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0/4(화)
생명  
선 순 화

I. 왜 생명에 대해서인가?

지금 우리는 왜 새삼스럽게 생명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하는가? 이 시대는 역사상 인간의 평균수명이 가장 길어진 시대이고 또 모든 생물체는 언젠가는 다 죽게 마련인데 말이다. 그것은 오늘날 인간 뿐 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전면적인 죽음의 위협에 처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핵무기는 지구의 전 생명체를 단시간 내에 말살할 수 있다. 공해 및 그에 따른 생태계 변화 및 기후 변동은 전 인류 뿐 만이 아니라 동, 식물 종의 멸절, 생물권의 퇴화 등 전 생태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전세계의 소외 계층(제 3세계인, 여성, 가난한 이, 장애자, 기타 국외자)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질곡의 폭이 심화되고 있다. 또 인간의 평균수명이 길어졌다고는 하나 많은 개개인의 심신은 여전히 병들어 있다. 이처럼 이 시대의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은 개인적이거나 국지적인 것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전지구적인 성격을 지닌다.

생명에 대한 문제가 이처럼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것만큼 그 해결 방법도 전면적이고 총체적일 수밖에 없다. 생명의 문제의 해결은 개개인의 변화는 물론이고 전체 문화의 변화를 필요로 하고 있다. 즉 생명 문제는 인간의 실천은 물론이고, 전 생명체의 생존을 다뤄야 하는 정신적이고도 윤리적인 각성을 요구하며, 신학의 재정립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이 논문은 생명 문제는 우리의 삶의 방식, 사고방식 또는 세계관, 신학적 범주에 대한 자세를 전면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그 범위를 설정할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숙제를 일부나마 풀고자 의도하는 것이다. 이 논문은 생명의 본질을 で관계의 망と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것이다. 생명의 정의를 생물학적으로, 사회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특히 기독교적으로--규명해 봄으로써 그 개념의 복합성을 밝혀 본다. 다음 생명 위기의 실상을 생산 과정, 분배 및 재분배의 과정, 재생산의 과정에서 탐색해 봄으로써 오늘날 생명 위기가 폭력과 소비의 삶의 방식을 동반하는 산업화, 경쟁과 착취, 지배와 억압이라는 사회(경제 및 정치 포함)구조의 모순과 맞물려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생명 위기가 현대 주의의 사상적 지원을 받았음을 인지하고 인간중심주의, 강자 중심 위계주의, 남성중심주의와 같은 서구의 사상적 범주들의 함의를 살펴본다.

이어서 생명 운동의 주체와 방향을 살펴보는데, 생명 운동의 주체는 종전의 で타자들と(자연, 제 3세계인, 가난한 이, 여성, 각종 소외자)을 주축으로 이뤄져야 하는 타당성을 제시한다. 생명 운동의 방향은 현대주의의 사상적 범주를 지양할 수 있는 생물체 평등주의, 만인 평등주의, 남녀 평등주의 중심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인의 생명 운동의 영역은 세계관의 변화, 생활 방식의 변화,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장으로 설정하고 그 실천 방안을 첫째, 생태학적 감수성의 계발과 그것에 기초한 총체적 영성 기르기, 둘째, 새로운 신학의 정립, 셋째, 환경 운동과 적정 생활 운동, 넷째, 새로운 사회 관계의 형성을 위한 사회 정의의 구현, 다섯째, 새로운 생활양식을 위한 공동체 형성 등으로 나누어 제시하고자 한다.

위 논의의 전체적인 의의는 결국 오늘날 생명 현상의 위기를 극복하고 보다 생명력이 넘치는 인간성의 형성과 사회적 삶의 장을 만들고자 하는데 있다.


II. 생명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생명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는 사랑이 무엇이고 종교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일처럼 난감한 문제이다. 서로 마음속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으나 꼭집어 말로 표현하려면 말의 한계를 느끼는 그런 것이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현상은 그 범위가 매우 넓어서 다양하게 경험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정의는 시공을 통해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개념은 다원적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1. 생물학적 생명--기계적, 통전적

생명 현상은 생기, 숨, 피, 영/혼/육, 의식 또는 정신적 기능, 신체적 운동, 맥박, 뇌파의 활동 등으로 생명의 구성 요소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금방 알 수 있듯이 생명의 구성 요소 자체가 생명일 수는 없다. 숨은 쉬어야 하고, 피는 돌아야 우리는 살았다고 하는 것이지, 숨자체나 피자체를 생명이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숨을 쉬고, 피가 도는 일은 허파나 심장이 스스로 독립적으로 한다기보다는 한없이 얽혀 있는 で삶의 망と을 통해서 가능해지게 된다. 물론 현대 의학에서는 뇌의 활동을 생명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이에 근거하여 뇌사한 사람의 장기이식 등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임상의학 이외에서는 생명의 문제를 통전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

생화학적으로도 생명은 ぢ물질과 에너지 대사를 통해 복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조직체っ라고 정의한다. 생명체는 세포라는 기본단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ぢ개개의 세포는 독립적이면서 다른 모든 세포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공동의 목표 즉 살아 있기 위해서 협력한다.っ 덧붙인다면 생명체는 생존을 위해 내부적인 대사 능력과 아울러 외부로부터 공급되는 영양과 자원(햇빛, 공기, 물 등)을 받아서 활용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즉 생명 현상은 개방된 공간 속에서 상대적으로 막을 지닌 생물체가 받아들임과 내보냄이라는 순환을 통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숨은 밖으로부터 공기를 내쉬었으면 다시 밖으로 내뱉어야 하고, 음식은 잘 먹어 섭취했으면 또한 잘 배출해야 건강한 생명체가 되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생물학적 정의는 한편 시공의 수준이 달라지면 그 정의도 달라진다. 과학의 발달로 우리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규모의 세계를 알게 된 것이다. 공간적으로는 작게는 세포는 물론이고 양성자와 중성자의 기본 입자인 쿼크 quark라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고, 크게는 지금도 팽창하고 있는 직경이 약 150억 광년이나 된다는 우주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초 이하의 시간도 측정 가능해졌고, 길게는 지구의 나이가 45억년, 우주의 나이가 200-500억년이 더된다는 등의 지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식이 확대됨에 따라 생명에 대한 이해가 과학적으로도 달라질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지구가 살아 있는 유기체라면, 우주 자체도 살아 있는 유기체이고, 따라서 우주 속의 모든 것도 살아 있는 것이 된다.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죽어 있다고 생각되는 것도 시간과 공간의 규모를 확대하면 살아 있어서 변용의 과정에 있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생물학적인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변용의 한 과정일 수도 있다.

이처럼 생물학이 내린 생명의 정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통찰은, 생명체는 살아 있는 총체적 조직체로서 시간과 공간을 매개를 하는 관계의 망을 통해 존재하며, 각 생명체의 지체는 독립적인 개체이면서도 공동의 선 즉 생존을 위해 서로 상부상조하는 속성을 지닌 부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2. 사회-문화적인 생명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의 망에서 사는 사회적 동물이요, 상징과 의미를 구사할 줄 아는 문화적 동물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인간은 그들이 소속한 집단의 가치관에 의하여 그들의 인간됨에 대한 평가를 받아 왔다. 이 인간됨의 기준에 부응한 자는 사회-문화적인 생명을 부지하고, 심하게 어긋나는 자는 설령 생물학적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해도 사회-문화적인 생명을 상실했다고 한다. 매국노, 변절자, 배신자, 불륜자, 금치산자 등은 이들에 대해 붙여지는 죽음의 이름이다. 이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윤리적 생명 등을 상실했음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문화적인 생명은 사회-문화적 관계의 망으로 얽힌 각 사회가 규정하는 가치관에 부응하려는 일치의 노력으로 유지된다. 그래서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는 일탈자로 낙인이 찍혀 사회에서 멸시, 경계, 격리를 당하게 된다. 한편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갈등과 파멸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일례로, 백인우월주의의 서구적 가치관은 백인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비인간화를 요구하는 아주 비생명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가치관을 변화시켜야만 생명력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 수가 있다. 이같은 인종차별주의 뿐 만이 아니라, 계급차별주의, 성차별주의, 지역차별주의, 사람들의 집단을 여러가지 사상적 이유로 매도하는 이데올로기 등은 비기득권자에게는 비생명적인 것이 된다.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불의한 사회적 생명 파괴에 대응하는 자들은 자신의 생존에의 의지를 자신의 생명 유지보다는 더 큰 생명 유지를 위해 사회적 죽음을 택하여 성취하는 생명의 이중성을 보인다. 자신을 죽여 남을 살리는 일이다. 심지어는 이를 위해 생물학적인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경우가 있다.


3. 종교적인 생명

종교는 인간과 세계를 신적 영역에 연결시키는 속성을 지닌다. 즉 삶의 궁극적인 근원, 의미, 목적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다. 종교는 세계와 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를 신이나 신적 존재의 창조로 믿거나, 모든 생명체간에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で초월적と 특성 때문에 인간은 우주의 전체적인 삶과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종교적인 생명은 종교가 사회 문화적인 성격을 지니는 만큼 해당 종교와 그 구성원들이 규정하는 관점에 의하여 각 종교마다 독특한 생명관을 지니게 된다. 예를 들면, 무속에 의하면 생명은 삼신할머니의 선물로서 주어지며, 생명은 신령들의 가호로써 풍성해지므로 신령과 신령의 거처인 자연에 정성을 바치는 것을 중요시하는 생명관을 지닌다. 불교는 인연과 업보로써 생명을 받게 되며, 모든 존재에는 불성이 있어서 생명의 평등성을 주장하고, 수도와 신앙과 덕행으로 해탈하여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는다는 생명관을 갖는다.

