은 어떻게 세계적 컨텍스트 속에서 군비 창고의 역할을 하고 군사적 테크노크라시를 유지할 것인가 하는데 관심을 추구하게 되었다. 냉전적 군사 질서는 무기와 무기체제의 질서만이 아니라 군사적 동맹과 정치적, 문화적 차원에서의 사회의 군사화 같은 모든 차원을 내포한 군사적 테크노크라시의 질서이다. 안에서든 밖에서든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적이다. 흔히 민중의 요구는 반국가적이고 반체제적인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다시 말해서, 정의와 평화를 위한 민중 운동은 기존 질서를 전복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국가는 안보를 이데올로기로 삼았고, 국가에 의한 정치적 폭력은 민중의 삶에 큰 위해(危害)를 가하고 그것을 파괴하였다.

서구에서 시작된 산업화는 근대화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지구의 거의 모든 지역에 스며들었다. 이것은 사회 - 경제적, 정치적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생테계에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산업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정치적 전체주의가 등장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끊임없는 생태계 착취가 진행되어 이제는 생명 그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요즈음 임박한 생태학적 재앙에 대처하려면 인류의 모든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삶에 있어서 근본적인 패러다임(paradigm)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학적 위기의 희생자들은 또 다시 민중,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다. 사실 그들은 경제, 정치, 문화 생활의 운영 체계에서 아무런 발언권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떨치고 일어나 자신들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세력에 저항하고 있다.

생명과 생명체는 수동적이지 않다. 인간이건 다른 생물이건 생명 그자체는 왜곡과 억압과 파괴에 저항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생명을 추구하는 민중의 운동은 인간과 동물 모두를 가릴 것 없이 생명의 통전성(統全性)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포괄적이고 다차원적인 생명의 투쟁이며 생명을 위한 투쟁이다. 그러므로 서로 얽혀서 공생하고 있는 죽음의 세력들에 맞서서 민중과 생명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대 과학 문화와 그것의 기술적 형식들은 현대 생활의 경제, 정치, 문화제도에 깊이 스며들어 역사에 바빌론적 충격을 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충격은 단순히 산업화의 외연(外延)이 아니라 포괄적이고 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자체의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체계를 지닌 과학적 합리성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 새로운 기술 관료 지배체제(technocracy) 이다. 그것은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술 관료들은 기계적 양식(mechanical modality)으로부터 사회조직과 세계질서의 유기적 양식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이것은 생명의 약속인가, 아니면 새로운 위협인가?

지금까지 세계적인 커뮤니케이션 및 정보체계는 새로운 삶에 대한 여러 가지 장미빛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자기 삶의 주체로서의 진정한 정체성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커뮤니케이션 및 정보체계, 그리고 그 과정의 독점은 민중들 간의 커뮤니케이션과 아래로부터의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왜곡시킨다.위로부터의 수직적 커뮤니케이션은 공동체 생활을 질적인 방식으로 지배하고 왜곡시키며, 그것을 복합적이고 신속한 디지털 신호들(digital signals)에 따라 작동되는 인공 두뇌들의 네트워크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다.

이 역사적 위기에, 고난당하고 투쟁하는 민중들로부터, 민중과 땅의 약동하는 에너지가 그것을 억누르는 역사적 굴레를 돌파하면서 건강하고 통전적인 삶을 향한 민중의 언어와 이야기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민중이 하느님, 곧 성령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것을 확증하는 징표이다.

현재와 같은 전환기에 고난당하면서 투쟁하는 민중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가지고 현세계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군사적, 사회경제적 질서에서는 자신들의 삶을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과, 전체 생활이 재편되어 그것이 현재생활의 모든 차원에 스며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민중은 어느 정도의 방향 감각을 가지고 부분적이나마 해방의 경험을 하고 있으며, 미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 죽음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땅위에서 계속 생명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민중인 것이다. 생명을 파괴하고 왜곡시키는 세력과 구조와 체제보다 생명의 힘이 더욱 강하다. 그것은 하느님이 창조하고 보전하며 충만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 생명이다. 그러므로 생명과 그것의 충만함을 위하여 고난당하고 투쟁하는 민중은 하느님의 백성(people of God)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선택받은 사람, 곧 이스라엘과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새하늘과 새땅에서 영원한(불멸의)생명이 실현되기를 갈망하는 이 세계의 모든 민중이다.

