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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4(화)
여성의 몸, 생명, 여신  
현경(玄鏡)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원 교수)

나는 녹색지구의 아름다움,
별들 속의 하얀 달,
물의 신비.

나는 당신의 영혼을 부른다. 일어나라고
그리고 내게 오라고

왜냐하면 나는 자연의 영혼
내 영혼은 우주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나로부터 만물이 나왔고
나에게로 만물은 돌아온다.

나의 예배는 기뻐하는 가슴속에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랑과 기쁨의 행위가
다 나의 제례이기에

당신 안에 아름다움과 용기,
힘과 자비, 자존심과 겸허함,
기쁨과 경외심이 있기를

나를 찾아 헤매이는 당신, 알아든다.
당신의 찾아헤맴과 기다림 모두 소용없음을,
만일 당신이 그 신비를 알지 못한다면……

당신이 찾는 것을 당신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어디서도 그것을 찾지 못하리라.

나를 보라, 나는 늘 당신과 함께 있었다.
태초로부터.

그리고 나는 갈망의 끝에서
길들여지는 존재

-스타혹

1. 왜?

왜 생명운동과 여성주의인가?
왜 동아시아 문예부흥과 생명평화인가?
왜 “여성의 몸•생명•여신”인가?

이 질문들의 뒤에는 반생명, 반여성적 세상의 폭력 속에서 몸부림치며 절규하는 통곡소리가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은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극단까지 몰아가고 있다. 여기서 돈은 神이 되었다. 인간들의 “궁극적 관심”으로 상승한 돈은 “돈교”라는 신종교를 창시했다. 이제 세계의 시장은 돈교의 예배당이 되었고, IMF, World Bank, Gatt. 그리고 세상의 많은 지배적인 금융기관들과 그곳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돈교의 제사장, 선교사들이 되었다. 그들은 돈복음을 전한다.
“돈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누구든지 돈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돈이 너희를 자유케하리니 네 있는 것을 모두 팔아 이것을 사라.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너희에게 풍성한 삶을 주려는 것이다. 나의 복음은 다른 구름잡는 종교들의 가르침과 달리 현실적이고 확실하다. 거기다 섹시하기까지 하다. 당신이 찾던 모든 문제의 답이 여기에 있다. 먼저 돈을 구하라. 그러면 다른 모든 문제들이 풀릴 것이다.”

이 돈교에서는 철저히 인간의 “원리”를 믿는다. 그들은 설교한다. 인간은 이기적인 본성, 자기중심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웃사랑”, 웃기지 마라. 인간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한에서만 이웃사랑을 한다. 그러나 인간은 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자유를 의미한다. 무한 생산, 무한 소비, 무한 경쟁, 적자 생존이다. 하나님은 자유하시고 무한하시다. 그는 있는 자에게는 더욱 더 많은 축복을 내리시고 없는 자에게는 그의 지금있는 것 조차 뺏어가시는 분이다. 네 자신이 끝없이 풍요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다.

이 돈교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 종교이다. 이것을 믿는자들만 구원을 받고 이것을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히 가난이라는 저주를 받는다. 이 종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군사주의라는 십자군도 만들고 폭력도 불사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전(Holy War)이고 정당한 전쟁(Just War)이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한다. 무한 생산과 소비를 지키기 위해서는 “효율적”이지 않은 건 다 제거한다.

돈교의 중심에는 이기적, 폭력적, 효율적인 인간이 서있다. 아주 편협한 인간중심주의가 있다. 이 돈교를 믿지 않거나 여기에 끼지 못하는 제 3세계인, 유색인종, 여자와 어린이, 장애인, 원주민들 그리고 인간 아닌 다른 생명체들은 이 배타적인 돈교 복음의 희생자이자 저주받은 자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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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체들에게는 자기 조직력, 자생적 치유능력이 있다. 그들은 이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튀는 유전자”들이 된다. 그들은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고 외친다. 그들은 여성적•생명적•에코적인 삶을 꿈꾼다. 그리고 세계의 곳곳에서 가부장적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피라미드 구조에 작은 구멍을 내는 개미처럼 일한다. 그들은 또한 거미처럼 네트워킹을 한다. 개미와 거미들이 만드는 진정한 지구화를 이루어간다. 여기서 생명운동과 여성운동 그리고 평화운동이 자라난다.

