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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4(화)
원효의 화쟁철학과 서양 생태론의 종합  
이 도 흠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1. 머리말

지금 지구는 환경오염으로 인류문명이 공멸할 지도 모르는 위기의 순간에 있다. 이 위기의 상황 속에서 인류는 자연생태계를 파괴한 그간의 패러다임에 대해 반성하는 한편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공생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있다. 생태론이 중심인 가운데 동양의 노장사상이나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대안 또한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에 대해 인간중심적이고 이분법적이며 이성중심적 사유인 서양의 현대철학이 환경위기를 낳았으므로 이를 자연친화적이고 일원론적이며 감성중심의 미학적 사고인 동양사상과 결합하여 생태적 세계관을 추구하는 것이 대안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신비주의적이고 반과학적이며 모호한 추상성을 추구한 동양사상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주장 또한 만만치 않다.
동양 철학에서 대안을 세울 때 중요한 것은 ‘보편성’과 ‘현실의 맥락’이다. 이를 배제한 논의는 당위적이고 선언적인 空理空論에 그치고 만다. 동양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동양의 전제정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인 중세의 농업사회로 퇴행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더 낫다. 현실, 우리가 디디고 있는 이 땅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대안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아무리 지극한 철학이라 하더라도 (현재적) 의미는 없다. 오늘날의 복잡해진 사회현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성현들의 현학적이고 신비적인 은유 놀이로 그칠 뿐이다.
‘21세기 오늘의 현실에서 한국 또는 동양의 사유의 현재성, 의미, 가능성’ 등의 과제를 수행하려면 그 논의는 지금 여기 우리가 맞고 있는 현실의 맥락에서, 20세기 또는 현대성의 반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서양 철학과도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다시 말하여 “20세기 인류사회, 또는 한국 사회의 모순과 위기는 무엇, 무엇이어서 서양의 현대철학은 이러저러한 대안을 내세웠는데 동양 사상은 이에 대해 어떤 면에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동양사상에서 대안을 찾자”는 것은 동양사상의 위대성이나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동일성’이 다른 것을 배척하는 것이라면 차이는 다른 것을 인정하는 가운데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차이의 관점에서 동양사상을 논할 때 ‘형이상학적 보편성’을 찾을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양자를 會通시킬 수 있다.
그럼 원효의 화쟁사상에 이에 대한 대안이 있을까? 원효의 화쟁사상은 어느 지점에서는 서양의 생태이론과 통하고 어느 지점에서는 이를 넘어설까? 이는 일원론, 자연친화주의, 미학적 이성과 통하고 신비주의와 반과학주의와 결별하는 것일까? 이성중심주의를 넘어서면서도 합리성과 결합하고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면서도 인간의 삶의 질을 확대하는 구체적 대안일 수 있는가? 필자는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에서 원효의 텍스트로 원효의 텍스트를 읽는다는 전제 아래 《金剛三昧經論≫, 《大乘起信論疏≫ 등 원효의 正典만을 대상으로 분석하여 화쟁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일곱 가지로 종합하였다. 이도흠,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서울: 한양대출판부, 1999) 가운데 <제2장 화쟁의 의미>, 105-172쪽.
논증의 전말은 이를 참고하기를 바라며, 여기서는 이 가운데 不一不二 개념을 중심으로 이를 생태이론과 비교하면서 논의를 펴나가는 가운데 一心과 眞俗不二 개념을 부분적으로 원용하고자 한다. 환경위기의 실상은 대체로 공감하는 것이고 자료나 수치의 나열이 될 수 있으므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환경위기의 특징과 원인을 알아본 다음 이에 대하여 생태이론과 화쟁의 不一不二를 비교철학적 관점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2.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의 특성

전 지구가 환경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1초 동안 0.6 헥타아르의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하루에만 100여종의 생물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2050년까지 80%의 이산화탄소의 양이 증가하여 2100년까지 지구의 평균온도는 3도, 해수면은 0.65미터나 상승할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예측한다. 앨 고어, 이창주 옮김, 《위기의 지구≫ (서울: 삶과 꿈, 1994) 참조.
오늘도 수억의 생명체가 제 명보다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살아남은 자라 해서 얼마나 더 나을까? 오염된 공기와 물과 토양을 먹으며, 또 이를 먹고 자란 생물을 포식하며 지구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이미 오래 전에 자연스러운 삶을 상실하였다. 8천 미터 설산을 나는 새나 북극의 백곰까지도 환경오염으로 신음하고 있다. 살충제에 죽은 벌레를 새가 먹고 한 쪽 날개가 퇴화한 새를 낳고 그 새를 잡아먹은 독수리가 고공을 날다가 갑자기 떨어져 죽듯, 중금속은 지구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의 몸에 조금씩 축적되고 있다. 소라 수컷을 암컷으로 변화시킨 농약 속의 환경 페르몬이 도시에까지 날아와 극히 미량으로도 도시 남자들의 정자 수를 감소시키고 여성화를 촉진시키고 폐암을 유발하듯, 그것은 소리도 없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환경위기는 어느 지역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가 이 모순 속에 던져진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이기에 사태의 심각성이 더하다.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의 특징은 세계적, 구조적, 순환적, 복합적, 불가역적, 일상적이라는 점이다.
환경위기는 더 이상 한 지역이나 나라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중국의 먼지와 대기오염물질, 바이러스가 편서풍을 타고 한국으로 날아와 황사현상을 일으키고 산성비를 내리고 입도열병 같은 병을 퍼트린다. 황사는 일본에도 내리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 동부에까지 이른다.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의 열대우림이 파괴되면 지구의 대기에 이상이 생기고 혼란상태에 이른 대기는 바다에 영향을 미치고 유럽에 폭설을 뿌리고 아시아에 홍수를 가져온다.
환경위기의 문제가 심각한 것은 구조적인 동시에 순환적이라는 점이다. 대기오염이 산성비와 산성안개를 만들고 이것이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키고 이로 산림이 파괴되고 동식물이 멸종한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산림파괴로 홍수와 가뭄이 일고 이로 토양과 수질이 오염되며 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인간은 더 많은 문명의 이기들을 부려 대기를 더욱 오염시킨다.
환경위기는 또 복합적이어서 하나의 요인이 여러 결과를 야기한다. 자동차 배기가스가 한편으로는 대기를 오염시켜 호흡기 질환을 유발하고 이 속의 이산화탄소는 온실효과를 만들어 지구의 온난화를 강화하고 산화합물은 산성비를 만들어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킨다. 이렇듯 환경위기는 하나의 동인이 여러 문제를 낳는, 곧 복합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환경위기는 특수한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언제든 오염된 공기를 마시고 바람을 타고 날아온 살충제의 잔여물을 호흡하고 중금속에 오염된 채소와 어패류를 먹는 것처럼 모든 생명체가 매일 매일 겪어야 하는 ‘일상’이다. 그럼에도 환경문제는 한 번 파괴되면 원상이 절대 회복되지 않는 불가역적 성격을 갖는다.
몇몇 학자들은 인류가 금세기 안에 제3의 인종의 탄생을 볼 것이라고 경고한다. 지금도 환경오염으로 기형아는 속출하고 있다. 에 나오는 외계인처럼 파충류를 닮은 아기가 지구 곳곳에서 태어나면, 지구가 기상이변을 일으켜 인류의 반 이상을 단번에 몰살시키는 천재지변을 일으키면 인류의 환경파괴는 멈출까?


