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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4(화)
생명의 논리적 정립을 위한 한 시도  
김상일(한신대학교 철학과)

1. 두 가지 의학과 두 가지 논리

(1) 오르가논과 오르간:논리가 의학을 결정한다

동양과 서양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종류가 다양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스즈키(D. T. Suzki)는 “동양은 정적이고 서양은 동적이다”라고 말했다. 스즈키의 이 말은 하나의 전형이 되어 지금까지도 그의 이런 주장을 비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은 실로 단편적인 것이며, 더 이상 일반적으로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동양과 서양 사이에 다른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 포괄적이며 보편적으로 동서를 나눌 만한 기준은 아직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러한 기준을 정할 때 가장 필요하고 적합한 도구는 역시 논리학인 것 같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모든 학문은 선행하는 전제가 있어야 하지만 논리학은 자기 안에서 세우는 전제 외에 바깥의 전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칸트가 말했듯이, 서양철학을 지배해온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서인 이른바 {오르가논(Organon)}은 서양 사회를 전반적으로 지배해온 논리학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인체의 장기를 두고 ‘오르간(Organ)’이라고 한다. 논리학과 의학의 관계를 직접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의 궤변론자들이 제기하는 역설, 특히 ‘제3의 인간 역설’ 같은 것을 사고의 병으로 보았으며, 논리서를 쓴 목적도 이와 관계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런 역설을 제거하는 도구로서 {오르가논}을 저술한 것이다. 사고 속에서 생기는 병이 논리적인 데 있다면, 육체의 병 역시 논리적인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의학을 논리적인 데서 찾은 경우는 한번도 없었으며, 논리학과 의학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알게 되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퇴치하려고 한 역설이 사람의 몸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논리학을 다루는 방법에서 동서양은 판이하게 달랐고, 거기서 의학의 종류가 나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서양에서는 역설을 ‘부자연스러운(unnatural)’ 병적인 것으로 본 반면, 동양에서는 ‘자연스러운(natural)’ 건강한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질병관이 견원지간만큼 다를 수밖에 없다.
칸트는 자기 당대까지 아직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사실에 놀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세 가지의 중요한 법칙을 ‘동일률(Law of Identity)’‧‘모순율(Law of Contrdadiction)’‧‘배중률(Law of Excluded Middle Term)’이라고 했다. 역설을 치유하기 위해 제시한 이들 법칙들은 지금 인체의 병을 비롯한 만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치료를 위한 것이 도리어 병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스승인 플라톤은 병의 이런 역설적인 면을 알고 있었다. 포스트모던 철학자인 데리다는 플라톤의 파르마티콘(parmaticon)을 재조명했는데, 이는 ‘약’이라는 뜻으로, 약은 인체에 이롭기도 하지만 병이 된다고도 했다. 이러한 역설적인 이중성을 그는 특히 차연(differance)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의 역설적인 이중성을 사고의 세 가지 법칙으로 파괴하고 만다. 아무튼 데리다가 자기 철학의 주요 개념을 약과 병이라는 데서 빌려온 것은 우리의 주제와 맞물려 매우 흥미롭다. ‘차연’은 다르면서 같다는 역설적인 의미를 지닌 말로, 노자의 도 개념과 연관해서도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Caputo, 1997, 1~6).
그런데 서양철학사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크레타 섬의 현자 에피메니데스(Epimenides)가 제기한 “거짓말쟁이가 한 거짓말은 참말이다”라는 ‘거짓말이 참말’이라는 논리는 그 이후 지중해 일대에 유행하는 말이 되었다. 이것이 후대에 ‘거짓말쟁이 역설(The Liar Paradox)’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논리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가 ‘반대 불일치’의 논리라면 에피메니데스의 논리는 ‘반대 일치(coincidence of opposite)’의 논리인 것이다. 두 논리는 그래서 서로 상반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 서양철학의 주류를 형성하여 칸트와 헤겔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그대로 이어받아 서양신학에 적용시킨 인물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이다. 