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0/4(화)
한국 생명사상의 뿌리  
--한국인의 생명체험과 생명이해: 묘합(妙合)과 서로 살림(相生)

박 재 순 (한신대 신학과 연구교수)

1. 생명의 본질

1) 서로 다른 요소들의 묘합(妙合)

생명체의 생성과정에는 지배와 정복의 원리가 작용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요소들이 타자를 긍정하고 존중하면서도 자기를 지키고 살리는 방식으로, 공생과 상생의 구조와 관계를 이룸으로써 생명체가 생겨난 것이다. 서로 다른 요소들이 분명히 참여했으나 자기 형태와 성질을 배타적으로 고집하지 않고 기본적인 자기 성질과 바탕을 유지하면서도 상대를 세우고 살리는 방식으로 함께 어우러짐으로써 전혀 새롭고 오묘한 형태와 성질을 지닌 생명체를 탄생시킨 것이다.
생명 없는 물체들의 관계가 표면적이고 정태적이라면 생명체를 생성하는 물질들의 관계는 중층적이고 입체적이며, 존재의 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창조적 관계이다. 생명 없는 물질에서는 볼 수 없는 깊이와 높이와 자유를 지닌 질적으로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 이 미묘하고 창조적인 내적 관계구조는 단순한 종합이나 결합, 연합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없고 묘합, 서로 다른 요소들의 절묘한 결합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씨앗 한 알과 배추 잎 하나 속에서 다양한 우주적 물질과 요소들이 창조적이고 공생적인 묘합을 이루고 있다. 이런 공생적 묘합은 서로를 긍정하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함으로써, 서로의 존재에 깊이 참여함으로써만 가능해진다. 생명체 안에서 서로 다른 요소들은 뗄 수 없이 결합되었기 때문에 어느 한 요소도 배제되거나 소외되면 생명체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

2) 지천태(地天泰): 자기 비움과 평화로운 공생

성서에 따르면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의 몸을 빚고 하나님의 생명기운(숨)을 코에 불어넣음으로써 인간을 창조했다. 하나님의 생명기운, 하늘의 기운을 흙으로 빚은 사람의 몸 속에 넣는다는 것은 하늘(天)이 흙(地) 속에 들어온 것을 뜻한다. 주역에서 하늘이 겸손하게 땅 아래로 오면 태평해진다고 한다. 하늘이 땅 위에 높이 있으면 위험하고 흉해진다. 그러나 땅이 앞에, 위에 오고 하늘이 땅 뒤에 땅 아래 오면 태평해진다는 것이다.(地天泰) 평화세계(하늘나라)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天)이 사람의 몸(地)을 입고 땅 바닥으로 내려왔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주역의 지천태가 시사하는 생명·평화세계의 진리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몸으로 하늘바람을 숨쉬는 숨에는 기독교적 인간창조의 깊은 의미가 담겨 있고 주역에서 말하는 지천태의 신비가 숨겨 있다.
주역에서 겸괘(謙卦)는 늘 길하고 이롭다. 강하고 높은 이가 자기를 낮추고 비울 때 생명이 융성해지고 풍성해진다. 강해진 음이 스스로 줄어들 때 생명이 생겨나고 생명활동이 이루어지며, 강해진 양이 스스로 줄어들 때 생명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기를 비우고 줄임으로써 생명이 발생하고 활동한다는 주역의 사고는 ‘타자’에 대한 예의와 배려를 담고 있으며, 공생과 상생의 관념을 반영한다.