3. 서양의 생태이론의 대안과 한계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대안은 과연 있는가? 위기는 하나이지만 이를 야기한 원인과 대안은 보는 시각에 따라 여러 가지이다.
가장 먼저 꼽는 것이 산업화와 도시화이다. 산업화를 감행하면서 인류는 화석연료를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화석연료는 오염물질을 배출하였다. 산업화는 DDT와 같은 독성물질, 플라스틱이나 비닐처럼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물질들을 수도 없이 쏟아내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확대되면서 숲은 도시와 목장, 공장으로 바뀌고 서식지가 파괴되자 이를 터전으로 삼았던 수많은 생명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2,000년 현재 세계 인류 중 거의 절반에 달하는 29억 명이 도시에 살고 있다. 2007년에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산업 쓰레기를 양산할 도시 생활자가 농촌생활자를 초월할 것이며 2030년에는 60%인 49억 명에 달할 것이다. www.yonhapnews.net /news/ 2001년 7월 10일.

인구 문제 또한 커다란 원인이다. 과학기술, 특히 의료기술 발달로 영, 유아 사망률이 현격히 감소하였고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었으며 경이적일 정도의 식량 증산이 이루어졌다. 유엔인구기금(UNFPA)에 따르면 세계 인구는 매년 7,700만 명씩 증가하고 있다. 지난 1999년 10월 60억 명을 돌파한 세계인구가 오는 2050년에는 93억 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특히 현재 49억 명에 이르는 개발도상국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2050년에는 82억 명에 이르면서 세계인구의 85%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2070년경 세계 인구가 100억 명을 돌파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 열린 유엔 인구 억제 특별총회에선 2050년 세계 인구가 120억 명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는 2001년 7월 10일 유엔이 정한 세계인구의 날(11일)을 맞아 유엔인구기금의 세계인구 전망 등을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협회는 세계인구의 20%를 차지하는 고소득층이 전 세계 민간 총소비의 86%를 차지하는 등 소득불균형이 심각하며, 이 고소득층의 5분의 1이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방출양의 53%를 점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같은 사이트, 2001년 7월 10일.
환경문제는 근본적으로 인구문제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지구가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 개체의 수, 다시 말해 인류가 폐기물을 쏟아내고 다른 동물을 잡아 섭취해도 자연정화가 되고 동물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인류 개체의 수는 2억 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계산대로라면 지금 현재의 상황으로만 추산하여도 60억에서 2억을 제한 58억 명의 인류가 매일, 생태계를 파괴하는 폐기물을 쏟아내고 생존하기 위하여 자연을 개발하고 다른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환경주의자들은 청정기술을 통하여 통제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유조선이 유출한 기름을 제거하기 위하여 화학약품인 유분산 처리제를 뿌리면 그것이 다시 바다를 오염시킨다. 이 예에서 보듯 환경주의의 대안들은 기계적 세계관과 인간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하였기에 근시안적이고 미봉책이며 국부적이다.
생태주의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그들은 인간이 전 지구의 중심에 서서 자연을 착취하고 개발하는 것을 문명으로 여긴 인간중심주의와 자연을 인간이 이용하는 대상으로 간주해버린 기계적 세계관에서 환경위기가 비롯되었다고 본다. 이들은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아우르는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세계관 속에서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을 통하여 인간과 모든 생태계의 조화를 추구한다. 이들은 뉴턴의 기계론적 물질관과 데카르트의 心身二元論을 비판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과학기술이 빚은 병폐의 근본 동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세계를 분석적, 환원주의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태론자들은 기계론적 세계관이 파기해버렸던 서양과 비서양의 전통사상을 결합해 대안을 모색한다.
생태주의자들은 기계론적 세계관을 극복하여 생태론적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으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기존의 생태론과 다른 대안을 내세운다. 에코페미니즘에서 보면 여성과 자연은 동격이다. 남성들에게 자연과 여성은 똑같이 착취와 개발의 대상이었다. 인간중심주의와 이성중심주의는 인간의 자연정복에 기반을 둔 남근중심주의적인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남성중심주의는 가부장적인 제도 속에서 내재화하여 이성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를 내세우며 근대 과학의 이름으로 자연과 여성에 대한 지배와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개발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여기서 여성과 자연은 남성, 힘을 가지고 부리려는 자가 한껏 소비하는 상품이며 마구 폭력을 휘두르고 배제를 하여도 무방한 타자이다. 그러니 가부장주의의 자연 파괴에 맞서서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며 이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여성성에 바탕을 둔 대안이 자연과 생명을 보호하리라 본다. 그러나 에코페미니즘은 페미니즘과 생태론을 결합한 것이기에 독립적인 영역을 갖는 이론이라기보다 양자의 절충으로 봄이 더 타당할 것이다.
1973년에 노르웨이의 철학자 아르네 네스는 기존의 생태이론을 ‘표층생태론(shallow ecology)’이라며 ‘심층생태론(deep ecology)’을 주장하였다. 표층생태론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으로 파악하여 자연 그 자체를 위하여 자연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유용한 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면에서 보존하기에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심층생태론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생태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기를 실현할, 즉 생존하고, 번성하고, 자기 나름의 형태에 도달할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생명평등주의(biospherical egalitarianism)의 입장에서 생태계 전 구성원을 바라본다. 이들은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각각의 평등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생명체끼리의 공생의 원리를 추구한다. Arne Naess, “The Shallow and Deep, Long-Range Ecology Movement,” Inquiryy, vol. 16, spring, 1973. pp. 95-96.

전 지구 규모의 환경문제는 바로 현재의 사회체제와 문명이 잉태한 것이므로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체제와 문명 그 자체를 변혁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바꿔 의식개혁을 하여야 하며 지금과 같은 생활방식을 지양하여 새로운 생활방식을 기초부터 만들어 나아가야 한다. 이들은 인간과 자연이 처음부터 하나라는 명제 아래 다양성과 공생의 원칙 속에서 모든 생물권이 평등하게 살아갈 것을, 그러기 위하여 인간이 상실한 ‘자연의 소리’, ‘지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감수성을 다시 회복할 것을 천명한다.  
네스는 죠지 세션즈와 더불어 심층생태론을 8개의 강령으로 요약한다. 1) 지구상의 인간과 인간 이외의 생명의 복리와 번영은 그 자체로 가치 (소위 내재적 가치 또는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이 가치들은 인간 이외의 생명의 세계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얼마나 유용한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것들이다. 2) 생명 형태의 풍부함과 다양성은 이 내재적 가치의 실현에 공헌하며 또한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3) 인간은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생명의 풍부함과 다양성을 훼손할 권리가 없다. 4) 인간의 생명과 문화의 번영은 실질적으로 보다 작은 인간 개체군과 양립할 수 있다. 인간 이외의 생명이 번창하려면 인간은 작은 개체군이 되어야 한다. 5) 오늘날 인간은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해 지나치게 개입하고 있으며,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하고 있다. 6) 따라서 정책들을 바꾸어야 한다. 기본적인 경제적, 기술적, 이데올로기적 구조들에 영향을 미칠 이러한 정책들은 현재의 상황을 매우 다르게 변화시킬 것이다. 7) 이데올로기의 변화라는 것은, 생활수준 향상의 표준을 지향하기보다는 더욱 더 삶의 질에 대한 평가의 표준을 지지함을 뜻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큰 것과 위대한 것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깊은 자각을 할  것이다. 8) 이상의 논의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필요한 변화들을 직·간접적으로 시도할 의무를 갖는다. Arne Naess, “The Deep Ecological Movement: Some Philosophical Aspects,” Michael E. Zimmerman eds., Environmental Philosophy (New Jersey : Prentice Hall, 1998), pp.196-197.