종교적으로는 신적 존재가 창조한 모든 피조물은 생명체의 의미를 지니기에 우주는 물론이고 우주의 모든 것들, 소위 말하는 무생물까지도 생명체인 것이 된다. 또는 인격신보다는 우주의 원리를 신성으로 생각하는 종교 전통에서도, 우주 만물이 신성을 공유하거나 신적 질서 속에 관계의 망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신성하다고 본다.

여기에서는 서구 문명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기독교의 생명 이해에 대해서 보다 밀접히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의 생명 이해는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며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대전제에 근거한다.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하나님의 생명의 창조요, 생명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생명을 나눈 사건이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창세기의 창조 설화는 인간을 포함하는 우주의 삼라만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인간은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어 자기와 닮게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기술한다. 피가 생명이라고 가르치는 레위기 17: 10-14는 피의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밝히면서 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후 제정된 계명들--십계명, 제사법, 희년법 등--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나타난 생명의 소중함을 보전하기 위한 것으로서 생명은 계속 보전되어져야만 하는 과정으로 다룬다. 신약에서는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화육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참생명, 영원한 생명임을 증거하고, 그를 믿는 신앙으로 참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고 또한 생명의 부활에 동참하는 소망을 지닌다고 한다.

성서의 생명 이해는 결국 생명의 근원, 의미, 목적을 초월적인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다 생명을 지닌다. 즉,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은 생명체인 셈이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므로 생명의 소유는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우주 만물은 피조물이므로 스스로는 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의 소유권 뿐 만이 아니라, 나 이외의 것에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생명에 대한 권리 또는 소유권보다는, 생명을 보전해야 할 책임과 그 생명을 풍성하게 살 자유를 갖게 된다.


4. 생명 현상의 공통점

그러면 생물학적인 생명, 사회-문화적인 생명, 종교적 생명 이해의 관계성은 무엇인가? 생명에 대한 성서적 이해에 근거하면, 생물학적인 생명, 사회-문화적인 생명은 종교적 생명 이해에서 말하는 영생을 얻게 되는 장이요 수단이요 통로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생명체는 각기 다른 고유한 달란트를 지닌다. 모든 만물은 신적 존재의 창조물이거나, 우주의 원리의 다양하고도 독특한 표현이므로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와 생존할 권리를 갖는다. 피조물의 생래적(生來的)인 권리와 자연법에 의한 자연적인 권리 사상은 서로 상응하는 면이 있다.

생물학과 성서는 생명을 유기체적으로 이해하는 유사성을 보인다. 즉 각 생명체는 서로 상부 상조하는 기관들과 존재들의 협력 관계 속에서 생명을 유지해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 이해는 사회-문화적인 생명 이해와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사회는 각 구성원이나 구성 기구들이 유기체적인 공조 체제로 균형을 이룰 때 안정을 이룬다고 보고 있다.

위와 같은 생명 이해는 지배와 착취로 인한 자연 파괴, 인권유린의 현실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기능주의적 이해에 내려진 사회 비평을 염두에 둔다면, 유기체적 생명 논리는 적어도 사회-문화적으로 볼 때는 강자의 지배 이데올로기 강화에 역이용될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사회 유기체의 안정과 균형이라는 사회적 요구는 자칫하면 사회 구성원의 다양성을 희생하고, 다수의 권익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소수의 권익을 무시할 수가 있다. 따라서 모든 사회 구성체가 고유의 가치와 권리를 갖는다는 다원적 생명 이해가 필요하다.


III. 생명 위기의 실상과 원인은 무엇인 가?


생명체란 스스로 존재한다기 보다는 생명체의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므로써 존재하는 관계적인 것이다. 생명체의 환경은 자연적인 것 뿐 만이 아니라 인위적인 사회-문화적인 환경을 모두 포함한다. 생명체, 자연 환경, 사회 문화적 환경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속, 변화한다. 그러므로 생명의 위기는 생명체 자체의 위기와 더불어 생명의 생태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의 위기와 맞물려 있다. 생명 위기의 실상을 생산 과정, 분배 및 재분배의 과정, 재생산의 과정에서 야기되는 것으로 분류하고, 그러한 과정들의 정신적, 문화적 바탕인 서구적인 철학 범주가 생명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고 보고, 그중 인간중심주의, 위계주의, 가부장제를 생명의 위기의 종류와 상응시켜 살펴보고자 한다.


1. 생산 과정으로 야기되는 생명의 위기와 인간중심주의

18세기 후반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업 혁명을 효시로 하여 시작된 산업화의 과정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가 갈수록 그 규모가 커지고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산업 선진국을 필두로 하는 산업화의 과정은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자연 자체의 생명력과 그 안에 깃들인 생명체들을 위협하고 있다. 곧 산업화 과정은 생명의 환경과 생태계 자체의 질서를 파괴하여 인류를 비롯한 모든 생명을 파멸의 위기로 몰고 가고 있다.

생산 과정으로 야기되는 생명의 위기를, 한때 한 나라의 부의 척도가 되었던 철강 산업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철강은 광물 속에 들어 있는 미세한 양의 철분을 추출, 수집, 가공한 것인데 그 과정은 고도의 에너지와 생태계의 파괴를 수반한다. 먼저 철광을 채굴하기 위해서는 산을 뚫고 파헤치는데 이 작업은 수만 년에 걸쳐 형성된 생태계가 순식간에 파괴된다. 원광은 철분을 추출하기 위하여 분말로 만들어 흐르는 물에 씻는다. 이 과정에서 나온 흙은 인근 하천과 강을 오염한다. 이렇게 얻은 광물 분말은 용광로에서 장시간 높은 온도로 녹인다. 이때 여러 종류의 중금속들과 유해 가스들을 내뿜어 인근 지역 공기와 생태계를 파괴한다. 이렇게 얻은 선철은 더 높은 온도의 공정을 거치고 강철이 되는데 또다른 대기오염과 냉각수의 방류로 하천을 오염시켜 생태계를 파괴한다. 생태계에 가해진 고 에너지 산업의 공정은 두 가지 양태로 생태계를 파괴한다. 첫째는 자연 상태에 있는 중요한 원소들 자체를 파괴하여 그들이 불안정하게 되어 결국 산업 폐기물로 버려지게 되고, 둘째는 생태계의 사슬의 한 부분을 단절시켜서 결국 생태계의 순환 고리 전체가 약해지거나 그 기능이 중단된다.

산업화가 생태계를 파괴하는 또하나의 과정은 산업 제품 자체들(수은, 합성 농약, 합성 세제, 합성 비료, 비닐 제품 등)이나 그 잔유물들(배기가스, 폐기 가스)이 생태계 순환 과정의 사슬의 어떤 고리 안에 축적이 되어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에 해를 끼치고 나아가서는 대기권을 교란시켜 전 지구의 대기 환경을 위기로 몰고 간다. 생산 과정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는 거의 다 위와 같은 경로를 밟아 이뤄진다.

그러면 생산 과정으로 야기되는 생명의 위기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서구 철학의 인간중심주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많은 사상가들은 베이컨 Francis Bacon (1561-1626), 데카르트 Rene Descartes (1596-1650), 뉴튼 Isaac Newton (1642-1727), 세사람이 서양사상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 유사한 이해를 하고 있다. 그들은 이 세 사람의 저술들은 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기계론적 파라다임과 결과적으로는 인간중심주의의 형성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들 이전의 사람들은 우주를 살아 있는 유기체적 실재로 보고 인격성을 부여한데 반해, 이들은 자연으로부터 영들을 제거하여 탈 신성화하고 탈 인격화하여 자연을 대상화하였다. 이전에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을 자연 자체의 생명력으로 본 것에 비해, 이들과 과학자들은 자연에서 그 생명적인 힘을 분리시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 인양 이해하였다. 자연의 힘은 이제 추상적인 수학 공식으로 둔갑하여 통제된 실험을 할 수 있어서, 자연 지배의 가능성까지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이 고유한 권한이나 가치를 갖는다라고 볼 수가 없었다. 자연은 여러 부품으로 조합된 で거대한 기계と에 불과하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베이컨은 지식이란 힘으로서, 사물들의 원인과 보이지 않는 운동에 대한 지식을 얻고 인간의 통치 영역을 확장하여 지구의 자원들을 변모시키는 데 활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데카르트는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을 체계화하는 데는 수학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통찰은 모든 것을 수학 정식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인간의 갈망에 불을 질렀다. 그러다 보니 자연의 모든 것과 현상이 수학적으로 진술될 수 있는 보편적인 기계론적 법칙들에 의해 지배되는 일종의 기계로 간주되었다. 데카르트는 수학적인 시도가 인간의 유익을 위해 자연의 비밀을 풀 수 있게 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지식으로 인간은 자연의 소유자요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뉴튼은 지구 역학과 천체역학을 연결시키는 천재성을 발휘하였다. 뉴튼의 우주는 인과법칙들에 따라 상호 연결되어 있는 부분들로 구성된 복잡하고도 정교하게 측정되어 있는 한 구형의 기계와 매우 닮았다. 그런데 그 우주는 피라미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이 세계의 맨 밑바닥에 무생물, 다음 식물, 곤충, 동물들로서 고도로 층화되어 있으며, 그 정상에는 이 구조에서 단연 우월한 존재인 인간이 자리잡고 있다. 인간은 그의 지능 때문에 우월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우주와 지구는 오로지 인간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에게 사용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기계론적 세계관은 인간의 지식과 지능을 높게 치하하므로서 인간 중심적인 가치관을 내세우게 되었다. 모든 존재들이 궁극적으로 독립적인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뉴튼의 원자개념, 즉 인간들끼리 또는 인간들과 자연계는 전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라는 생각은 로크 John Locke나 아담 스미쓰 Adam Smith에 의해 사회로 확장되었다. 로크는 정부의 기능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 발견한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힘을, 부를 생산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는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담 스미쓰는 모든 인간 활동의 근거는 물질적인 자기 이익이라고 하면서 뉴튼의 파라다임을 따르면 경제적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덧붙여 다윈의 진화론의 핵심인 적자생존은 인간의 자기 이익과 물질적 안녕의 확보를 통해 생존을 보장받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는 자연 세계는 평가절하를 받고, 하나의 생명 공동체로서의 우주와 그 속에 살아 있는 종들 간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생각이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 종에 가해지는 손상이 전체에 가해지는 손상으로 파악되는, 우주가 하나의 밀접하게 연관된 가족이라는 이해가 받아들여질 공간이 없는 것이다. 우주와 자연은 오로지 인간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에게 이용되는데서 그 존재의 의의를 갖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위와 같은 기계론적인 세계관에 기초한 인간중심주의는 우리에게 문명의 이기를 가져왔지만 결국은 오늘날 생산 과정으로 야기되는 생태계의 피폐화를 가져왔다.


