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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4(화)
생명이란 무엇인가?  
진교훈(서울대교수·철학)

Ⅰ. 序

오늘날 우리는 미증유의 생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른바 생태학적 위기와 생명경시풍조는 우리 사회에서 만연되고 있고 가속화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생명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생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한 데서 생긴 병폐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묻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 물음은 묻는 것에 대해서 모르고 있을 때 이를 알려고 하는 데서 생긴다. 그러나 우리가 묻는 것에 대해서 뭔가 조금 알고 있을 때에만 물을 수 있으며 전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물을 수 없다. 어떤 것이 문제된다는 것, 즉 어떤 것이 물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혼란상태에 있거나 위기에 처해 있음을 말해 준다. 물음은 상황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문제의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를 발생시키고 긴장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여러 방면에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생물학이나 의학에 종사하는 사람의 중요한 관심사가 될 것이지만, 종교학자와 철학자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도 가장 근원적이고도 가장 절실한 문제이다. 그러나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직 아무도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만족할 만한 해답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생명에 대해서 전혀 아무 것도 모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적어도 생명에 관해 무언가 좀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종교가, 철학자, 문학자, 생물학자, 의학자 등은 각기 그들 나름대로 생명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들간에 생명에 대한 하나의 통일된 견해를 찾아보기 어렵고, 더군다나 같은 학문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간에도 관점에 따라 생명의 의미는 상당한 차이를 노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생명의 본질이 워낙 깊고 넓은 것이어서 어떤 하나의 관점에서 간단히 다 표현할 수 없는 신비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나 생명은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라고 믿으며, 또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생명이 이 세상의 질서의 근본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생명의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야말로 무엇보다도 중대한 일이라고 하겠다.
생명은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생명은 물질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생명은 개념정의가 불가능해 보이는 신비스러운 것이다. 사람들은 생명은 聖스럽다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생명을 지키고 존중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누가 왜 우리가 생명을 존중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생명이 가치가 있는 것은 자명(self-evident)한 것이라고 밖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생명체는 자연으로부터 나왔으며 자연으로 돌아간다. 모든 생명체는 따로따로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며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교제하면서 응답하고 受授관계에 있는 파트너이다. 모든 생명체와 자연은 하나의 연대공동체(Solidargemeinschaft)이며 하나의 운명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순환의 파괴는 모든 생명체에 심대한 타격을 준다.
자연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生命體의 安息處이다. 이 안식처의 위기는 바로 모든 생명의 위기이다. 이 생명의 위기는 이른바 ‘생태학적 위기’와 바로 직결된다. 이 위기는 인류의 역사에서 최근세에 들어와 발생했고 극히 짧은 기간에 일어났다. 지난 200년 동안 계속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공해, 너무나도 많은 자연자원의 낭비, 너무나도 많은 긴장을 만들어 냈다. 자원고갈, 오염, 생명의 종의 멸절, 산림과 野原, 습지와 갯벌의 상실은 지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생태학적 위기의 근본원인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그것은 생명의 의의에 대한 인간의 무지와 오해에 기인한다. 첫째, 서양근세에 나타난 소위 사회적 진화론자들은 適者生存, 弱肉强食, 優勝劣敗, 自然淘汰라는 사상을 인간에게 주입시켜 생물계 일반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을 심어 주었다. 그래서 인간이 마치 지구의 착취자나 폭군으로서의 지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받았거나 그렇게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처럼 인간의 ‘지구의 지배’를 誤導했다. 베이컨(Francis Bacon)은 “자연은 순종하는 가운데서 정복된다.”(natura parenolo vincitur)고 말했다. 그는 “지식은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라고 외치면서 지식(科學)이란 자연의 힘을 이용하여 인간의 현실생활에서 실익을 거두는 것으로 보았다. F. Bacon, De argumentis scientiarum 2.(ed). Spedding, Works, London, 1963, p.496. 참조.