그러면
왜 이 생명•평화 여성운동을 동아시아 문예부흥이라는 기운 속에서 보려하는가? 그것은 시대의 예감 속에 떠오르는 “오래된 미래”의 도래때문이다. 문예부흥, 르네상스는 고대의 재발견이다. Renaissance 문자 그대로 Re-Birth, 재탄생이다. 여기서 우리가 상정하는 고대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경제적 식민주의, 문화 제국주의, 가부장적 자본주의에 물들기 전 온전한 몸, 일, 삶과 공동체가 축하되던 젖과 꿀이 흐르던 마고 어머니의 시대이다. 이 시대에 대한 위험한 기억들이 우리의 무의식속에서,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종류의 생명운동 속에서 다시 떠오르고 있다. 이것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떠올려야 하는 “억압된 앎의 반란”(Insurrection of Subjugated Knowledge)이다. 어려운 시대에 태어났던 한국의 신종교들은 지배, 폭력, 분열, 갈등, 상극의 시대였던 양의 시대에서 협동, 모심, 살림, 조화, 상생이 꽃 피우는 음의 시대로의 전환을 “후천개벽”이라는 메타포로 예언했었다. 이러한 예언은 서양에서도 있었다. 미국의 소종파 운동이었던 셰이커(Shakers)들은 처음의 그리스도는 남성으로 왔으나 예수 재림은 이제 여성 그리스도로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첫번째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간과 세상을 시작만 했지 완성하지는 못했는데 여성의 몸을 입고 오는 두 번째 그리스도는 새 인간과 새 세상을 완성 시킬 것이라는 말이다.

동양의 고대에 대한 향수는 이제 동양인 만의 것이 아니다. 서양의 학문세계에 몸담고 있는 내게는 서양의 기운이 동양으로, 여성으로, 에코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서양 학문의 막다른 골목에서 동양적인 것이 서양의 이원론적 분열을 극복해 주기를, 여성적인 것이 지배와 폭력의 문화를 상생과 평화의 문화로 바꾸어 주기를, 또 생태적 감수성이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지구와 우주를 향해 교감하는 신 인간을 탄생시켜 주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 같다.

당연한 역사적 기운의 흐름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절대 빠지면 안되는 함정을 조심하자.
“동양으로”가, “동아시가”가 문화 본질주의(Cultural Essentialism)에 근거한 동양 중심주의, 동양 우월주의, 남근주의에 근거한 단국주의, 편협한 민족주의로 빠지면 안된다. 이것은 또다른 “동양주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다. 동양은, 동아시아는 변하지 않는 본질이 아니라 지금도 기억과 비전 속에서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Process)이다. 우주 속의 작은 푸른 별, 지구 위에 사는 우리들은 이제 “지구인”으로 사고해야 한다. 동양과 서양은 이제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같이 이 죽어가는 지구에서 살아남기를 해야하는 가까운 이웃들이다. 동양과 서양의 지혜를 함께 모으고 그 양자를 포월하여 가장 포괄적인 세계문화를 만들어가야한다.

“여성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이 “여성성”(Femininity)인가? 그건 이제 “모든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남성중심의 판타지를 넘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성적 본질주의도 문화적 본질주의만큼 위험하다. 여성성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영원한 본질이 아니다. 그것도 역시, 사회 문화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과정이다. 가부장적 지배와 억압속에서 살아 남은 여성들의 역사적인 경험과 지혜의 축적이 현존하는 여성성을 만들어내었다. 돌보고 보살피고, 명확한 담보다는 관계성이 더 중요하고, 정면충돌해 싸우기 보다는 돌려가며 타협안을 찾으려하는 친평화적 자세들…… 그런 특성들이 현존하는 역사적 잠정적 여성성이다. 거의 세계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이 여성성은 마치 여성의 본질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본질주의를 믿지 않으나 다가오는 음의 문화, 여성적인 문명을 맞이하는 동력을 위해 “여성성”을 “전략적인 본질주의”(Strategic Essentialism)로 쓰려고 한다.

“Eco”로, 생태로, 자연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답을 얻자는 운동도 비역사적인 자연 낭만주의의 함정에 빠지면 안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은 항상 사회적으로 구성(Socially Constructed)된 자연이다. Eco로 돌아가자는 이 운동은 사회정의의 문제와 함께가는 생태정의(Eco-Justice)의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환경파괴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 같은 피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다. 환경파괴로 더욱 큰 상처를 받는 제 3세계, 유색인종, 원주민들,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향한 정의가 이루어질 때 Eco로 돌아가는 큰 뜻이 살아나게 된다.

2. 어떻게 말을 걸까?

뉴욕에 살고 있고, 서양의 학문 세계에서 지식 노동자로 월급을 받고 있는 내 정규 교육 속에서 거의 서양 학문을 공부했다. 민중 신학, 해방 신학, 여성 신학을 주로 공부한 나의 머리 속은 거의 서양식 사고로 채워져있다. 나에게 있어서의 동양의 기억은 몸과 무의식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내겐 동아시아의 문예부흥이라는 맥락에 서서 “여성의 몸•생명, 여신”이라는 내게 주어진 주제에 대해 학문적 강연을 하는 것이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동양에 대한, 동아시아에 대한 학문적인 준비가 아직 잘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선 고백적 스토리텔링(Confessional Storytelling)을 하려한다. 이건 또 여성주의 말하기, 글쓰기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 자신이 한 사람의 존재를 다 건 영혼의 사토가 없는 말과 이론은 듣고 싶지 않다. 추상성과 방법론의 폭력에 매여 알아듣기 힘든 전문 용어로 나열하는 말들이 듣기 싫다. 구체적인 현실, 일상의 거룩함과 투쟁 속에서 체화된 자기말들이 듣고 싶다. 스토리는 우리들에게 세계관을 제공한다. 한 스토리에서 다른 스토리에로의 전이는 한 세계에서 다른 대안적인 세계로의 전이를 의미한다.