3) 상생(相生)의 원리

스스로 낮추고 비움으로써 생명활동이 융성해진다고 보는 동양적 생명이해는 상생과 공생의 원리로 이어진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만물은 ‘서로 살림’(相生)과 ‘서로 이김’(相剋)의 원리에 의해 운행된다. 생명세계에서도 서로 살림과 서로 이김의 원리가 지배한다. 그러나 생명세계에서는 서로 이김보다 서로 살림의 원리가 우세하고 주도한다. 만일 서로 이김의 원리가 우세하다면 생명세계는 줄어들고 약해져서 결국 소멸할 것이다. 또 서로 이김과 서로 살림의 원리가 똑 같이 지배한다면 생명세계는 정태적인 균형과 조화 속에 지루한 반복만 있었을 것이다. 서로 살림이 우세하기 때문에 생명세계는 큰 조화와 균형 속에서도 자유롭고 다양하고 풍성하게 생성하고 발전하고 진화해 가는 것이다.
생명은 상극보다 상생의 관계다. 먹이사슬의 구조와 관계도 상생조화 속에서의 먹고 먹힘이다. 오히려 먹임으로써 사는 관계, 너를 살리기 위해 나를 밥으로 줌으로 함께 사는 상생조화의 길을 연다. 호랑이는 늑대를 먹고 늑대는 양을 먹고 양은 풀을 먹는다. 그러나 호랑이도 늑대도 양도 죽어서는 풀의 거름이 된다. 먹이사슬의 순환과 상생의 관계는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조화와 균형 속에서 생명세계는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진다. 이 먹고 먹히는 생명세계를 최시형은 “하늘로써 하늘을 먹임”(以天食天)으로 보았다. 자연생명세계를 먹이고 기르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보았다. 유영모는 “자연생명세계가 서로 먹이[희생양]가  됨으로써 죄와 더러움을 씻어서 힘있게 한다.”(自然相贖殷)고 보았다.
꽃과 곤충·포유류는 먹이가 됨으로써 서로를 살리는 아름다운 상보상생적 관계를 이루었다. 속씨식물의 꽃과 열매, 꽃가루와 꿀은 ‘더불어 살자!’는 생명의 표현이요, 상생에로의 초대였다. 꽃씨 식물은 자신을 포유류와 곤충들에게 먹이로 내어줌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살린다. 겸허하게 자기를 먹이로 내어 줌으로써 서로 살게 하였다. 먹히는 자가 먹는 자의 속에 들어가서 더욱 힘있게 살고 먹는 자도 힘있게 사는 관계는 먹히는 자와 먹는 자의 멋지고 오묘한 공생관계를 나타낸다.

2. 한국인의 생명 체험과 생명 이해

한국인의 생명체험에서 생명사상과 생명이해가 형성되었다. 한국인의 독특한 삶의 경험이 언어와 정신과 문화에 반영되고 이렇게 형성된 생명이해가 한국인의 삶의 양식을 규정한다.

1) 밝고 따뜻한 삶에 대한 염원

한민족은 수 천, 수 만 년 전부터 해 뜨는 동쪽, 밝고 따뜻한 나라를 찾아 중앙아시아의 우랄 알타이산맥을 넘어 북 몽골 족이 세력을 떨쳤던 바이칼 호를 거쳐 동북아지역으로, 다시 만주와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에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밝고 따뜻한 삶을 향한 이러한 오랜 순례의 길에서 한민족의 가슴에는 밝고 따뜻한 삶에 대한 사무친 염원이 새겨진 것 같다.
밝고 따뜻한 삶을 추구한 한민족은 자신들을 예(濊) 또는 맥(貊)으로 자처했는데, 예(濊)는 동쪽을 맥(貊)은 밝음을 뜻했다. 한민족은 동쪽에서 환히 비치는 태양의 광명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예맥, 한(韓=桓:밝음)을 자기부족들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동북아일대의 산천이름 사람이름 등에 白()자가 많다. ‘희다’와 ‘밝다’를 뜻하는 白()은 밝고 따뜻한 햇빛을 나타낸다. 한민족이 스스로를 “배달의 겨레”라고 일컬었는데 배달은 “밝달=밝은 땅”을 뜻한다. 이런 이름들은 한민족이 밝고 따뜻한 삶을 지향했음을 나타낸다. 또 한민족이 흰옷을 즐겨 입은 것도 밝은 삶에 대한 염원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2) 한민족의 근원적인 생명체험과 생명이해: ‘한’(韓)의 묘합

