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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4(화)
동서양 자연관과 문학  
박이문(철학가)

서론

동서양의 자연관과 문학의 문제는 자연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표상으로서의 자연철학과 자연을 포함한 모든 대상에 대한 사유, 인생의 모든 경험 그리고 그러한 것들에 대한 종합적인 표현으로서의 문학이 관계가 있는가를 살피고, 만약 있다면 그 관계가 필연적인가 아닌가를 알아보는 데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문제를 이번 세미나의 주제인 󰡐생태환경󰡑이라는 틀에 설정할 때, 그것은 생태환경 문제와 문학간의 필연적 혹은 우연적 관계를 생각해보는 문제로 확대 연장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풀기에 앞서 󰡐자연󰡑과 󰡐자연관󰡑의 개념 정리가 전제된다. 그러므로 나는 1에서 각기 두 개념들과 그것들의 관계를 분석하고, 1에 근거하여 2와 3에서 서양과 동양에 있어서의 철학적 자연관과 문학에 나타난 자연에 대한 태도를 정리한 다음, 2와 3을 바탕으로 4에서 자연관과 문학의 관계가 필연적인가 아니면 우연적인가를 검토하기로 한다. 그리고 결론에서 생태환경 문제와 문학의 관계에 대해 언급해보기로 한다.
1. 자연과 자연관

동서양의 자연관과 문학의 관계는 복잡하며, 이 관계를 󰡐생태환경󰡑이라는 맥락에서 접근할 때, 이 문제 해결에 전제된 󰡐자연󰡑과 󰡐자연관󰡑의 개념 정리의 혼란과 󰡐자연관󰡑이라 할 때의 󰡐관󰡑의 이중적 의미 때문에 한결 더 복잡해진다.
첫째, 󰡐자연󰡑이라는 개념은 어떤 물리적 즉 객관적 대상으로, 󰡐자연관󰡑은 그것의 관념적 즉 주관적 표상으로 간단히 구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대상과 그 표상 즉 󰡐관󰡑의 구별은 생각보다 애매모호하다. 우리가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가령 개, 초록색 등과 같은 대상은 놀랍게도 󰡐눈󰡑(雪) 󰡐개󰡑 󰡐초록색󰡑 등의 개념에 의한 관념화와 독립해서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박테리아나 벌레에게는 󰡐개󰡑나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에스키모에게는 우리가 󰡐눈󰡑(雪)이라는 한 종류의 존재로 묶어 인식하는 독립된 단 하나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고, 서로 구별되는 수많은 종류로 구별되는 존재들로 표상된다. 이러한 예들은 객관적 대상과 그것의 표상 즉 그것에 대한 󰡐관󰡑과의 절대적 구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객관적 대상은 이미 일종의 표상 즉 관에 지나지 않음을 함축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대상과 그 표상의 관계가 근원적으로 얽혀 있음을 입증한다. 대부분의 우리에게는 그 의미가 분명해서 일상생활에서 쉽게 구별할 수 있는 󰡐눈󰡑 󰡐개󰡑 󰡐초록색󰡑 등의 대상이 이러하다면, 일생생활에서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자연󰡑이라는 대상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여러 맥락에서 수많은 뜻으로 사용되지만, 객관적 대상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될 때, 󰡐자연󰡑이라는 개념은 때로는 인류와 구별, 대립되는 질서/세계, 때로는 인류와 그 밖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존재 전체의 질서/세계, 그리고 어떤 존재의 바꿀 수 없는 본성이라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세 가지 다른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연관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생태환경󰡑이라는 문제의 테두리 안에서 제기되고, 󰡐생태환경󰡑의 문제가 땅과 물, 산과 바다, 풀과 꽃, 숲과 동물들에 대해서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와 행위의 문제인 만큼 여기서 󰡐자연󰡑은 첫번째의 뜻 즉 󰡐인류와 구별되는 질서/세계󰡑 즉 자연현상의 뜻으로 이해되고, 이런 시각에 초점을 두고 접근되어야 한다.
