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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4(화)
가톨릭 신학적 관점에서 본 생명  
조규만 (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서론
1. ‘그리스도교는 생명(生命)을 위한 종교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라는 명칭이 말해주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신앙의 핵심(核心)으로 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약식 고백(略式 告白)이다. 그리스도란 메시아, 즉 하느님께서 파견한 결정적 인물로서의 구원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란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말의 그리스 번역어이다.  ‘기름을 발리운 자’로 풀이된다. 이스라엘 전통에서 ‘기름을 발리운 자’ 는 왕이나 사제처럼 백성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자를 뜻한다. 초기 이스라엘 신앙에서 메시아란 인물은 불투명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오래동안 기다려 왔던 희망적 인물이다. 나자렛 예수가 생존하던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저마다 여러 부류의 메시아를 기대하였다.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던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정치적 의미의 왕으로 이해한 부류도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로 이끌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지도자로 이해한 부류도 있었으며, 구름을 타고 나타날 신비한 힘을 지닌 천상적 존재로 이해한 부류도 있었다. 죽음으로부터 부활을 체험한 예수의 제자들은 비로서 예수야말로 옛날부터 예언자들이 희망으로 제시했던 메시아임을 고백하게 되었다. Cf. S. Mowinckel, He That Cometh, Oxford, 1956; J. Klasuner, The Messianic Idea in Israel, New York, 1955; H. Cazelles, Il Messia della Bibbia, Citta` di Castello, 1981.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쓰여진 성서를 그리스도교의 중요 경전으로 삼고 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중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두고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생명’을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셨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말씀 가운데 몇 가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 ).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한 5,24).”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를 생명의 종교라고 말해도 무관할 것이다.
2. 그리스도교 신학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 무엇보다 인간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 성서와 그리스도교 신학이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해서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관심을 갖는 부분은 바로 인간 생명이다. 최근 일부의 생태주의 환경학자들에 의하면, 인간 생명과 인간 이외의 생명을 동등하게 보려는 경향이 엿보인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 더 나아가 무생명체까지 포함한 영성 평등주의(spiritual egalitarianism), 세상을 신의 일부로 주장하는 만유재신론(panentheism), 지구는 모든 존재를 출현시킨 원천이고, 자궁이며, 모든 생명체에게 영향을 공급하는 터전으로서 신의 몸으로 간주하는 멕퍼그의 이론 등이 그렇다. 참조: 한면희, “생태 위기 시대의 교회 역할과 환경신학의 흐름 -「생태계의 생명부양 능력과 환경신학」에 대한 논평, 『司牧神學』, 제8집(2000년),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 66-67쪽.
그러나 성서와 그리스도교 신학은 결코 인간 생명을 동물의 생명, 또는 식물의 생명과 동등하게 보지 않는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마태 6,26).
3. 그리스도교 신학은 인간 생명을 신성하게 여긴다. 장차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현세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 현세 생명을 결코 가볍게 보지 않지만 더욱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리스도교는 영원(永遠)이란 하느님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 시간이 3차원(次元) 존재의 인간을 비롯한 세상의 피조물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면, 영원은 고차원의 하느님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영원은 결코 시간의 연장이 아니다. 차원이 다른 세계이다. 인간의 영원한 생명은 영원에 존재하는 하느님께 참여함으로써 가능하다. 이것을 시대마다. 교부들마다, 신학자들마다 다른 표현을 사용하였다. ‘구원’, ‘천당’, ‘하느님 나라’, ‘영원한 안식’, ‘천상 예루살렘’ 등이 그렇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인간 생명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4. “생명이란 무엇인가?” 이번 학술발표의 주제이다. 신학적 관점에서 생명에 관하여 말하기에 앞서 밝혀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교는 과학(科學)이 제기하는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과학은 생명에 대한 현상, 생물의 진화와 방식 그리고 그 역사에 대해 질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 궁극적 의미(窮極的 意味)를 묻는다. 생명의 시작에 관한 그리스도교 창조는 연대기적 시작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시작(存在論的 始作)을 말하고 있다. 참조: 프랑수아 바리용, 『오직 사랑이신 하느님』(믿는 기쁨, 사는 기쁨 3), 심민화 옮김, 생활성서 (서울 2000), 60-65쪽.
과거에는 신화(神話)와 역사(歷史)가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지만, 성서의 창조 이야기가 역사가 아니라는 인식과 더불어 신화란 대해 실제로 일어났던 것에 대한 어떤 실재에 대한 성찰과 진술이라는 새로운 이해를 얻게되었다. 역사는 실제로 일어났던 것을 진술하고 이에 반해 신화는 허구를 진술한다는 식으로 신화와 역사를 대립시키는 것이야말로 비역사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참조: 클라우스 베스터만, 『창조』, 황종렬 옮김, 분도출판사, 1991, 24-26쪽.
이러한 새로운 인식 속에서 교회는 신학과 과학은 상호 의존적이며 협력적 관계임을 이해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과학이 종교를 오류(誤謬)와 미신(迷信)으로부터 정화시켜 줄 수 있고, 종교가 과학을 우상숭배(偶像崇拜)와 거짓 절대주의(絶對主義)로부터 정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참조: C.F. 무니, “신학과 과학의 새로운 대화(1)”, 임기석 옮김, 『신학전망』, 98호(1992년 가을), 광주가톨릭대학교, 61쪽. 필자는 1988년 6월 바티칸에서 개최한 현대 신학과 과학과의 대화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발언한 교황 바오로 2세의 발언을 인용하였다. 교황의 메시지는 Physics, Philosophy, and Theology: A Common Quest for Understanding, ed. Robert J. Russell, William R. Stoeger, and George V. Coyne (Noter Dame: Univ. of Noter Dame, 1988); Ernan McMullin, A Common Quest for Understanding, America 160/5 (Feb. 11. 1989), pp. 100-104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6년 교황청 과학원 총회에 회원들에게 생명의 기원과 진화라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교회와 과학의 신뢰에 찬 대화의 풍성한 결실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참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담화 “교회는 진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1996년 10월 22일).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제3호(1997),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86-187쪽. 영문은 교황청 신문 L'Osservato Romano, 1986년 11월 24일자 22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교회는 더 이상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과학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일을 하지 않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과학이 하는 일과 신학이 하는 일을 구별하고 있다. 과학이 관찰을 통하여 생명의 다양한 출현을 더욱 더 정확하게 측정하고 진술하고, 실험적인 차원에서 인간 존재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매우 귀중한 일련의 표징들 발견해내는 영역이라면, 신학은 창조주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그 궁극적 의미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과, 어떤 이론도 인간의 존엄성이나 행복 또는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신학은 인간의 전체적 선(善)을 가로막는 여하한 이론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또 제기할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에서 생명에 관하여 논하고자 한다. 우선 그리스도교 신학의 원천인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전반에 나타나는 생명 이해를 먼저 살펴보고, 다음으로 생명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론