2. 분배 및 재분배 과정으로 야기되는 생명의 위기와 위계주의

지구의 자원과 그 자원에서 나온 상품의 소유권, 사용권은 부의 분배 및 재분배의 과정의 흐름을 결정한다. 선진 산업 국가들은 지구의 자원의 분배 과정에서 그 선점권을 누리고 과소비하는 동안에, 제삼세계를 중심으로 하는 후진국은 파괴된 환경 속에서 가난과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후진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이와 맞물린 사회적 불의, 정치적 억압, 군사적 억압 및 파괴(전쟁), 문화적 황폐로 그들의 생명과 삶은 위기를 맞고 있다.

이와 같은 경쟁적 국제 관계와 사회 관계는 폭력 질서와 갈등 구조를 정당화하였고, 이를 유지하는 것이 인류의 안정 구축에 필수적이라는 자기 합리화에 빠져 서, 각 나라들이 군사력의 증강을 당연시하여 무서운 핵무기를 생산, 보유하기에 이른 것이다. 강대국들의 이러한 안보 이론으로 인해 한반도는 분단이 되었고, 지금도 주변 강대국과 남북한 당국의 안보 이론으로 분단의 고착화를 면치 못하고 있다.

분배 및 재분배의 불균형을 세계적 수준에서 살펴보면 그것이 야기하는 생명의 위기 현상을 더 분명하게 볼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고도의 산업화가 이뤄져 1인당 자원 소비가 후진국의 그것보다 수십배를 넘고 있다. 또 생산력의 과잉 부분을 처리하기 위해 후진국으로부터 더 많은 자원을 더 싼 값으로 확보하는 동시에 시장 확대를 위해 국경이 없는 자유무역 정책을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 조직의 이데올로기로 정착하고 있다. 농산품에서 공산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금융자본의 개방과 지적 소유권의 확대에 이르기까지, 조직화된 선진국의 대기업들이 후진국에 진출하여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후진국은 싼 원료의 공급지인 동시에 비싼 공산품과 서비스의 수요지가 되어 환경은 파괴되고 빈곤은 구조적으로 고착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제도의 국제적 모순에 의해 후진국의 빈곤은 영속화되고 있으며, 한쪽에서는 식량이 남아 돌아가고 있는데도 다른 한쪽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수천만에 이르고 있는 불합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기아가 만연이 되어 있는 지역은 동식물도 남아나지 않을 만큼 생태계가 파괴되고 심지어는 회복이 불가능한 사막화가 진행되기에 이른 것이다.

국제적인 환경개발회의에서 늘 논쟁이 되는 것은 선진국들과 후진국들의 상이한 경제구조이다. 후진국은 개발을 원조 받아야 만할 처지이고, 선진국은 자원을 절약하고 개발의 속도를 늦추고 검소한 생활양식을 갖도록 요청 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후진국의 빈곤과 기아와 질병으로 인한 생명의 위협 문제는 국내외의 사회경제적인 개혁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래야만 후진국이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경제 개발의 기회를 갖는 동시에 그들의 후손을 위한 자원의 보존도 가능하게 된다. 환경이 지탱 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을 해 나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창조 질서를 보전하고 생명 현상을 영속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한 국가 내에서의 빈부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의 해결도 위와 유사한 경로를 필요로 한다. 가진 자들은 자원을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양식으로 바꾸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직업의 기회와 자기 계발의 조건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사회계층간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총체적인 사회경제적 제도의 개혁을 실시해야 한다.

생명망의 관점에서 본다면 후진국과 가난한 자의 빈곤, 생태적 파괴, 문화의 황폐는 선진국과 부자의 풍요, 자원 낭비, 소비적인 생활과 맞물려 있다.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후진국과 가난한 자의 비생태적 삶은 인류 전체의 비극인 것이다. 따라서 이의 해결은 인류 모두를 위한 해결인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분배와 재분배의 불의한 구조에서 야기되는 생명의 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서구 인문주의의 이원론, 즉 정신과 육체, 인간과 자연 등을 이원적으로 분리하여 생각하는 경향과 그에 수반하여 오는 강자 중심의 위계주의이다. 이원론은 어두운 부분, 즉 죽음, 의존, 유한성을 떼어 내어 육체(몸)나 자연에 그것을 투사시킨 후 그것을 지배하고 조절한다. 이러한 이원론이 사회 진화론과 맞물리면서 인간사회로 확장되었다. 강대국은 약소국을 경시하였고, 지배자는 피지배자를 경멸하였고, 가진 자는 못가진자를 열등하다고 간주하게 된 것이다. 또한 다양한 사회계층은 더욱 복잡하게 층화되어 피라미드 모양의 위계구조를 정당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위계주의는 다원적인 사회에서는 여러 종류의 위계 구조를 형성하여 더욱 더 복잡하게 생명의 위기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3. 재생산 과정에서 생기는 생명의 위기와 가부장제

인간의 성은 일차적으로 차세대를 재생산하여 인간이라는 종을 이어가는 일을 담당해 왔다. 그런데 남성 중심으로 설계되고 개발된 기술들이 만들어 낸 많은 생산품들이 오히려 여성과 남성의 재생산 능력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제초제, 유독 산업 폐기물, 핵방사선, 가정화학품은 여성에게, 유해한 생산 과정은 남녀 모두의 재생산 능력을 손상시키고 있다. 핵으로부터 나오는 방사능과 폐기물은 생태계의 오염은 물론 선천적인 기형이나 암을 유발하는 것이다. 유독 산업 폐기물은 지하수나 상수원에 스며들어 유산이나 선천적 기형, 백혈병의 원인이 된다. 논밭이나 숲에 뿌리는 농약이나 제초제는 해당 지역 인근에 살고 있는 임산부들에게 잠재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에서도 골프장의 과도한 농약 사용이 생태계의 파괴는 물론이고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 캐디들의 건강과 재생산 능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실이 사회화된 적이 있었다.

인간 남녀의 생물학적 구별은 사회적인 성역할의 구별로 연결이 된다. 즉 남녀의 사회적 관계는 여성의 생리, 임신, 수유에 영향을 받는다. 사회적인 통념은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이 여성을 집에 묶어두고 그들의 사회적 기동성과 노동력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축 받아야 할 여성의 재생산 능력이 오히려 여성의 생산 능력을 저해하는 무슨 약점이나 저주처럼 간주하는 사회적 편견은 가부장제의 산물이다. 여성 해방을 부르짖는 자들은 인간이란 생물학적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많으며 여성이나 남성 모두 이성체로서 자율적인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단지 교육과 경제적 기회로부터 여성을 배제한 가부장제가 여성들의 창조 능력을 제한하였다는 것이다.

가부장제적 자본주의는 남성은 상품화할 수 있는 노동을, 여성은 가정에서의 노동이나 단순노동에 합당하다는 편견을 드러내 왔다. 가정에서의 여성의 노동은 무보수이며 남성의 공공노동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다 보니 남녀가 지배와 종속의 관계를 맺게 되고 남녀는 서로에게서 소외가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성의 가정에서의 역할을 평가절하면서도 여성의 가정 밖에서의 역할을 제한하는 것이 가부장제의 모순성이다.

그런데 의학의 발달로 인간은 인간의 재생산 능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되자, 인간의 성은 이제는 재생산보다는 사랑과 쾌락의 수단으로 그 중요성이 더 부각되고 있다. 인간의 성, 특히 여성의 성은 상품화하고 대상화되어 남성들의 쾌락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한국의 경우는 뿌리깊은 기생문화의 영향으로 서비스 부문에서 종사하는 상당 부분의 여성들이 성을 상품화하도록 강요를 받고 있다. 특히 저소득 사회계층 출신은 생존을 위해 성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기에 이른 것이다. 성의 대상화는 또한 도색 문화와 성폭력의 확대를 가져왔다. 유아의 성추행, 직장 상사의 성희롱, 친지에 의한 강간, 각종 성폭행은 여성의 인격성을 무시한 가부장제적인 여성에 대한 폭행이다.