이에 대해 사회생태학자들은 심층 생태론의 신비주의적이고 반과학적인 정신을 비판하는 동시에 이미 지배적인 사회를 비위계적인 협력사회로 전환시키려는 환상에서 출발한다고 비판한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면서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였으므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생태의 균형이란 공허한 목표다. 생물주의는 ‘인간성’을 ‘자연법’으로 영원히 축소시켜버림으로써 이 뒤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이 추상적인 ‘인간’도 ‘사회’도 아닌 바로 자본주의란 사실을 얼버무리고 있다. 이러한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은 때때로 다양한 영성에 대한 경건한 호소와 더불어 공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르조아적인 탐욕에서 등장한 무분별한 이기주의에 성인의 가면을 씌워놓고 있는 형상이다. 머레이 북친, 문순홍 옮김, 《사회 생태론의 철학≫ (서울 : 솔, 1997), 163쪽.
이성중심주의가 지금의 위기를 불러온 것은 타당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이성을 무시하고 직관과 영성을 중시한다면 인간의 의식이란 동물의 본성과 같은 것으로 전락한다. 인간 중심주의가 인간의 자연에 대한 파괴를 정당화하였다는 주장은 타당하고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우열이 아니라 다름과 차이의 눈으로 보아야 하지만, 인간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가운데 지적 능력이 가장 뛰어난 특성을 가진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를 인식하고 대안을 세우고자 하는 것 또한 인간이고 그가 가진 이성이다. 그러기에 한 마리의 바이러스와 인간이 동등하다는 생명평등주의는 실제적으로 에코파시즘으로 전락한다. 생물권에 모욕을 가하는 인간들 간의 차이, 즉 가난한 자와 부자, 남자와 여자, 백인과 유색인, 착취자와 피착취자를 구분하지 않은 채 무조건 ‘인간’을 공격하는 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가능하겠는가. 위의 책, 161쪽.
심층생태론이 제기한 자연과의 일체화 체험이 여러 신흥 종교가 범람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환경교육과 명상이 환경위기 시대의 새로운 상품으로 변질된 예들은 이 이론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실례이다. 영성의 힘을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토대의 변화 없는 영성 운동만으로 사회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사회생태론자들이 볼 때 환경위기의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의 체제에 있다. 사회생태론도 마르크스주의 생태론, 생태무정부주의 등 여러 유파가 있으나 그것이 북친이 제시한 틀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기에 여기서는 북친의 사회생태론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 사회는 진보를 협력보다는 경쟁과 동일시하고 사회를 정교화한 인간관계의 영역이라기보다 사물들을 소유하는 영역으로 파악하며, 균형과 억제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에 기반하는 윤리를 창조한다. 인간사에서 최초로, 사회와 공동체는 거대한 쇼핑센터로 축소되었다. 머레이 북친, 앞의 책, 182쪽.
자본주의는 ‘확대 재생산’을 해야만 살아남는 체제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서 인간은 자연을 원료나 기계 등 ‘불변자본’으로 변환시키고 변환된 자연은 기계라는 모습을 띠고 다시금 인간 노동력을 대량으로 가변자본화하는 데 기여하며 인간은 다시 도구를 써서 더욱 급속도로 자연을 불변자본화한다. 자본주의는 잉여노동을 착취하고 상품을 판매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사회이기에 과잉생산을 추구하고 과소비를 조장한다. 노동자들 스스로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자본주의적 인간이 된다. 그들의 욕망은 직접 실현되지 않는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더 높은 명예를 얻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다. 그들 스스로, 자본가와 국가, 대중문화의 상징과 이미지 조작에 놀아났든 아니든, 이들을 얻는데, 다시 말해 생태계 전체를 파괴하는데 스스로 동참한다. 그러기에 자본주의 체제는 자연을 더욱 더 황폐화시키고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동시에 쓰레기를 양산한다. 확대재생산의 원리는 자연이 무한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번영과 발전을 약속하는 것인데 자연은 유한하였다. 10, 20년 전만 해도 자연의 여분이 있어 (세계의) 산업화가 300여 년 단행되었어도 오염은 국부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그곳마저 개발하여 버리는 바람에 환경위기는 전 지구 차원에서, 인류가 절멸할 정도의 지경에까지 치닫는 것이다. 그러니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거나 혁신을 가하여 확대재생산의 원리를 자연과 문명간의 균형의 원리로 바꾸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미봉책이다.
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논리가 변증법적인 이성이다. 변증법은 세계가 합리적인 한에서 자의식과 정교화가 커 가는 진보의 철학이다. 위의 책, 173쪽.
변증법은 추상으로부터 구체성의 분화를 지향하는 진화의 논리이기에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일차 자연-실제 자연-과 이차자연-인간문화 전반-을 종합하여 새로운 차원의 ‘자유로운 자연’을 이룩할 수 있다. 자연은 종들의 자유로운 자기 선택에 의한 진화과정 그 자체이며 진화과정은 유기체적이고 발전적이고 변증법적이기에, 1차 자연과 2차 자연이 자유롭고 합리적이며 윤리적인 자연으로 용융되면서도 일차 자연과 이차 자연 그 어느 것도 자신의 특수성과 통합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같은 책, 186쪽.
그러기에 참여적 진화가 일어나는 자연, 곧 제3의 자유로운 자연은 생명이 변증법적, 유기체적으로 진화를 거듭하여 다산성과 다양성, 생물종들간의 상보성, 모든 구성원들의 참여가 증대되고 생활형태를 끊임없이 분화하는 사회이다.
사회생태론은 구체성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현실성을 갖는다. 신비주의와 반과학주의를 지양하여 변증법적 이성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객관적 보편타당성 또한 획득한다. 공동체 건설과 시민포럼, 인간적 필요에 따른 소비 개념 재정립 등 사회운동을 대안으로 내세우기에 힘을 가지며 영적인 인간 자아의 변화에도 초점을 맞추므로 영속성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변증법 또한 이항대립적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변증법은 이미 그 자체에 주와 객, 자와 타의 대립과 투쟁, 모순을 통한 종합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사회생태론이 구체성과 힘을 갖지만 그 패러다임 자체는 아직 자연을 파괴한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심층생태론은 물론이고 사회생태론 또한 서양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논리의  한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제3세계의 환경위기이다. 제3세계에서 환경위기의 근본 원인은 서구화,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이다. 서양 문명이 들어오기 전까지 제3세계의 사회는 자연과 완벽하게 공존하며 사람끼리도 서로 평화스럽게 살았다. 그들은 신이 보내준 짐승만을 사냥하였고 화살촉에서 대변과 집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쓰고 버린 모든 것은 자연으로 돌아갔다. 레비스트로스는 서양의 한 선교사를 통하여 경쟁이 아니라 공존이 삶의 목표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선교사가 원주민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고 시합을 시켰더니 양 팀이 서로 비길 때까지 하였다. 이 예는 서양과 제3세계 사이의 패러다임이 얼마나 다른 것인 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서양 사회는 이 ‘야생의 사고’를 미개와 야만이라 하였으며 문명의 이름으로 서구화와 산업화를 단행하였다. 이로 제3세계는 자연이 파괴되고 공동체가 해체되었으며 가난과 내전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 사회는 “서구적 산업모델의 수용과 서양식 근대화→인구의 증가와 도시화, 전통 사회의 점진적 해체→산림의 개발과 증산 위한 비료와 농약 사용→산림파괴, 토양의 사막화와 토양오염, 지하수 오염→가뭄 등 천재지변→농촌공동체의 급속한 해체와 기근→(내전)→서양의 종속 강화”의 악순환을 겪고 있다. 에티오피아가 서구적 산업화를 단행하자 국토의 40%에 달하였던 삼림은 1%로 축소되었다. 숲이 물을 품어주고 기후를 조절하지 못하자 가뭄이 40여 년 간이나 지속되면서 농토는 거의 모두 사막으로 변하였고 하천과 샘들은 말라버렸다. 대기근이 발생하고 인간과 생물은 말라 죽어가고 있다. 물론 다른 요인도 있지만, 삼림으로 우거졌던 아름다운 나라 루완다가 내전을 겪고 기근으로 수백만의 어린이가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것도 서양적 농법을 도입하고 산업화를 단행하여 삼림을 파괴한 데 전적으로 기인한다.
에티오피아나 루완다에서 서양의 제3세계, 제3세계 종속자본과 권력의 하층 민중에 대한 지배구조를 변화시키지 않고서 그들 국민의 영적인 태도를 바꾼다고 해서 환경파괴는 멈추지 않는다. 그럼 제3세계의 사회적 현실을 포용하면서도 이분법을 넘어서서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를 극복할 패러다임이 원효의 화쟁사상에 있을까?  