1. 구약성서의 생명 이해
1.1 생명에 관련된 구약의 용어들
우리 나라말도 생명을 목숨, 삶, 생활 등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하듯이 구약성서에서도 생명을 뜻하는 단어로 다음 4가지를 들 수 있다. 1)하이임(מייה), 2) 네페쉬(שׁפנ), 3)루아흐(הור), 4) 너샤마(אמשׁנ)이다. 참조: 김영남, “그리스도교의 생명 이해”, 『가톨릭 신학과 사상』, 제20호(1997년 여름), 가톨릭대학교출판부, 65쪽.
 ‘하이임’은 창세 2,7과 욥 24,22에서 보듯이 생명을 뜻한다. “그 때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니쉬마트 하이임)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의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창세기』, 임승필 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하느님께서 이런 포악한 자들을 당신의 힘으로 휘어잡으시리니 한번 일어나시면, 그들의 생명(하이임)은 안개같이 사라지리라”(욥 24,22: 공동번역).
‘네페쉬’는 일차적으로 숨이나 음식을 넘기는 목구멍 또는 목이라는 신체기관을 뜻하는 이름이다. 욕구, 영혼, 사람으로도 번역되며, 특별히 갈망하는 인간을 표현한다. 참조: 한스 발터 볼프, 『舊約聖書의 人間學』,神學叢書 第十卷, 文熹錫 옮김, 분도출판사, 1976, 28-56쪽.
이 단어가 목숨, 또는 생명의 의미로도 쓰여진다. “그 때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니쉬마트 하이임)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네페쉬)가 되었다”(창세 2,7). “야훼여, 내 목숨(네페쉬) 지하에서 건져 주시고 깊은 구렁에 떨어지는 자들 중에서 살려 주셨습니다”(시편 30,3). “피는 곧 생명(네페쉬)이라, 생명(네페쉬)은 고기와 함께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신명 12,23). “생물의 목숨(네페쉬)은 그 피에 있는 것이다”(레위 17,11).
‘목이 잘렸다’는 우리말은 ‘생명을 잃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즉 ‘목’이 ‘생명’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것에 비길 수 있다. ‘루아하’는 숨, 바람, 영, 정서, 의지력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생명으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다. 참조: 한스 발터 볼프, 『舊約聖書의 人間學』, 68-81쪽. “그 위에 사는 백성에게 입김을 넣어 주시고 거기 움직이는 것들에게 숨결(루아하)을 주시는 하느님 야훼께서 말씀하신다”(이사 42,5).
‘너샤마’는 숨결을 뜻한다. ‘루아하’는 ‘너샤마’와 동의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가 당신께서 외면하시면 어쩔 줄을 모르고 숨(루아하)을 거두어들이시면 죽어서 먼지로 돌아가지만, 당신께서 입김(루아하)을 불러 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을 새로워집니다”(시편 104,29-30). 이 예언서 구절은 창세 2,7을 연상시키며, 창세기의 너샤마라는 용어 대신에 루아하를 사용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피(담, מד )를 생명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생명력 자체가 머무는 곳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고기를 먹을 때 피는 먹지 말라는 엄한 금령을 내리고 있다(창세 9,4; 레위 3,17; 7,26; 17,10-16; 신명12,16.23; 15,23 등 참조). 이러한 금령(禁令)들은 구약성서의 생명 경외(敬畏) 사상을 보여준다. 참조: 한스 발터 볼프, 『舊約聖書의 人間學』, 123쪽.


1.2. 생명의 주관자(主管者)
구약의 생명 경외 사상은 생명의 주관자가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데 바탕을 두고 있다. “야훼께서는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어 지하에 떨어뜨리기도 하시며 끌어올리기도 하신다”(1사무 2,6). “나 외에는 신이 없다. 죽이는 것도 나요 살리는 것도 나다”(신명 32,39). 구약의 창조(創造) 사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의미의 해설이다.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만든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창세 2,7참조)도 인간 생명의 주관자가 하느님이시라는 의미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생명은 야훼에게만 속한다는 신학은 피에 관련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생물의 목숨은 그 피에 있는 것이다. 그 피는 너희 자신의 죄를 벗는 제물로서 제단에 바치라고 내가 너희에게 준 것이다”(레위 17, 11).  인간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을 파괴하는 범죄이다. “피는 곧 생명이다. 너희 생명인 피를 흘리게 하는 자에게 나는 앙갚음을 하리라. 어떤 짐승에게도 앙갚음을 하리라.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에게도 앙갚음을 하리라.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니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제 피도 흘리게 되리라”(창세 9,4-6).

1.3. 인간생명의 존엄성
구약성서는 무엇보다 인간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구약성서는 분명 인간 중심주의를 드러낸다. 구약의 창세기는, 특히 제관계 문헌(1,1-24a)은 인간을 창조의 절정(絶頂)으로 다루고 있고, 야훼스트계 문헌(2,4b)은 인간을 모든 창조의 중심(中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는 데 매우 신중하셨다는 표현을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라는 표현이 그렇다.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형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지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신학자들은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 근동 지방에서 사안(事案)이 중대한 만큼 왕이 홀로 결정하고 선언한 것이 아니라 어전회의(御前會議)를 통해서 결정하였다는 뜻으로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던 그 용법을 빌려왔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만큼 인간 창조는 신중하게 결정된 것임을 드러낸다. 또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물을 긍정(肯定)하신다. 성서는 ‘보시니 좋았다’(창세 1,31)고 거듭 표명한다. 무엇보다 인간을 창조하시고는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평가하신다. ‘참’(very)라는 부사를 통하여 다른 창조물보다 인간 창조가 하느님에게 더욱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模像)’이기 때문에 존엄하다는 입장을 보인다. 우리는 오늘날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본디 히브리어는 ‘셀렘’(מלצ)과 ‘데무트’(תומד) 두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셀렘’은 조각이나 성상처럼 구체적인 닮은꼴을 드러내는 보통명사로서 ‘모습’ 또는 ‘모상’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리스어 icon, 라틴어 imago, 영어 image에 해당된다.
‘데무트’는 ‘닮음’, ‘비슷함’ 또는 ‘유사함’으로 번역될 수 있는 추상명사이다. 그리스어 homoiosis, 라틴어 similitudo, 영어 likeness로 번역된다.
아담의 셋째 아들 셋이 아담을 닮았다고 표현할 때에도 이 두 가지 용어가 사용되었다. “아담은 백 삼십 세에 자기 모습을 닮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창세 5,3). 그러므로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것은 마치 셋이 그의 아버지 아담을 닮은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과연 인간이 하느님의 무엇을 닮았는가에 관해서 답하는 일이 쉽지 않다. 셋이 아버지 아담의 무엇을 닮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사실 아들이 아버지를 닮는 것은 일부의 외모(外貌)만이 아니다. 성격이나 습관 등 내면적인 부분을 더 많이 닮고 있다. 성서도 인간이 하느님과 닮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 무엇인가 닮고 있음에 틀림없다. 닮은 부분에 관하여 신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이 있다.
그리스 철학자 필로(Philo)는 인간의 ‘영적 능력’이 하느님을 닮은 것이라고 말하였고,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는 ‘영혼의 능력’들, 즉 ‘기억’과 ‘지성’과 ‘사랑’이야말로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말하였다. 그밖에도 ‘인격성과 이해’, ‘자유의지’, ‘자아의식’, ‘지성’, ‘영적실존’, ‘영적 우월성’ 등을 거론하였다. 심지어 궁켈(H. Gunkel)은 ‘형상’과 ‘외모’에 있어서 하느님을 닮았다고 주장하였고, 쾰러(Koehler)는 ‘직립보행(直立步行)’하는 외양이 하느님과 닮았다고까지 주장하였다. 하지만 구약성서는 인간을 구체적으로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이 비판되고 있다. 참조: 클라우스 베스터만, 『창조』, 86-88쪽.
오늘날 우리 모두가 수긍할만하고 받아들여야 할 입장은 칼 바르트(K. Barth)의 견해이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의 모상이란 “인간이 존재하는 혹은 행하는 그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자신이 바로 그렇게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인간은 만일 그가 하느님의 모습, 모상이 아니라면 인간이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바로 그가 인간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모습, 하느님의 모상인 것이다”. 클라우스 베스터만, 『창조』, 89쪽 재인용: Karl Barth, Kirchliche Dogmatik, III,I, p. 206.
필자는 이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만일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이 인간의 어떤 특별한 자질(資質)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자질이 부족하거나 결여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 결여된 인간일 수밖에 없다. 가령 인간의 지성을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가정(假定)하면, 지성이 뛰어난 사람은 하느님을 뛰어나게 닮은 것이고, 지성의 능력을 잃은 치매 환자나, 식물 인간은 인간의 모상을 상실한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도 상실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과연 어떤 부분에서 하느님을 닮았는지 규정하는 일은 계속 추구되어야 할 연구 분야이지만, 인간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한 견해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비록 지적 능력이 약하거나 결여되어 있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어른이거나 어린이거나, 태아거나 모두가 인간인 만큼 하느님의 모상을 태어나고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셋이 만일 장애자거나 정신적 지진아였다 하더라도 여전히 아담의 아들로서 분명히 그를 닮은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교황청 장애인들의 대희년 준비 위원회는 이와 동일한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비록 장애인일지라도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존재인 우리 인간은 그분과 결합되어 있으며,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신비에 싸여 있다. 인간은 참으로 풍부한 실재이다. 인간의 가치는 다른 모든 창조된 실재의 가치를 뛰어넘는다. 유일하고 되풀이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인간의 고유한 존엄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존재인 인간은 모든 외적인 모습을 초월하여 그의 존재와 능력과 자유로써,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능력으로 그를 창조하신 사랑의 하느님을 반영한다.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영예와 영광과 존엄을 지니고 있다. 사람은 동산(창세 3,8)에서 하느님과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존재이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충만한 당신 생명을 부어 주시고 친교를 나누시고자 당신 자신을 위하여 창조하신 실재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과 자유롭게 친교를 맺는 능력과 책임을 부여해 주셨다” 교황청 장애인들의 대희년 준비 위원회, “장애인들의 대희년 준비”(2000. 12. 3),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17호(2001), 198-199쪽.