하느님의 백성을 이스라엘과 기독교인에 한정하는 개념은 선교에 해악을 끼쳤으며, 심지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관념을 낳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특별 은총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 이방인, 노예, 소외된 자, 아니 더 나아가서 모든 고난당하고 투쟁하는 민중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특별은총의 본질이다. 구원과 교회론을 배타적으로 한정하는 것은 기독교 선교를 배타적이고 무방향적이며 가부장적(paternalistic)이고 독점주의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개념은 고난받고 투쟁하는 민중 가운데 연대와 상호 협력의 컨텍스트에서 올바로 교통하고 기쁜 소식을 나누도록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이미 민중가운데 성육신하셨고 그곳에 현존하신다. 그들은 이웃과 하나이며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이것이 진정한 연대관계이다.

4. 그리스도는 민중과 연대하고 계시다.

아시아에서 고난받고 투쟁하는 민중과 연대하는 그리스도라는 주제는 에큐메니칼 선교의 핵심이다. 이것은 성서의 진리이기도 하다. 가난한 산업 노동자에게 예수는 동료 노동자로 나타나며, 병든 자에게 그는 진실된 친구로 나타난다.가나나한 여인들은 그와 함께 하는 것으로 즐거워한다. 예수는 원폭 희생자들의 곤경을 함께 나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도시의 홍등가로 밀려난 여성들의 친구이다.

ぢ연대っ라는 용어는 다소 이데올로기적 컨텍스트에서 잘못 해석되어 왔으며, 서구 교회들은 이 말에 부정적으로 반응해 왔다. 그러나 연대라는 개념은 고난받고 투쟁하는 민중 가운데서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었다.우리는 ぢ연대っ라는 용어의 올바른 의미를 회복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어느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개념에 찬동할 필요는 없다. 사실, ぢsolidarityっ라는 용어는 여러나라말로 번역되었고, 그 변역어들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매우 다른 이미지들을 표현하고 있다. 가령 ぢsolidarityっ는 한국어의 연대(連帶)라는 말에 해당하는데, 이 말은 줄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적 결속,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것을 의미한다.

연대와 비슷한 뜻을 지닌 성서적 개념들로는 계약(신실한 관계), 성육신(더불어 삶 = 오이코노미아, oikonomia)그리스도안에서 한몸이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 코이노니아(나눔과 참여), 신앙(신실한관계)등을 들 수 있다. 강력하고 변치 않는 공동체적 관계를 의미하는 ぢstereomaっ라는 성서 용어는 연대라는 용어와 커다란 언어학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사도행전 16장 5절을 보면, ぢ교회들은 믿음 안에서 갈수록 강화되었다っ(굳건[solid]해졌다)이러한 성서의 용어들은 하느님의 백성의 공동생활과 관계가 있다

일반적으로 연대는 공동의 목표와 공통점들 - 가령 종족적, 지리적 집단- 을 기반으로 한 관계 혹은 일련의 관계들을 의미한다. 그밖에도 다른 많은 요소들이 사람들의 연대를 공동체로 바꾸어 주는 역할을 한다. 연대는 사회성과 공동생활의 한 형태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에큐메니칼 운동에 훌륭하게 기여한 ぢ일치(unity)라는 에큐메니칼적 용어를 보완하는 개념으로 っ연대ぢ라는 용어를 제창한다.っ일치ぢ는 정태적이고 추상적이다.っ하나(one)ぢ라는 용어는 이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활력적인 개념이다.그러나 일치는 교회들 간의 분열과 적대 관계를 극복하고 그들로 하여금 교회의 일치와 협력을 위한 운동, 더 나아가서 사람들 가운데서의 화해와 협력이라는 형태의 세속적 일치를 위한 운동에 참여시키는데 기여해 온 주요한 개념이었다.

아시아의 컨텍스트에서, 특히 고난받고 투쟁하는 사람들의 컨텍스트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정의의 문제를 다루어 왔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일치라는 패러다임이 무언가 부족하고 모호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말을 할 때에 사용하는 성서적 용어 ぢ하나っ는 일치가 아니라 ぢ연대っ로 번역되어야 한다.고대의 세례 서약인 ぢ유다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っ(갈 3:28)라는 구절은 연대를 설명하는 성서의 표현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두드러진 메시야의 이미지는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이다. 고난의 종은 탁월한 연대의 이미지이다. 다윗왕적인 메시아 이미지는 이러한 종의 이미지보다 이차적인 것이다.왜냐하면 다윗은 하느님의 정의를 위해 봉사하는 다시 말해서 백성을 보호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그들의 생명과 권리를 보호하는 하느님의 종이기 때문이다.공관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신을 고난의 종과 동일시하는데, 고난의 종은 고난받는 민중을 뜻하는 집단적 개념이다. 고난받는 민중은 하느님의 정의를 갈망하고 이를 위해 투쟁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봉사이다.