3. 여성의 몸

그 때였다. 갑자기 내 몸의 깊은 곳에서부터 그 특유의 떨림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 그녀의 냄새, 그녀에게서는 오대산 호랑이 냄새가 난다. 그 냄새는 아마존의 젖은 원시림 냄새, 태평양의 바다 냄새와 섞여 나의 전 존재를 뒤흔든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저만치서 그녀가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햇볕에 검게타서 전보다 더욱 반짝거렸고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까르륵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내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정신없이 그녀를 쫓아갔다. 너무 빨리 달리는 그녀를 헉헉거리며 따라 잡았다. 그녀 옆에서 같이 달리며 물었다.
“당신이지?”
“보면 몰라?”
“확인하고 싶었어.”
“확인?”

그녀의 웃음소리가 더 커진다.
“내 몸을 봐. 공룡과 시조새, 아메바와 플랑크톤, 화산과 바다, 바위와 폭포, 바람과 천둥번개, 별과 달, 몇억년전의 조상들과 몇억년 후의 아이들이 보이지 않아? 그들이 다 내 몸 속에 있잖아.”

“Touch me!”
당신이 날 만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풀려지리란 걸 알고 있어. 이 외로움, 이 목마름, 이 괴로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나를 다시 온전하게 해줘.”
“너를 다시 온전하게 해 줄 수 있는 이는 너 자신 뿐이야.”
“나는 당신이 필요해. 나 혼자 노력했지만 되지 않았어.”
“그랬겠지. 왜냐하면 너는 너 자신을 믿지 않으니까. 큰 비밀을 알려줄까? 너는 이미 온전해, 존재의 밑바닥에서부터 너 자신을 믿어봐.”

나는 화가 났다. 그녀는 항상 이런 식으로 물러난다. 내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면 그녀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그녀, 그년ㄴ 무지개처럼 황홀하게 나타났다가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녀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나는 숨이 찼다. 그러나 그녀를 또 다시 놓쳐버리지 않기 위해 나는 열심히 뛰었다.

“네 안엔 그 누구에 의해서도 부서지지 않는 빛나는 아름다움이 있어. 네가 그 빛나는 아름다움을 네 안에서 꺼낼 수 있다면 그 빛나는 아름다움이 너를 구원할거야. 그러나 네가 만약 그 빛나는 아름다움을 네 안에서 꺼내지 못한다면 그 태어나지 못한 빛나는 아름다움이 너를 파괴시키고 말겠지. 그 빛나는 아름다움 밖에는 아무것도 너를 도와줄 수 없어.”

그리고 그녀는 더욱 속력을 내어 뛰기 시작했다. 긴 머리카락이 햇빛이 반사되면서 주홍빛으로 반짝였다. 땀으로 젖은 검은 몸은 열을 뿜으며 보랏빛으로 변했다. 주변에 쏟아져 내리는 금빛의 입자들 속에서 그녀는 포효하는 사자처럼 소리쳤다.

“결국은 그 아름다움이 우리 모두를 구원할거야.”

그녀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나는 헉헉대며 쫓아가면서 그녀에게 소리쳤다.
“제발 함께 가게 해줘. 나를 데리고 가줘.”
“안돼. 아직은…… 아직 너는 빛의 속도로 달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잖아. 그리고 너는 아직 이 세상에 온 이유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 함께 갈 수 없어.”

그녀는 빛의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황금빛 입자들이 날아다니며 투명한 글자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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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라고?
무엇을 어디까지 기억할 것인가?
세계화와 전쟁,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포르노그래피적 관음문화, 죽어가는 지구의 신음속에서 여성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들의 몸이 거룩한 여신의 몸이고 생명과 살림을 창조해 나갈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있는 몸이고 삶의 모든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고 축하할 수 있는 축제적 몸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최초의 빅뱅 그 이전부터 있었던 몸이다. 우리의 몸 속에서는 창조를 가능하게했던 우주의 사랑, 도, 창조력이 있고, 빅뱅의 불꽃, 별의 폭발이 있고, 지구 속에 살아왔던 또 앞으로 나타날 모든 생명체들의 몸이 있고, 한울님의 기운이 여신의 숨이 흐르고 있다. 우리의 몸은 우주의 자궁과 연결되어 오늘도 끊임없이 생명을, 상상력을, 우리 살멩 필요한 모든 것들을 생산해 내고 있고 우리의 사랑과 노동을 통해 살림살이를 해낸다. 우리의 몸은 또한 달과 해의 주기, 밀물과 썰물의 춤, 천둥과 번개의 소리, 꽃의 개화와 나비의 날개짓과 함께 떨리고 열리고 울리는 “풍류”적인 몸이다. 우리는 우리 몸 속에 즐거움의 감이 흐르고 있고 우리의 성과 감성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창조성을 일깨우고 우리로 하여금 아이를 작품을 혁명을 만들어 갈 기운을 일으켜 준다는 걸 안다.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의 진실, 떨림과 연결되어 있는 이 “Power of Erotic”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축하하게 한다.