이처럼 가부장제는 인간 특히 여성의 재생산 과정에서 야기되는 생명의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그렇다면 가부장제 형성의 흐름을 일별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성은 일차적으로 차세대를 재생산하여 인간이라는 종을 이어가는 일을 담당해 왔다. 인간의 생리에 대해 넓은 지식이 없었던 고대에는 재생산 과정에서 남성의 역할에 대해 잘 인지하지 못한 반면, 여성에게서는 재생산 과정을 가시적으로 극명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곧 여성의 재생산성은 자연과 대지의 재생산과 유비적인 것으로 연결되었다. 그리하여 고대인들은 자연을 돌보는 어머니라고 하였고 대지를 여성적으로 생각함으로써 또한 세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생각하게끔 되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람들이 자연과 대지의 영향력에 의탁하여 살던 원시 농경시대까지는 여성의 재생산 능력에 대해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여성의 재생산성은 사회의 풍요와 번영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의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재생산 과정에서 남성의 역할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사회가 가부장제로 조직화되면서부터 여성의 재생산 능력을 평가절하를 받거나 심지어는 차세대 재생산에는 직접적으로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생산 과정에 있어서 여성은 단지 물질 또는 수동적 원리 만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태아를 만드는 능동적인 원리는 남성의 정자에서 나온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은 서구 사회에서 가부장제가 공고해지면서 더욱 정설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17세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대중들의 견해는 남성의 で씨と는 재생산 과정에서 능동적인 결정자, 즉 실제 부모이고, 여성은 단지 태아의 발달에 영양과 따스함으로 협력하는 수동적인 인큐배이터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경우도 별로 다를 것은 없다. 남성은 능동적인 で씨と를, 여성은 수동적인 で밭と을 제공하여 재생산 과정을 수행한다.

남녀의 이러한 생물학적인 재생산 능력은 사회적 역할로 해석되면서 남성은 활동적이고 공적인 역할에, 여성은 수동적이고 사적인 역할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즉 남자는 훨훨 돌아다니는 で배と요, 여자는 기다리는 で항구と와 같은 존재로 형상화하는 것이었다. 본성적으로 남성은 여성보다 우수하고 더 가치가 있는 재생산자요 여성의 부족을 메꾸어주는 생산자라는 것이다. 남성만이 활력과 완전함을 보유한다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과학과 시장경제가 발달하고 기계적 우주관이 등장하면서 여성의 재생산성과 돌보는 역할은 수동적인 사회적 역할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여자의 성이 남자의 재산인양 간주되기도 하였다. 기계적 세계관에 의하면 몸도 하나의 기계와 같아서 외부에서 혼과 같은 작용 요인으로 인해 작동한다는 것이었다.

여성은 물질적인 존재여서 정신 우위의 이원론에 의하면 여성과 물질은 모두 수동적이 된다. 17세기에 여성의 수동성에 대해 이렇게 이해하게 된 것은 그 당시 산업 생산에 있어서 여성의 수동성과, 기계적인 철학에 의한 물질의 수동성과 무기력에 대한 확신과 맞물려 있었다. 이러한 인간의 재생산의 능력에 대한 이해는 새로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구성 요소였던 자연과 여성의 통제에 근거한 새로운 과학적 가치와 맞물려 있었다. 종교적으로도 혼은 정자를 통해 남성에 의해 전승된다는 것이다. 남성의 정자는 영적 요소에 공헌하는 것에 비해 어머니는 물질에만 공헌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은 지적으로 열등하고 감정적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 따라서 여성은 임신과 육아와 같은 재생산적인 기능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사용하므로, 학습과 이성 능력과 같은 고등기능에는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의 권위는 여성을 지적으로 열등하고 경제적으로 의존적인 존재로 자리 매김을 하는데 사용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과학의 힘을 빌려 생물학적인 차이가 어느 사이에 사회적인 차별로 둔갑을 한 것이다. 이리하여 남녀간의 위계 구조가 형성이 되었다. 호르몬, 월경, 임신 등과 같은 여성의 재생산 능력은 오히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 여성의 경제적 의존성을 심화시켰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과학 혁명은 여성에게 소위 말하는 지적 각성, 객관성, 전통주의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주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생태학적 여성해방론자는 가부장제가 자연과 인간사회를 파괴로 이끌었다고 본다. 이들은 사실 원자론, 이원론, 계급제도, 엄격한 자율성, 추상적 이성, 자아, 몸, 자연 등과 같은 서구적 개념도 가부장제적 범주에서 형성되었다고 본다.


4. 생명 위기의 실상들의 관계성

위의 모든 과정--생산, 분배 및 재분배, 재생산--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들에게서 파생되는 생명 위기의 실상도 서로 유기적 관계성을 지니고 있다. 갈등적인 사회경제 구조에서 오는 가난, 기아, 질병은 고도로 발달한 서구 중심의 산업화의 파괴적인 생산 과정과 유통 과정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는 또한 핵전쟁의 위협을 가져오고도 있다. 자본주의적 경제 구조와 사회관계는 여성의 시장 노동력과 재생산 과정에 관여한다. 이처럼 생산, 분배 및 재분배, 재생산과정에서 야기되는 생명 위기 현상은 서로 맞물려 있다. 그 근본 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중심주의, 위계주의, 가부장제 모두 이원론적인 분리주의와 배타주의를 공통분모로 보유하고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현대 산업 기술은 바로 남성이 그의 환경, 그의 몸, 그의 여성, 그리고 다른 모든 피지배 계급의 남성을 지배함으로써 죽음과 유한성을 정복하려는 남성 탐구심의 절정으로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생명 위기의 실상과 원인의 성격을 종합해 보면 결국 관계성의 깨어짐인 것을 알수가 있다. 따라서 인류는 이러한 생명에 대한 총체적 위협에 대하여 그 실상에 대한 공동 연대적인 인식, 그 해결을 위한 공동 연대적인 비젼과 실천 전략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IV. 바람직한 생명 운동의 성격을 어떻 게 설정할 것인가?


위의 생명 위기 현상의 극복을 위해 우리는 생명 운동을 전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러면 바람직한 생명 운동의 성격은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모든 사회 운동은 운동의 주체와 방향과 영역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운동의 성격이 달라지므로 여기서는 주체와 방향이 갖는 생명 운동에서의 의의를 살펴보고, 다음 장에서는 생명 운동의 영역을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유형화해 보고자 한다.


1. 생명 운동의 주체

생명 운동의 주체는 역설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자율성이 보장된 주체자의 입장이 아닌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박탈된 で타자と의 입장에서 생명 운동의 주체성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1) 인간 뿐 만이 아니라 자연도 주체이다

먼저, 우주나 우주안의 자연물이 나름대로 생명 운동을 하고 있는 주체인데도 우리 인간이 그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례로 인간과 인간의 생활 환경이 지구에 나타나기까지 우주는 무수한 진화와 퇴화, 변화와 역전의 과정을 거쳐 왔다. 이러한 모든 과정들이 어찌 보면 우주 나름대로의 생명 운동인지도 모른다. 대폭발 (Big Bang) 또는 대출산 (Big Birth) 이후 생물학적 생명체의 출현을 위한 몇백억년의 길고도 긴 여정이 전개되었음을 우리는 아는데 그것이 우주의 생명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지구상에 생물학적 생명체가 출현한 이후에도 지구는 놀랄 만한 생명보호 기제를 운용해 온 것이다. 오존층과 대기권의 형성, 대기 중의 일정한 산소 함량, 대양과 태풍 등을 통한 온도 조절 등 지구의 생명 보존을 위한 운동은 끝이 없다.

사실 인간의 생명 운동은 지구의 생명 운동에 동조하고 참여하는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생명 현상의 유지나 파괴가 인간의 간섭 여하 및 정도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을 볼 때, 피조물 중 인간의 생명 운동에 우리는 일차적으로 큰 관심을 두게 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지구의 생명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지만 일차적으로 급한 것은 그 운동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통찰은 우리는 지금까지 우주와 자연을 생명 운동의 주체로 볼 만한 생태학적 감수성을 발달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근대인은 우주는 물론이고 자연을 자체적인 생존의 의지력을 지닌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욕구와 자연의 생명 운동이 상충하면 인간은 근시안적인 시각을 가지고 인간 중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따라서 생명 운동의 주체를 밝히는 일은 자연과 우주의 주체성과 생래적인 생존권을 다시 인정하는데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2) 사회적 강자 뿐 만이 아니라 여성을 포함하는 사회적 약자도 주체이다

인간만의 사회 내에서 생명 운동의 주체를 지키는 일은 또 무엇인가? 인간사회에는 늘 생명 보존의 힘과 생명 파괴의 세력이 공존하고 있다. 생명 보존의 힘은 사회 구성원의 다양한 주체성이 잘 발휘될 때 강화되는 반면, 생명 파괴의 힘은 사회 구성의 주체성 대신 타자성이 강조될 때 강화된다.