메시아와 민중 간의 연대의 의미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난의 대속적 나눔이다. 예수는 민중의 고난을 나누지 않고는 그들의 메시야가 될수없다. 고난의 종의 이야기에서 연대의 또다른 의미는 연대의 중심인 메시아의 정치적 권위의 성격과 관계가 있다. 예수는 모든 사람들 중 첫째가 되려고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꼴찌,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되기 위하여(막 9;35) 자신의 메시아직은 고난받는 종이 되는데 있음을 선언하였다. 이것은 당시 로마 제국의 질서의 정치적 권위, 아니 더 나아가서 모든 정치적 위계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것이었다. 연대를 통한 민중의 진정한 주권은 통치자가 모든 백성의 종이 될 때에만 확립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을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선한 목자로 여긴다(요 10:11) 그는 친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선언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고난받고 투쟁하는 민중과의 진정한 연대이다. 그리스도는 ぢ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으며,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っ(빌 2:7-8) 이것은 노예들, 곧 로마 제국의 절대 다수에 해당하는 민중과 함께 하는 연대의 기독론(Christology of solidarity)이다.

그리스도와 민주의 연대는 단순히 고난받는 종의 형태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존재는 민중 가운데 계신 하느님의 성육신이다. 임마누엘(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이 그리스도의 이름이요 존재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는 민중 가운데 계신 하느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요한복음 1장 15절에는 ぢ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っ고 기록되어 있다. 민중가운데 거하시는 것은 공동의 집 혹은 거처(oikos)를 갖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민중 가운데 계신 하느님의 오이코노미아(oikonomia)라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적 언어로 하면, 그리스도와 민중의 연대는 하느님의 정치 경제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하느님의 집에는 민중을 위한 정의와 샬롬이 있고, 그들의 생명에 대한 보호가 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정치 경제이다.

그리스도와 민중의 연대는 죽음을 떨치고 일어섬이요, 죽음의 세력에 대한 저항이며, 죽음의 굴레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고난받는 민중은 동시에 생명을 위하여 투쟁하는 민중이다. 그리스도와 민중은 이점에서 하나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의 감옥에 사로잡혀 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신 것 같이 죽음의 상황에서 떨쳐 일어나서 죽음의 세력을 극복하려는 민중운동이다. 교회론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민중의 연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ぢ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っ(갈 3: 27 - 28)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연대의 공동체가 되려는 운동이다. 이 연대는 고난당하고 투쟁하는 모든 민중을 끌어안는 포괄적인 연대이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 교회(the catholic church)의 핵심이다.

메시아 예수의 연대는 새계약, 새계약 공동체, 메시아적 축제, 만민의 초대,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등의 형태로 표현된다.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 사이의 새 계약은 그리스도의 한몸(one body of churist), 곧 교회의 형성을 통하여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사이, 사랑과 사랑의 사이의 모든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교회는 연대와 무한한 포괄성(보편성)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의 연대는 정의와 샬롬의 상태에서 메시아의 생명의 통치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새하늘과 새땅에서 메시아의 통치는 민중의 통치가 된다. 하느님은 민중의 하느님이며, 민중은 하느님의 백성이다. 그곳에는 죽음이 없다. 그것은 생명의 강이 흐르고 생명의 나무가 가득찬 생명의 정원이다. 메시아적 비젼은 그리스도와 고난받고 투쟁하는 민주의 연대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진실로 그때에 메시아는 민중의 메시아가 되고, 민중은 메시야의 민중이 된다는 말이 이해가 될 것이다.

5. 민중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선교

그리스도의 선교(missio Christi)는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거부감을 일으키고 있다. 그 첫번째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고, 또다른 이유는 종교적인 것이다. missio Christi 는 십자가를 든 채 배를 타고 왔으나 뒤따라오는 군대의 척후병 노릇을 한 식민 세력의 승리주의적 개념이다.missio Christi 개념은 선교를 이교 지역과 그곳의 민족을 정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종교적 제국주의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보다는 하느님(God)이 아시아 사람들에게 접근하는데 훨씬 친근감 있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시아 사람들도, 비록 기독교적인 신과는 다르지만,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 개념은 중요한 접촉점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으로부터 토착화 신학과 종교간의 대화가 발전되고 있다.