우리는 이 거룩하고 창조적이고 축제적인 몸을 의식적으로 온 정성을 다해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5천년의 가부장적 역사와 근대의 과학 그리고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제도와 문화들은 매일 우리의 몸은 별 거 아니고, 더럽고 과학 연구의 자료이고 시장에다 내다 팔 고깃덩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많은 가부장적 종교들은 여성들의 몸은 부정하고 유혹과 죄의 온상이라 했고 과학적 계몽의 문화는 여성과 자연을 혼돈, 무질서 마녀적 마술과 연결시켰다. 정치와 경제제도는 여성을 “마지막 식민지”로 만들었고 특히 여성의 자궁은 세계 전쟁의 마지막 전쟁터가 되었다. 여성들의 몸은 푸줏간에 걸려있는 죽은 동물들처럼 포르노그래피적 남성들의 생산할 수 없는 죽은 욕망들을 위해 전시되고 여성의 몸의 부분들은 의학과 과학의 발전을 위해 짤려나가고 팔려나가고 조작되고 죽여진다. 자연과 물질과 성과 욕망과 죄와 땅과 연결되면서 가부장적 남성문화의 그늘, 그림자, 식민지, 전쟁터, 지옥으로 전락된 여성의 몸.
그 땅 밑 세계의 어두운 마녀들의 몸이 무덤으로부터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부활과 반란과 회귀는 우리에게 새로운 우주의 계시, 문명의 예감을 가져다주낟. 사실은 그 마녀들이 “현묘한 암컷”들이었고 마고 여신의 딸들이고 가이아으 ㅣ몸이고 살림의 지혜의 담지자라는 것. 이제 빛으로만 초월으로만 달려갔던 “En-light-en-ment”의 중독증에서 벗어나 그 어두움에서 그늘에서 땅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혜, “En-dark-en-ent”를 배우라는 것. 가부장적 문화의 제도와 폭력 속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의 역사적이고 구체적이고 체화된 일상의 지혜를 거울 삼아 우리가 지금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비춰보라는 것. 그 큰 검은 거울 앞에 서서 물어보라는 것. “거울아 거울아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지구 위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겠니?”

여성의 몸은 바로 그 큰 검은 거울이다. 특히 제 3세계 유색인종 민중 여성의 몸은 더 큰 거울이다. 그 큰 검은 거울 앞에 영혼과 육체의 옷을 다 벗고 섰을 때 큰 하늘이 열릴 것이다. 이것이 곧 후천개벽이다.

4. 여신

그러면 왜 여신인가?

“못살겠다. 바꿔보자.”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다. 5천년전 가부장적 남성신의 독재는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우리 모두를 극도의 양의 문화, 남근 문화 속에서 병들게 했다. 그 남성신은 폭력적인 전사였고 해결사였고 지배와 통제와 억압으로 이 세상을 꾸려가려고 했다. 이 남성신 지배문화의 가장 큰 부작용은 “神이 남자니까 남자가 神이 되었다”라는 것이다.

남성신이 자리잡기 위해 그 전에 있던 여신들을 납치하고 침묵시키고 살해했다. 이 남성신은 그의 큰 페니스를 가지고 지배하고 강간할 수는 있었지만 생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지배와 통제를 통한 쾌락은 알았지만 진정한 즐거움은 알지 못했다. 홀로코스트와 광주, 수많은 전쟁과 지구 파괴를 거치며 이 전지전능하다는 남성신의 능력은 의심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를 떠났나? 아니면 더 이상 힘이 없나? 죽었나? 우리의 아픔과 슬픔에 같이 가슴이 터지고 같이 울고 우리를 보살피고 돌보는 모성적 神에 대한 그리움은 양의 역사의 극단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우주의 균형잡기일 수 있다. 이것은 마치 12세기 중국으로 건너간 인도의 남성 보살, 아발로키테스바라가 여성형의 관세음 보살, 여성 “권인”으로 바뀌는 과정과 흡사하다. 그 당시 가부장적 유교 문화 속 민중들의 모성성에 대한 염원이 종교적 성전환 수술을 감행한 것이다.

가부장적 종교문화 속에서 지고의 존재를 남성으로만 상상해온 여성들은 자신 안에 있는, 여성의 몸 속에 있는 신성을 들어내고 키우고 표현하며 신적인 차원으로까지 자신을 진화시키기 어렵다. 여성들이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을 육화시키기 위해서 여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여성들은 이 가부장적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지배와 종속이라는 힘의 구조에 빠져 사는 가부장적 남자들과 평등하고 싶지 않다. 침몰해가는 가부장제라는 타이타닉 혹에 남자들과 함께 일등석을 타는 게 무엇이 중요한다.? 중요한 건 구명보트를 타고 그 타이타닉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여성들에게 하나의 생명선으로 제시된 것이 많은 여성학자들에  의해 연구된 고대의 여신에 대한 재발견이다. 그들의 연구의 내용이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흐름이 있다면, 그 당시는 훨씬 더 평화롭고 풍성한 생산과 예술이 꽃피웠던 시대라는 관찰이다. 지배와 종속보다는 보살핌과 참여, 관계성이 중시되던 시대, 인간의 공격성을 전쟁으로보다는 예술과 스포츠를 승화시켰던 시대였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이 역사적으로 증명되는 사실이냐는 현대를 사는 지금의 여성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이길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만약 아니어도 좋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고대에 대한 신화적 상상력이고 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는 우리의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이끌 어 줄 여신을 출산한다. 이 여신은 우리의 가장 깊은 무의식의 바다에 떠오르는 “체화된 온전함의 메타포(Metaphor of embodied wholenesse)”다.