4. 和諍의 不一不二의 의미와 생태적 적용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적 사유에는 하나가 다른 것보다도 우위를 차지하고 지배하는 폭력적 계층질서가 존재한다.” Jacques Derrida, tr. Alan Bass, Position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pp. 56-57.
데리다는 이성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서양의 형이상학은 정신/육체, 이성/광기, 주관/객관, 내면/외면, 본질/현상, 현존/표상, 진리/허위, 기의/기표, 확정/불확정, 말/글, 인간/자연, 남성/여성 등 이분법에 바탕을 둔 야만적 사유이자 전자에 우월성을 부여한 폭력적인 서열제도이며, 처음과 마지막에 “중심적 현존”을 가정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홍수를 막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댐을 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 흐르는 대로 물길을 터주는 것이다. 서양 사회는 인간과 자연을 이항대립으로 나누고 인간에게 우월권을 주었기에 전자의 방식을 택하였다. 댐을 쌓듯 인간 주체가 자연에 도전하여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는 것을 문명이라 하였고 이것으로 그들은 17세기 이후 전 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댐은 물의 흐름을 방해하여 물을 썩게 하고 결국 거기에 깃들여 사는 수많은 생물을 죽이고 심지어는 주변의 기후를 변화시키고 지진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듯 이항대립에 바탕을 둔 서양의 패러다임은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현대성의 위기의 동인이었다.
댐을 쌓는 것이 근대적, 서양적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대안이라면, 물길을 터서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를 심는 것은 화쟁의 不一不二의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대안이다. 화쟁의 패러다임을 가졌던 최치원은 홍수를 막기 위하여 물길을 트고 나무를 심었다. 지금도 지리산 자락의 함양군 함양읍 대덕동에 가면 낙엽활엽수림으로선 유일하게 천연기념물(제154호)로 지정된 上林이란 숲이 있다. 1,100년 전 신라 진성왕(887년~896년) 때 이곳의 태수인 고운 최치원은 홍수로 툭하면 넘치는 위천의 물길을 돌리고 이 숲을 조성하였다. 下林은 사라져버렸으나 지금도 폭 200~300미터, 길이 2킬로미터에 걸쳐 200년 된 갈참나무를 비롯하여 114종, 2만여 그루의 활엽수목이 원시림과 같은 깊은 숲을 이루고 있다.
댐은 물을 썩게 하고 생명들을 죽이지만 숲은 빗물을 품었다가 정화한 다음 서서히 내보낸다. 사람이 걸어 다녀 다져진 토양은 시간당 10밀리의 비를 품는 반면에 잘 가꾼 숲은 시간당 200밀리 이상의 강우를 가둔다. 고운 최치원은 왜 활엽수를 심었을까? 임업연구원이 광릉수목원에서 실험하였더니 활엽수 천연림은 사방공사를 한 침엽수와 활엽수가 섞인 숲에 비하여 우기에는 헥타아르 당 28.4톤의 물을 머금고 반대로 건기에는 2.5톤의 물을 더 흘려보내는 것으로 밝혀졌다. 고인 물은 썩지만, 흐르는 물은 산소를 머금고 이온 작용으로 자연 정화를 하며 온갖 생명들을 품는다.
이런 화쟁의 불일불이 원리에 대하여 원효는 다음과 같이 씨와 열매의 비유로 설명한다.

“열매와 씨가 하나가 아니니 그 모양이 같지 않기 때문이요, 그러나 다르지도 않으니 씨를 떠나서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또 씨와 열매는 단절된 것도 아니니 열매가 이어져서 씨가 생기기 때문이요, 그러나 늘 같음도 아니니 열매가 생기면 씨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씨는 열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열매일 때는 씨가 없기 때문이요, 열매는 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씨일 때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기 때문에 生하는 것이 아니요, 늘 같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滅하는 것이 아니다. 멸하지 않으므로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생하지 않으므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二邊을 멀리 떠났으므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하나 가운데 해당하지 않으므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할 수 없다..” 元曉: 《金剛三昧經論≫, <無生行品>, ≪韓國佛敎全書≫, 제1책, 625-중-하: 菓種不一 其相不同故 而亦不異 離種無菓故 又種菓不斷 菓續種生故 而亦不常 菓生種滅故 種不入菓 菓時無種故 菓不出種 種時無菓故 不入不出故不生 不常不斷故不滅 不滅故不可說無 不生故不可說有 遠離二邊故 不可說爲亦有亦無 不當一中故 不可說非有非無”