“하느님의 모습을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1,27)는 말씀은 오늘날 남자와 여자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해석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남성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여성은 남성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1고린 11,7-12)라고 이해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살던 남성위주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여성에게는 하느님의 모습이 전혀 없다거나 또는 여성에게는 남성보다는 하느님의 모상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없다. 남성이 하느님의 모상을 창조된 만큼 여성도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임에 틀림없다. Cf. P. Alfredo Marranzini, "L'uomo immagine dii Dio in Cristo", in Teologia Dogmatica 3, Roma 1969, p. 32.
우리는 남녀 구별 없이 어떤 인간도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더 나아가 장애자, 노인, 어린이를 상관하지 않고, 인간인 만큼 존엄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1.4. 인간생명과  다른 생명들
오늘날 생태주의 옹호자들은 성서의 인간중심주의에 반론을 제기한다. 그리스도교가 성서의 인간중심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초래한 오늘날의 환경 위기에 대해 부분적 책임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질책하고 있다. 참조: 한면희, “생태 위기 시대의 교회 역할과 환경신학의 흐름”, 63-65쪽.
사실 일찍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 크세노파네스(Xenophanes)가 신화(神話)의 인간중심주의를 근원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결국 인간이 말을 할 줄 알고 생각할 줄 아니까 신의 모습을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낸 것이 아니냐? 만일 짐승이 말을 할 줄 알고, 그림을 그릴 줄 알았더라면 신의 모습을 짐승처럼 그려냈을 것이 아니냐고 질문하였다. 참조: 요수타인 가아더, 『소피의 세계』, 장영은 옮김, 현암사, 서울 1996, 45쪽:“죽음을 면하지 못하는 인간은 신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태어나고, 옷을 입으며, 인간의 형상과 음성을 띠고 있으리라고 상상하였다. [...] 이디오피아 사람들은 자기네 신들이 코가 납작한 흑이라고 상상했고, 트라키아 지방 사람들은 푸른 눈에 빨강 머리의 신들을 생각해 냈다. [...] 암소와 말 그리고 사자에게 손이 있어서 그림을 그리고 인간처럼 창작을 할 수 있었다면 말은 말과 같은 신의 모습을, 암소는 암초처럼 생긴 신의 모습을 그려 자신과 똑같은 형상을 창조했을 것이다”.
성서가 하느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이것을 성서신학에서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이라고 한다. 마치 하느님이 사람처럼 말씀하시고, 걷고, 오른 손을 내밀고, 분노하고, 힘쎈 팔을 펼치시어 도움을 주고 벌도 내리신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성서가 근본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보이지 않고 만져질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뵙게되면 죽게된다’(판관 13,22; 출애 3,7 참조)는 표현으로 이러한 하느님의 비가시성(非可視性)과 그분의 초월성(超越性)을 드러낸다. 고전신학(古典神學)의 전통은 이러한 하느님의 초월성과 그 초월성으로 인한 하느님의 불가해성(不可解性)을 보존하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는 고전신학의 이러한 통찰을 집약적으로 표현하였다. “만일 네가 이해했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이해할 수 있었다면 당신은 하느님이 아닌 것을 이해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부분적으로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면, 당신의 생각의 속았을 뿐이다”. 엘리사벳 A. 존슨, 『하느님의 백 한 번째 이름』, 함세웅 옮김, 바오로 딸(서울 2000)175쪽 재인용: Augustinus, Sermo 52, C. 1, n. 16.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렇게 비가시성과 초월성을 하느님의 특성으로 이해하면서도, 인간에게 체험된 하느님은 인간의 방식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또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인간동형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태주의 환경운동가들은 “자식을 낳고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세 1,28)는 성서 구절을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지적한다. 이 구절이 자연을 오직 자원으로만 간주하여 마음껏 이용해도 좋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적극적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린 화이트(L. White), 매트 폭스(Matthew Fox), 살리에 맥퍼그, 베어 2세 등의 생태주의자들의 주장이 그렇다. 그들에 의하면, 오늘날 환경 위기의 근원적 뿌리로 유대교-그리스도교 전통이 지적되고 있다. 즉 성서의 인간중심주의와 인간의 세상 지배권이 오늘날 환경 파괴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인간만이 아니라 고등동물과 새, 개미, 벌레를 포함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바위와 물, 불, 바람과 같은 무생명체도 포함해서 평등주의를 내세우기도 한다. 여기에 여성 해방운동가들도 합세한다. 그들은 성서의 남성우월주의가 오늘날의 여성 불평등을 초래하였다는 데 동의하며, 남녀 평등은 물론 더 나아가 다른 생물체도 인간과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은 인간의 목적 달성과 무관하게 내재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참조: 한면희 “생태 위기 시대의 교회 역할과 환경신학의 흐름”, 62-68쪽.