우주 또는 자연의 타자성과 사회 구성원 중의 약자의 타자성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페미니스트 feminists 학자들이 밝힌 바에 의하면, 서구의 지성사는 자연의 수동성, 육체성, で악마성と을 여성의 수동성, 육체성, で악마성と과 연결시켜서 문화 또는 남성에 의해서 길들여지고 지배당할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이는 인종, 계급, 지역에도 확대가 되어 비기득권 인종, 계급, 지역은 자연처럼 수동성, 나약성, 육체성, 무지성, で야만성と으로 간주되고 있다. 아주 좋게 보아야 で순진한と 정도이다.

따라서 생명 운동의 주체를 논할 때는 생명계의 존재들 간의 권력 구조를 살피지 않으면, 우주, 지구, 피조세계, 인간사회의 막연한 공동체성, 일치성을 주장하여 생태학적 전체주의에 빠져서, 실천의 주체들과 그들의 고유한 개체성과 생래적인 생존권을 흐리게 할 우려가 있다. 반면 각 구성원의 권리만을 주장한다면 얽히고 얽힌 생존의 망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 생태계의 모든 존재는 늘 억압자인 동시에 피억압자이다. 집단으로서 백인 지배층 남성은 백인 여성에 대하여 강자이고, 백인 여성은 유색인 남녀보다 강자이고, 유색인 남성은 유색인 여성보다 강자이고, 유색인 여성은 어린이와 자연에 대하여 강자이며, 자연은 때로는 모든 인간에게 위협적이며, 물질적 강자들은 정신적, 영적 소외감으로 불행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생명 사슬의 엄연한 현실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자신의 생존의 의지력에 의하여 불의한 순환 고리에 생명 파괴력에 반항을 하기도 하고 스스로 그 파괴력의 일부가 되지 않도록 자신의 지배력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2. 생명 운동의 방향

모든 생명체는 생존에의 의지에 의하여 생명을 영위해 간다. 그런데 모든 생명체 중에서 인간만이 언어, 문화 등의 상징 체계와 같은 독특한 이념 체계를 통해 그 생명력을 형성하고 영위하고 설명하는가 하면, 또 그것으로 인해 생명력을 상실하기도 한다. 종교사상도 이러한 이념체계의 강력한 일부이다.

따라서 기존의 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で이념적 모형 전이 paradigm shiftと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념 체계의 어떤 내용을 무엇으로 바꿔야 하는가? 앞서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를 서구 사상의 범주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는데, 생명 운동의 이념적 방향은 바로 이러한 범주들의 변화를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그중 몇가지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인간 중심적 위계질서에서 생명체 평등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인간은 지구상의 다른 모든 것들보다도 더도 덜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이 한정된 지구에서 다른 종들도 번성하게 되고, 그들의 진화적 운명을 다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이러한 생태학적 의식 내지는 감수성을 체득할 때, 인간은 생명 자체의 위대한 과정 속에 증언하고 참여하게 된다. 남용에서 벗어나 감사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실체들도 번성할 수 있도록 적절한 한계 속에서 사는 성숙한 인간성의 길을 제시해 준다. 이것이 바로 모든 존재가 권리를 갖는다는 것의 의미이다.

이러한 이념 체계는 이원론적 사고와는 달리 우주를 구성하는 풍부한 내적 관계성을 본다. 다른 인간들과 자연계와 전적으로 독립적인 원자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모든 것을 구성하는 내적 관계에 있어 で연결점と이라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성은 다른 사물들과의 내적 관련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이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서로 서로에게 뿐 만 아니라 자연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고 취급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성숙한 인간은 이성을, 주객 이원론을 초월하는 보다 심오한 이해나 감수성에 따라 사용할 것이다.

그러면 인간들의 비인간적 환경에 대한 도덕적 관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첫째,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의존하며, 둘째, 인간이 인간이 된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자비, 사랑, 돌봄을 통해 실현한다. 이는 종전의 사고의 틀이 인간됨을 위계질서적 관계에서 권력에의 의지를 통한 지배와 종속으로 본 것과는 대조적인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존재들을 돌보고 사랑하고,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우리의 능력은 우리에게 작용하는 신성을 이해하는 능력과 관련이 있다. 모든 사물의 기원과 운명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또한 우리의 몸과 우리의 몸이 의존하고 있는 관계를 보다 잘 이해한다.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신에게 내맡김으로써 우리는 맡김과 동시에 우리 자신의 구체성을 긍정한다.


(2) 강자 중심적 위계질서에서 만민 평등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통념적으로 권리란 말은 다른 것과는 절연된 것처럼 보이는 인간적 개념이다. 따라서 권리를 가진 자들 속에서 일어나는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생길 것이다. 이때 가치나 의무의 모든 문제들을 규범적인 평등주의로 동일화시켜 버리거나 윤리적 관심의 초점을 전체로서의 생태계(또는 사회)로 옮겨 놓는다면, 개인의 이익이 전체의 이익에 뒤따르는 일종의 생태학적 전체주의가 결과적으로 초래될 수가 있다. 이러한 전체주의적인 생명망 개념이 내포하는 공동체 개념에서는 자아가 돌봄과 책임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어서, 거기에서는 권리 이론의 준거틀 속에 적용시키려는 시도들은 살아남을 수 없게 되어 피억압자들의 권리가 박탈당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즉, 내부 관계의 전체적 배경에서 で전체의 이익と을 위하여 개체들이 합법적으로 희생될 수 있다. 왜냐하면 결국 개체들은 진동하는 생명계에서 작용하는 역동적 유형 속에서 일시적으로 결집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민 평등주의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생래적인 권리와 자유를 소유함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특히 사회적인 약자의 자율성과 자기 정체성 확립을 보장하며 그들의 목소리도 전체 생명망에서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한다는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만 만민이 평등한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3) 남성 중심적 위계질서에서 남녀 평등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인간중심주의는 곧 남성중심주의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페미니스트들이 지적하는 바이다. 이의 시정을 위해 그들은 자아의식이나 개성화 과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청하고 있다. 즉, 한편으로는 고립된 자아를 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타자에 대한 무의식적 혼합을 회피하는 관점이다. 온전한 개체성이란 내가 생명의 모든 것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나 자신을 경험할 때 만 얻어질 수 있다. 건전한 개성화란 육체, 자연, 성과 떼어서 전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를 초월하는 자기 의식은 상당히 관계적이며, 이기주의적 위선이나 거짓 인격을 버리고 있다. 연결성을 가진 것이 자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일부 여성 학자들의 현상적인 연구와는 대조적으로, 여성들과 남성들은 똑같이 원래부터 관계론적 존재인 것으로 상정되고 있다. 전적인 자율성과 독립이라는 가부장적 추구는 망상에 불과한다고 본다. 관계를 통해 여성의 자아는 관계속의 개체로 구체화된다. 또 다양하고도 독특한 시공적 사건인 모든 생명체는 그 존재가 중첩될 수 없기에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존재도 소중하다. 그러기에 생명체는 개방성을 나타내는 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개방성에 몸을 맡길수록, 철저한 분리성이라는 가부장제의 망상이 만든 고뇌와 불안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러한 개방성은 여성 특수한 상황과 역사에 대한 관계에 의해 구체화된다.


V. 그리스도인의 생명운동 실천 영역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망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의 생성 괴멸의 순환 고리에 따라 삶을 영위해 가는 미물이면서도, 자기 존재에 대한 독특한 자기의식속에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하며 산다. 그 세계에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함께 삶의 의미를 짜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명 운동은 따라서 자기 세계에 대한 이러한 자의식을 더욱 각성시켜 생태학적 감수성과 영성을 기르고, 그 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자연관과 신학을 포함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수립하는 것이다. 생명망은 또한 다른 피조물과 인간들간의 관계망을 포함하므로 이의 건전한 관계 형성에 이바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명 운동 영역이 될 터인데 자연과의 관계회복를 위해 환경 운동에,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사회 정의 구현운동과 공동체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1. 생태학적 감수성 또는 영성 기르기

환경 개량 운동이 시급히 요청됨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단순한 개량주의는 지구의 파괴를 막는데 충분치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전히 인간 중심적인 운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자연 안에서 자연 자체와 자연의 위치를 이해하는 인간성의 혁명만이 인간과 땅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연결하는 데 필요한 인간 행동에 있어 극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인간성의 혁명은, 모든 생명체는 관계의 망 속에 존재한다는 의식에 기초한 생태학적 감수성의 형성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생태학적 감수성은 생명의 영성과 관련된다. 그것은 인간과 그 밖의 것들 사이에 절대적인 분리가 있을 수 없다는 で중심적 직관と을 존중한다. 이와 같은 비이원론적인 사고는 우주를 구성하는 풍부한 내적 관계성을 주시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모든 것을 구성하는 내적 관계에 있어 で연결점と의 역할을 한다. 이는 동서양의 종교의 신비적 전통에서 발견되는 일치 개념과 유사하다. 즉 で나와 내가 아닌 것(타자)と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통합체이다.