화쟁의 일곱 가지 의미 가운데 하나인 불일불이는 차이를 통하여 공존을 모색하자는 사유체계다. 씨는 스스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으나 열매와의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갖는다. 씨와 열매는 별개의 사물이므로 하나가 아니다[不一]. 국광 씨에서는 국광사과를 맺고 홍옥 씨에서는 홍옥사과가 나오듯, 씨의 유전자가 열매의 거의 모든 성질을 결정하고 열매는 또 자신의 유전자를 씨에 남기니 양자가 둘도 아니다[不二]. 씨는 열매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空하고 열매 또한 씨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이 또한 공하다. 그러나 씨가 죽어 싹이 돋고 줄기가 나고 가지가 자라 꽃이 피면 열매를 맺고, 열매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지만 땅에 떨어져 썩으면 씨를 낸다. 씨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면 씨는 썩어 없어지지만 씨가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자신을 흙에 던지면 그것은 싹과 잎과 열매로 변한다. 空이 生滅變化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세계는 홀로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지만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씨는 스스로 공하나 썩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이것이 없으니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니 이것이 있다. 또 씨가 있어 열매를 맺고 열매가 있으니 씨가 나오는 것처럼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해서 이것이 있다. 열매일 때는 씨가 없으므로 씨는 열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씨일 때는 열매가 없으니 열매는 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으므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늘 같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으므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멸하지 않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할 수 없고 나지 않으므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중부정을 통해 공한 것이 공한 것이기에[空空] 오히려 존재를 긍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화쟁은 우열이 아니라 차이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투쟁과 모순이 아니라 자신을 소멸시켜 타자를 이루게 하는 상생의 사유체계이다. 서양의 이항대립의 철학이 댐을 쌓아 물과 생명을 죽이는 원리를 이룬다면, 화쟁의 불일불이는 그 댐을 부수고 물이 흐르는 대로 흐르며 물은 사람을 살게 하고 사람은 물을 흐르게 하는 원리이다. 화쟁의 불일불이는 이항대립적 사고, 우열과 동일성을 해체한다는 점에서는 데리다의 철학과 통하나 데리다는 해체는 하되 대안은 약한데 화쟁은 차이와 상생을 결합한 사유체계이다. 그리 나를 소멸시켜 상대방을 이루려 하는 것이 참사랑이요 화쟁의 불일불이이다.
不一不二는 이것과 저것이 깊이 연관되어 있음도 의미한다. 불교를 모르는 미국인도 바이오스피어2 프로젝트(Biosphere Ⅱ project)를 통하여 한 줌 흙에 있는 미생물이 지구 전체의 대기의 균형에 관여함을 깨달았다. 우리 앞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보다 작은 박테리아 한 마리가 다른 모든 생명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여기 딱정벌레 한 마리가 내 발에 밟혀 죽었다고 해서 그 벌레는 죽은 것인가? 어느 사이에 개미가 새카맣게 모여 그의 몸뚱이와 더듬이와 다리를 해체해선 가져가 여왕개미를 먹이면 여왕개미는 쑥쑥 개미 알을 낳는다. 남은 껍질에도 수억의 미생물이 어디에선가 날아와 생명의 하모니를 펼친다. 딱정벌레는 죽은 것이 아니라 개미와 미생물로 전환한 것뿐이다. 이처럼 하나하나 존재를 보면 끊임없이 소멸하는 것이지만 전체로 보면 우리는 영원히 불멸한다. 영겁의 회귀가 있을 뿐, 사라지는 것은 아무도 없으며 우주 삼라만상은 모두가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심층생태론이 다분히 당위적이고 신비적인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였다면, 연기론은 한 마리의 미생물이 지구상의 온 생명체가 인다라망의 구슬처럼 서로 얽히고설켜 하나가 곧 전체를 이룬 세계의 실상을 ‘과학적으로’ 밝혀준다.
미봉책의 대안은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지금의 문명을 송두리째 부정한 대안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이 씨와 열매처럼 자신을 소멸시켜 상대방을 이루려 한다면, 그 원리에 따라 사회를 재편하고 가치관을 혁신하고 모든 생산을 해낸다면 인간은 함양의 상림처럼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지 않는 문명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서양의 대안을 전적으로 폐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고운은 상림을 조성하여 씨와 열매의 관계처럼 나무는 물을 품고 물은 나무의 양분이 되어 1,000여 년 간 홍수를 막으면서도 물이 맑게 흐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부임한 그해의 홍수는 어찌할 것인가. 고운은 상림을 조성하기 전에 둑을 쌓았다. 화쟁의 패러다임은 서양과 동양, 현대와 탈현대의 대안 또한 하나로 아우른다.

5. 생태이론과 화쟁 철학의 비교 및 종합

자연대립적이면서 이분법적이고 이성중심적 사유인 서양의 현대철학이 환경위기를 낳았으므로 이를 자연친화적이고 일원론적이며 감성중심의 미학적 사고인 동양사상과 결합하여 생태학적 세계관, 미학적 이성을 추구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박이문, 《문명의 미래와 생태학적 세계관≫ (서울: 당대, 1997), 참조.
반면에 동양의 전통사상이 덧없는 공허함이나 신비주의적인 외형을 가지는 경향이 있고, 머레이 북친, 앞의 책, 140쪽.
동양의 현인들이 심오하게 사유하고 느꼈다는 사실이 “그들 저서가 모호하다.”는 비판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주지는 못한다. 위의 책, 144쪽.
두 사람의 지적을 통하여, 우리는 자연친화적, 일원론적, 미학적 사고인 동양사상이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서양 사상과 대화를 하여 자체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생태론과 화쟁사상은 어느 점에선 서로 통하고 어느 점에서는 서로 다를까?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를 해결하는 데 생태론이 결하고 있는 부분을 화쟁이 보완해주고 화쟁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을 생태론으로 보충할 수 있을까?
흔히 불교와 생태론을 연결지을 때 慈悲와 緣起의 사유를 거론한다. 일체 중생이 佛性을 가지고 있다는 大乘의 요체는 모든 생명이 부처님처럼 소중하다는 생각으로 옮겨지며, 이는 한 마리의 하찮은 미물도 부처님과 같이 존귀하니 모든 생명체를 자비로서 바라보고 돌보아야 한다는 인식과 실천을 낳는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인드라망처럼 서로를 비추며 서로 관계하고 의존하고 있으며 서로 인과관계를 맺고 있어 이것이 없으면 저것조차 없다는 것이 연기적 사고이다. 이는 인간과 자연, 나와 지구의 온 생명체가 서로 연관을 맺고 있고 상보적이어서 공중에 떠다니는 미생물 한 마리조차도 지구 자연의 균형에, 나의 삶에 관여하고 있어 그것 없이는 나의 삶도 존재하지 못한다는 사고를 낳는다. 화쟁이 대승철학을 바탕으로 하였고, 不一不二는 연기론의 한 갈래이니 화쟁의 불일불이 논리 또한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이런 면에서 불일불이론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 통한다. 이에서 보면 생성이 존재를 빚어내기에 자연은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이 창조해 가는 과정이다. 한 마리의 벌레가 기어가는 데도 중력이 작용하듯이 우주의 섭리는 자연의 모든 생명체에 두루 깃들여 있다. 세계는 그 자신의 활동성과 다양성을 상실해 가는, 꾸준히 하향하는 유한한 체계의 장관을 우리에게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 자연에는 물리적 해체의 측면에 역행하는 어떤 상향의 기운이 있다. 화이트 헤드, 김용옥 역안, 《이성의 기능≫ (서울: 통나무, (1998), 350쪽.
자연은 자기 스스로를 조직하는 거대한 생태계(ecosystem)이며 지금도 새롭게 갱신되고 있다. 퓨마와 사슴에서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온 생명들이 고정되고 고립된 것이 아니라 우주의 목적에 따라 서로 소통하고 의존하고 서로를 보완하는 가운데 자신을 창조하고 초월하면서 보다 나은 수준으로 진화해 가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조그만 개미 한 마리가 죽고 새로운 유충이 태어나는 것도 우주 전체의 어떤 목적과 섭리에 따라 일어나는 전체 속의 부분, 그러나 전체를 담고 있고 전체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부분이다. 서로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세계 속에서 하나하나의 주체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초월체로서 창조적으로 전진한다. 모든 주체는 끊임없이 소멸되지만 객체적 불멸성(objective immortality)을 통하여 새로움에 참여한다. 그러기에 모든 존재는 주체적으로는 끊임없이 소멸되지만 객체적으로는 불멸한다. A.N. 화이트헤드, 오영환 역, ≪과정과 실재 - 유기체적 세계관의 구상≫(서울: 민음사, 1991), 29쪽.