여기서 우선 그리스도교 신부(神父)로서 필자는 교회를 변호 내지 옹호하는 입장에서 질문하고 싶다. 그리스도교 국가는 성서에 근거하여 자연과 환경을 파괴한 책임을 고백해야 한다면, 그리스도교 국가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무엇을 근거로 환경을 파괴했는지 묻고싶다. 남녀가 평등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적극 동의한다. 그리고 아직도 여성에게 불평등한 조건이 산재해 있다는 현실도 인정한다. 그리고 자연은 인간 목적 달성과 무관하게 내재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는 입장도 수용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이나 생물체에 대한 생명 존중에 대해서도 긍정한다. 그러나 인간 생명과 다른 생명체의 가치를 동등하게 인정해야한다는 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생존을 위한 먹이 사슬의 구조를 무시할 수 없다. 인간이 동물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서 먹을 수 없고, 채식을 해야한다면, 가끔은 인간을 해치는 동물을 잡아서는 안된다면, 인간과 동물에게 아무런 해도 주지 않는 식물의 생명을 무슨 이유로 해칠 수 있는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만물평등주의를 내세우는 사람이라면 그의 말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성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다고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지배권을 통한 인간중심주의를 드러낸다. 아담(인간)은 에덴 동산(세상)을 돌보아야 하는 존재였다(창세 2,6-8 참조).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창세 1,26). 인간의 세상 지배권은 시편에도 반영되고 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 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시편 8,4-6). 이 지배권에는 봉사(奉仕)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스림’이라는 왕권(王權) 개념은 주변 근동 국가의 왕권 개념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이 왕권 개념을 통해서 세상을 다스려야 하는 인간의 지배권 내지 인간중심주의를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 왕은 에집트 파라오처럼 신적 영역에 속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왕은 여느 백성과 다름없이 하느님의 계약과 법에 예속되어 있었다(1사무 13,8-15; 15,10-30). 오히려 왕은 여느 백성보다 하느님의 계약과 법에 성실해야 했다. 그래야만 하느님이 왕을 통해서 백성에게 축복을 내리신다. 그리고 하느님을 대리하여 백성들을 위하여 원수들을 쳐부수고 승리를 이룩해야 하고, 백성들의 번영을 보장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시편 44,4-8; 71,1-7 참조).  Cf. X.Leon-Dufour, art. “Re”, in Dizionario di Teologia Biblica, Brescia 1965, pp. 921-922. S. Mowinckel, He That Comes, pp. 23-60.
창세기 1,28에 인간이 동물에 대해 행사하는 다스림(הדר)은 땅을 정복하는 것(שׁבכ)과는 구별된다. 그렇지만 땅을 복종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물을 다스리는 것은 결코 착취를 내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왕권 개념에서처럼 자기 영토의 주군(主君)으로서 왕은 단지 그 영역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 것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영역을 위해 축복(祝福)을 가져다 주는 자요, 또한 그 축복을 중재하는 자이기도 한 것이다. 만일 인간이 땅의 자원들을 착취하여 대지와, 초목, 동물들을 비롯한 자연들을 손상시킬 경우, 그는 땅에 대한 지배라고 하는 자신의 왕다운 직무에 실패한 것이다. 참조: 클라우스 베스터만, 『창조』, 80쪽.
역사상 이스라엘 왕들이 실패했던 것처럼, 그래서 왕다운 왕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처럼. 분명 오늘날 인간은 생태계 파괴(破壞)에 책임이 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세상을 다스리라고 맡기셨는데 인간은 세상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착취(搾取)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선물로서, 사명으로서의 지배권은 인간이 땅을, 즉 세상을 돌보라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자연을 파괴한 것이다. 왕권이 아니라 왕권을 잘못 행사한 왕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성서의 인간중심주의가 잘못이 아니라, 잘 다스리지 못한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필자는 우주의 중심이 인간이라는 데 동의한다. 인간은 다른 생명보다 훨씬 소중하다고 본다. 인간이 살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이면 아메바를 비롯한 하등생물은 물론이고 모든 동물이 살 수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인간 때문에라도 환경은 보호되어야 한다. 오늘날 인간은 환경을 파괴함으로써 다른 생물은 물론 인간이 살아 갈 수 없게 만들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1.5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교가 인간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보다 영원한 생명 때문이다. 성서와 그리스도교가 관심을 갖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물론 구약에서 사후(死後) 생명에 대해 희망을 보이는 것은 상당히 후기 시대의 일이다. 구약성서의 관점에서 생명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었다. 그런데 구약성서의 초기 사상에 의하면, 생명은 비록 하느님의 선물이긴 하지만 철저히 지상적이고 현세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생명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끝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장수(長壽)를 희망했다. 장수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특별한 축복으로 간주되었다. 후기에 가서 점차적으로 죽음 넘어선 생명을 희망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죽음이 죄의 벌(罰)로 이해되기에, 속죄로 말미암아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간직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도 우리는 믿습니다. 이미 죽은 당신의 백성이 다시 살 것입니다. 그 시체들이 다시 일어나고 땅 속에 누워 있는 자들이 깨어나 기뻐 뛸 것입니다. 땅은 반짝이는 이슬에 흠뻑 젖어, 죽은 넋들이 다시 솟아나게 할 것입니다”(이사 16,19). 그래서 죄인과 달리, 의로운 사람은 죽었지만 명성(名聲)이나 추모(追慕) 속에서 계속 살아 있다는 믿음이나 또는 후손(後孫) 안에서 계속 살아 있다는 믿음(지혜 4,1 참조)을 통해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의인은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더라도 안식을 얻는다”(지혜 4,7). 이러한 희망과 확신은 저승(쉐올)이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표상(시편 88,6 참조)과는 달리 여전히 하느님의 손길이 미칠 수 있는 곳이라는 사상에 근거한다. “하느님은 나의 목숨을 구하여 죽음의 구렁에서 건져 주시리라”(시편 49,15). 죽음 후에도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 속에 계속 살고 있다는 확신을 드러낸다. “미련한 자들의 눈에는 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재앙으로 생각될 것이며,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이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의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지혜 3,2-3). 하느님의 친교는 죽음 속에서도 끝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점차 강하게 드러낸다. “이 몸과 마음이 사그라져도 내 마음의 반석, 나의 몫은 언제나 하느님”(시편 73,26). ‘몫’이란 야훼와의 관계에서 생활의 토대와 생계(生計)라는 보편적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 자신을 생계로 삼은 사람에게는 그의 생명이 죽음에 이르러서도 끝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참조: 한스 발터 볼프, 『舊約聖書의 人間學』, 196쪽.
묵시문학(黙示文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은 자들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다. “티끌로 돌아갔던 대중이 잠에서 깨어나 영원히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모욕과 수치를 받을 사람도 있으리라”(다니 12,2). 예언자 이사야도 하느님의 약속 안에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강력하게 표명하고 있다. “죽음을 영원히 없애버리시리라. 야훼, 나의 주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벗겨 주시리라. 이것은 야훼께서 하신 약속이다”(이사 25,8). 구약의 이스라엘 신앙은 현세 생명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종교의 모습을 갖추었다.


2. 신약성서의 생명 이해

신약성서도 생명이란 뜻으로 두 가지 그리스어를 가지고 있다. 프쉬케(ψυχη) 와 조에(ζωη)이다. 또 다른 단어 비오스(βιοs)가 있지만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프쉬케’는 목숨, 즉 지상적 생명을 뜻하고, ‘조에’는 지상적 생명을 뜻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내세에 구원의 선물로 주어질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지시하는 데 사용되었다. 참조: 김영남, “그리스도교의 생명 이해”, 75쪽: 공관복음에서는 ‘조에’라는 단어는 자주 쓰이지 않는다(마르코 복음에 4번, 마태오 복음에 7번, 루가 복음에 5번이다). 그러나 루가 복음 두 곳 즉,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조에)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12,15), “아브라함은 ‘애야, 너는 살아 있을(조에)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16,25)에서만 자연적인 생명을 지시할 뿐 거의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신약성서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복음서, 사도행전, 그리고 바오로 서간을 비롯한 서간문들이다. 여기서는 성격이 크게 다른 공관복음과 요한계 문헌, 그리고 사도 바울로 서간으로 구분하여 다룬다.  