한민족의 정체를 나타내는 ‘한’은 흔히 ‘큰 하나’를 뜻하지만 그 쓰이는 말뜻은 매우 복합적이고 다양하다. “환하다, 크다, 임금(우두머리), 높음, 온전함, 대략, 하나, 많은, 무릇, 모든, 바른, 넓은, 가운데”. 이런 다양하고 상반된 의미를 지닌 ‘한’의 어원은 무엇일까? 학자들은 ‘한’(韓)이 ‘환하다=해=밝음’(白)에서 온 말이라고 본다. 한은 환히 밝다는 ‘환’(桓)을 뜻한다. 이기영에 의하면 ‘=한’은 중앙아시아의 추운 바이칼 호수 일대에서 따뜻한 광명을 찾아 남하하는 동안에 한민족에게 생긴 본능적 개념이다. 이기영, 민족문화의 원류. 149쪽. 김상일, 한철학. 26쪽에서 재인용.

‘한’이란 말 속에는 한민족의 근원적 생명체험과 생명이해가 담겨 있다. ‘한’의 논리와 사유는 생명의 논리와 사유이다. ‘한’은 ‘낱’(하나로서의 개체)과 ‘온’(큰 전체)을 아우르는 말이다. 생명도 다양한 ‘낱’이면서 하나로 이어진 ‘온’이다. 생명세계가 분화되면 많음이 되고 다양한 많음이 수렴/통전되면 하나로 귀결되듯이, ‘한’은 다양한 많음과 수렴·통전된 하나를 함께 나타낸다.
‘한’이라는 하나의 존재가 ‘크다’(전체)와 ‘하나다’(개체)의 이원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을호는 ‘크다’와 ‘하나다’의 이원적 구조가 일원적 존재로 이해되는 ‘한’의 존재구조를 ‘묘합’(妙合)으로 설명한다. 이을호, “단군신화의 철학적 분석” 한국사상의 심층연구. 14쪽.
‘한’은 서로 다른 상반되고 양극적인 요소의 일원적 통일을 나타낸다.
묘합으로서의 한의 구조는 ‘낱’과 ‘온’의 역설적이고 역동적인 일치와 통전을 나타낸다. ‘한’은 ‘낱’으로서의 개체와 ‘온’으로서의 전체가 결합된 개념이다. 또한 ‘한’은 한겨레와 ‘한울(하늘)’, ‘한님’(한아님)을 함께 나타낸다. ‘한’은 이 땅에 사는 한겨레의 삶과 하늘(한님)을 이어준다. ‘한’이란 말속에서 한겨레와 하늘(한님)은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한’이란 말속에 ‘밝고 따뜻한 땅의 삶에 대한 염원’과 ‘하늘의 자유’가 미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서로 다른 것의 묘합의 논리는 평면적인 형식논리가 아니라 생명과 정신의 입체적이고 중층적인 구조와 깊이를 나타내는 논리이다. 이것은 개체 속에서 전체를 보고 전체 안에서 개체를 보는 생태학적 논리이며, 사람과 하늘의 깊은 관계를 보는 영적 깨달음의 논리이다.
삶은 다양하고 다원적이고 복잡하고 중층적이면서도 구체적인 하나의 생명체로 존재한다. 모든 생명체는 우주적 요소들과 생명작용의 묘합이다. 한사상은 이러한 생명현실을 충실히 반영한다. 양극화, 분리, 대립, 배제, 갈등의 논리와 사고는 삶의 본질과 현실에 충실한 한민족의 기본정서와 사유에 낯설다. ‘한’에는 배제하거나 소외시키지 않는, ‘더불어 살고’ ‘서로 살리는’ 인식과 사유가 내포되어 있다.
묘합으로서 한은 개체와 전체, 하나님과 인간, 하나와 많음의 역동적 일치를 나타낸다. 한민족의 전통종교사상을 담은 〈삼일신고〉에서는 이것을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고 셋이 만나 하나로 돌아옴”(執一含三, 會三歸一)으로 표현했다.(〈삼일신고〉가 조선왕조 말엽이나 일제 때 씌어진 위서라고 해도 거기에 담긴 내용이 민족종교문화의 본질과 성격을 드러낸다면 그것만으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셋은 완전수로서 만물을 나타낸다. 만물을 포함하고 하나로 돌아가게 한다는 원리는 만물을 품어 하나로 만드는 ‘한 사상의 포용적 동화적 성격’을 드러낸다. 셋(만물)을 큰 하나 속에 포함시키고 큰 하나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은 ‘나’, ‘너’, ‘그것’을 두루 포용하고 통전시키고 동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하나’와 ‘셋’, ‘셋이 어우러짐’(會三)과 ‘하나로 돌아감’(歸一) 사이에 긴장과 균형의 관계가 있다.
‘한’의 이원적이면서 하나인 존재구조에서 개체와 전체, 하나와 셋의 역동적 관계가 성립된다. ‘한’의 사유와 논리에서는 ‘나’가 전체(우리) 속에 소멸되거나 해소되지 않고 우리(전체)가 개별적인 ‘나’로 해체되거나 흩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인도종교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과도 다르다. 범아일여는 ‘나’와 우주적 보편적 실재와의 직접적인 일치로서 ‘나’를 우주적 신적 실재와 동일시하거나 우주적 신적 실재로 해소한다. 또한 중국의 음양오행사상이나 노장사상과도 다르다. 음양오행사상은 음양의 조화와 상보성, 오행의 순환적 상관관계를 말한다는 점에서 하나로 귀일시키는 ‘한’의 사유구조와는 다르다. 그리고 노자도 도(道)를 ‘하나’로 파악하지만 이 ‘하나’는 만물의 근본법칙으로서 사물을 사물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道德經 39장) 또 “도에서 하나가 나오고 하나에서 둘이 나오고 둘에서 셋이 나오고 셋에서 만물이 나온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고 함으로써 도에서 만물로 퍼져 나가는 사유구조를 제시한다.(42장) 이런 사유구조도 “하나로 셋을 포함하고 셋을 하나로 돌아가게 하는” ‘한’의 사유구조와는 다르다.
한의 묘합사상은 하나와 만물(셋), 개체와 전체의 역동적 관계를 지킨다. 마치 생명체가 자기 중심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내적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고 바깥세계와의 평형을 지키는 것과 같다. 개체와 전체의 역동적 관계를 지키는 한의 사유구조에서는 ‘나’(하나)가 ‘우리’(큰 전체)로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우리’가 ‘나’(하나)로 해체되지도 않는다.