아주 최근에, 아시아 에큐메니칼 운동은 missio dei 개념을 매우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그러나 우리는 ぢ민중 속의 그리스도っ가 아시아에서 새로운 선교론을 형성하는데 핵심적인 내용이라는 토마스(M.M.Thomas)의 견해에 동감한다.이것은 한국의 시인 김지하가 그의 희곡 [금관의 예수]에서 지적했듯이, 지배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문화로부터, 그리고 교리적 구속복(straitjacket)에서 그리스도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고난받고 투쟁하는 민중속에 계신 성서적 그리스도 예수로, 다시 말해서 민중과 연대하여 생활하는 그리스도 예수로 부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공동체와 에큐메니칼 운동은 민중과 연대하여 고난받고 투쟁하는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선교의 본래적 의미를 되살릴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 때 교회론은 민중과 연대하는 메시아 운동으로서의 내용성을 다시 찾게 될 것이며, 그 개념을 통해서 하느님은 민중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이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될 것이다.

missio Christi는 그리스도가 고난받고 투쟁하는 자들의 삶의 깊은 곳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의 한복판에서 고난받는 종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메시아가 민중과 더불어 통치한다는 비전은 그들로 하여금 죽음의 상황을 떨치고 생명을 위한 투쟁으로 일어서게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오이코노미아(샬롬의 정치경제)의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성령의 활력을 일으킨다.

6. 몇가지 선교론적 주제들에 관한 성찰

(1) 선교의 영원한 문제는 공동체와 ぢ참여와 연대의 네트워크っ로부터 개인이 분리된 현실이었다. 근대 서구 문명에서의 개인의 등장은 비록 맹목적 집단성으로부터 개성을 구별시켜 주었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생활을 원자화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삶의 개성은 상호의존, 참여와 연대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개인 영혼의 회심과 개인의 자유는 공동체의 맥락에서 참된 의미를 갖는 바, 민중의 삶은 바로 이 공동체 속에서 유지되고 충만하게 결실을 맺는다.

국가기구, 기업, 정치권력, 군사력 같은 집단적 세력들은 개인과 기초 공동체를 무력화시켰고 그들의 개성과 주체성을 억압하였다. 민중의, 민중을 향한 연대는 일부 민족주의, 사회주의 권위주의 국가들에서는 절대 권력과 집단적 관료주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오용되어 왔다. 그러나 민중의 연대라는 패러다임은 밑바닥으로부터 세계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인간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하느님의)민중과 연대한 사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사회적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진 민중의 연대는 선교의 준거가 될 수 있으며, 개인주의자와 집단주의자들의 분열을 극복한 통전적 선교를 가능케 한다.

(2)선교의 또 다른 문제는 영혼 혹은 정신과 육체의 분리-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모두를 포함하였다. 그러한 구분은 세계속에서 기독교 선교를 수행하는데 대단히 심각하고 유해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민중과의 연대는 ぢ하느님이 민중과 더불어 거하심っ혹은 ぢ하느님이 민중과 더불어 가정을 이루심っ(oikonomia tou theou)이라는 구체적인 형식을 취하는바,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 of God)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는 서구 세계의 컨텍스트에서 이루어진 관념론과 유물론의 이분법을 극복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세계속에서 고난받고 투쟁하는 민중들의 연대는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나누어 질 수 없다.

민중의 삶은 자연의 생명과의 연대 관계까지를 포괄한다.ぢ생명의 정원っ은 인간의 생명뿐 아니라 생명전체를 가리킨다. 하느님이 생명과 맺은 계약(God's covenant with life)은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과 땅을 포괄한다.(창 9:8 - 13)생명의 연대는 생명의 전체성을 포함한다.