가부장적 피라미드 문화를 원형의 생명평등 문화로 바꾸기 위해서 여성들은 새로운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은 지금까지 남성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 귀여운 여자, 마녀, 팜므파탈, 유혹자, 현모양처, 동정녀, 성녀에서 발견할 수 없다. 우리는 여성의 눈으로 여성을 보며 여성의 가장 귀한 힘을 끌어낼 수 있는 새이름을 여성에게 지어주어야 한다. 아줌마, 공주, 마녀, 나쁜 여자 등 여러 저항적이고 대안적인 이름들이 여성들 속에서 자라나왔다. 나는 이 이름들을 넘어 여신이라는 이름을 내놓고 싶다. 이 미쳐가는 세상, 죽어가는 지구를 살려내는 살림군, 살림이스트가 되기위해선 여신 같은 마음, 지혜, 힘이 필요하다. 두르가 여신의 머리에서 태어나 폭력적인 세상을 평정한 전사 칼리 여신, 우리들의 시조이신 마고 여신, 우주의 몸 가이아 여신 등등. 그들은 우리 속에서 다시 태어나길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차마 죽이고 망가뜨리지 못하는 “엄마 마음”으로 분리되고 찢어진 세상의 관계들을 치유하고 회복시켜 다시 온전하게 만들려한다. 그것이 바로 구원(At-one-ment: Atonement)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물질 속에 나타나는 여신의 생명을 살리는 힘이다.(The Goddess is the Life force in matter)

남성의 신화 속에서 소외되고 애곡되어 여성을 더욱 주눅들게 하고 남성의 더 큰 자기 증오와 의심을 하게 만드는 남성들이 만들어낸 여신들이 아니라 여성의 몸 속에서 지금 다시 태어나는 여신들이 새로운 살림문화를 만들어 갈 것이다. 이러한 여신 문화에 동조하는 남성들은 여신의 파트너인 싱싱한 남성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이 두 극이 만들어내는 상생의 문화 속에서 성(gender)의 구분이 전혀 중요하지 않고 각 인간의 “자기다움”의 차이가 각각 가장 아름답게 꽃 피는 것을 즐거워하는 그 날이 올 것이다.

5. 생명•평화의 길

이제 우리는 여성의 몸의 지혜와 다시 돌아오는 여신의 계시 속에서 무엇을 배워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생명포럼의 과정에서 김지하 시인이 만들어낸 말, “생명과 평화의 길”이 세계의 생명운동과 여성운동이 가려하는 길이기도 하다. 나는 세계의 평화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생명운동에서 배운 지혜중에서 열 개의 생명, 평화 사인을 골라 이 생명 포럼에 오신 분들과 나눠보고 싶다.

-생명•평화의 길로 가는 10개의 Sign Post-

1. “다움”의 인정 (Allowing “Daum”)

모든 생명은 자기다움을 꽃 피우려 이 생명계로 들어왔다. 생명의 핵심에는 자기 존재에 대한 사랑과 자유가 있다. 각 존재의 고유한 구성 방식, 에너지, 리듬, 결 그리고 존재의 이유가 있다. 생명은 각자 자기 조직력, 창조력, 재생력을 가지고 있는 주체이다. 모든 생명이 자기다움에 충실할 수 있고 자기 다움을 맘껏 표현할 수 있을 때 거기 존재의 평화가 깃든다. 이 때 우주와 함게 큰 숨을 쉴 수 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인간을 인간답게 자연을 자연답게 놔두는 것, 그 각자의 고유성을 인정해 주는 것. 그 “놔둠”이 생명•평화의 시작이다.

2. “다름”에 대한 모심 (Holding the “Differences”)

전쟁과 분쟁의 심리학을 분석해 보면 그 속엔 다름에 대한 혐오•공포•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이분법적 분리주의라는 가부장적 사고에서 자라난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을 선과 악, 빛과 그림자, 정신과 물질, 이성과 감성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본다. 특히 가부장적 유일신 종교는 하나의 神, 하나의 진리, 하나의 구원만을 강조했고 그 모든 다른 神의 유형을 우상이라고 이름지었다. 다름은 그냥 다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타자화”(Otherization) 되고 악마화 되었다. 다름이 악마화됨의 심리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곳엔 내가 부정하고 있는, 억압하고 있는 내 안의 그림자(Shadow)가 자리잡고 있다. 그 그림자는 내 안에서 소외되면서 남에게 투사(Projection)되고 그리고는 많은 경우 악마화된다. 북아일랜드의 한 평화 운동가는 평화를 이루는 딱 한 가지 묘안을 이야기하라면 그것은 다름을 서로 껴안는 일(Holding the differences)이라고 말했다. 다름을 모시는 길. 생명•평화의 길이다.