심층생태론은 낮은 단계이기는 하지만 자비와 연기의 사유와 통하는 면이 있다. 반면에 사회생태론은 연기적 사유를 하여 생물간의 상보성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자비를 모든 생명에 확대시키기보다는 인간- 그 중에서도 사회적 약자-에 국한시킨다.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화쟁과 심층생태론이 감성과 영성 중심의 미학적 사고를 하려 한다면, 사회생태론은 이성 중심의 변증법적 사고를 하려 한다. 반면에 화쟁 철학은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생명이 깃든 소중한 하나, 하나이며 이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밝힌다.
화쟁이 일원론의 형이상학이라면 생태론은 완전한 일원론적 형이상학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를 지향한다. 생태론과 화쟁사상은 총체적 사고로 세계와 자연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분석적으로 부분만을 보는 것이 현대적, 기계론적 세계관이라면 모든 것을 서로 영향을 주고 영향을 맺는 시스템으로 보고 총체적, 유기체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화쟁의 세계관이다. 반면에 심층생태론은 일원론적 사고를 지향하기는 하지만 이원론적 잔재가 너무 강하고 사회생태론은 이원론을 극복하고 변증법적 종합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변증법적 종합이 일원론적 형이상학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교화한 이원론으로 봄이 타당하다. 더구나 화쟁의 불일불이가 씨와 열매의 경우처럼 양자의 상생을 통하여 하나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라면, 변증법적 종합은 양자의 모순의 대립과 갈등, 투쟁을 통하여 하나로 종합하고자 한다.
이처럼 화쟁의 불일불이는 심층생태론이나 사회생태론을 초월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화쟁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다. 화쟁은 신비주의도 반과학주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지금의 환경위기를 낳은 근본 원인과 모순에 대한 첨예한 인식과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당위적, 선언적 공리공론에 그친다는 점이다. 지금 여기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환경위기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데 이 또한 불일불이로 언제인가는 포용될 것이라며 실천을 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추상적 관념으로 전락한다.
동양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전제왕권 사회나 농업사회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를 ‘새로운 개념의 합리성’으로 보완하여야 한다. 어떠한 믿음, 결정, 담론도 어떤 형태로든지 합리성의 개념 없이는 가능하지 않고, 합리성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이성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박이문, 앞의 책, 159쪽.
하버마스의 말대로 합리성이 없다면 유토피아를 실현할 방법 또한 없다. 비판이성은 이성의 건축술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다. 문화 전체에 대한 최고의 재판관의 역할을 한다. 어떠한 믿음, 결정, 담론도 어떤 형태로든지 합리성의 개념 없이는 가능하지 않고, 합리성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이성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해체할 것은 이성 그 자체가 아니라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마저 비인간화하고 소외시키고 있는) 특정 개념의 이성인 것이다. (현대성의 위기를 야기한 목적적 합리성을 극복한) 의사소통적 이성은 명제적 진리, 규범적 정당성, 주관적 진실성, 심미적 조화성에 대한 요청들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 해결의 논증적 절차에서 자신의 척도를 발견한다. 위르겐 하버마스.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이진우 옮김(서울: 문예출판사, 1994), 367쪽.

그럼 화쟁의 틀 안에서 서구적 합리성을 결합할 수 있을까?

또 저 두 견해에 다 동조하면 그 안에서 스스로 모순을 일으켜 다투게 될 것이요, 만일 저 두 견해에 다 반대하면 그 두 견해와 다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동조도 말고 반대도 말고 설법하라는 것이다.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말대로 해석하자면 모두 다 허용하지 않는 것이요,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뜻을 따라 말한다면 허용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반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 情에 어긋나지 않고, 동조하지 않기 때문에 도리에 어긋나지도 않는다. 정에 대해서나 도리에 대해서나 서로 어긋나지 않는 까닭에 진여에 상응하는 설법을 한다는 것이다. 元曉, 《金剛三昧經論≫, <入實際品>, 《韓佛全≫, 제1책, 638-상: “又復兩同彼二則自內相諍 若異彼二則與二相諍 是故非同非異而說 非同者 如言而取 皆不許故 非異者 得意而言 無不許故 由非異故 不違彼情 由非同故 不違道理 於情於理 相望不違 故言相應如說 如者而也”


어떤 사상을 진리라고 하여 그것을 맹종하면 교조로 흐른다. 교조는 지성의 무덤이다. 반면에 어떤 사상을 허위라고 하여 전적으로 부정하여 버리면 그 사상 속에 있는 일말의 진리도 버리게 된다. 현대의 철학과 탈현대 철학, 서양 철학과 동양철학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르기도 하고 따르지 않기도 해야 양자에 담긴 진리를 수렴하면서도 허위를 버릴 수 있다.
이처럼 順而不順의 논법을 따라 두 가지 다른 견해이지만 따르기도 하고 따르지 않기도 하여 하나를 이루는 방편인 一心二門의 화쟁을 확대하여 이 二門에 서구적 합리성을 포함시킬 수 있다. 세계는 A or not-A, 이것이 아니면 저것인가, 주체인 동시에 객체인 것, 주체와 객체 중간에 있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가? 서양은 오랜 동안 이분법적 모순율과 배중율을 바탕으로 사고하였다. 그러나 실제 세계는 A or not-A가 아니라 A and not-A, 곧 퍼지이다.

                                 三: 和諍, 和諍, 탈현대적, 생태적 사유와 대안 사유
                         󰀩
                          體用
                一: 一心, 自然              󰀭       二: 二門, 근대적 사유