(3) 복음주의는 배타적이고 민중을 대상화하는 부정적 경향을 보여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부 에큐메니칼 집단들을 전통적인 복음주의에 대해 미심쩍어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진정한 복음주의는 민중과의 연대 속에서 그들 가운데서 기쁜 소식을 나누는 것이다. 세계교회 협의회 세계선교전도위원회(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에서 추진하는 도시 농어촌 선교(urban rural mission)는 그 좋은 사례이다. 도시 농어촌 선교속에서 교회들은 고난받고 투쟁하는 민중들과 연대하며 여기서 복음의 진정한 나눔이 이루어진다.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안에서 복음주의 운동의 타성을 극복해야한다. 그리고 복음주의 운동들은 민중과의 연대의 컨텍스트 속에서 자신들의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4)선교 운동에 있어서의 이 비극적인 이분법과 분열은 극복되어야 한다.파편화된 해방적 선교 운동들은 서로간에 내적 연관을 맺는 방식을 발견해야 한다. 억압적 세력들은 민중을 탄압하는 권력의 망(網)을 짰으나, 해방운동 진영은 사안에 따라 분파적으로 행동할 뿐 이에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있다. 운동 세력들 간에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 운동들이 민중과의 연대를 추구하지도 않고 총체적인 해방이라는 목표와 충실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교회와 에큐메니칼 운동이 민중과 더불어, 민중속에서 연대를 이룩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에큐메니칼 선교의 미래를 결정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하느님이 창조하고 보전하고 구원하고 완성시키는 생명, 곧 하늘과 땅은 나누어질 수 없는 통전적인 생명이다.그것은 고난받고 투쟁하는 민중 가운데서, 그리고 땅위의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 가운데서 연대의 네트워크를 이룩할 것을 요구한다. 총체적 생명에 관한 이러한 비젼은 민중뿐 아니라 땅위의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포함한다.

7. 커뮤니케이션과 에큐메니칼적 연대의 형성

우리가 아시아의 고난받고 투쟁하는 민중들과의 연대를 생각할 때 민중운동이 우리의 선교론적 사고의 중심에 들어오거니와, 우리는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의 운동 혹은 하느님의 나라를 향한 메시아적 민중운동으로 본다. 에큐메니칼적 연대란 이런 의미에서 민중 운동들 간의 연대를 의미한다. 그것은 제도적 연대가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연대는 나눔과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민중 가운데서 생각난다.공동체 커뮤니케이션(communion -communication)은 에큐메니칼적 연대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열쇠이다. 이것은 민중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 이념적, 민족, 인종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 장벽들을 무너뜨리고, 고난과 비젼, 가장 깊은 확신과 생명 그 자체에 관한 우리의 경험들을 나누기 위하여 커뮤니케이션을 개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민중과 연대(신실한 관계)속에 있다고 우리가 말할 때, 그것은 하느님의 커뮤니케이션과 복음, 곧 기쁜 소식을 그리스도 안에서 민중과 더불어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연대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근본적으로 형성된다.이것은 하느님과 민중의 파트너쉽에 대하 하느님의 완전한 인식을 포함한다.민중은 완전한 동반자로서 하느님과 계약관계 속에 들어간 하느님의 백성들이다.이것은 민중의 주체성(주권)과 민중의 자주성을 긍정하고 민중을 대상화하는 일체의 관념을 거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하느님의 주권적 은총과 사랑과 정의는 일체의 대상화를 거부하는 민중의 절대적 주체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설교와 성례전, 예배와 기독교 교육뿐만 아니라 신뢰와 확신을 서로주고 받는 것은 연대 관계를 형성하는데 필수적이다. 하느님은 고난받고 투쟁하는 민중의 비참한 상태를 보시고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며 그들의 참상을 아신다. 이것이 바로 민중의 해방을 위한 하느님의 커뮤니케이션이다.

민중과의 연대는 그들의 생명과 죽음을 나누는 것이다. 연대는 공동의 거처와 가정을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공동의 사회- 경제적 삶(oikonomia=정치경제)을 나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연대는 코이노니아(koinonia) 곧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모두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참여와 나눔의 사회- 정치적 관계를 의미한다.연대는 시대의 징조를 더불어 깨닫는 것, 다시 말해서 민중을 파괴하는 세력의 실체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사회적 분석을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동시에 연대는 정의와 평화와 생명이 넘쳐 흐르는 메시아적 통치에 대한 비젼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연대는 핵심은 물론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포함하는 민중이다.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들과 계약을 맺으셨다.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민중과 맺으시는 연대는 정의와 평화와 생명을 위한 민중 운동을 촉발시키신다.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 왕국을 향한 고난받고 투쟁하는 민중의 운동에 참여하신다.