3. “공생”의 축하 (Celebrating “Co-Existence”)

다움의 인정과 다름의 모심은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다원주의의 차원을 넘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서로의 다름을 즐거워하며 서로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상생으로, 어울림의 큰 공생으로 표현되고 축하되어야 한다. 극도의 개인주의 속에서 일어나는 다름의 인정은 공동체에 “게토주의”를 만들어낸다. 남을 인정하지만 이웃과 소통하려하지 않는 소외된 섬들을 만드는 것이다. 이 섬들 사이에 다리를 놓고 함께 더불어 잘 사는 법을 배우는 것. 생명 평화의 길이다.

4. “지평융합”을 통한 진화•창조적 초월 (Learning evolutionary, creative transcendence through “fusion of horizons”

공생과 상생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다른 존재의 다름을 통해 내 존재를 우리의 존재를 더욱 깊고 넓고 아름답게 진화시켜가고 창조해 가는 것이다. 두 다름은 만나 물과 기름처럼 표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만남을 통해 나타나는 분열, 갈등, 투쟁을 넘어 더 포용적이고 큰 파라다임으로 진화되어 가야 한다. 동서양,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신과 인간이 만나 새로운, 더 생명친화적인 지평을 열어야 한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Another world is possible) 양자택일의 세계가 아닌 다름을 끌어 안고 넘어가는 초월적 세계 대안적 세계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실천해가는 길. 생명평화의 길이다.

5. 흥속의 “神”남 (Finding true joy through giving birth to Goddess)

세계화가 세상의 뿌리는 지본주의적 쾌락의 유혹을 극복하고 더 많은 소비와 소유에서 자유로와지는 길. 그것은 진정한 즐거움 참된양생(Good Life)의 길을 발견하는 일이다. 진정으로 가슴 뛰게 만드는 일과 사랑을 찾아가는 길,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고 나누는 길, 이 과정에서 神이 태어난다. 神난다. 이 “神”남이 우리민족이 지켜온 흥과 풍류속에 나타난다. 수많은 외세의 침입과 내부갈등 속에서도 지켜내온 즐거운 삶.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억압을 뚫고 나오는 즐거움, 페미니스트들이 강조하는 진정한 “Power of the Erotic”, 세계의 원주민 종교속에서 나오는 신내림의 엑스타시. 이 모든 것이 한의 역사를 뚫고 나오는 한국인의 흥, 신남, 풍류와 만날수 있다. 진정으로 즐거운 사람은 전쟁을, 분열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 진정한 즐거움 속에서 계속 神이 태어나게 하는 것. 생명평화의 길이다.

6. 정의로운 보살핌과 힘찬 살림 (Life flourishing salim: Justice-Love)

여성주의 윤리가 해온 중요한 고민 중의 하나가 어떻게 하면 보살핌과 돌봄의 모성적 윤리를 이 가부장적 자본주의 속에서 구조적 정의를 만들어 가는 치열한 싸움과 융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발전된 담론이 정의는 올바른 관계(Right-Relationship)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올바른 관계를 만들어 갈 때 생명평화가 이루어 진다. “정의가 없는 평화”, 이것처럼 위협하고 위선적인고 유혹적인 건 없다. 많은 종교, 정치. 경제인들이 정의가 없는 평화를 선포해 왔기에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 참된 평화가 도래하지 않은 것이다. 성, 인종, 계급, 문화, 종교의 차이가 차별이 안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구조변혁의 노력이 우주와 나의 참자아 그리고 다른 생명들과 깊은 소통으로 만나보려는 영적인 노력과 만나질 때 진정한 살림이 이루어질 것이다. 살림은 생명을 일으키고, 증가시키고, 주는 행위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회변혁 운동, 문화운동, 평화운동, 생명운동들은 지금 여기서 대인적인 삶을 살아보려는 사람들의 노력이다. 이 정의로운 보살핌 속에서 힘찬 살림이 일어난다. 생명평화의 길이다.

7. 비폭력적 삶과 해결(Ahimsa of Everyday Life)

가능하면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을 매일의 구체적인 생활에서 체화하는 것. 비폭력적 대화, 비폭력적 몸짓, 비폭력적 정치사회 구조, 비폭력적 사랑, 비폭력적 문화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군사문화, 가부장제, 자본주의 세계화의 근거에는 다 생명에 대한 숨겨진 폭력이 있고, 거기에는 젖어서 살아온 우리에게는 “Ahimsa”의 Life style이 익숙하지 않다. 우리들의 과도한 육식은 동물들의 홀로코스트를 불러오고, 의약품의 발전이란 이름 하에 진행되는 온갖 과학적 연구들은 동물들에 대한 집단 고문에 근거해 있다. 국민소득과 에너지를 올린다며 산을 깍아내리고 갯벌을 없애며 물의 흐름을 막아 썩게 만든다. 우리의 개발은 너무나 지나친 그리고 불필요한 다른 생명에 대한 폭력에 근거해 있다. 비폭력적 삶의 방식 비폭력적 나라살림, 세계 운영, 생명평화의 길이다.