2.1. 공관복음의 생명 이해
공관복음은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해준다.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또는 하늘나라)’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의 중심 주제가 되고 있다. Cf. J. Jeremias, Teologia del Nuovo Testamento, vol. 1, Brescia, 1976, pp. 43-47; R. Schnackenburg, Signoria e Regno di Dio, Bologna, 1971, p. 77; P. Hunermann, art. "Regno di Dio", in Sacramentum Mundi, vol. 6. Brescia, 1974-1977, p. 756: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100여번 언급하고 있다. 특히 공관복음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예컨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마르 1,15; 11,10; 마태 3,2; 4,17; 10,7; 12, 28; 루가 10,9.11. 12,20;, 17,20; 19,12; 21,31).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마태 6,10; 11,2). ‘하느님 나라는 신비이다’(마르 4,11; 마태 12,28; 13,11; 루가 8,10; 11,20). ‘하느님 나라는 구원의 시기에 있을 잔치이다’(마르 14,25; 마태 8,11; 루가 22,10-19).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의 것이다’(마르 10,14; 23, 35).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5,3; 루가 12,32).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긴급하다’(마르 1,15; 9,1; 마태 11,12; 루가 10,11). 하느님 나라는 인간이 제일 먼저 추구해야하는 것이다‘(마태 6,33; 19,12; 루가 9,62).
무엇보다 예수의 사명으로 이해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4,23;9,35; 루가 8,1; 마르 1,15 참조).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사명이었을 뿐 아니라 제자들의 파견사명이기도 하였다.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가 그들에게 다가왔다고 전하여라”(루가 10,9). 제자들뿐만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청중들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추구해야할 목표였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걱정하지 말아라. [...]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 나머지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덤으로 주실 것이다”(마태 6,25-34). 이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구원, 즉 영원한 생명과 직결된다. 영원한 생명으로서 하느님 나라를 잃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을 얻는 것도 소용없게 만든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루가 9,25).
그렇지만 예수는 현세의 생명(프쉬케)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았다. 아니다. 오히려 영원한 생명 때문에 현세 생명을 매우 존중하였다. 예수가 가장 많이 행한 일이 있다면, 바로 병자들을 치유한 일이다. 병자 치유란 바로 생명을 구하는 일이다.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것이 악마의 유혹이라는 것을 인식하였지만(마태 4,3-4),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다(마태 14,13-21). 인간의 생명 때문이다. 예수는 ‘생명(프쉬케)을 구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고, 어떤 제도나 율법에 대해서도 당당히 맞섰다. 당시 가장 중요했던 율법을 거스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럴 때에 그 양을 끌어내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마태 12,12). ‘생명은 안식일보다 더 소중하다.’ ‘인간생명은 양의 생명보다 훨씬 귀하다.’ 이것은 예수의 일관된 소신이었다.
그의 삶 전체가 인간 사랑으로 일관하셨던 예수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이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예수의 인간 이해가 인간 사랑과 인간의 소중함의 바탕이 되고 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표현은 구약의 ‘하느님 모상’이라는 표현을 더욱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드러내준다. 예수는 인간이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이며, 하느님이 보시기에 참 좋게 창조된 존재임을 전제하였다(마태 19,4-7 참조). 예수에 의하면, 인간이면 누구나 예외 없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인간 이해가 일차적이다. 하느님이 인간의 아버지이시라는 데 옳은 사람, 옳지 못한 사람,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의 구별도 없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없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또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 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하고 대답하셨다”(마태 19,4-6). 오히려 당시 대접받지 못한 여성들에게 극히 이례적인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였다(루가 7,13-15; 36-50; 8,43-48 참조). 어린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받아들이셨다(마태 11,26; 18,1-5; 마르 10,13-16; 루가 8, 42.49-56; 9,37-42). 병자나 소외된 인간일수록, ‘병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마르 2,17) 자신은 그들을 위해 필요한 자로 처신하셨다.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은 간과될 수 없음을 강하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어라”(마태 18,10). 따라서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라도 악에로 인도하는 잘못은 엄청나고, 그 책임을 모면할 수 없다는 점도 역설하셨다. “나를 믿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사람을 죄짓게 하는 이 세상은 참으로 불행하다”(마태 18,6-7). 반대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베푼 선행은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한 상급으로서 하느님 나라가 약속된다’(마태 25,34-40 참조). 예수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머리카락가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실 만큼 귀한 하느님의 자녀이다(마태 10,30 참조).
여기서 생명이 경시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 있다. 예수가 지적한 ‘보잘것없는 사람’이란 과연 누구를 지시하는 것일까? 가장 무시하고 싶은 사람일 것이다. 사람으로 취급하기 꺼려하는 존재들일 수 있다. 오늘날 인간으로 규정하고 싶지 않은 존재들일 수도 있다. 낙태시키고 싶은 태아(胎兒), 실험을 위하여 인간으로 규정하고 싶지 않은 배아(胚芽)일 수도 있다. 오늘날 생명을 다루는 과학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언제부터 인간이냐는 물음이다. 물론 교회 교도권은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하나의 생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조: 교황 바오로 2세, 『생명의 복음』, 60항: “어떤 이들은 잉태으 결과를, 적어도 일정한 날수를 지나기까지 아직도 인격적인 인간의 생명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낙태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난자가 수정되는 그 순간부터 아버지의 생명도 아니고 어머니의 생명도 아닌 한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생명은 스스로 성장하는 새로운 인간 존재의 생명입니다. 그 존재가 기왕에 인간이 아니라면 결코 인간으로 자라날 수 없을 것입니다”.
최근 생명 복제 기술의 엄청난 발전과 의학적 유용성 때문에 수정 이후 14일 이내의 수정란 연구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거론되고 있다. 참조: 김인경, “의학적 측면에서 보는 생명 복제의 현실과 인류의 미래”(2000년 대희년 맞이 세미나 『인간 복제시대와 그 윤리적 책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가정 사목위원회 주최, 1999, 9, 19), 『司牧』, 제 250호(1999년 11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34쪽. “국내에서도 유전 공학 학자들은 ‘인간 복제’라는 목적으로 시행되는 모든 실험은 금지되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21세기에는 생명 복제 기술이 엄청난 의학적 유용성을 지니고 있기에 체세포 핵 이식 난자가 체외에 존재하는 한 인간 복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체세포 핵 이식된 난자의 자궁 내 착상 단계를 엄격히 규제하면서, 수정 후 14일 이내 수정란의 연구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다”.
그렇지만 생명의 시작과 끝에 관한 규정이 오늘날처럼, 의학자들이나 생물학자들이 모여서 단순히 자신들의 연구 목적이나, 실험의 유용성 때문에 민주주의 다수결(多數決)의 원칙에 의해서 투표(投票)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 교도권은 인간 생명이 생겨나는 첫 순간에 인격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거듭 천명한다. “인간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한 인격으로서 인간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 순간부터 그가 한 인격체로서 지닌 권리를 인정해야 하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무고한 인간 존재가 지닌 생명에 대해 침해할 수 없는 권리입니다”. 신앙교리성, “人間生命의 起源과 出産의 尊嚴性에 관한 訓令”,(1987. 2. 21), 孟光鎬 譯, 『司牧』, 112호(1987년 7월), 125쪽.
교회의 문헌들은 성서가 생명의 그 시점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모든 인간 생명은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느님께 속한 신성 불가침의 존재임을 드러내는 성서적 표현을 만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예레 1,5; 시편 71,6; 이사 46,3; 루가 1,41 참조).

2.2. 요한 복음의 생명 이해
요한 복음과 요한계 문헌은 ‘생명’이란 단어를 어느 성서보다 많이 사용하고 있다. 공관복음의 ‘하느님 나라’를 요한 복음은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의 개념으로 표현한다. 즉 공관복음에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요한 복음에서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 또는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과 같은 뜻이 되고 있다. 사람이 하느님 나라로부터 기대하는 것을 총괄하는 구원 내용이 요한 복음에는 영원한 생명으로 표현되고 있는 셈이다. 요한 복음은 자연적 생명(프쉬케)과 신적 생명(조에)을 일관성 있게 구별하고 있다. ‘영원한’(αιωνιοs)란 수식어는 항상 신적 생명(조에)에만 사용되고 있다. 또한 요한 복음의 특징은 이 신적 생명(조에)은 공관복음에서처럼 내세에서만 얻게되는 것이 아니라 참조: 김영남, “그리스도교의 생명 이해”, 81쪽: 공관복음에서는 영원한 생명은 미래적인 것으로 표현된다. “현세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르 10,30; 루가 18,30 참조).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마르 9,43).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마르 10,17: 루가 18,18 참조).  
, 믿는 사람들에게 이미 주어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요한 복음의 집필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모든 인간의 생명자체임을 알려주고자 한다. 영원한 생명은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 생명의 빛이요(8,12), 생명의 빵이요(6,36), 생명자체이시다(11,25; 14,6). 무엇보다 예수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1,14). ‘말씀(λογοs)’은 그리스 철학적 개념을 빌린 것이지만, 구약의 ‘지혜’ 개념의 번역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의 잠언에 세상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존재하였고, 하느님과 함께 한 존재로서 지혜가 있었다(8,22-23). 이러한 지혜의 개념을 그리스 문화권 안에서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리스 철학과 종교에서 최고신과 인간 사이에서 창조와 구원의 중재자로 이해되고 있던 ‘로고스’ 개념을 빌린 것이다. 말하자면 하느님과 함께 하셨던 분,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는 표현이다. 이를 두고 그리스도 신학은 ‘강생’ 또는 ‘육화’라고 말한다. 이 육화 사건은 인간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확인 시켜준다. 즉 하느님이 사람이 되실 만큼 하느님에게서 인간이 긍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으로부터 긍정된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필연적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신앙의 결단을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사되는 것이다. 마치 포도나무와 그 가지와 같다(15,1-10). 이와 같은 밀접한 친교는 신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모든 인간관계의 바탕이 신뢰이듯이, 믿음이란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과의 친교에 있어서도 근본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을지라도 살 것이며, 살면서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11,25-26).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은 죽음을 넘어서 계속될 수 있는 생명을 뜻한다. 요한 복음에서는 참 생명이란 영원한 생명을 전제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끝장나는 현세적 생명은 의미가 없다. 영원한 생명 때문에 현세 생명은 소중하다. 부활을 통해서 얻게되는 영원한 생명은 지금 여기서(hic et nunc) 현세 생명을 누렸던 나로서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미래 생명은 바로 현세 생명 속에 싹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세 생명과 미래 생명의 깊은 연관성을 요한 복음은 미래 생명의 현재성으로 표현한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섰다”(5,24).