오늘날에도 서구인의 자연관은 베이컨적인 유물론적 경험론으로 가득 차있다. 둘째, 서구인들은 관념론자들이건, 유물론자들이건 간에 자연을 단지 물질로만 구성된 것으로 파악하려고 하고 기계론적으로 해석한다. 특히, 데카르트(R. Descartes)와 라마르크(J. B. Lamarck), 모노(J. Monod)에 이르러 그러한 心身에 대한 二分法的인 사고는 極에 달한다. 자연은 인간의 필요와 수단으로서만 그 존재이유가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태학적 위기의 극복의 관건은 근본적으로 생태학적 위기를 유발한 인간이 생명과 이 생명의 안식처인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나는 이 발표에서 생명의 개념의 多義性과 그 정의의 난점을 살펴보고, 생명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Ⅱ. 生命의 개념의 多義性과 그 定義의 難點

생명이라는 개념은 매우 다의적으로 사용된다. 우리말 사전에 의하면, 사람들은 생명은 대체로 살아 있는 것(생명체, 생물)과 살아 있지 않는 것(無生物)을 분간해 주는 기준, 즉 목숨을 의미하며, 생물의 생활현상에서 추출해 낼 수 있는 일반적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희승 편저, 『국어대사전』, 민중서림, 1982년, 1879쪽; 신기철, 신용철, 『새 우리말 사전』, 삼성출판사, 1958년, 735쪽; 한글학회 지음, 『우리말 큰사전』, 어문각, 1992년, 2229쪽 참조.
이보다 좀더 과학적인 정의를 브리타니커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생명의 定義는 대략 다섯 가지로 분류된다.: 즉 生理的, 代謝的(metabolic), 유전적, 생화학적 및 熱力學的(hermodynamic) 정의. Encyclopaedia Britanica, Macropedia, Vol.10., 1975, pp.893~894. 참고.

생명에 대한 생리적 정의에서는 생명이 가지고 있는 특징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각종 생리작용을 나열하고 이러한 생리작용을 지닌 대상을 생명체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적 생명규정에 가장 근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의 본질적 특성을 다 보여주지 못할뿐더러 모든 생명체가 이러한 작용을 다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사적 정의는 신진대사가 생명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며 적어도 일정한 기간 내에 그 내적 성격에는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으면서 외부와는 끊임없이 물질교환을 수행해 나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식물의 종자나 박테리아의 포자 등은 상당 기간 대사작용 없이도 존재한다. 유전적 정의는 한 개체가 자신과 꼭 닮은 또 하나의 개체를 만들어 내는 특성을 가진 것을 의미하며, 생식작용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꿀벌 중에 일벌이나 노새와 같은 동물은 생식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음으로 이것은 생명의 정의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생리적, 대사적, 유전적 정의와 같은 전통적인 생물학의 개념으로는 생명의 정의는 불충분할뿐더러 생명의 속성을 다 밝힐 수 없다. 그래서 생화학적 정의와 열역학적 정의가 등장했다. 생화학적 정의는 생명의 특성을 유전적 정보를 함축하고 있는 핵산분자, 즉 DNA분자들과 생물체 내에서의 화학적 반응을 조절하는 효소분자, 즉 단백질분자들이라고 보아 이러한 물질들을 기능적으로 함유하고 있는 체계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 정의도 결점을 가지고 있다. 상이한 분자적 구조를 지니면서도 기능적으로 유사한 성질을 가진 물체가 나타날 때 이를 생명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반론에 대응할 수 없다. 예컨대 일종의 바이러스를 닮은 스크라피 병원균은 스스로 어떤 핵산분자도 지니지 않으면서 숙주의 핵산분자를 활용함으로 번식을 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화학적 정의와는 달리 열역학적 정의는 생명을 자유에너지의 출입이 가능한 하나의 열린 체계로서 보고 특정한 물리적 조건의 형성에 의하여 낮은 엔트로피, 즉 높은 질서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는 특성을 지닌 존재로 규정한다. 이 정의는 생명의 체계가 어떠한 소재로 이루어졌든 간에 이러한 기능만 수행할 수 있으면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도 생명이 되기 위한 충분조건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컨대 높은 질서의 유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자연적 또는 인위적인 물질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생명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이며, 또 이것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이러한 자연과학적인 생명의 정의는 생명의 외적인 물리적인 사태에만 주목하고 생명의 내면적인 차원을 소홀히 다루었다. 자연과학적인 생명관은 마치 생명은 오로지 물질인 것처럼 생명이 가지고 있는 영적(beseelt)인 측면을 철저히 무시해 버렸다. 따라서 이러한 생명관은 생명을 온전히 해명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가 직관적으로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생명의 개념보다 생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예컨대, 생물현상은 이러저러한 특성이 있다고 설명될 수 있다. 생물은 무생물과 달리 조직적이고 물질대사를 하며 성장하고 자신과 같은 것을 번식하며 자연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받아 생명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현상은 생명의 본질을 다 밝혀 주지 못한다. 생명현상을 연구하는 생명과학은 생명의 본질이나 생명의 기원을 다룰 수 없다. 왜냐하면 생명의 출현(발생)은 과거 단 한 번 일어난 유일한 사건이며, 자연과학은 규칙적으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생명의 기원문제는 엄격히 실험과학의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과학자들이 생명의 기원을 문제삼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이미 과학의 영역을 떠나 철학적, 종교적 영역에서 생명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생명이 초자연적인 계획과 설계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믿는 창조론이나 수십억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쳐 자연적인 방법으로 무기물로부터 자연발생하여 간단한 생물이 출현하고 그 후 복잡하고 질서있는 조직을 갖춘 고등생물로 서서히 진화되었다고 보는 자연발생론 내지 진화론도 다 같이 처음부터 생명에 대한 어떤 형이상학적인 前理解에 의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필연적으로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전제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생명에 관하여 연구하는 과학들이 많다.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모든 생명과학들은 그 방법론에서 한계가 주어지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생물들의 어떤 부분을 설명해 주는 데 불과하다. 생명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현상의 특성을 망라하고 이를 통합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험과학들은 생명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실험과학은 온갖 생물의 생명현상에 대한 연구결과들을 실제로 다 종합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설사 종합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종합은 자의적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며, 개괄적인 연구결과들을 종합하는 데 있어서도 그것의 가능조건으로 먼저 생명 전체에 대한 이해가 전제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전체를 문제삼는 것은 과학의 과제가 아니라 철학의 과제이다.