이는 또한 현대에 이르러 꽃피고 있는 양자 물리학의 존재에 대한 이해와도 상통한다. 양자 물리학에 의하면 물질 세계에는 절대적인 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で저밖에と 어떤 독립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한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주란 그것을 감지하는 감각 기관의 환영일 뿐이다. 모든 원자의 99.9999퍼센트가 텅 빈 공간이며, 실제로는 진동하는 에너지의 덩어리인 아원자 입자가 이 공간 속을 빛의 속도로 돌아다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 진동은 무작위 적이고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모든 원자 내부의 공허는 보이지 않는 지능으로 맥동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와 주위의 환경은 하나이다.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자신의 몸이 어느 지점에서 끝나 있다고 인식한다. 또 우리의 몸이 방의 가구나 집밖의 나무와는 텅 빈 공간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양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で고형 물질と과 で빈 공간と의 구별은 의미가 없다. 1입방 센티미터마다 양자 공간은 거의 무한대의 에너지로 채워져 있고, 아무리 미세한 진동이라도 그것은 전체 은하계 속을 진동하고 있는 광대한 장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환경은 곧 우리의 몸의 연장이다. 우리는 호흡을 할 때마다 누군가가 어제 내쉰 수억 개의 공기 원자를 들이마신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산소와 물과 햇빛은 우리의 체내에 있는 것과 거의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도 보통의 깨어 있는 의식의 상태에서는 우리는 집밖의 나무를 만져 보고는 일치 감정보다는 우리와 다른 딱딱함을 느낀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의 에너지와 정보의 덩어리인 우리의 손가락이 또다른 에너지와 정보의 덩어리인 나무를 만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손가락과 그것이 만지는 대상은 둘 다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무한한 장의 한낱 미세한 끄트머리일 뿐이다. 이것을 실제로 느낄 때 우리는 분리의 상태에서 의식을 해방시켜 만물과의 일체성을 체험한다. 이 일체성 속에서는 で외부에と 있는 의식, 사람들, 사물들, 그리고 사건들은 모두 우리 몸의 일부가 된다. 사실 우리는 이 영향력들의 중심에 있는 관계들의 거울일 뿐이다. 이러한 조화의 관계를 깨달으면 기쁘다는 것이 생태학적 영성을 잘 쌓은 사람들의 공통된 느낌이다.

이러한 조화의 관계를 모르면 で외부의と 것이 공포스럽다. 공포는 분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봄으로써 우리는 자신과 で외부의と 사물들 사이에 혼돈과 무질서를 만들어 낸다. 두려움이 일어나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폭력을 수반한다. 다른 사람들, 사물들, 사건들이 우리와는 떨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만들고자 한다. 조화 속에는 폭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체성 속에 있는 사람은 지배가 불가능한 것을 지배하려고 무모하게 애쓰는 대신 받아들이는 것을 배운다.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내면과 그의 연장된 몸 속에는 평화와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분리로부터 일체로, 분쟁으로부터 평화로의 변화가 모든 영적 전통의 목표이다. 사실 종교들이 영성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온전한 하나로 이어진 전체를 온몸으로 의식하는 것의 다름 아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의 세계관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가정들을 버리므로서 가능하다. 세계관의 변화의 체험은 침묵, 명상, 관조, 직관 등을 통하여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새로운 세계관은 결국 ぢ나와 내가 아닌 것(타자)っ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통합체라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생태학적 감성 또는 영성 기르기는 만물이 하나님의 피조물이 되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인간과 더불어 하나님의 신성을 경축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일이다.그리하여 인간,만물, 하나님은 하나의 생명 통합체를 이루는 것이다.


2. 새로운 신학의 정립

오늘날 생명 현상의 위기가 서구의 문명과 문화와 직결되어 있다면, 오랫동안 서구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왔던 기독교에 대한 신학적 점검이 또한 요구된다.


(1) 새로운 자연관을 향하여

1633년 갈릴레이에 대한 재판과 단죄 이후 과학과 기독교는 서로 다른 길을, 때로는 상호 적대적이기까지 한 길을 걷는 쪽으로 기울어졌다고 지적되고 있다. 기독교 사상가들은 더 넓은 우주적, 세계적 관련사들로부터 그리고 심지어는 문화적 관련사들로부터도 자신들의 관심을 거둬들여서 거의 전적으로 그리스도교 이야기의 독자성에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창조 신학은 일반적으로 무시되었고, 거의 모든 신학적 관심이 구속과 구원의 과정 그리고 예수의 인격과 구원의 길을 따라 개인의 영혼을 인도하는 데 요청되는 내적인 영적 규율들, 또한 교회 공동체 내부의 규범과 법적 신분에 한정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개신교 전통은 스콜라 학파가 전통적인 자연신학을 거부하는 쪽으로 기울면서 구원의 우선성과 은총의 질서를 강력히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적 신학의 편향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새로운 자연관을 수립할 필요를 느낀다.


1)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생태계 파괴의 직접적인 원인은 과학기술의 오용에 의한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사람을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의 착취자로 변화시켰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이 자연의 착취자로 등장하게 된 그 사상적 배경에는 유대교 및 그리스도교적인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많은 신학자들의 의견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다른 피조물 즉 자연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위치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는데, 특히 창세기 1장 28절은 이를 명시하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 자연은 인류의 가족이다

위의 주장의 근거를 제시한 사람은 기술사 교수였던 린 화이트 Lynn White Jr.였다. 그는 Science (March 1967)에 발표한 ぢ우리의 생태학적 위기의 역사적 근원っ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 라는 논문에서 이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생태적 위기의 해결책도 기본적으로는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생태학적 위기를 과학기술의 응용을 더함으로써 해결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의 생물종으로서의 인류라는 입장에서 자연의 모든 측면을 숭배하고 그리고 겸양의 미덕을 신조로 삼고 있었던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1182-1226)야말로 오늘의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을 준 성자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러면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는 누구였던가? 그는 베네딕트와는 달리 아씨시의 프란씨스는 철저하게 유랑자였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소유하지 않고 유랑하면서 공작인 (homo faber)으로서의 일체의 역할을 포기하였다. 그에게는 동산과 연관된 베네딕트회 전통에서 보이는 이 세계를 개조하고자 하는 충동이 없었다. 그는 자연 세계를 인간의 의식주를 제공해 주는 실용주의적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창조물들은 하나님의 현존을 비추어주는 거울 또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가닿게 해주는 사다리였다. 그는 자연을 지배하거나 변혁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고 오직 창조계 전체를 혈족으로 보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신을 자연과 동일시하거나 하나님의 초월적 차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간의 분열을 치유하는 방식으로 모든 창조계를 아우르고자 하였다. 그는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와 그것들과의 친밀한 관계는 사물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일체의 욕구를 막아 준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소비와 소유욕에 불타있는 오늘의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그의 자연에 대한 우애는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의 신비가 인간과 지구는 물론 하나님과의 사이에 더 깊은 친교에 이르도록 계속 촉구하고 있다.


3) 자연은 인류가 돌보고 변혁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르네 듀보 Rene Dubos 교수는 토지의 침식, 동식물의 멸종, 천연자원의 착취 및 생태적 파괴 등은 결코 유대 그리스도교적 전통이나 오늘의 과학기술만이 책임져야 할 특유의 것도 아니라고 한다. 자연 파괴의 과정은 동서고금 어디에서고 발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생태계 위기의 해결 방안은 자연 속에 파묻혀 짐승과 새들과도 대화를 나누며 사색에 잠겼던 성 프란시스코의 삶의 모습보다는, 6세기 경에 몬테 키씨노에 수도원을 설립한 성 베네딕트의 삶의 표본이 보다 더 오늘의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적절한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고 듀보 교수는 주장탖다. 베네딕트회의 규칙이 ぢ노동이 바로 기도하는 것っ이라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베네딕트회의 규칙은 하나님이 사람을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관리인으로서 사람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는 창세기 2장의 창조 신화에서 보다 더 큰 계시를 받았던 것으로 해석한다. 즉 창세기 2장을 비롯한 성서 자체가 전해 주는 동산과 관련한 전통을 지극히 확장시킨 것이다. 인간은 애초에 에덴 동산의 동산지기로 지음을 받아으므로 다른 피조물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다. 에덴 동산은 대지의 상징으로 생태학적

인 공간 즉 생물체의 활동 무대요 보금자리가 되는 공간이다. 생명체가 깃들인 공간인 대지도 따라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다른 피조물을 다스릴 권리만 과도하게 주장한 것이 근대의 문명이라면, 이제는 동산 지기로서 창조의 질서를 보전하고 모든 피조물들과 더불어 안식 즉 샬롬을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는 것이 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생태학적 조화를 충분히 살린 환경의 질을 적극적으로 향상시키는 일이라고 듀보 교수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인류와 땅-지구간의 상호작용은 때때로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광야에서 발생하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창조적인 생태계를 창출해 낸다. 즉 자연에 창조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환경을 아름답게 で인간화된 자연と으로 가꾸어 나가는 일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베네딕트회의 주장이 인간들은 지구를 남용하라고가 아니라 이 세계를 충실하게 관리할 충직한 청지기가 되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문제는 이들의 출발점은 언제나 인간 중심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직 ぢ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っ 자연은 예측 불가능하고 변화무쌍한 것이라는, 또한 만일 인간들이 계속 경계를 펼치지 않으면 이 자연은 쉽게 인간들을 압도해 버릴 수 있는 것이라는 두려움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로 인해서 자연을 순치하며 이를 인간의 통제하에 끌어들이고자 하는 충동이 베네딕트회 전통의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4) 자연은 사랑하고 즐거워해야 할 연인이다

성 프란시스와 베네딕트회와는 좀 다른 자연 이해를 한 이가 있다. 빙엔의 힐데가르트 Hildegarde of Bingen (1098-1178) 는 시인, 음악가, 화가, 신비가, 식물학자이면서 동시에 교황, 왕족, 그리고 교회 평의회의 자문자였는데 지구의 녹색화를 보람으로 살았다. 거룩함을 추구하는 신비가들이 자연 세계로부터 물러날 것을 주장하고 자연 세계에 대해 뿌리깊은 두려움과 적대감을 표시한 데 반해, 그녀는 자연 세계는 인간들이 피해야 하거나, 아니면 순치 시키기 위해서 싸움을 벌여야 할 혼돈 내지 광야로 보지 않는다. 대신 자연은 기쁨과 경탄과 찬양과 경외 그리고 사랑을 불러일으켜 준다고 보았다. 자연은 지극히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어서 그 창조자조차도 입맞추며 포옹하기 위하여 연인으로 가장한 채 자연에게로 다가간다고 한다.