2.3. 사도 바오로 서간에 나타난 생명 이해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서도 ‘프쉬케’는 주로 지상적 생명을 말한다(참조: 필립2,30; 1데살 2,8; 2고린 12,15). 때로는 ‘조에’가 현세적 생명을 지시할 때가 있지만(참조: 필립 1,20),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경우 ‘조에’는 하느님께서 선사하시고 하느님의 성령을 통하여 얻게되는 영원한 생명을 지시한다. 참조: 김영남, “그리스도교의 생명 이해”, 77쪽.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표는 영원한 생명이다. “이제는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여러분은 거룩한 사람이 되었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누리가 되었습니다. 죄의 댓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을 우리 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로마 6,22-23). 로마 2,7; 5,21; 갈라 6,8에서도 영원한 생명이 목표로 겨냥되고 있다. 영원한 생명에 관한 성서의 말씀은 상당히 많다. 몇 가지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꾸준히 선을 행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로마 2,7). “죄는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다 주었지만 은총은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로마 5,21). “자기 육체에 심는 사람은 육체에게서 멸망을 거두겠지만 성령에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둡니다”(갈라 6,8).
바오로 신학에서 영원한 생명이 최종목표이지만, 바오로가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최종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현재의 삶의 방식이다. 바오로의 신학에서 영원한 생명은 의화(義化)의 결과이다(로마 5,17-18.21; 6.22). 의화란 죄의 용서이다. 죄(罪)란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일이다. 즉 하느님과의 친교 단절(親交 斷切)이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가로막는 장애물, 즉 영원한 죽음이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은 한편으로 하느님의 은총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죄의 용서가 베풀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오로의 사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은 그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올바른 행위로 모든 사람이 무죄한 판결을 받고 길이 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 그래서 죄는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다 주었지만 은총은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로마 5, 18-21). 그래서 바오로는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21)라고 고백한다. 예수의 죽음을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대리 속죄의 죽음으로 이해하는 바오로의 해석은 1고린 15,3-5의 고백 정식에 뚜렷이 나타난다. “[...]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 [...]”.
이러한 이해는 예수의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현양(顯揚)을 의미한다(에페 1,20; 히브 1,3.13). 현양이란 하느님으로서의 위엄을 띠고 권좌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현양되신 분으로서 하느님의 권능과 그 영광의 한 몫을 나누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일체의 실재의 미래가 예수와 함께 이미 시작되었고, 그분에게서 결정적으로 향방이 정해졌을 뿐만 아니라, 바로 예수의 인격과 그 운명이 바로 우리의 미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부활로 말미암아 세상의 구원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범행들 때문에 넘겨지셨고, 우리의 의화를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로마 4,25).
바오로는 이처럼 부활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구원론적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한 죽음’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로마 8,3; 갈라 3,13 참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으로부터 첫 번째로 부활하신 분이 되신다.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습니다”(골로 1,18). 예수의 첫 번째 부활은 우리들의 두 번째, 세 번째 부활로 이어지는 시작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영원한 생명이란 바로 예수의 부활에 근거를 두고 있는 셈이다.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셨을 리가 없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1고린 15,13-19).
바오로는 부활을 통한 영원한 생명에 근거해서 인간 생명을 존중한다. 영원한 생명에 초대 받는 데는 더 이상 유다인이나, 그리스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여 여자 아무런 차별이 없다.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만민의 주님이 되시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찾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리십니다”(로마 10,12).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데에는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갈라 3,28). 그는 실제로 당시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위해서 그의 주인이었던 필레몬에게 더 이상 종으로서가 아니라 형제처럼 대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필레 1,8-20 참조). 영원한 생명을 위한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서 모두가 한 몸이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1고린 12, 13-27).
바오로에게서 인간 생명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관심의 대상이지만, 그렇다고 현세 생명이나 또 인간 이외의 생명이 무시되고 있지 않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19-24). 에른스트 케제만(E. Kaesemann)은 바오로에게 자연은 극히 사소한 역할 밖에는 하지 못하기 때문에 ‘피조물(크티시스 κτισιs)’을 ‘이성 없는 피조물’ 혹은 오늘날의 ‘자연’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외의 피조물을 지시한다고 보았다. E. Kaesemann, 『로마서』, 國際聖書 註釋, 34卷, 韓國神學硏究所, 1982, 380쪽.
 사도 바오로가 오늘날의 생태주의자들의 입장에서 피조물을 의도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에게는 여전히 다른 피조물에 대한 관심을 읽어낼 수 있다. ‘하늘과 땅의 만물’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 시켜 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골로 1,20). “때가 차면 이 계획(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시켜 이루시려고 미리 세워 놓으셨던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것입니다”(에페 1,10). 그러나 일찍이 교부 오리게네스는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말씀을 근거로 ‘만물회복이론’(αποκαταστασιs)을 내세웠다. 말하자면 언젠가는 모든 것이, 비록 악마까지도 속죄의 기간을 지내고, 하느님과의 친교를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지옥의 가능성의 부정적 견해 때문에 그의 견해를 거부하였다.


3. 생명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과거 생명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십계명, 특히 ‘살인하지 말라’는 제5계를 토대로 생명을 존중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과거는 그만큼 사회가 단순했다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에 와서 생명의 문제는 복잡다단해졌다. 낙태, 안락사, 생명복제, 생태계 파괴 등의 ‘죽음의 문화’가 사회적이고 보편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될 만큼 심각해졌다. 이러한 현실에 대처하여 교회는 문헌을 통해 생명 윤리의 지침을 제시해야 했다.
현대 사회에 관심을 본격적으로 보인 것이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새로운 사태(노동헌장)』(Rerum novarum, 1891년)이다.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백주년』(Centesimus Annus, 1991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회 회칙이 발표되었다. 교회의 주요 사회 회칙은 다음과 같다.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1891년), 비오 11세의 『사십주년』(1931년), 『하느님이신 구세주』(1937년), 요한 23세의 『어머니요 스승』(1961년), 『지상의 평화』(1963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1965년), 바오로 6세의 『민족들의 발전』(1967년), 『팔십주년』(1971년), 세계주교대위원회의 『세계정의』(1971년), 바오로 6세의 교황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1975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노동하는 인간』(1981년), 신앙교리성의 훈령 『자유의 전갈』(1984년), 『자유의 자각』(1986년),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사회적 관심』(1987년), 『백주년』(1991년) 등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 회칙 속에서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집중적으로 생명에 관심을 보인 것은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인류』(Humani Generis, 1950년)이다. 이후 교황 바오로 6세의 『인간 생명』(Humana vitae, 1968년),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인공유산 반대 선언문』(1974년), 『인간생명의 기원과 출산의 존엄성에 관한 훈령』 (198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생명의 복음』(1995년), 교황청 생명학술원의 『인간 복제에 관한 성찰』(1997년), 『‘임종자들의 존엄’에 관한 최종 성명』(1999년), 교황청 가정평의회의 『배아 감수에 관한 선언』(2000년) 등 많은 문헌들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최근에 발표되었고, 모든 생명의 문제를 총괄하는 회칙 『생명의 복음』을 중심으로 교회의 가르침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이제 교회의 가르침은 단순히 생명 보존의 소극적 차원에서 생명의 질적 향상을 위한 적극적 차원에서 언급한다.

3.1. 그리스도교는 자신을 생명의 종교, 생명을 위한 종교로 이해한다.
생명의 복음은 예수께서 전파하신 메시지의 핵심이고, 따라서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핵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말씀이신(1요한 1,1) 예수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고 말씀하셨다. 그 외에도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 5,26)라고도 말씀하셨다. 즉 생명의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선포되고 충만하게 제시된다(29항 참조).
교회는 날마다 이 생명의 기쁜 소식을 모든 시대와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한다(1항). 복음의 핵심적 부분이며,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신,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우리는  생명의 백성이며, 생명을 위한 백성이다(78항). “하느님께서 당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생명의 복음을 주셨고, 바로 이 복음으로 우리가 변화되고 구원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의 백성입니다”(79항).