3) 한(恨)과 신명의 묘합

한국인의 묘합적 정신구조는 한(恨)과 신명의 어울림(妙合)을 낳았다. 밝은 삶을 염원하기 때문에 신명이 나고 일치와 동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한(恨)이 맺힌다. 한의 사무친 슬픔 이면에는 삶에 대한 깊은 염원이 있다. 이어령이 말하듯이 한은 “...자기 마음속에 무엇인가를 희구(希求)하고 성취하려는 욕망이 없이는 절대로 이뤄질 수 없는 정감이다.” “남에게서 피해를 본 것만으로도 怨의 감정은 생겨난다. 그러나 한은 자기 마음속에 무엇인가를 希求하고 성취하려는 욕망이 없이는 절대로 이뤄질 수 없는 정감이다. 그런 꿈이 없을 때 한의 감정은 단순한 절망감이 되어 버리거나 「복수심」으로 전락되고 만다.”(李御寧, “푸는 文化, 신바람의 文化” 中央日報, 1982. 9.23일자)
삶에 대한 염원과 한(恨)이 미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한국인의 삶의 특징은 한(恨)과 신명의 어울림에 있다. 사무치는 한(恨)의 아픔과 장쾌한 활력, 구슬픈 애조와 흥겨운 가락이 공존한다. 함께 눈물 흘리며 아리랑을 부를 수도 있고 함께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아리랑을 부를 수 있는 한민족의 가슴에는 한과 신명이 어우러져 있다.
역동적인 묘합의 사유와 정신구조 속에 사는 한국인은 깊은 한(恨)을 품으면서도 어둡고 깊은 한(恨)에만 매몰되지 않고 밝은 신명과 활력을 지니고 산다. “한(恨)이 깊을 수록 신명이 난다.”는 말은 한(恨)과 신명의 묘합과 역동성을 드러낸다. 한이 깊고 처절할 수록 삶은 정화되고 아름다워지고 강해질 수 있다. 탈춤이나 대동제의 집단연희는 맺힌 한을 집단의 신명으로 전화시킨다. 한이 원한으로 되고 한이 맺혀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해학과 초월로 승화되기도 한다. 한이 깊은 만큼 인정도 깊다. 그러나 거꾸로 신명나는 신바람과 초탈한 웃음, 속 깊은 정(情) 속에 한(恨)이 배어 있기도 하다. 한(恨)은 흥겨운 가락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 밑바닥을 사로잡는 정서이기도 하다.