힐데가르트는 지구의 기르는 역할은 결코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 역할에는 우리의 정서적이고 영적인 안녕까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지구는 ぢ하나님의 아들っ이 그의 육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창조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2) 새로워져야 할 신학적 주제들

존 캅 John B. Cobb, Jr.은 자연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과 자연계와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고 교회의 자연에 대한 교리를 보다 충분히 개발하는 것 이상이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이것이 자연신학을 ぢ창조의 교리っ와 구분 짓는 것이다. 즉 전 신학이 자연에 대하여 우리가 배운 바에 비추어서 영향받고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한다. 캅은 자연신학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성찰은 다음 네가지라고 주장한다. 첫째, 모든 ぢ...의 신학들っ은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이었는데 자연신학은 인간의 문제를 보다 확대된 맥락에서 보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 자연신학은 여타 ぢ...의 신학들っ에 대해 호의적으로 개방적이라는 것이다. 인간계는 자연계를 배제할지는 몰라도 자연계는 결코 인간계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자연신학은 여러 가지 다른 주장과 특별한 이해에 귀를 기울이도록 사람들을 개방시키다는 것이다. 셋째, 자연신학은 창조계의 부문들에게도 발언권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기독교의 논의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던 것이다. 일례를 들면, 가축이나 실험 동물들의 고통과 권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연신학에 근거한 어떤 신학을 정립한다는 것은 그것을 전통적 신학의 중심적 범주들 안에서 표현하고 기독교가 관심하는 모든 영역에 적합함을 드러내므로서 행한다. 이러한 신학 작업은 신 중심적인 신학으로 초대한다는 것이다.

캅은 오늘날의 신학이 근대 계몽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중심주의, 이원론, 개인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근대적 사고는 인간을 포함한 각 존재는 근본적으로 자족적 존재 a self-contained being 으로서 타자와는 오직 외부적으로만 관계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사고는 신학에도 영향을 미쳐, 신학하면 그것의 주제와 방법이 아주 타학문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단지 그들과 외부적으로만 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하게끔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신학이라는 것이 이 시대의 절박한 요구에 도무지 걸맞지 않는 것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캅은 이제 자연신학이 우리의 이러한 신학적 경향을 수정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것은 내면적 관계를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데서 온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깨달음처럼 영과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상호 내재성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세계는 상호 내재성으로 존재하며 인간끼리도 상호 내재성으로 존재하는데 그 중심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있다고 믿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다고 믿는 것과 같다. 그러니 신중심주의는 그리스도 중심 주의와 다를 바 아니다. 예수의 수육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신학은 은혜를 강조하면서 그것을 하나님과 수혜자간의 외부적 관계로서만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은혜란 하나님께 외부적이요 인간 수혜자에게는 외부로부터 보태진 것인 양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신 은혜란 믿는자안에 있는 성령의 살아 있고도 효과적인 현존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신학은 전통적 신학적 범주인 신론, 기독론, 세계론, 수육론, 은혜론 등을 재구성할 수 있게 도와준다.


3. 환경운동

공해, 종의 멸절, 산성비로 인한 삼림과 습지의 파괴, 핵과 핵무기 등등을 반대하는 국제적 법률을 포함하고 있는 환경 운동 또는 생태 운동이 우선 필요하다. 한국의 경우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의 효시는 1960년대 중반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전문 학자들 중심으로 공해 문제를 주제로 몇 번의 대화 모임을 가진 것이다. 그후 1975년에 환경문제에 관한 최초의 민간단체인 [환경보호협의회가] 결성되었고, 1982년에는 기독교계 인사를 중심으로 [공해문제연구소]가 결성되어 활동하면서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드디어 실천적 사회 운동으로 자라게 되었다. 1986년이후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해가 늘어나고 환경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공해문제연구소] 외에 [공해추방청년협의회], [공해추방을 위한 시민연합] 등의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공해문제연구소]는 이들 단체와 연합하여 [공해추방운동연합]으로 발전하였다. 이때까지의 환경 운동의 흐름은 초기에는 환경문제에 대한 구조적이고 총체적인 이해보다는 환경문제의 원인을 기본적 공중도덕의 결여 정도로 파악하여 야외에서 쓰레기 줍기와 같은 자연보호 캠페인에 치중했다. 그 후 시민 단체들은 환경문제에 대해 구조적인 인식을 갖추었으며, 환경문제와 환경운동사례에 관한 외국의 자료를 소개하고 대중 교육에 힘썼다. 그러다가 1986년 온산주민의 집단발병 사건을 계기로 환경오염 피해를 입은 지역 주민의 생존권 투쟁을 지원하였다. 여기까지의 환경 운동은 환경문제의 원인분석에 있어서 정치경제학적 접근에 편향되어 있어서 단순하고도 투쟁적인 활동에 치중해서 환경문제에 얽힌 가치관의 측면과 생태학적 측면 등 환경문제의 총체적 성격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독자적인 환경 단체들이 속속 생겨났다. 그 갈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소모임 환경 운동으로서 환경문제와 관련된 전문인 또는 자연의 친구들의 운동이다. 둘째는 지역사회에 뿌리를 둔 운동으로 해당 지역사회가 당면한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는 운동이다. 셋째는 생산자 및 소비자 협동조합 운동의 성격을 띤 것으로써 유기농법에 의한 무공해농산물 등을 생산하여 도시민에게 공급하는 활동을 하면서 생명 존중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 및 공존이라는 가치관의 전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들 모든 운동은 그러나 소모임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다가 1993년 [환경운동연합]으로 모여지게 되었다.

한국의 환경운동은 앞으로 몇 가지의 과제에 직면해 있다. 첫째, 한국적 환경운동 이념을 창출하여 그 토대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둘째, 지역운동과 결합된 환경사회운동 모델 개발이 필요하다. 각 지역마다 특수한 환경문제가 지방자치제의 주요 과제로 부상하고 있으므로 지역화되고 대중화된 환경사회운동의 모델이 요청된다. 셋째, 국제적 연대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현재 지구촌에 살고 있으므로 한국은 기업의 해외 진출이나 농산물과 원자재의 수입으로 해당 수출국의 환경에 영향을 미친다. 반면 한국내의 다국적 기업이나 주변 국가의 산업화는 한국의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에 환경 운동은 국제적 연대를 구축해서 환경문제를 해결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환경운동은 위와 같은 환경운동에 개인들 또는 교회 단위로 동참하고 주도하면서 이것이 그리스도교 윤리의 실천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아울러 환경보호의 근본적 대책의 하나가 되는 적정 생활양식을 주창하고 실천해야 할 윤리적 책임도 갖는다.

대중매체의 홍보를 통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파괴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의 삶은 여전히 일회용 상품을 즐겨 쓰고 합성 제품을 거리낌없이 쓰고, 차량 소유량을 늘려만 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유함과 편리함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를 경제발전의 지표 인양 여기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유와 소비가 사회적 지위를 가르키는 한 지표가 되기 때문에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더 큰 건물의 교회, 더 큰 규모의 예산이 교회 성장의 성공의 지표로 인식된 지 오래다. 교회 활동에 과도한 차량과 에너지의 소모가 일상화되어 있고, 교회 건물의 개축과 증축은 필요 이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교인들의 소비적 삶이 하나님의 축복인 양 오해하는 풍토도 조성되어 있다. 이제는 매사에 ぢ이것이면 충분하다っ라고 하는 절제와 절약의 겸허한 삶의 양식이 필요하다.


4. 사회 정의의 구현

부유한 국가들과 가난한 국가들 그리고 같은 나라에서의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간의 점점 다 격차가 벌어져 가고 있는 세계에서 생명이신 예수의 복음이 요구하는 것들은 무엇인가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사회의 불의에 대하여 다시 한번 심각하게 생각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제1세계 국가들에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소비 형태는 지구가 그것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 있는 무분별한 것이고, 오직 세계인수의 대다수를 빈곤화시킴으로써만이 유지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부도 권력도 가지지 못했던 나사렛의 예수, 자신의 머리를 눕힐 곳조차 없었던 예수의 추종자들 15억이 지금은 지구 자원의 3분의 2를 자유 자재로 사용하고 관리하고 있고,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 보다 3배 정도 더 부유한 상태에 있다.