8. 숲처럼 살아남기(Staying alive like a forest)

인도의 에코페미니스트 반다나쉬바는 숲의 원리가 여서적 원리(feminine principle)라고 하며 우리는 숲으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숲은 종이 다양할수록 그 종들간의 상호성과 주고 받음이 많아질수록 병에 대한 면역성이 높아지고, 무성해지고, 오래 생명을 지속시킬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면역성을 높이는 방법도 이렇게 다양한 종들간의 상호성과 주고 받음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민간 연대의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세계화일 수 있고 여러가지 파라다임, 대안들 끼리의 만남을 통한 역사적 실험일 수도 있다. 다르고 새로운 것에 대한 배타나 배척이 아니라 그것들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포용하여 같이 배우고 오랫동안 살아갈 때 우리의 영혼의 면역성도 높아진다. 이런 방법이 오랫동안 여성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던 관계 맺기이다. 여성적 윤리, 숲의 우리에게 종들간의 섬세한 조화와 균형을 가르친다. 숲은 살아남기 위해서 골林, 떨林, 열林, 울林, 살林, 어룰林 등 많은 林이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생명평화의 길이다.

9. 물처럼 흐르는 생활(Flowing river in  your daily life)

생명평화 生活은 生이 물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이 삶은 무상한, 끊임없이 변하는 흐름, 과정이라는 걸 깨달아 큰 욕심, 집착을 놓고 흘러가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 생성되고 변화되는 큰 우주의 스토리중 아주 작은 지구의 스토리를 쓰고 있고 그 지구의 몇 백억년되는 스토리중 우리의 삶이라는 찰라 같은 스토리를 쓰고 있다. 그러니 우리 삶이 자연스럽게 끊임없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둬야 한다. 삶에 댐을 막아 우리 삶을 썩게 할 필요가 없다, 내영혼과 몸속에 항상 살아있는 물이 흐르게 하는 것, 그리고 내 이웃의 영혼과 몸속에도 그것이 가능하게 놓아두고 힘을 실어주는 것. 생명평화의 길이다. 여신의 샘의 물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10. 일곱대를 생각하기 (Thinking Seventh generation)

미국의 원주민, 인디언들에게 배운 지혜다. 그들은 어떤 행동, 결정을 할 때마다 그것의 결과가 앞으로 태어날 칠대 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에코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산처럼 생각하기 (thinking like a mountain)와 같은 가르침이다. 조급하게 내 일대에만 괜찮은 결정과 행동을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올 긴 결과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는 소위 말하는 자연재해들, 츠나미, 홍수, 지진, 가뭄 이상기온들은 더 이상 자연스럽게만 볼 수 없다. 이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삶의 양식이 극대화 될수록 “자연재해”도 극대화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일곱대 손을 생각하며 세계를 휩쓸고 있는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세계화와 맞서 싸워야 한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 모든 비폭력적인 방법을 다 동원해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또 오늘 나의 싸움이 나의 대에서 내게 결실을 안겨주지 않아도 된다는 큰마음, 빈 마음으로 싸워야 한다. 즐겁게, 서로를 살려내면서, 상쾌, 유쾌, 흥쾌, 통쾌하게 싸워야 한다. 생명평화의 길이다.

6. 살림이스트 선언(Salimist Menifesta)

*살림이스트:명사'살림'에서 온 말:모든 것을 살아나게 함.
1
한국의 에코페미니스트 혹은 한국 에코페미니스트의 비전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의미. 살림이스트는 모든것(특히 죽어가는 지구)을 살아나게 함. 살림은 한국여성이 매일하는 가정일을 일컬음. 예를 들면 나무하기, 물긷기, 음식하기, 빨래하기, 베짜기, 아이 키우기, 병간호, 노인 돌보기, 꽃 나무 가꾸기, 우물지키기, 소,닭,개 키우기, 그리고 집의 영들을 돌보기 등. 살림은 또한 망가지는 것 (냄비, 신발, 그리고 가슴 등)을 고치는 일을 일컬음. 한국 사람들이 "저 여자 살림꾼이네" 하고 말하면 그것은 그 여성이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하는 기술, 예술, 전문성이 있음을 말함. 예를 들면 모든 사람을 배부르고 행복하게 먹이는 것, 가족의 평화, 건강, 풍요함을 끌어 내는것 (이때의 가족은 모든 종류의 생명을 포용하는 큰 가족 개념을 의미), 아름다운 삶의 환경을 만드는 일 등.