3 한국인의 언어에 담긴 생명사상

1) 모심과 교감의 언어

타자에 대한 서구인들의 비우호적 사고는 정복전쟁, 권력투쟁과 계급투쟁을 통해 정치사회문화를 형성해온 전통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더 나아가서 타자에 대한 그들의 이러한 비우호적 사고는 그들의 언어구조와 실체론적 사고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유럽언어들의 뿌리 말에 해당하는 라틴어에서는 주어가 술어를 지배하고 규정한다. 동사의 형태는 객어(상대)와는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의 성·수·격에 의해 결정된다. 모든 명사와 형용사도 자신의 성·수·격에 따라 그 꼴이 결정된다. 주어가 지배하고 명사와 형용사가 자신의 성·수·격에 따라 변화하는 라틴어의 문법구조와 성격은 타자를 지배하고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고경향을 조장했다고 여겨진다. 또한 “자기완결적이고 배타적인” 실체개념이 서구철학의 중심개념이 됨으로써 타자에 대한 열린 사고와 타자의 다름을 존중하는 사고가 발달하기 어려웠다고 본다.
우리말에는 자기를 낮추고 비켜서는 겸허함과 자기 비움이 배어있고,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경이 스며있다. 한국어에서 ‘나’가 흔히 ‘우리’로 뭉뚱그려지거나 생략되는 것은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겸허함의 표현이고 상대(객어)가 술어의 꼴을 결정하게 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경을 나타낸다. 한국인의 언어는 객어(상대)를 존중하고 드러내는 언어이다. 상대와의 교감을 중시하는 우리말은 주어가 지배하는 서구언어에 비해서 평화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을 지배하고 분해하려들지 않고, 인식대상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모시는 자세가 한국어에 드러난다. 서구어가 대상을 범주화하고 일방적으로 규정하는데 반해서 한국어는 대상을 존중하고 그대로 드러내려 한다. 서구어에서 색깔이 단순하게 범주화되는데 한국어에서는 색깔에 대한 미묘한 묘사와 표현이 발달해 있다. 대상의 움직임을 드러내는 의성어와 의태어, 부사어가 풍부한 것도 한국어가 인식대상 즉 타자에 대한 존중과 긍정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처럼 형용사와 부사어가 한국어에서 특히 발달한 것은 인식대상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드러내려는 한국인의 생명친화적 태도와 자세를 반영한다.
또한 한국어에서 주어와 객어를 생략하고 동사로만 대화할 수 있는 것은 상대와의 교감을 전제한 것이다. 주어와 객어가 생략된 “왔어?”, “왔니?”와 같은 표현은 서구어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제3자를 지칭하는 표현이 서툰 것도 객관화하는 사고가 발달하지 않은 것을 나타내는 반면에 한국어가 교감의 언어임을 알려준다. 교감은 생명의 기본 특징이다. 교감의 언어인 한국어는 미묘한 생명 언어이다.