생명에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측면이 있고,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생명이 밖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설명(erklären)될 수 없고 다만 이해(verstehen)될 수 있을 뿐이다. 졸고, 『철학적 인간학 연구(Ⅰ)』, (서울 : 경문사, 1982), 12-14쪽 참조.
우리는 실제로 생명의 깊은 뜻을 은유적이거나 비유적인 표현을 통하여 문학적-예술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생명의 의미를 일별해 보기로 하자. 우선 편의상 그리스도교의 생명관을 살펴보자. 그리스도교의 생명관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생명관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성서의 생명관은 일종의 상징적인 神話的 記述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생명 그 자체에 대한 명확한 의미를 말해 주지 않으며 논리적으로 보면 일종의 同語反覆(tautology)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의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믿지 않는 사람과의 수평적 대화는 용이하지 않다. 예컨대 창세기에 나오는 ‘하느님이 흙으로 생물일반을 지으시고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시고……’하는 표현을 실증주의자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포괄적인 생명을 논하면서 오늘날에도 서양인의 생명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생명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생명관은 성서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선 구약성서의 생명관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구약성서에서는 생명을 나타내는 두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하나는 하임(hajjim)인데, 이 말은 지상에서의 삶, 즉 일생과 죽음에 반대되는 삶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른 하나는 네페쉬(nepeš)인데, 이것은 인간을 활동시키는 생명의 핵심으로서 인간의 존재 전체를 규정하는 생명 그 자체이다. 이것들도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신과의 관계에서만 이해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말은 원래 종교적인 개념이며,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Ritter, J., (hrsg),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5. 1984, S.56. 참조.
구약성서는 생명이 철저하게 신에게 속한 것이며, 이러한 사상은 신약성서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는 생명을 나타내는 말은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조에(zoe; ζως)인데, 이 말은 죽음과 대조되는 생명으로 구약성서의 하임과 같은 뜻이다. 둘째로, 魂을 의미하는 프쉬케(psyche; ψμχς)인데, 이것은 인간의 생명활동의 핵심을 가리키며 구약성서의 네페쉬보다는 더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로, 비오스(bios; βιος)로서 생명의 생존기간이나 인간의 인생 또는 생활을 위한 능력을 의미한다. 위의 책, S.57. 참조.
이 비오스는 영어, 독어, 불어 등에서 생명을 가리키는 어원이다. 이 말은 지상적인 삶 또는 육체적인 삶, 즉 육체적,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것을 가리킨다. 신약성서는 생명이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며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종말의 때, 즉 하느님의 구원이 현실로 될 때에 생명 그 자체이며 생명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한다. 이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한 말씀(요한복음, 14장 6절)과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서 풍성함을 얻게 하려고 왔다”는 말씀(요한복음 10장 10절)이다. 신약성서의 생명관은 인간의 자연적인 생명을 말하는 비오스를 넘어서서 참생명, 즉 영원한 생명에 초점이 있다. 이 永生은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존재 전체가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영생과 구원은 인간에게 국한됨으로 그리스도교의 생명관은 인간중심적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의 이와 같은 생명관을 현대의 생명윤리의 문제들에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는가를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생명관은 한마디로 하느님이 주신 생명은 존엄하다는 것이다. 생명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은 존중되어야 하고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 그러므로 생명의 가치는 그 삶의 상태가 완전도에 의거하지 않는다. 인간의 생명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지며 생존을 위한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카이절링(E. W. Keyserling)은 이와 관련하여 “인간의 생명은 존중되어야하며 결코 정당한 이유없이 빼앗기거나 변질되거나 방치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인간에 대한 전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고, 매코믹(R. A. McComick), 램지(P. Ramsey) 등은 “인간은 근원적인 신비나 생명의 수수께끼에 도전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신의 영역에 속하며, 인간에게는 생명의 시작과 끝을 결정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생명관을 구체적인 생명윤리의 문제에 적용시켜 보면, 배아 또는 태아가 설사 결함이 있는 것이 사전에 인지된다고 할지라도 낙태 또는 중절시킬 수 없는 것이며 어떤 이유로도 안락사를 시킬 수 없다. 클로닝(cloning)은 한마디로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한다.