그러므로 연대 속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종교적 신앙과 문화적 가치, 그리고 철학적 유산을 정의와 평화와 생명을 위한 고난과 투쟁에서 찾고 있는 민중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그들과의 연대속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요청하고 있다.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은 연대 형성(solidarity - building)을 위한 것이다.연대는 가장 깊은 차원의 커뮤니케이션, 다시 말해서 복음의 나눔의 전제 조건이다.민중 운동과 교회의 민중과의 연대의 컨텍스트에서 이루어지는 종교간의 대화는 우리의 성찰에 의미 있는 경험을 제공해 준다.이것은 세계의 종교들 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대화가 민중속에서의 연대의 컨텍스트에서 재검토되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기독교 선교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 연대의 컨텍스트에서, 다양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복음을 나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전통적인 전도(evangelism)는 이방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인 민중과의 연대의 컨텍스트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

연대성 속에서의 종교간의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은 사회- 경제적, 정치적 생활을 위한 민중은 공동체적 정치 경제의 형성에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민중은 참여와 정의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주권을 실현하려고 투쟁하고 있다. 그들의 종교적 신앙들은 서로간에 연대를 이룰 때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는 일에 기여할 수 있다. 민중은 굶주림과 가난, 착취와 의존을 극복함으로써 자신들의 경제적 복지를 위하여 투쟁하고 있다. 종교간의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은 그들이 오이코노미아(oikonomia)를 형성하는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구의 과학과 기술은 그 동안 산업 권력에 봉사해 왔다. 그 동안 사람들은 과학과 기술을 보다 깊이 검토하지 않은 채 세속적인 것을 지나치게 찬양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그러므로 과학적, 기술적 사고와 도구를 어떻게 민중의 삶을 위해 봉사하도록 순응시키는냐 하는 문제는 교회들이 고민해야 할 또다른 중요한 문제이다.과학적 사고와 기술적 장치의 본질과 역할은 민중과의 연대라는 맥락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그런데 현대 과학과 기술은 생활과 문화의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의 본질을 규명하는데 과학과 기술에 관한 도구적 관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현대 사회의 발달된 정보 및 커뮤니케이션 문화는 그 동안 민중의 삶을 위하여 쓰이지 않았다. 현재의 정보 및 커뮤니케이션 질서는 미래적 질서의 한 예시(例示)에 불과하다. 문화생활은 가치와 신앙뿐만 아니라 의식과 인식의 차원에서 민중의 삶과 죽음이 걸린 전투장이 될 것이다.현재의 커뮤니케이션 질서는 권력자들이 지배하는 질서를 위하여 동원되고 그 안으로 흡수된다.그리고 민중의 삶은 그들의 가치와 신앙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식과 인식의 관점에 의해 왜곡되고 파괴된다.

그러한 문화적 상황을 컨텍스트로 한 민중 속에서의 복된 소식의 커뮤니케이션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 민중과의 연대를 컨텍스트로 하는 에큐메니칼적 커뮤니케이션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두개의 차원, 곧 교회간 연대 커뮤니케이션(inter - church communication)의 차원과 연대 형성을 위한 민중 속에서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among the people for solidarity building)의 차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적 커뮤니케이션은 일차적으로 민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이다.바꾸어 말하면, 교회는 민중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중이 연대성 속에서 교회와 에큐메니칼 단체들을 향하여 말하는 형식, 곧 에큐메니칼적인 듣는 과정과 구조(ecumunical listening process and structure)가 있어야 한다.

에큐메니칼적 커뮤니케이션은 모든 차원에서의 연대를 위한, 다시 말해서 강자들에 의한 격리와 고립과 희생을 극복하고 민중속에서 경험과 지혜와 믿음을 나누기 위한 매개과정(mediatiog)과 구조를 필요로 한다.민중속에서의 연대를 위한 에큐메니칼적 커뮤니케이션 연결망(ecumenical communication network)은 기존의 커뮤니케이션 질서에 대한 대항적이고 대안적인 커뮤니케이션(counter and alternative communication)이 된다. 더 나아가서, 민중 운동과 교회들 속에서의 커뮤니케이션 연결망을 위한 새로운 하부 구조를 건설하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고난받고 투쟁하는 민중은, 성서와 역사속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그렇게 해온 것처럼, 이미 그들 자신 가운데서 자기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들은 이미 세계의 민중들 가운데서 하느님의 연대의 길을 열어가고 있다. 우리는 역사 전체를 통하여, 이 땅위에서 생명의 충만함을 위해 고난받고 투쟁하는 민중들과 연대하신 우리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민중과 연대하는데 자신들의 삶을 바쳐 온 사람들 -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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