둘째, 󰡐자연󰡑도 객관적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표상 즉 󰡐자연관󰡑으로 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으로서의 󰡐관󰡑과 󰡐자연관󰡑으로서의 󰡐관󰡑이라는 두 표상, 즉 󰡐관󰡑의 개념은 논리적으로 일차적 󰡐자연관󰡑과 이차적 󰡐자연관󰡑 즉 메타-자연관으로 구별할 수 있으며, 이 두 가지 자연관들 사이에는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자연에 대한 나의 태도는 나의 자연에 대한 인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나의 인생에 대한 태도에 따라 나의 자연 인식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나의 지각 대상에는 두 가지 다른 관계가 필연적으로 성립된다. 나는 나의 대상을 󰡐개󰡑 혹은 󰡐여우󰡑로 인식하는 동시에 그것들에 대해서 󰡐호의적/친화적󰡑 혹은 󰡐대립적/반친화적󰡑 태도를 취할 수 있으며, 󰡐좋다󰡑거나 혹은 󰡐나쁘다󰡑라는 가치판단을 내리게 마련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자연과의 일차적 관계로서의 󰡐자연관󰡑이 인간에 비친 자연의 객관적 표상을 뜻하는 데 반해서 이차적 자연관 즉 메타-자연관은 그렇게 비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태도의 표현을 나타낸다.
인간과 자연과의 인식적 즉 일차적 관계는 자연철학적 담론으로 가장 투명하게 표상되고, 이차적 관계 즉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문학작품으로 가장 생생하게 표현된다. 그렇다면 생태환경의 맥락에서 본 동서의 자연관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검토는 일차적 자연관이 아니라 이차적 자연관 즉 메타-자연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모든 것에 대한 태도가 그러하듯이 자연현상에 대한 태도도 크게 친화적인 것과 대립적인 것, 우호적인 것과 배타적인 것, 존중적인 것과 경멸적인 것, 통합적인 것과 차별적인 것, 동화(同化)적인 것과 배타적인 것, 찬미적인 것과 혐오적인 것, 공생적인 것과 정복적인 것, 내재적인 것과 도구적인 것, 요컨대 긍정적인 것과 수단적인 것으로 양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서양의 자연관과 문학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한편으로는 각기 동서의 문학작품에서 나타난 자연현상에 대한 태도를 정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작품에서 볼 수 있는 자연현상에 대한 태도와 철학인 종교에서 나타난 동서의 자연관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를 검토하는 문제로 바뀐다.


2. 서양의 자연관과 서양의 문학

형이상학을 존재 전체의 근본적 속성에 대한 이론으로 규정할 때, 포로타이노스, 헤겔, 특히 스피노자와 같은 경우에서 예외는 볼 수 있지만, 서양사상을 지배해온 형이상학은, 이원론적이고 관념론적이며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을 함축한다.
이원론적이고 관념적인 서양의 형이상학은 지배적인 서양철학과 종교에서 드러난다. 철학에서는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구별하여, 그것들을 각기 본질/실체와 현상/환상으로 보는 플라톤, 인간에 있어서 생각하는 마음과 몸을 양분하여, 그것을 각기 자명한 존재와 불확실한 존재로 차별하는 데카르트, 존재 자체로서의 비물질적 누메나의 세계와 감각적 경험 대상으로서의 비본질적인 감각적 페노메나의 세계로 갈라놓고, 각기 전자를 존재의 본질로, 후자를 현상으로 등급화한 칸트에서 분명하다. 이러한 형이상학은 조물주와 피조물, 성역과 속세, 초월과 현실, 절대신과 인간, 영혼과 육체로 양분해놓고 전자를 존재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 우위에 놓는 유대-기독교에서도 자명하다. 서양적 형이상학이 관념론적인 것은 이원론을 거부하고 일원론을 주장하는 푸로타이노스나 헤겔의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양의 이같은 이원론적이고 관념적 형이상학 속에는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함축되어 있다. 인간만이 지적, 정신적, 영적 즉 관념적 존재로서 현상적 즉 자연적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만큼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는 인간의 관점에서 그리고 인간의 척도에 따라 인간에 의해서만 그 의미가 해석되고 그 가치가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물건이든 타자에 대한 나의 태도는 타자와 나 자신에 대한 인식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는다. 