동양종교의 생명관을 간단히 살펴보자. 불교의 생명관은 우주론의 일부분으로서 일반적으로 地水火風의 四大요소를 가지고 해설한다. 예컨대 俱舍論에서 地水火風의 可視的인 작용(業用), 즉 소지(持), 섭취(攝), 성숙(熟), 증장(長)과 성질(自性), 즉 견고성(堅), 습성(濕), 열(煖), 움직임(動)을 가지고, 그리고 여기에 色受想行識의 五蘊을 첨가하여 생명현상을 논한다. 그러나 여기서 四大要素는 可視的인 空에서 영원하며 본래 실체가 없으며 假和合하는 相으로서 幻花와 같은 것이며, 五蘊중에 受想行識은 일종의 정신적 작용을 하는데, 受는 감수작용, 想은 상상작용, 行은 의지작용, 識은 了解의 작용을 하는 것으로 논한다. 요컨대 四要素중 風은 생명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원동력이 되고 地水火는 생명의 재료가 되어 身體를 구성하며, 五蘊 중에서 識은 六識을 지나서 알라야식(소위 8식 또는 種子識)에 이르면 생명의 근원류에까지 심화되며, 생존을 유지하는 생명자체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이 존재하는 상태란 알라야식이 신체를 執受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大正藏, 제29권, 俱舍論一卷, 大正藏 17卷 및 16卷 맟조. 불교의 생명관은 김용정, “인간게놈과 생명윤리” 2001년 7월 생명윤리자문위원회 홈페이지에 수록된 논문 참조.  

이제 도교의 생명관을 아주 간략히 일별해 보자. 道家 및 道敎의 생명관에 의하면 만물은 天地의 소산이며, 도는 천지를, 천지는 만물을 낳는다: “道는 만물을 생성시키고 덕은 이들을 잘 키운다”(道生之 德育之, 『老子』, 51章). 莊子는 “하늘은 無爲로서 맑고 땅은 무위로서 안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天과 地의 두 개의 무위가 서로 결합하여 만물이 생겨난다”(「至樂」, 天無爲以之淸 地無爲以之寧 故兩無爲相合 萬物皆化)고 말했다. 그는 天地, 즉 自然과 人爲를 구별했으나, 山川草木과 같은 좁은 의미의 物質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精神界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天地와 나는 함께 태어났으며 만물과 나는 하나”(「齊物論」, 天地與竝生 而萬物與我爲一)라고 말했다. 그러면 만물과 내가 하나된다고 말할 때의 그 하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하나는 형상을 초월한 것으로서 언어문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말하지 않는 말’(不言之言)의 표현이다. 따라서 이 말은 眞人이라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사람의 말일 뿐, 보통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표현이며, 단지 사물을 함부로 구분하고 차별하는 分別智를 버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다수 중국 민중의 도교신앙의 기초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한국의 도교에도 큰 영향을 미친 李昌齡의 太上感應篇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생명존중사상을 담은 구절을 음미해 보자. “모든 사물에 자비를 베풀어라(慈心施物), 초목과 곤충도 함부로 해치지 말라”(昆蟲草木猶不可傷).