2) 생명친화적인 동양·한국의 인식방법

생명과 물질의 내적 구조와 성격, 본질과 성향이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 방식으로, 인식대상에 대해서 공감하고 신뢰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인식해야 한다.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 사이에 인식론적 일치만 아니라 존재론적 일치와 교감이 이루어질 때, 다시 말해 생명의 공명과 감응이 이루어지고,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사이에 신뢰관계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생명과 물질에 대한 깊은 인식이 이루어진다.
‘알다’는 말도 서양의 말과 비교된다. 서구언어의 뿌리 말인 인도 유럽어에서 ‘알다’를 나타내는 말(라틴어 scio)의 말 뿌리는 ‘skei’인데 “자르다, 분리하다, 가르다”를 뜻한다. J. Pokorny, Indogermanisches etymologisches Wörterbuch. Bern, A. Francke Hg. 1969.      919쪽.
서구언어에서 ‘알다’는 대상을 ‘가르고, 잘라서’ 본다는 뜻을 품고 있다. 인식주체의 자르고 분리하는 이성적 자아의 인식능력이 앎의 행위를 구성한다. 인식대상은 가르고 자르는 인식행위의 수동적 대상에 문다. 이에 반해 우리말 ‘알다’는 사전에서 “배우거나 경험하여 모르던 것을 깨닫다.”로 풀이한다. 그리고 ‘알다’의 뿌리 말 ‘알’은 ‘알맹이’(核), ‘알짬’(精), ‘알’(卵)이고 ‘얼’(情神)과 통한다. 김민수 편, 『우리말 語源辭典』. 태학사 1997. 705쪽.
우리말 ‘알다’는 인식주체의 인식능력이나 행위와 관련되지 않고 인식대상의 본질과 내용과 관련된다. ‘알다’는 인식대상의 알맹이와 알짬, 잠재적 생명력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알다’는 인식대상에 ‘알맹이’, ‘알짬’, ‘생명의 씨앗’이 있다고 믿고 대상에 접근한다. ‘알다’는 인식대상의 알짬[내적 본질]을 알 수 있음을 전제한다. 앎에는 인식대상의 알짬이 담겨 있다. 서구언어에서 ‘알다’는 인식대상을 분석하고 해체해서 대상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것이라면 한국어에서 ‘알다’는 인식대상 전체의 핵심을 손상시키지 않고 파악하는 것이다. 한국어에서 ‘알다’는 전체적인 이해와 깨달음을 뜻한다. 이런 말의 어원적 차이는 서구에서는 인식대상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인식론을 시사하고 한국에서는 인식대상을 긍정하고 신뢰하고 존중하며, 인식대상에 맞추는 인식론을 시사한다.
모름이란 말 자체가 한국인의 이런 인식방식과 성격을 드러낸다. 다른 말들에서는 ‘안다’는 말 앞에 부정사를 써서 알고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영어는 'know', 'don't know'라고 한다. 영어를 비롯한 서구언어가 다 그렇고 중국어와 일본어도 그렇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안다’, ‘안 안다’고 하지 않고, ‘안다’, ‘모른다’고 할까? ‘모른다’ 는 ‘못 안다’에서 온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모름’ 은 ‘못-앎’이다. 김민수 편 『우리말 語源辭典』에서는 ‘모르다’의 어원을 ‘몯[不能]+[매개모음]+다[어미]’로 보기도 한다. 김민수 편, 우리말        語源辭典. 태학사, 1997. 366쪽.
‘모른다’는 말에는 “능력이 없거나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어원적으로 ‘모름’이 ‘못 앎’에서 오지 않았다 해도 ‘모름’에 인식능력이 없거나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면, ‘모름’은 ‘못 앎’을 뜻한다. ‘못-앎’은 ‘안-앎’과는 다르다. ‘못’은 능력이나 형편이 미치지 못한 것을 나타내고 ‘안’은 사실에 대한 부정을 나타내거나 말하는 이의 의지를 드러낼 수 있다. “결혼 못 했다”는 말과 “결혼 안 했다”는 말에서 그 차이가 잘 드러난다. ‘안’과 ‘못’의 차이에 대해서는 천소영, 우리말의 속살. 창해, 2000. 130-1쪽.