내 눈앞에 있는 타자로서의 한 지각 대상을 코브라뱀으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썩은 새끼 토막으로 파악하느냐에 따라 그 타자에 대한 나의 태도와 행동은 전혀 달라지며, 내 눈앞에 선 사람을 나의 아버지로 보느냐 아니면 나를 해치려고 했던 놈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나의 그 사람에 대한 태도는 백팔십 도로 바뀌지 않을 수 없다. 나와 타자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에 대한 포괄적 인식 형태로서의 서양의 이원론적, 관념적 그리고 인간중심적 형이상학에는 인간과 차별되는 자연현상이라는 타자에 불가피한 태도로서의 자연관이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에 내포된 자연현상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무관심적, 멸시적, 도구적, 대립적, 배타적, 공격적, 정복적 그리고 지배적이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등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에 있어서 현상적인 것, 육체적인 것 그리고 페노메나는 각기 관념적인 것, 정신적인 것 그리고 누메나보다 본질적인 실체이다. 그리고 전자가 경멸과 극복의 원시적/미개적/동물적/자연적 대상인 데 반해서 후자는 존중과 보존의 발달된/문명화된/인간적/문화적 대상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양분화와 평가적 차등화는 일원론적인 프로타노스나 헤겔의 철학에서도 전혀 다를 바 없으며,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삶을 영적 세계에서 영생을 얻기 위한 속죄의 기간으로 보는 유대-기독교에서 더 분명하다.
서양의 지배적 철학과 종교에 깔려 있는 이같은 자연관 즉 자연현상에 대한 입장은 세계의 객관적 인식의 표상이기에 앞서 그것에 대한 주관적 감성 즉 태도의 표현으로서의 서양 문학-예술 작품, 더 일반적으로는 미학적 다양한 표현에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서양에서도 자연을 주제로 하고 그것을 찬미하거나 그것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시기, 운동, 문인, 예술가, 문학작품, 예술작품, 미학적 풍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로 19세기 초반이 그러한 시기였고, 낭만주의가 그러한 운동이었고, 독일의 횔덜린, 노발리스, 하이네, 프랑스의 루소, 샤토브리앙, 라마르틴, 영국의 워즈워스, 예이츠 그리고 미국의 프로스트, 스나이더가 그러한 종류에 속하는 작가들이었으며, 횔덜린의 「귀향」, 샤토브리앙의 「아탈라」, 워즈워스의 「수선화」, 예이츠의 「이니스프리의 호도」, 프로스트의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 등의 문학작품들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프렌치 가든󰡑과 정면으로 대조되는 󰡐영국 정원-잉글리쉬 가든󰡑도 자연친화적 미학적 감수성의 표현의 예로 내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낭만주의적 자연관은 큰 주류를 이루지 못하고 한 시대의 현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의 희곡들, 서양의 중세 문학을 대표하는 단테의 『신곡』, 영국 문학을 대표한 셰익스피어의 회고들, 조이스의 『율리시스』,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라블레의 『팡타그뤼엘』, 보들레르의 『악의 꽃』, 말라르메의 『소네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페인 문학을 상징하는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등은 모두 자연에 대한 찬미는커녕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자연에 대한 서양적 비친화적 태도와 무관심은 문학작품에서만이 아니라 그리스 이래의 회화나 조각, 건축에서도 드러난다. 자연은 그리스의 조각들, 중세 기독교의 성화들, 르네상스의 회화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예술작품들의 한결같은 중심 주제는 인간이다. 서양의 궁전이나 성당의 석조 건물들은 나름대로 남성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만, 자연친화적이 아니라 자연정복적 인간의 의지를 느끼게 한다. 자연을 살리고 그것과의 조화를 찾기보다는 그것을 인간의 계산된 의지의 규범 속에 가두어두고 통제하려는 인간의 태도는 이성적 질서에 맞게 기하학적으로 재구성하고 개조해서 꾸며진, 이른바 󰡐프랑스식-데카르트적 정원󰡑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지만 동양, 적어도 아시아의 자연철학으로서의 자연관과 자연에 대한 태도로서의 자연관은 다같이 전통적으로 서양과 많이 다르며, 확연히 대조된다.