서방세계의 이러한 부가 하나님의 축복으로만 이뤄졌다고 보기에는 세계근현대사가 식민지 제국주의의 비극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서방세계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기보다는 식민지 지배를 통해서 부의 중요한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그러한 식민지 지배가 제3세계 국가들을 빈곤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선진국의 후진국 경제 지배는 시장의 개방이라는 명목으로 다시한번 그 세력을 과시하는 시대를 우리는 지금 맞고 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그리스도인들 뿐만이 아니라--생명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것도 풍성하게 가지게 하기 위해서 왔다. (요한복음 10장 10장) 그런데 세계 인구의 3분의 2는 경제적 빈곤으로 말미암아 일용할 양식을 걱정해야 하고 병에 시달려야 하고 저들로부터 위협을 느끼며 살고 있다. 경제적 빈곤은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삶에 대한 약속을 무색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빈곤은 희망을 갉아먹고 믿음을 무기력하게 하며 사랑을 냉담함으로 바꾸어 버리기 때문이다.

반면 부자들은 정신적인 빈곤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오늘날 선진국의 중산층은 물질적 풍요 뒤에 오는 것은 공허함과 권태에 시달린다. 그들을 즐겁게 하거나 감동시키는 것은 드물고, 그들의 인간관계는 피상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되고, 미래는 그들에게 더 이상 희망과 꿈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들의 일은 지루하고 의미가 없다. 특히 모든 것을 금전적 가치로 계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정신적인 생명력을 느끼기 힘들다.

죌레는 마가복음서에 나오는 부자 청년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오늘 풍요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기 비움을 명령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부자 청년은 너무 많이 가졌기에 예수를 따르지 못하고 근심하면서 떠났다. 오늘날 한국도 이제 빈곤의 시대에서 벗어나 풍요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중산층들은 고등교육과 안정된 직장과 수입이 있으며 친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적 충만함, 삶의 의미, 정신적인 위안거리를 추구한다. 즉 물질적 충만함에다 정신적, 영적인 충만함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죌레는 예수는 이러한 중산층의 바램을 거절한다고 한다. 우리가 이미 모든 곳을 가졌을 때 생명의 충만함이 오직 않는다. 하나님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텅 비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충만함은 나누어 가질 때 채워지기 때문이다. 부자들의 영적인 공허함은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경제적인 불평등이 심화된 결과이다.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부란 다른 사람들을 가난하게 하므로써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부를 형성하고 유지하고 증식시키기 위해서는 폭력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모든 넘쳐흐르는 외면적인 것을 텅 비워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금전과 폭력을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좀 더 적게 가지고 폭력에 덜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충만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마음의 변화이다. 예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자신의 세계와 생활 태도 및 가치관, 특권적 사회 계급을 극복하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풍요로움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에 있다. 다른 사람들과 나눔으로 해서 오히려 줄어들지 않고, 충만한 생명은 다섯 개의 떡과 두마리의 생선의 기적처럼 증가하기 때문이다.


5. 공동체운동

토엔니스 Ferdinand Toennies는 산업화로 인해 인간의 사회생활의 양태는 gemeinschaft 에서 gesellschaft 로 전이되었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산업 사회 이전까지 모든 사회의 공통된 형태는 지역 공동체였다. 그러나 산업화와 더불어 민족국가가 성립되면서 이러한 지역 공동체는 철저하게 변형되었다. 자연적 공동체의 쇠퇴와 해체는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이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산업화는 기계적인 사물의 질서에 바탕을 든 기획이기 때문에 자연과 사람간의 관계 뿐 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도 기계화된 질서에 입각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 공간이 제도, 관념, 법률, 권력구조 등 추상적인 사회공간에 의하여 지배당하게 되었다. 베버 Max Weber는 근대사회의 특징을 관료체계라고 하였다. 이러한 근대적 조직이 확장됨에 따라 가족 제도와 지방의 저변 문화가 자율성과 안정성을 잃어가게 되었다. 공동체 운동은 계획된 사회가 사회 구성원들의 일상생활을 침해하는 사태에 대한 반동이라고 볼 수 있다. 공동체 운동은 관성화된 행동과 사고방식을 운동의 소재로 삼는다. 그 이외에도 주택 설비, 교통과 지역개발, 탁아시설, 휴양 시설처럼 이전에는 개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거나 행정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던 사회적 재생산 영역을 주요 주제로 삼는다.

종전의 사회 운동이 정치나 노동문제와 같은 で공적영역と에 치중한데 비해, 공동체 운동은 で사적영역と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거대한 사회구조의 체제와 연결시켜 그 체제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연결 구조를 세밀하게 분석하기 위한 실마리를 실천하는 몸짓이다. 공동체 운동은 맹목적 성장과 경쟁으로 인해 생긴 생명의 장의 위기를 극복하고 인정과 협동과 공생이 기조를 이루는 구체적 장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 문명의 반생명적 원리에 대해 총체적으로 반성하고, 체제 변혁은 물론 일상생활의 변혁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억압적 구조에 저항함과 동시에 평등과 자발적 관계를 기초로 한 대안적 삶의 양식을 제시하고 살아내는 것이다. 이제 일상생활의 변화 없이는 사회의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바, 그것이 가장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영역은 소규모 공동체이다.

공동체 운동과 함께, 가시적인 소규모 공동체는 인간의 인간종으로서의 특성이 긍정적으로 나타나는 틀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관계 속에서 참여, 자율, 협동, 공생, 친밀감 등의 인간 종의 긍정적 특성이 여기서 구체적인 현실로 확대되고 재생산된다.

여기에 산업 사회에서 원자화된 인간의 소외를 극복하는 길이 있다. 공동체는 의사 소통, 상호 승인은 자기 성찰의 깊이를 더해 준다. 공동체를 통해 개인은 자기들이 맹목적으로 추구하던 산업 사회의 가치들--소유, 소비, 성장, 경쟁, 선정주의, 명예욕--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하게 되고 의미의 자원이 이로부터 개발된다. 새로운 세계관에 눈을 뜨고 내면적인 변화를 체험하며 그 문화는 도피적이거나 자본의 이익을 위해 소비하지 않으며, 대중매체를 통한 정서와 이데올로기도 비판적으로 걸러 낼 수 있다. 일상성은 대동성을 회복함으로써 건전한 정치성을 담보할 수 있어 개개인이 자율적인 주체로 참여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가 소규모 단위로 고립된 채 폐쇄적으로 운영될 때 그 자체의 자족성에 매몰되거나 이기주의에 빠지거나 탈 정치화하기가 쉬우므로 공동체는 내실을 기하면서도 사회에 대한 넓은 전망을 가지고 개방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다른 공동체와 연대할 필요가 있다. 힘을 규합해서 문제를 해결할 때 자발적이고도 협동적인 집합 행동이 나오므로써, 그러한 유대 속에서 삶의 의미와 의지가 창조적으로 솟아나고 순환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일상성과 정치성은 얽어지게 된다.

이러한 공동체 운동은 지방자치의 성공 조건이 되기도 한다. 지방자치는 지금까지의 행정 논리였던 で중앙의 논리と--집권, 획일, 거대, 고속, 상의하달, 권력 불균형, 관리 등--에서 벗어나 분권, 참여, 토론, 민주주의, 다양성, 조화, 협동, 자율을 추구하는 で지방의 논리と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행정의 문화화로 행정의 기능을 시민 문화적인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을 공공의 의사로 수렴하고 이웃과의 연대 속에서 나오는 창조적 의지로 행정이 운영되는 것이다.그리스도인은 사회에서의 공동체 지향 운동에 동참하거나 소공동체 삶을 대 동호인들과 살아볼수 있다.또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를 통해서 위에서 주장하는 지방의 논리를 실천하고 연습할 수 있다.그곳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대안적 삶을 펼쳐보는 것이다.


VI. 마치는 글


지금까지 이 논문은 생명망의 관점에서 생명의 문제를 숙고해 보고자 하는데 이 생명망 개념은 생명의 위기의 진단과 그 처방에 합당한 개념으로 보인다. 생명의 본질 자체가 순환, 상호관계,상호 의존이라는 관계의 망을 통해 자신의 잠재성을 최대한 발휘해 보려는 성질이 있다. 따라서 생명의 문제는 단편적으로 다룰 수 없는 복합적인 문제로서 인간의 생산, 분배, 재생산활동등 인간의 제반 활동과 모두 관련이 있다.

이러한 인간활동 속에서의 생명의 위기는 결국 이러한 순환성,상호 관계성, 상호 의존성이라는 생명의 그물이 찢어지는 일이며 이는 결코 어느 생명 집단에만 유리한 것이 아닌 전 생명체에게 전반적인 생명의 위협을 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다른 생물종의 우위에 서서 또 인간 가운데에서도 강자 원리를 조성하며, 위계질서 속에서 억압과 종속으로 약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도 서슴치 않고 있다.

따라서 생명을 회복하는 운동은 이러한 약자들이 주체가 되도록 하는 노력이다. 생명의 위기에 처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예수 그리스도의 수육의 의미와 그 삶의 겸허함에서 나오는 가르침을 본받아 만물에 대한 일체감을 회복하고 그에 합당한 새로운 세계관과 신학을 수립함과 동시에 생태계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 구조를 해방 구조로 바꾸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생명과 현존이 모든 관계속에 즉, 인간과 자기,인간과 인간, 인간과 만물, 인간과 하나님,그리고 모두 속에서 충만하고도 풍성하게 이뤄져 생명망의 순환성, 상호관계성, 상호 의존성이 회복되어 모든 생명체가 일치의 환희를 느끼기를 염원해 보는 것이다.

  이름   메일   회원권한임
  내용 입력창 크게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