3.2. 그리스도교는 생명은 신성(神聖)하게 여긴다.
모든 생명의 주관자(主管者)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오직 하느님만이 생명의 주인(主人)이시기 때문이다(55항). “생명의 시작에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오직 하느님만이 그 주인이시다. 어느 누구도, 어떤 상황에서도, 무죄한 인간을 직접적으로 파괴할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53항). 참조: 신앙교리성, 『人間生命의 起源과 出産의 尊嚴性에 관한 訓令』, 맹광호 역, 『司牧』, 112호(1987년 7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24쪽;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4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6, 2258항.
따라서 인간 생명과 죽음은 하느님 손에, 그분의 권능에 달려 있다.  하느님은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어, 지하에 떨어뜨리기도 하시며 끌어올리기도 하시는 분”(1사무 2,6)이요, “죽이는 것도 나요 살리는 것도 나다”(신명 32, 39)라고 하시는 분이시다(39항).  그러므로 생명을 죽이는 일은 월권행위요, 하느님을 모독(冒瀆)하는 일이다. 제5계명을 거슬러 온갖 종류의 살인, 집단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 자체를 거역하는 모든 행위와 [...], 또 이와 비슷한 다른 모든 행위는 문명을 손상시키는 행위이며 불의를 자행하는 사람을 더럽히는 행위로서 창조주께 대한 극도의 모욕이다(3항).

3.2.1. 따라서 교회는 살인(殺人)을 단죄한다.
하느님은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을 처벌하셨다(7항). 살해당한 사람의 피는, 그 피가 흘렀던 땅으로부터 하느님께서 정의를 펼치실 것을 요구한다(창세 37,26; 이사 26,21; 에제 24,7-8 참조). “‘피는 곧 생명’(신명 12,23)이며, 생명, 특히 인간의 생명은 오직 하느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 생명을 공격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의미로 하느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입니다”(9항).

3.2.2. 교회는 낙태(落胎)를 단죄한다.
오늘날 더 큰 수용과 사랑과 보살핌을 요구하는 생명은 쓸모 없는 생명이라고 간주하거나, 또는 참을 수 없는 짐으로 생각하며 이런 저런 방식으로 그런 생명을 거부하는 ‘생명에 대한 음모’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며, 낙태는 분명 ‘살인하지 말아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직접적으로 침해는 악(惡)임을 분명히 한다(13항). “생명은 그 수태되는 순간부터 성심껏 보호되어야 한다. 낙태와 유아 살해는 가증할 죄악이다”(62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51항.
인간의 육체적 생명의 불가침성은 “수태 시에서부터 죽을 때까지” 참조: 신앙교리성, “人間生命의 起源과 出産의 尊嚴性에 관한 訓令”, 123쪽. 이 문헌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세계의학협회 제35차 총회 참가자들에게 하신 연설”을 인용하여 재확인한다.
이다.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닌, 한 새로운 사람의 생명이 시작된다. 그것은 그 자신의 성장을 가지는 한 새로운 사람의 생명인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면 결코 그것이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 현대 유전학은 이 자명한 불변의 원리를 확인해 준다. 이 생명체가 자라나서 충분히 독자적인 특징을 지닌 한 사람이 될 프로그램이, 수태되는 첫 순간부터 수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유전학은 증명해 주었다.” 신앙교리성, 『人間生命의 起源과 出産의 尊嚴性에 관한 訓令』, 125쪽.
따라서 생명은 수태되는 그 순간부터이므로 수태되는 그 순간부터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참조: 신앙교리성, 같은 문헌, 124-125쪽.


3.2.3. 교회는 안락사(安樂死)를 단죄한다.
“안락사란 죽음을 조절하여, 정해진 시간 이전으로 앞당기는 것이며, 자신의 생명이나 타인의 생명을 ‘편안하게’ 끝맺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논리적이고 인간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안락사를 잘 살펴보면 무의미하고 비인간적인 행위임을 알 수 있다”(64항). 오직 생산성이라는 기준 위에 조직되어 있는 죽음의 문화의 탓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희망이 없을 정도로 손상을 입은 생명은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본다(64항). 안락사는 ‘과도한 의학적 치료’를 그만두는 것과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 안락사는 하느님의 법에 대한 중대한 위반임을 확인한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고의적이고 윤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살해행위이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러한 행위에 자살이나 살인에 해당하는 악의가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65항). 자살은 언제나 살인이나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이 삶과 죽음에 대한 권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66항).  낙태와 안락사란, “인간이 지닌 침해할 수 없는 권리들이 엄숙하게 선포되고 생명의 가치가 공적으로 인정되는 순간에, 즉 탄생과 죽음의 순간에 부정되거나 짓밟히고 있는 것이다(18항).

3.2.4. 교회는 사형제도(死刑制度)를 반대한다.
“살인자조차도 인격적인 존엄성을 잃지 않는다. [...] 죄인을 죽이기보다는 바로잡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살인이 또 다른 살인행위를 통해서 처벌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9항). 따라서 사형은 처벌의 본질과 범위를 신중하게 평가하고 결정해야 하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즉 다른 방법으로서는 사회를 보호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범죄자를 사형에 처하는 극단까지 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56항).

3.3. 교회는 특히 인간 생명의 탁월성을 가르친다.
3.3.1.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실 만큼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지니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는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다. 사람을 긍정하셔서 사람이 되신(육화하신) 하느님의 사랑이다.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신”(요한 3,16)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인간 생명의 존엄성의 근거이다(2항). 그리스도의 피는 사랑의 위대함,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인간 생명의 가치가 얼마나 무한한 것인가 하는 것도 보여준다(25항).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며, 마치 우주의 절정과도 같고, 모든 피조물 중에 최상의 것인 듯한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입니다”(35항).

3.3.2.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을 누릴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 생명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며 그분의 충만한 사랑을 나누어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37항). 인간이 나누어 받고 있는 생명은 바로 하느님의 생명이다(51항).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은 생명이다.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바로 하느님의 생명이며 동시에 하느님 자녀들의 생명이다(38항). 영원한 생명, 충만한 생명이란 바로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자연적 소명이 지닌 숭고함은, 인간 생명이 현세적 측면 안에서까지도 위대함과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2항). 바로 이 때문에 생명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가장 숭고한 것이다. 생명의 존엄성은 그 출발도 하느님에게서 올뿐만 아니라 그 마지막 목적 즉,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친교를 맺기 위한 목표와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38항). 지상에서의 생명은 절대적 선은 아니다(47항). 또 궁극적인 실재가 아니라 ‘준궁극적’ 실재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생명은 여전히 우리에게 맡겨진 신성한 실재이다(2항). 하느님에게서 오는 인간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그분의 모상으로서 신성함을 지닌다(39항). ‘살인하지 말라’는 제5계명만이 아니라 십계명 모두가 인간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을 보이라는 요구이다(41항).

3.4. 생명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수정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을 지닌 존재의 모험이 시작된다(60항). “출생은 막는 것은 살인을 앞당기는 것이다. 출생 전이거나 후이거나 별로 차이가 없다. 하나의 사람이 될 태아는 이미 그 사람인 것이다”(61항). 성서는 잉태, 태중의 생명 형성, 출산,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과 창조주 하느님의 활동 사이의 관계 등에 대해서 존경심과 사랑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예레 1,5; 시편 22,10-11; 71,6; 139, 13-14; 루가 1,25 등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61항).

3.5 인간 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지향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탄생하셨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준궁극적(penultmate) 실재’ 인간 생명은 영원성 안에서 그 완전한 실현에 다다르게 된다. 각 개인의 현세적 생명이 지니고 있는 상대성을 드러내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초자연적인 부르심이다(2항). 이 지상 육체의 생명이 절대적 선이 아니기 때문에, 더 큰 선을 위해서 그 생명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을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예수의 희생적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47항).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마르 8,35).