3. 동양의 자연관과 동양의 문학

서양을 지배해온 철학 및 종교의 밑바닥에 있는 형이상학이 원론적이며, 관념론적이며, 인간중심적인 데 반해서 동아시아를 지배해온 사상은 일원론적이며, 자연주의적이며, 생태중심적 세계관을 함의한다.
이러한 사실은 동아시아를 지배해온 노장철학과 불교나 샤머니즘과 같은 종교에서 일관되게 입증된다. 이러한 동양철학과 종교는 관념적 세계와 현상적 세계, 인간과 동물, 정신과 육체의 구별을 거부하고, 모든 것을 어떠한 것들로도 서로 차별화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도󰡑라는 총체적인 질서로서의 󰡐존재 전체로서의 자연󰡑, 어떠한 언어로도 표상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무/공󰡑이라는 실체, 그리고 자연과 인간, 물질과 정신이 서로 유통하는 󰡐살아 있는󰡑 하나의 󰡐실체󰡑의 영원회귀적 운동으로 파악한다. 샤머니즘에서 물질과 정신, 인간과 자연은 완전히 서로 달리 이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류하고 어울리고 섞여 있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지각적으로 파악되는 존재들의 다양성은 그 자체로 각기 따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인 존재의 다양한 시간적 및 공간적 양상에 불과하다. 이러한 일원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과 자연, 관념적 존재와 물질적 존재, 신과 인간, 초월적 영혼의 세계와 속세적 육체의 세계, 영원과 순간, 미래와 현재 등의 형이상학적 구별은 본질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의 혼동과 착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는 생물은 물론 인간 그리고 인간의 의식, 도덕 및 종교적 의식까지도 단 하나의 물리적 현상으로 설명하려 하고 있고, 최근 생명공학에 의해서 어느 정도 그러한 설명이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는 과학적 세계관과 극히 유사하다. 동양적 형이상학과 자연과학이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과학이 깔고 있는 형이상학이 공간의 틀 안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물질󰡑이라는 특정한 존재로부터 출발하고 그것을 고집하는 데 반해서 동양의 일원론적 형이상학은 그러한 고집을 털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일원론적 형이상학은 인간중심적이 아니라 자연중심적인 세계관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이라는 전체의 일부, 아니 한 측면이지 자연을 타자라는 대상으로 대하고 자연의 밖에 서서 인식하고, 관리하고, 정복하고 도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중심적인 관점에서 스스로를 그 일부로 파악할 때, 인간은 자연에 대해 친화적일 수밖에 없고, 자연에 친화적일 때 인간은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할 때 자연에 대한 관심, 찬미, 경외심이 뒤따르게 된다. 또한 자연은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이며, 인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돌아가서 몸과 마음이 평안할 수 있는 따뜻한 고향이며, 영혼이 명상 속에서 우주와의 원초적 조화를 찾을 수 있는 사찰이다.
자연에 대한 동아시아의 이러한 철학적 및 종교적 인식은 자연에 대한 친화적 정서와 찬미적 태도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한 예로서 동아시아인 특히 한국인이 󰡐고향󰡑에 부여하고 있는 정서적 의미에서 나타난다. 정지용의 시가 보여주듯이 󰡐고향󰡑은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따뜻한 향수의 대상이다. 태어나고 성장한 󰡐마을󰡑이라는 원래의 뜻으로 볼 때 고향은 시골일 수도 있고 도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볼 때 󰡐고향󰡑은 언제나 시골이다. 자연적 상태, 즉 인간, 즉 문명에 의해서 때가 묻거나 파괴되지 않은 상태의 시골을 떠올리는 것이 사실이라면 고향은 곧 자연을 의미하며, 고향에 대한 향수는 곧 자연에 대한 향수 즉 친화적 태도를 나타낸다.