빛이 원래 하나이나 이를 밝음과 어두움으로 가르고 다시 세분하여 빨, 주, 노, 초로 나누듯, 세계는 하나이나 그러면 인간이 이를 이해할 수도 이용할 수도 소통할 수도 없다. 그러니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칸트와 헤겔, 마르크스, 하이데거 등은 이데아와 그림자, 본질과 현상, 주와 객, 노에시스(noesis)와 노에마(noema) 등 둘로 나누어 본다. 이처럼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은 실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하고 이용하고 소통하기 위한 것이니 하나가 둘로 갈라지는 것은 用이다.
무지개가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일곱 가지 색인가? 빛이 프리즘이나 물방울을 통과하면서 굴절되어 인간세계에서 그리 나누어 나타나는 것이며 일곱 가지 범주를 가진 인간에게 그리 보이는 것일 뿐이다. 무지개를 자세히 보면 빨강과 주황 사이에도 무한대의 색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색에 대해 알 수도, 전달할 수도 없으니 이를 분별하여 무엇이라 명명한다. 그러니 빨강과 주황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언어공동체는 그 사이의 색을 보지 못한다. 유럽 사람들도 근세 초까지 무지개를 네 가지나 다섯 가지로 보았다. 주황이란 언어가 없으니 빨강과 주황을 같이 본 것이다. 멀쩡한 주황을 빨강이라 하면 이것은 허위이다. 그러나 주황을 주황이라 하는 것도 허위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범주를 세분하여 주황을 ‘진한 주황, 아주 진한 주황, 극도로 진한 주황’ 등으로 만 가지, 억 가지로 나눈다 해도 그것은 실제의 색에 이를 수 없다.
이렇듯 아무리 범주를 세분하였다 하더라도 둘로 나눈 것-또는 이에 근거한 이원론적 사고나 이에 이름 붙인 언어기호-로는 세계의 실체를 드러내지 못한다. 극도로 세분한 범주에 언어기호를 부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세계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럼에도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의 서양 철학자들이 세계를 둘로 나누고 이렇게 인식한 것이 진리라 생각한 것처럼, 사람들은 둘로 나누고 이에 이름을 부여한 것을 실체로 착각하였다. 그러니 셋을 두어 둘의 허상을 해체하여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체(體)이다.
그럼 이들은 어떤 관계를 가질까? 체용상의 원리는 서양의 주류철학처럼 실체적이지 않다. 관계의 사유를 한다. 인간의 체는 영원히 알 수 없다. 우리는 이를 인간의 행위를 통하여 한 자락 엿볼 뿐이다. 이처럼 체(참)는 용(짓)을 통하여 일부 드러난다. 몇몇 원숭이가 직립을 하고 손을 쓰면서 손이 발달하고 뇌가 점점 커진 것처럼, 탄소동화작용이나 광합성 작용을 하는 나무가 햇빛을 충분히 받아들이도록 넓게 벌어진 잎과 바람에 살랑거리며 공기를 내뿜도록 가는 잎새를 갖는 것처럼 짓[用]은 품[相]을 만든다. 뇌가 일정 정도 이상으로 커진 원숭이는 다른 원숭이와 다른, 인간의 특질을 드러내고 너른 이파리를 가진 나무와 가는 이파리를 가진 나무는 다른 특성을 갖는다. 이처럼 품[相]이 참[體]을 담는다. 이처럼 참은 짓을 통하여 드러나고 짓은 품을 만들며 품은 참을 담으며 이 참은 또 다시 짓을 낳는다. 이처럼 참과 짓과 품은 영겁순환에 놓인다. 일심이 이문으로 나누어지고 이문은 화쟁의 방편을 통하여 다시 일심의 체로 돌아가고 이는 다시 이문으로 갈린다.
원래 자연과 일심은 궁극적 실체로 인간이 알 수도 다다를 수도 없다. 인간은 사회를 영위하고 이성을 통해 궁극적 실체를 이해하고 전달하기 위해 이를 둘로 나누어 해명하고 이용한다. 그러다가 포스트모더니즘에 와서 궁극적 실체에 이를 수 없음을 알고 해체하려 하고 전 지구차원의 환경위기를 깨닫고 생태론적 사유를 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궁극적 실체에 이르려 하고 자연을 되찾으려 한다. 생태적, 화쟁적 사유만이 일심에 이르고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문명 사회가 이분법과 합리성에 의해 만들어진 기제이기에 이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眞如門으로 보면 화쟁만이 일심으로 가는 방편이지만, 生滅門에서 보면 합리성의 원리를 무시할 수 없다. 대안은 생태적, 화쟁적 사유와 합리성을 종합하는 것이다.
불일불이의 패러다임에 서구적 합리성을 하나로 원융시키는 것 또한 화쟁의 논법이다. 씨와 열매의 관계처럼 인간과 자연, 나와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서로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하여 서로가 서로를 살리려 할 때, 생명체는 서로 공존을 모색하는 가운데 종의 다양성과 진화발전을 추구한다. 대신 서구적 합리성을 포용하여 자연과 생태위기를 불러오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가부장주의, 이성중심주의, 과학만능주의, 개발 위주의 정책 등 불일불이의 상생을 방해하는 것에 대하여 첨예한 인식을 하고 비판을 하고 대응을 한다. 그러면서도 합리성의 틀에만 머물지 않고 불일불이의 원리에 따라 인간의 삶의 질이 개선되면서도 모든 생명체가 번성하는 가치론을 지향한다. 논자는 이를 오늘 ‘화쟁적 합리성’이라 부르고자 한다. 이는 몸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깨달음은 저 언덕 너머 어딘가에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바로 여기가 도솔천이듯, 깨달음은 우리의 몸 속에, 우리가 있는 이 땅위에 현존한다. 자연의 空함을 인식하는 것은 마음이요, 마음이 자리하는 것은 특정한 몸이요, 이 몸은 또 특정한 장소에 자리한다. 공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보편적으로)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지만 오로지 이 순간에만, 바로 이곳, 내 몸 속에서 실현된다. Malcolm David Eckel, “Is There a Buddhist Philosophy of Nature?", in Buddhism and Ecology-The Interconnection of Dharma and Deeds. Mary Evelyn Tucker and Duncan Ryūken Williams(ed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7), p. 345.
이처럼 불일불이는 21세기의 사회의 현실이란 맥락에서, 이 땅위에서 호흡하고 있는 우리 몸을 바탕으로 우리 몸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화쟁의 불일불이는 화쟁의 또 다른 개념인 一心의 사유와 眞俗不二와 결합할 때 비로소 올바른 생태이론이 될 수 있다.

“一心이라 하는 染과 淨을 포괄하는 法은 그 本性이 둘이 아니요, 참되고 참되지 않음에도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一이라 하는 것이다. 이 둘이 아닌 곳에 여러 법이 적중하여 열매를 맺어 허공과 같지 않아 本性이 스스로 신비한 이해력을 갖고 있어 心이라고 한다.…따라서 일심은 일체 世間의 법과 出世間의 법을 포괄한다.” 元曉, 《大乘起信論疏≫, 卷1, 《韓佛全≫, 제1책, 741-상: “何爲一心, 謂染淨諸法 其性無二, 眞妄二門不得有異, 故名爲一. 此無二處, 諸法中實 不同虛空 性自神解 故名爲心.…心卽攝一切世間出世間法”


一心이란 직역하면 한 마음이란 뜻이다. 一이란 眞과 俗, 淨과 染, 中觀과 唯識, 眞如門과 生滅門, 理와 事를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아우르기에 一이다. 하나란 모든 대립을 통일한 세계를 인식하는 궁극적 실체이자 모든 사유와 존재가 출발하는 원점이다. 그 본성이 둘이 아니란 것은 일심이 아닌 곳에서는 둘임을 전제로 한다. 일심에 의하지 않으면 眞과 俗, 事와 理, 主와 客 등 세계의 실체를 둘로 나누어 본다. 하지만 이것은 세계의 실체가 그런 것이 아니라 중생이 깨닫지 못한 세계에서나마 세계의 실체를 이해하려고 편의상 둘로 구별하여 본 허상일 뿐이다. 이렇듯  세계의 실체가 본래 둘이 아니기에 一이다. 이 하나가 허공과 달리 스스로 모든 법을 포괄하고 이해하여 온 세계를 지어내니 心이라 이른다. 未覺이 있기에 미각이 아닌 것을 깨달음이라 하고 깨달음이 있기에 이와 다른 것을 未覺이라고 하는 것처럼, 俗한 세계에 있으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眞이고 깨달았다면 깨달은 세계에서 俗한 세계에 있는 중생을 구원해야 하는 것처럼, 전자가 있으므로 해서 후자가 드러나고 또 후자가 있어 전자가 드러나기 때문에 전자와 후자는 하나가 된다. 이처럼 일심이란 더럽고 깨끗한 일체의 법이 다 의지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곧 모든 법의 근본이다. 元曉, 《金剛三昧經論≫, <無相法品>, 《韓佛全≫, 제1책, 615-하: “如是一心 通爲一切染淨諸法之所依止故 卽是諸法根本”
그러기에 일심의 사상은 몸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속제를 버리고 나타난 진제’는 ‘속제를 녹여 나타난 진제’와 같은 것이니, 이 2문의 진제는 오직 하나요 둘이 아니며, ‘진제의 오직 하나’란 圓成實性이다. 그러므로 버리고 녹여 나타난 것은 오직 一心이다. 元曉, 《金剛三昧經論≫, <入實際品>, 《韓佛全≫, 제1책, 639-하-640-상: “又初門內 遣俗所顯之眞 第二空中 融俗所顯之眞 此二門眞 唯一无二 眞唯一圓成實性 所以遣融所顯唯一心”