우리는 도교사상으로부터 “사물이 자연스럽게 운행해나가는 데 무리하게 인간이 그 자신의 욕망을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무위사상을 배울 수 있으며, 자연생태계의 신비로운 조화와 균형(天鈞)을 깨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동양종교의 관점에서 본 생명의 의미를 이제 유교의 관점에서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方東美는 “만물이 본래 가지고 있는 천성을 그대로 실현시켜 그 생명발전을 끊임없이 존속하게 하는 것이 道義가 할 일이다”(成性存存道義之門)라는 『易經』의 말을 염두에 두고 중국사상이란 한마디로 생명질서의 사상이라고 말하였다. 또 陣立夫도 “時空중에 있는 모든 존재는 다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우주는 바로 끊임없이 생생하고 쉬지 않고 굳세게 운행하여 시시로 움직이면서 변화하고 있는 대생명이다”라고 하였는데, 陣立夫, 『中國哲學史 : 人間學的 理解』, 鄭仁在 譯, 民知社, 1986, 32-33쪽.
이 말도 周易을 두고 말한 것이다. 요컨대 易學은 생명학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생명질서의 이치를 밝히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주역은 “생명의 부단한 계승을 易”(生生之謂易), “천지의 큰 덕은 생명”(天地之大德曰生)이라고 하였다. 金凡父는 “모든 이치가 자연스러운 것에서 나왔으니 사람의 知力으로 덜어내거나 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金凡父, 周易講義, 李種益 編, 東方思想論叢, 보연각, 1975, 77쪽 참조.

우리는 유가의 생명관을 논하기 위해서는 天人相感說, 자연과 인간의 不可分離關係, 格物論, 생명의 과정 연속성과 전체성과 力動性과 조화 등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나, 孟子가 생명의 근본원리를 存養과 自然之性에 두고 “자연스럽게 생장하는 것을 인위적으로 助長하지 말아야 한다”(勿助長也)고 말한 대목에서 유교의 생명관의 요체를 꾀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교의 생명관을 현대사회의 생명윤리문제에 직접적으로 적용시키는 데는 난점이 있음을 경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명관은 현대 생명공학의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무절제한 도발행위에 반성을 촉구할 수 있을 것이다. 도교와 유교의 생명관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졸저, 『환경윤리 : 동서양의 자연보전과 생명존중』, 민음사, 1998, 131-179쪽 참조.

앞에서 여러 관점에서 살펴본 것처럼 생명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서 우리는 한마디로 일의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명은 일회적인 것, 내면적인 것,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 역동적인 것(das Dynamische), 체험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 따라서 초합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Will T. Blackstone, "The Search for an Environmental Ethic," Tom Regan (ed), Matters of Life and Death, Temple University Press, Philadelphia, 1980. p.301. 참조.
그러므로 생명은 기계론적인 사고, 도식화하는 사고, 수학적·합리주의적인 사고로 파악될 수 없고 정서적인 느낌을 통해 간접적으로 겨우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생명의 사전적 정의는 엄밀히 말하면 同語反覆(Tautologie)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키아’설을 비롯하여 많은 철학자들이 생명에 관해서 정의를 내렸지만, 그러한 논의는 이미 전제 속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을 분석하는 데 불과할 뿐 새로운 것으로 종합하지 못했으며, 생명의 어떤 필요조건을 제시할 수 있었을 뿐이고, 충분조건을 제시해 주지는 못했다. G. Marian Kinget, On being Human, Harcourt Brace Janovich, New York, 1975. p.240,이하 참조.

생명의 의미는 셀러(M. Scheler) Max Scheler, Der Formalismus in der Ethik und die materiale Wertethik, Gesammelte Werke, Band 2. Francke, Bern, 1980. S.68, S.280f. SS.340-344.
나 베르그송(H. Bergson) Henri Bergson, L'evolution créatrice, 1907, 서문 참조.
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생명의 의미는 明證的(evident)이며 本質直觀(Wesensanschaung)에 의해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본질은 신비로 가득차 있다. 그 누구도 생명의 신비를 다 파헤쳐 보여 줄 수 없다. 인격이나 사랑과 같은 정신활동이 개념정의가 될 수 없듯이 생명은 개념정의를 할 수 없는 말이다. 사람들은 육체적 생명(식물적 생명과 동물적 생명을 포함), 영혼적 생명, 정신적 생명, 우주적 생명, Thome H. Fang, Chinese Philosophy, Linking Pub., Taipei, 1981, pp.106-108.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 언급한다. 관점에 따라 생명의 범위는 크고 넓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논의가 ‘논점이탈의 오류’ 또는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단지 생명은 ‘의미있고’(sinnerfüllt), ‘가치가 충분한’(werterfüllt)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Max Schelrr, 앞의 책, S.341.
우리는 殺生과 생명에 손상을 입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며, 생명을 존중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상적인 사람은 생명의 가치를 부인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생명을 존귀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제 생명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생명의 존귀함을 이해하고 어떻게 생명을 고양시킬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한국생명윤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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