3.6. 인간 생명은 다른 모든 생명의 중심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은 다른 살아 있는 피조물들에게 주신 생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피조물들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창조주를 알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조된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만물은 인간의 지배를 받도록 만들어진 것이다(34항).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며, 마치 우주의 절정과도 같고, 모든 피조물 중에 최상의 것인 듯한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이다(35항). 일찍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d'Aquino) 역시 영혼을 지닌 인간은 다른 혼을 지닌 생물보다 탁월함을 논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사상을 물려받아 생명이란 ‘스스로 움직이는 것’으로 규정하고 ‘모든 자연적 사물은 생명을 분유한다’고 보았다. 참조: 토마스 아퀴나스, 『神學大全』2, 정의채 역, 성바오로출판사, 1993, 205-206쪽.
“아리스토텔레스『자연학』제8권에서 ‘운동은 자연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마치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모든 자연적 사물은 운동을 분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자연적 사물은 생명을 분유(分有)한다”(『신학대전』, I, q. 18, a. 1). 토마스는  ‘운동이나 어떤 작업을 하기 위해 스스로 작용하는 것’을 생물(生物)로 정의한다. 따라서 스스로 작용하는 것들이 아닌 것들은 비유, 유사를 통해서만 생물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흐르는 물을 ‘산 물’(aquae vivae)라고 하고 정체되어 있는 물을 ‘죽은 물’(aquae mortuae)라고 말한다는 것이다(q. 18, a.1). 본래적 의미의 생명에 관해서, 생명을 한 작용으로 규정하고 작용에 따라 4 가지로 구분한다. 영양을 섭취하는 것, 감각하는 것, 장소를 따라 운동하는 것, 인식하는 것이다(q.18. a.2). 생물체의 원인이고 원리를 혼(魂)으로 보고, 생물이 다른 광물질과 같은 피조물과의 구별되는 특성을 ‘생혼’(生魂) 또는 ‘생장혼’(anima nutritiva)라고 말한다. 식물과 달리 감각하는 동물은 ‘감각혼’(anma sensitiva)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달리 제일 높은 등급의 인식 능력을 지닌 ‘영혼’(anima intellectiva)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I, q. 76. a.4). 토마스는 작용의 등급에서도 탁월한 존재임을 논증하고 있다.

3.7. 교회는 인간 이외의 생명과 자연을 소중하게 여긴다.
뒤늦게나마 교회는 생태계의 위기의식에 공감하고, 다른 생명과 자연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사회적 관심』(1988년)은 광범위하나마 환경문제를 다루고 있다. “개발의 윤리적 성격에서 자연세계를 구성하는 제반 사물들, 일찍이 희랍인들이 그것을 특징짓는 ‘질서’를 의미하면 ‘우주’(cosmos)라고 일컬은 그 세계를 구성하는 사물들에 대한 존중이 제외되어도 된다라는 말은 할 수 없다”(34항). 교황은 그의 첫 회칙 『인류의 구원자』(1979년)에서 자연환경 오염의 위협을 언급하면서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세 1,28)는 성서 말씀을 “인간이 현명하고 품위 있는 ‘주인’이자 ‘보호자’로서 자연과 통교하는 것이지 ‘착취자’나 ‘파괴자’로서 자연을 대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해석하였다(15항).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적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결론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생명윤리 기본법’ 시안에 관하여 ‘생명윤리자문위원회’와 생명 공학 관계자들 사이에서 공방이 한창이다. 참조: 2001년 7월 11일자 연합 뉴스 등 일간 신문.
동물 복제에 성공한 생명공학이 인간 복제에 대한 실험에 착수하고자 금지 법안을 마련하려는 윤리적 제동에 반발하고 있는 모습이다. 오늘날 인간 생명에 대한 새로운 위협이 감지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생명에 대한 음모’가 이루어지고 있는 요즈음의 상황을 ‘죽음의 문화’라고 지적하고 경고하고 있다(『생명의 복음』, 12항).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다.’ ‘인간은 존엄하다.’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생명의 종교라고 할 만큼 생명을 존중한다. 교회가 ‘인간 복제’를 반대하는 것은 바로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간 생명을 신성하게 여긴다. 인간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는 근거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창조 사상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인간이 되실 만큼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긍정되고 있다는 육화사상(肉化思想) 역시 인간 존엄성의 중요한 근거를 이룬다. 하느님의 육화(肉化)는 인간의 신화(神化)를 위한 것이다. 즉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대화 상대자’ 참조: 칼 라너,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 이봉우 역, 분도출판사, 왜관, 1994, 54-56쪽. K. Rahner는 인간을 ‘초월의 존재’로 보고, 하느님을 ‘인간 초월의 지향점’으로 간주한다. 라너는 인간을 하느님의 대화 상대자로서 하느님의 생명에 동참하는 존재임을 표현하였다.
로서 영원하신 하느님의 생명에 초대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으로부터 긍정된 존재요 사랑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초대받은 영원한 생명 때문에도 인간의 현세 생명은 소중하다. 이런 이유로 예수는 인간 생명을 구하는 일에 헌신하였으며, 마침내 자신의 목숨을 인간을 위해 바쳤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는 남녀노소, 장애자, 태아, 배아의 구별이 없다. 생명 자체이신 예수의 말씀은 준엄하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마태 18,6).
자연과 환경에 대해 보다 깊은 지식과 이해를 지니게 된 오늘날 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다른 생명, 즉 ‘보잘것없는 생명’으로 확대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이란 본디 하느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모든 피조물은 ‘보시기에 좋았다’(창세 1,10.12.18.21.25)라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피를 먹지 말라’(창세 9,4; 신명 12,23 참조)는 금령은 동물의 생명에 대한 보호조처이다. 예수는 당시 엄격한 안식일이라는 율법조차도 구덩이에 빠진 양을 구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셨다(마태 12,11 참조). 예수에게는 ‘하늘의 새나 들꽃조차도 하느님께서 돌보시는 존재들’이다(마태 6,26-31). 그렇지만 인간 이외의 생명과 인간 생명을 결코 동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먹이사슬의 구조 속에서 다른 생명을 죽이는 일이 불가피하다. 자연의 구조이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탐욕 때문에, 오락과 쾌감을 위해서 생명을 함부로 다룬 결과 초래된 오늘의 환경파괴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인류는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착취한 결과로 초래될 인간 생명의 위협을 감지하고 있다. 인간 생명을 위해서도 다른 생명은 소중하다. 생명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피는 곧 생명이다. 너희 생명인 피를 흘리게 하는 자에게 나는 앙갚음을 하리라”(창세 9,4)는 하느님의 준엄한 경고가 되살아난다.  

색인어 : 인간 생명, 영원한 생명, 인간 존엄성

=ABSTRACT=

           The view of Life in the catholic theology

Cho Kyu-Man
Department of Theology, The Catholic University of Korea

Christianity is a religion for Life. Because Jesus Christ, who is always heart of christianity, says "I came that they may have life, and have it abundantly"(Jn 10,10). In truth, the Gospel of life is at the heart of Jesus' Message.
According to the Old & New Testament, the catholic Church knows the value of life, first of all, the sacred value of human life which belongs only to God. She teaches human being has a dignity, because every person is created as the image of God by the Creator.  Furthermore, incarnation of the Son of God, in Jesus Christ, reveals to humanity the incomparable value of every human person, child of God, loved by God. It reveals that human life will be share the eternal life with God.
For this reason, the Church teaches the Commandment "You shall not kill". It means to show reverence and love for every person and the life of every person. Following this same logic, the Church prohibits abortion, euthanasia and rejects the death penalty. The Church sternly condemned abortion. Because human life is sacred from its very beginning it directly involves God's creative activity. The Second Vatican Council says "From the moment of its conception life must be guarded with the greatest care, while abortion and infanticide are unspeakable crimes"(Gaudium et Spes, 51). To euthanasia, must be distinguished from the decision to forego so-called "aggressive medical treatment", is to take control of death and bring it about before its time, "gently" ending one's own life or the life of others. The Church condemned too it as to be senseless and inhumane(cf. Evangelium Vitae, 64). The Church's tradition has always rejected suicide as a gravely evil choice. Furthermore she teaches God, who preferred the correction rather than the death of a sinner, did not desire that a homicide be punished by the exaction of another act of homicide(cf. Evangelium Vitae, 9).
Now-days we are confronted by a larger reality, which can be described as a veritable "culture of death". We need to recognize the value of life.
All christian believe that every life belongs to only God. And they believe the sacred value of human life, the human dignity for the eternal life. Christianity shows clearly his thought about the creation in "anthropocentrism". It is right for the human life and for the others' life. Il means that human being has responsibility to all creation of the world for life.

Key Words : human life, eternal life, human dignity

[한국생명윤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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