인식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존재와 생명 세계에 대한 겸손한 인정과 접근태도가 모름이란 말에 담겨 있다. 앎의 세계와 알고 있지 않은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자세와 태도가 아니라 나의 인식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모름의 세계를 긍정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드러나 있다. 모름은 인식능력이 미치지 않는 차원의 세계가 내게 알려주기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자세를 나타낸다. 모름을 모르는 대로 두어두고 모르는 대상이 알려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모르는 대상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모름’을 지키는 것은 나의 인식능력과 주체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이지 인식능력과 인식주체를 포기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대상에게 모르는 것을 물으면서 모르는 대상이 스스로 알려주기를 기다리는 것이고 ‘나’ 자신이 깨알아 알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지금 능력이 미치지 못해서 알지 못하지만 ‘알고 싶다’. ‘알고 싶은 데 모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 ’모름‘은 인식대상에 대한 존중과 경이를 내포하고 모르는 것에 대한 알고 싶은 의욕과 의지를 담고 있다. 이것은 ‘모름의 세계’에 대한 구도자적 탐구의 자세를 포기하지 않으나 모르는 대상에 대한 인식론적 왜곡과 폭력을 피하는 주의 깊은 태도이다.
‘가르침’과 ‘깨달음’을 전제하는 이러한 ‘모름’의 인식론에는 ‘모르는 것’이 알려질 수 있다는 낙관적 신념이 들어 있다. 지금 모르지만 알 수 있는 가능성이 닫혀 있지 않다. 지금 인식능력이 부족하고 미치지 못하지만 알 수 있다는 신념과 알고 싶은 의욕이 깔려 있다. 인식주체의 인식능력이 늘어나고 커질 수 있으며, 인식대상이 스스로를 드러내고 알릴 수 있다.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사이에 친화적 관계가 성립한다. 이런 인식관계 속에서는 인식대상도 수동적이고 닫힌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인식행위와 인식사건에 참여한다. 모름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인식주체도 모름의 차원과 세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스스로를 새롭게 변화시킨다. 단순한 정보(information)를 추구하지 않고 모름의 세계를 깨달으려는 사람은 스스로를 변형(transformation)시켜야 한다. 질적으로 새로운 차원의 앎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존의 인식방식과 관점과 관념을 변형시켜야 한다.
모름의 인식론은 인식대상을 지배하거나 정복하지 않고 인식대상과 교감하고 감응하는 방식으로 대상과 타자를 인식한다.


맺는 말

생명의 존재론적 깊이와 자유로우면서도 뗄 수 없는 미묘한 관계구조는 한민족의 생명체험과 이해를 담은 ‘한’의 묘합적 논리구조와 일치하고 한국전통문화의 포용적이고 종합적인 성격과 통한다.
지구화 과정 속에서 갈등하고 대립하는 서로 다른 주체들과 요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지키면서도 서로 이어지고 서로 살리는’ 묘합(妙合)의 지혜와 생활방식이 요구된다. ‘낱’과 ‘온’, 사람과 하늘을 아우르는 한국 생명사상은 모든 것이 파편화하고 얄팍해지는 세상에서 삶의 깊이를 지니면서 부문과 장르, 영역과 개성이 어우러지는 문화세계를 열어가고,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 동과 서를 넘어서 평화세상을 이루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생명과 평화의 길

<발표자 소개>

박 재 순
서울대 철학과졸, 한신대 신학박사,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씨의 소리 편집위원

현재: 한신대학교 연구교수, 씨사상연구회회장

<주요 논문>
함석헌의 민족혼과 기독교사상
유영모 사상의 자리 매김과 현대적 의미

<주요 저서>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 천지, 1988.
민중신학과 씨사상. 천지, 1990.
하나님없이, 하나님 앞에:디트리히 본회퍼의 그리스도론적 하나님 이해. 한울, 1993.
예수의 눈길. 나눔, 1994.
열린 사회를 위한 민중신학. 한울, 1995.
한국생명신학의 모색. 한국신학연구소, 2000.
한국생명사상의 뿌리. (공저),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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