자연에 대한 친화적 그리고 자연중심주의적 동아시아인들의 태도는 무엇보다도 정서의 가장 의식적 표현으로서의 예술작품 특히 문학작품에서 분명해진다. 동양화나 조각의 주제는 불교화나 역사적 인물들의 초상화나 조각들 또는 역사적 사실들의 기록화나 조각물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물이거나 사건들인 경우도 적지 않으며, 신윤복의 경우처럼 민중의 풍속화도 적지 않다. 중국의 『삼국지』 『수호전』이나 『금병매』, 한국의 「처용가」, 정몽주의 충성을 노래한 유명한 시조, 홍명희의 『임꺽정』을 비롯한 근대 소설들의 주제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주제는 그 제목이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토지 즉 자연이 아니라 한 시골 대가에서 일어나는 인간적, 가족적, 도덕적 및 사회적 드라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예술적󰡑 회화나 시에서 주제의 절대 다수는 자연이 차지하고 있다. 회화에서의 󰡐산수화(山水畵)󰡑와 󰡐사군자(梅蘭菊竹)󰡑 같은 말이나 문학에서의 󰡐음풍농월(吟風弄月)󰡑 등의 낱말들은 동양의 자연친화적 태도를 반영한다. 김홍도의 그림 〈사양기속입황혼(斜陽綺贖入黃昏)〉,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이상범의 수많은 동양화, 이응로가 말년에 그린 〈조선화〉 등은 모두 자연을 소재로 한 자연찬미적 작품들이다. 자연친화적 동양인의 태도는 문학에서 더욱 분명하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노래하는 것이 많다. 예이츠의 유명한 시 「이니스프리의 호도」가 보여주었듯이 서양에서도 시골 그리고 자연을 상징하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노래한 문학작품들이 있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詞)」나 정지용의 「향수」로 대표되는 동양에서처럼 강렬하지 않다. 한국에서는 「청산별곡(靑山別曲)」, 박목월 「나그네」, 중국에서는 소동파 「적벽부(赤壁賦)」나 이태백 「산중문답(山中問答)」, 일본에서는 오래된 시골 연못에 뛰어드는 개구리를 묘사한 중세기 바쇼의 󰡐하이쿠(俳句)󰡑나 일본의 초기 근대시를 대표하는 이시카와 다쿠보쿠 의 단시(短詩) 등이 한결같이 자연을 주제로 하고 자연의 미학적, 정신적 및 종교적 정서의 가치를 부각시킨다.


4. 자연관과 문학 관계의 필연성과 우연성

한편으로는 서양의 철학과 종교에 깔려 있는 이원론적 형이상학과 서양의 문학이나 예술 일반에 나타난 자연에 대한 대립적, 정복적, 도구적, 경멸적, 반자연친화적, 한마디로 인간중심주의적 태도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양의 철학과 종교에 함축된 일원론적 형이상학과 동양의 문학이나 예술 일반에 나타난 자연에 대한 향수적, 조화적, 존중적, 찬미적, 자연친화적, 한마디로 자연중심주의적 태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앞서 보았듯이, 모든 관계를 논리적 및 인과적인 것으로 양분할 수 있다면, 둘 사이에는 그 중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것은 논리적 관계이다.
이원론적 형이상학에는 반자연친화적인 인간중심주의적 태도가 논리적으로 불가피하게 함축되어 있다. 이 형이상학에는 인간만이 정신, 영혼을 가진 유일한 존재이거나, 인간만이 절대신의 의도에 따라 자연의 주인으로서 창조되었음이 함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일원론적 형이상학에는 자연친화적인 자연중심주의적 태도가 함축되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을 우주 전체의 일부,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보는 이 형이상학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차별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리적 필연의 관계는 인과적 필연의 관계를 함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논리적 관계가 개념적 관계인 데 반해서 인과적 관계는 물리적 현상의 관계이며, 개념과 물리적 현상 사이에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논리적 관계가 있을 수 없고 오로지 우연적일 수밖에 없는 인과적 관계만이 있을 수 있다. 서양의 이원론적 형이상학과 반자연친화적인 인간중심주의적 태도와의 사이와 동양의 일원론적 형이상학과 자연친화적인 자연중심주의적 태도와의 사이의 인과적 관계는 어떤 의미로든 필연적이 아니라 우연적일 따름이다. 인과적 관계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시간적 거리를 전제한다. 형이상학과 자연에 대한 태도, 두 가지 중 어떤 쪽이 원인이며 어떤 쪽이 결과인가? 전자가 원인이요 후자가 결과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을 󰡐뱀󰡑으로 믿느냐 아니면 󰡐썩은 새끼 자락󰡑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것에 대한 나의 태도는 필연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인과적 관계와는 정반대의 관계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와는 달리, 험한 눈(雪)의 세계 속에서 눈에 잘 대처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에스키모에게는 우리가 󰡐눈(雪)󰡑이라는 단 하나의 존재로 인식하는 대상이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가진 존재들의 복합체로 인식된다는 사실, 똑같은 환경과 삶이 종교적으로 설명되기도 하고 유물론적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한 사람의 가치관, 삶에 대한 태도에 따라 동일한 세상이 서로 다르게 인식될 수도 있다는 사실 등으로 알 수 있다.