2
살림이스트는 마술사, 혁명가, 여신처럼 모든 것을 만짐. 그녀가 만지면 모든것이 웃고, 자라고, 태어나면서 생생하고, 색깔 있고, 살아나게 됨. 그녀는 채식주의 음식을 즐겨 만듦.(그러나 아주 가끔, 그녀가 화가 매우 많이 나면 못된 놈들을 큰 솥에 넣고 끓이기도 함.)그녀는 운동의 전략이나 근본적인 사회 변혁의 비전을 요리해내는 것도 즐김. 그녀는 라틴 아메리카의 에코페미니스트 '콘스피라다'들 처럼 함꼐 머리를 회전시켜서 중요한 것을 짜냄. 그녀는 어떤 조건하에서도 살아남음! 그녀는 깔깔대는 아이들을 씻기는 것, 더러운 늙은 남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정치, 경제 제도와 오염된 강을 청소하는 것이 취미. 어떤 살림이스트들은 더러운 늙은 남자가 만들어내는 쓰레기를' 가부장적 자본주의'라고 부름. 그녀는 포용하는자, 끌어나는 자임, 그녀는'다름'들이 신나는 것이며, 우리의 면역체계를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믿음. 다른 종의 식물들과 나무들은 숲을 강하게 만들고, 다른 민족들은 만나서 아주 예쁜아이들을 만들고, 다른 색깔의 실들은 무지갯빛 색동을 만든다고 믿음. 그녀는 모든 것을 다 포용함. 남녀노소, 빈부귀천, 학력, 성한 몸, 장애인, 성적취향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을 그녀의 잔치에, 예배에, 부정의에 대항해서 싸우는 데모 등에 그들의 의도가 좋다면 다 참석시킴. 그러나 그녀는 칼리 여신처럼 무서운 포용주의자임. 그녀는 만약 못된 의도와 악한 마음들을 보면 정의의 칼로 그 목들을 잘라 그녀의 목걸이를 만들어 버림. 그녀는 강인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어머니들처럼"여자를 쳤어? 바위를 친 줄알아"하며 부정의를 향해 포효함. 그러나 결국 그녀는 모든 것을 끌어안음. 선과악, 빛과 그림자, 더러움과 깨끗함, 기쁨과 슬픔, 고통과 해방, 분노와 자비 등. 그것들이 다 그녀의 영혼에 ,명상에,시에 좋은 밑거름들이 되기 떄문이라고 함. 그녀는 특히 인도의 칩코 운동을 일으킨 여자들처럼 나무 끌어안기를 좋아함. 도끼를 든 나무꾼들에게 "저를 죽이고 나무를 죽이세요"하고 윙크하면서.

3
살림이스트는 모든 것을 재활용함. 종이, 우유팩, 병, 정치가, 지도자들, 옛 애인, 전 남편, 고대의 신들, 그리고 삶 자체를. 혁명적 변화가 빨리 오지 않는다며 사람들이 좌절하면 그녀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들을 격려함."긴장 푸세요. 백만 번도 더 이 삶으로 돌아오면서 그 이상을 이루면 되니까요. 지금 여기서 할 수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엔 춤춥시다"하면서

4
살림이스트는 산처럼 생각하는 평화주의자임. 한국에 있는 살림이스트들중 어떤 사람들은 혼인을 했는데 그 남편들은 그녀를 '안해-아내'라고 부름. 햇볕정책으로 그녀는 가는 곳마다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풀어 평화와 화해, 그리고 조화를 만들어냄.(상상력이 풍부한 한 언어학자는 한국어의 살림, 히브리어의 살롬[평화],아랍어의 살람[평화] 이 같은 어원에서 생긴 것이라는 이론을 내놓음. 인류는 모두 아프리카 대륙에서 출발했으므로 그럴 수도 있겠으나 아직 학문적 근거가 밝혀진 것은 아님.)

5
살림이스트는 여성, 자연,지구, 여신 등을 사랑함.(가끔씩 남신들, 예수, 붓다 ,루미 같은 신적인 남자들을 사랑하기도 함.) 그녀는 밥, 연꽃 등과 모든 여성적인 것, 페미니스트적인 것을 사랑함. 그리고 그녀는 새롭게 자라나고 있는 '살림꾼' 남자들과 모든 흐르는 것을 사랑함. 눈물, 강물, 구름, 생명 에너지, 기, 샥티,프라나,루아, 그리고 그녀가 월경하며 흘리는 피 등. 그녀는"삶은 유기체, 오르가니즘(아니면 오르가슴)이야,증식시켜!"하고 속삭임. 그녀는 봄처럼 오고, 오고,오고, 또 돌아옴, 살림이스트는 그녀의 자궁과 우주의 자궁, 그리고 창조력을 축하함. 그리고 그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사랑함.

6
만약 우머니스트와 페미니스트의 관계가 보라와 연보라의 관계라면 살림이스트는 짙은 녹색으로 나타남. 그 색깔은 어둠을 정면으로 뚫고 들어가 끌어안고 변화시키는(En-Darken-ment) 색임. 그 짙은 녹색은 보라와 연 보랏빛의 꽃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듦.  

* 살림이스트 선언을 쓸 수 있도록 영감을 주신 한국의 많은 여성들과 흑인 여성 작가 앨리스 워커(Alice Walker)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살림’이라는 말에 시적 상상력을 불어넣어주신 김지하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사) 생명과 평화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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