금을 녹여 장엄구로 만들듯 眞諦를 녹여 俗諦를 만들며, 다시 장엄구를 녹여 金甁으로 환원시키듯 속제를 녹여 진제로 만든다. 중생의 입장에서 보아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일체 중생이 모두 佛性이 있다고 하는 것은 大乘의 요체이다. 그러니 중생이 곧 부처요, 중생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으로 본래 청정하다. 그런데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그 하늘을 가리듯, 일체의 중생이 無明으로 인하여 미혹에 휩싸이고 妄心을 품어 진여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세계를 분별하여 보려 한다. 그러니 유리창의 먼지만 닦아내면 맑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듯, 모든 사람의 무명과 망심을 없애면 그들 마음속에 있는 부처가 저절로 드러난다. 깨달음과 해탈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 속 부처를 드러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미천한 인간들이 속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여야 완성된 인격[眞]에 이를 수 있고 또 이에 이른 사람은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을 이끌어야 비로소 깨달음이 완성될 수 있다.
연꽃은 저 높고 아름다운 산록에서 피어나지 않는다. 왜 저 아름다운 연꽃이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향기로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는 높은 언덕에 피지 않고 냄새나는 수렁의 진흙 속에서 피어날까? 왜 가장 더러운 진흙 속에서 줄기를 뻗어 청정한 하늘 위로 가장 아름다운 꽃송이를 틔울까?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이 저 높은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고 반야의 바다를 완전히 갖추었어도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고 무량한 겁 동안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고 온 중생을 구제한 뒤에 비로소 열반을 얻는 것이다. 높은 깨달음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열반에 머물지 않고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을 구제해야 비로소 깨달음의 완성에 이른다. 이것이 眞俗一如이다. 원효는 열반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不住涅槃을 추구하였고 이를 몸소 실천하고자 중생 속으로 내려갔다. 眞俗不二는 생태론적 관념에만 머물지 않고 모든 생명체가 공존할 수 있는 실천인 慈悲行을 행하는 사유이다. 지식인들만 공허한 외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생태적 사고가 잠재되어 있으나 다만 산업화와 인간중심주의, 기계론적 세계관의 이데올로기에 조작되어 감추어져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여 그들로 가서 그들 속의 부처님이라 할 생태적 사고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무지한’ 농부나 ‘야만적인’ 아프리카 원주민이 서양의 유식한 생태학자보다 더 훌륭하게 생태적 지혜를 펼치던 것을 수없이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眞俗不二는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에서 억압당하고 신음하는 민중들, 그 지배체제로 인하여 착취되고 개발되며 종의 절멸로 치닫고 있는 지구상의 온 생명체들을 모두 보듬을 수 있는 방편과 실천을 제시한다.

6. 맺음말

화쟁의 不一不二가 생태론일 수 있는 가능성을 살폈고 이를 서양의 생태론과 비교하였다. 화쟁의 불일불이는 우열이 아니라 차이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투쟁과 모순이 아니라 자신을 소멸시켜 타자를 이루게 하는 상생의 사유체계이다. 서양의 이항대립의 철학이 댐을 쌓아 물과 생명을 죽이는 원리를 이룬다면, 불일불이는 그 댐을 부수고 물이 흐르는 대로 흐르며 물은 사람을 살게 하고 사람은 물을 흐르게 하는 원리이다
화쟁의 불일불이는 심층생태론이나 사회생태론을 초월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화쟁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다. 화쟁은 신비주의도 반과학주의도 아니다. 화쟁은 이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서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지금의 환경위기를 낳은 근본 원인과 모순에 대한 첨예한 인식과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위적, 선언적이라는 점이다. 그러기에 동양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전제왕권 사회나 농업사회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불일불이는 一心二門의 順不順의 논법을 따라 ‘화쟁적 합리성’-과학적 보편타당성을 가지면서도 생물종의 다양성과 진화발전을 추구하고 변해진 21세기의 사회문화의 현실맥락에 바탕을 두면서도 인간과 생물의 삶의 질을 확대하는 가치를 지향하는-으로 보완하여야 한다. 씨와 열매의 관계처럼 인간과 자연, 나와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서로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하여 서로가 서로를 살리려 할 때, 생명체는 서로 공존을 모색하는 가운데 종의 다양성과 진화발전을 추구한다. 대신 서양의 합리성을 포용하여 자연과 생태위기를 불러오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가부장주의, 이성중심주의, 과학만능주의, 개발 위주의 정책 등 불일불이의 상생을 방해하는 것에 대하여 첨예한 인식을 하고 비판을 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합리성의 틀에만 머물지 않고 불일불이의 원리에 따라 인간의 삶의 질이 개선되면서도 모든 생명체가 서로 공존하고 상생할 수 있는 가치론을 지향하고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불일불이는 21세기의 사회의 현실이란 맥락에서, 이 땅위에서 호흡하고 있는 우리 몸을 바탕으로 우리 몸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화쟁의 불일불이는 화쟁의 또 다른 개념인 眞俗不二와 결합할 때 비로소 올바른 생태이론이 될 수 있다. 眞俗不二는 생태론적 관념에만 머물지 않고 모든 생명체가 공존할 수 있는 실천인 慈悲行을 행하는 사유이다. 지식인들만 공허한 외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생태적 열망이 잠재되어 있으나 다만 산업화와 인간중심주의, 기계론적 세계관의 이데올로기에 조작되어 감추어져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여 그들로 가서 그들 속의 부처님이라 할 생태적 사고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 眞俗不二는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에서 억압당하고 신음하는 민중들, 그 지배체제로 인하여 착취되고 개발되며 종의 절멸로 치닫고 있는 생명체들을 모두 보듬을 수 있는 방편과 실천을 제시한다.
혹자는 화쟁이 21세기의 패러다임이 된다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실현 가능한 것이냐고, 너무 장밋빛 꿈을 꾸는 것이 아니냐고, 토대의 변화 없는 상부구조의 변화는 힘과 구체성을 상실한다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2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신분에 따른 차별을 정당화하는 중세적 세계관에 맞서 휴머니즘의 원칙을 외치던 이들은 당시 전 인류를 통틀어 몇 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보편적인 원칙이 되었다. 화쟁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적 가능성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정당성이다. 정당성이 있으면 힘을 가지며 가능성도 따라간다. 더구나 21세기에 와서 토대 또한 탈산업사회, 혹은 디지털사회로 변하고 있다. 화쟁은 새로운 토대에 부합하는 상부구조이기도 하기에 힘과 구체성도 갖는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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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yonhapnews.net / news /2001년 7월 10일.

(사)생명과 평화의 길

<발표자 소개>

이 도 흠

ㅇ 58년 충북 제천 생,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학사, 석사, 박사.
ㅇ 의상·만해 연구원 연학실장 역임
현재,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소장, 계간 <문학과 경계> 주간
   한국언어문화학회 부회장, 한국시가학회 연구이사, 한국기호학회 교육이사  

<주요 저서>
ㅇ『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한양대출판부, 1999.
ㅇ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푸른역사, 2000.
ㅇ 『설화와 역사』(공저), 집문당, 2000.
ㅇ 『문화변동과 인간, 그리고 문화연구』(공저), 깊은샘, 2001.
ㅇ 『생명에 관한 아홉 가지 에세이』(공저), 민음사, 2002.
ㅇ 『기호학으로 세상 읽기』(공저), 소명, 2002.
ㅇ 『기호학과 철학, 그리고 예술』(공저), 소명, 2002.
ㅇ 『고전시가엮어읽기』(공저), 태학사, 2003.
ㅇ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공저), 생각의 나무, 2003.
ㅇ 『대중문화 낯설게읽기』(공저), 문학과 경계, 2003.

<주요 논문>
1. 「포스트모더니즘 문예이론과 원효 화쟁의 비교연구」, 『Korean Studies at the Crossroads』, 국제비교한국학회, 2002년 6월.
1. 「원효의 화쟁사상과 탈현대철학의 비교연구」, 『元曉學硏究』, 제6집, 元曉學硏究院, 2002년 2월.
1. 「話頭와 禪詩의 和諍記號學的 硏究」, 『白蓮佛敎論集』, 제11집, 白蓮佛敎文化財團, 2001년 12월.
1. 「불교철학 심화의 방편으로서 서양 인문학의 탐색』, 『釋林論叢』, 제34집, 동국대 석림회, 2001년 11월.
1. 「원효의 화쟁사상과 생태이론의 비교연구」, 『돈암어문』, 제14집, 돈암어문학회, 2001년 10월.
등 5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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