한 사람의 형이상학과 그의 자연에 대한 태도 가운데서 어느 쪽이 원인이고 어느 쪽이 결과냐를 따지는 것은,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 마찬가지로 동양과 서양에 있어서 각기 형이상학과 자연에 대한 태도 가운데 어느 쪽이 형이상학에 함축된 자연관과 문학에 표현된 자연에 대한 태도 사이의 인과적 관계를 정확히 밝히는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결론: 생태환경과 문학

자연관과 문학의 관계를 위와 같이 정리할 때 문학과 생태환경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연친화적 자연관과 문학이 곧바로 생태환경의 보호라는 실천으로 옮겨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적어도 생태환경의 보존에 한해서 본다면, 반자연친화적 철학과 종교가 지배하고 비자연친화적 태도가 분명한 문학이 절대적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서양에서 그와 정반대되는 태도와 문학이 지배한 동양에서보다 생태환경 문제에 대한 의식이 더욱 강하고, 생태환경이 월등 잘 보존되고 보호되고 있다는 사실로서 입증된다. 자연친화적 즉 생태환경친화적 세계관과 문학은 생태환경의 문제해결에 직접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 생태환경 문제의 해결은 자연친화적 세계관과 태도 이외에도 과학기술적, 경제적 및 정치적 개입과 활용 없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문학은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 생태환경 문제해결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그 주제와 내용이 자연친화적 태도를 나타내든 반자연친화적 태도를 나타내든 문학(그리고 모든 예술)적 언어 구조는 다른 담론에서의 언어와는 달리 원천적으로 생태학적이다. 문학 그리고 모든 예술의 보편적 본질은 자연을 지배하는 생태계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어떤 대상을 가장 생생하게 구체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표상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생태환경으로서의 자연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모든 표상은 필연적으로 어떤 대상의 표상이며, 모든 대상의 표상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 즉 구체적인 자연일 수 없다. 그러나 한 대상을 표상하는 의도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데 있다. 그러다 보면 한 대상의 표상은 그것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지 않을 때만 표상될 수 있다는 역설이 생긴다. 모든 표상은 곧 언어적 개념화 즉 추상화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철학적, 과학적 그리고 문학적 표상은 동일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철학이나 과학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예술 일반)의 차이는 전자가 그러한 추상화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데 반해서 후자는 언어로서 위와 같은 불가피한 언어적 추상화를 극복할 수 있는 표상이 되고자 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문학이 내재적으로 갖고 있는 이러한 의도는 문학적 언어의 특징이 논리적이 아니라 은유적인 언어의 경향을 나타낸다는 사실, 언어의 의미를 개념적/추상적이 아니라 감각/사물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을 나타낸다는 사실, 한마디로 언어적 의미의 개념성이 아니라 이미지, 작품구성의 논리적 원자적 구조가 아니라 미학적·유기적 구조가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1) 바로 이런 점에서 문학작품(예술작품 일반)은 생태환경의 문제를 접근하고, 파악하고, 재구성하고 나아가서 해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적절한 모델 즉 기본적 패러다임이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기술문명이 인간에 의한 생태계/환경/자연 󰡐닦달/속박󰡑의 산물이며, 이러한 닦달/속박이 철학적 혹은 과학적인 언어에 의한 개념화와 논리적 재구성의 결과로 볼 때, 철학이나 과학과는 정반대로, 그리고 그에 저항하는 입장에서 언어를 동원하는 문학은 생태계/환경/자연의 해방자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생명윤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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