그래서 이러한 일련의 사상 노선을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 논리학(Aristoteles-Acquinas Logic)’ 혹은 줄여서 A형 논리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러한 논리가 서양철학과 신학의 주류를 형성해왔다. 이러한 논리를 사용하지 않은 철학과 신학은 비정통으로 혹은 이단으로 다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통 철학과 신학은 고질적으로 이원론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 에피메니데스의 거짓말쟁이 역설이라는 논리는 에피메니데스보다 한 세기 먼저 살았던 에우불리데스(Eubulides)와 에피메니데스로부터 비롯하여 중세의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비정통 혹은 이단시되면서 그 맥을 이어왔다. 이를 ‘에피메니데스-에우불리데스-에크하르트 논리학(Epimenides-Eubuleides-Eckhart Logic)’ 혹은 E형 논리라고 부르기로 한다._            A형 논리 쪽의 사람들이 ‘A’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것처럼, 에우불리데스‧에피메니데스‧에크하르트도 우연히 이름 첫글자가 ‘E’로 시작된다. A형 논리는 실체를 의미하는 ‘Arch’ 혹은 ‘Atom’의 첫글자이고, E는 ‘Eastern’의 첫글자이기도 하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들을 통해 이들 두 논리 체계가 얼마나 상반된 현상을 가져오는지 살펴볼 것이다. 의학뿐만 아니라 기하학‧언어학‧물리학‧신학‧철학‧심리학 등 모든 분야의 갈등은 궁극적으로 이 양대 논리의 싸움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기하학을 예로 들자면, 유클리드 기하학은 A형 논리를 사용하고 있으며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E형 논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뉴턴-데카르트 물리학과 철학은 A형 논리를, 아인슈타인-화이트헤드의 물리학과 철학은 E형 논리를 선택하고 있다. 그 밖에 심리학의 영역에서도 A형 논리와 E형 논리의 갈등은 심각하다. 가령, 전통 심리학이 A형 논리의 주장을 택한다면, 최근의 양태심리학은 E형 논리의 주장 위에 서 있다. 이러한 분류는 동서 철학의 대단원 같은 정리라고도 할 수 있다. 건축에서조차도 서방의 고딕(Gothic) 양식이 A형의 양식을 보이는 반면, 동방의 돔(Dome) 양식은 E형 양식을 보이고 있다. 애슈브룩은 A형 고딕은 좌뇌를 E형 돔은 우뇌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보았다(Ashbrook, 1988, 14~49).
필자가 여기서 제시하려고 하는 ‘거짓말쟁이 역설’이라는 하나의 잣대를 사용해본다면,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을 쉽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거짓말쟁이 역설은 과거 2,400여 년 이상을 두고 논쟁이 되어온 문젯거리이다. 이미 기원전 4~5세기경에 그리스의 철학자 에우불리데스와 에피메니데스는 이 역설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역설은 그동안 서양철학사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새롭게 등장하면서 지난 100년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서양에서는 이 역설을 병적인 것으로 보고 폐기하거나 제거하려고 한 반면, 동양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동양사상이 서양의 그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근본 원인은 바로 거짓말쟁이 역설을 철학의 바탕으로 삼은 데 있다. 실로 거짓말쟁이 역설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는 정치‧경제‧과학‧철학 등 모든 분야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의학이 동양의 한의학을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근본적인 이유도 바로 서양의학이 과학적인 것과 달리 한의학은 비과학적이라고 보는 시각에 있다. 이런 고정관념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지배적이다. 여기서 과학적이라고 하는 것은 예전의 뉴턴 과학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최대 과제는 다름아닌 이런 뉴턴적 세계관을 극복하는 데 놓여 있다. 20세기와 더불어 시작된 신과학은 ‘과학적’이라는 말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신과학의 과학은 논리적으로 전혀 다른 논리적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다(안재구, 1991, 219).

(2) A형 논리의 두 의학철학:경험론과 실재론

서양의 논리를 지배해온 A형은 철학을 경험론과 실재론으로 갈라놓는다. 철학의 두 물줄기는 의학의 흐름도 그렇게 결정하고 말았다. 의사들은 인간의 병이 어디에서 유래하며 어떻게 그 치료가 가능한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경험론자들은 인간의 병에 대한 의사의 지식을 백지 상태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이는 경험주의자 존 로크가 인간의 마음을 빈 백지 상태(tabual rasa)로 파악한 것과 같다._            “이를테면, 정신은 아무런 특성도 없고, 어떤 경험도 없는 백지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 종이는 어떻게 채워지는가?”(Lock, 1975, 104).
그래서 병의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경험적 관찰로 귀납법을 통해 추리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경험주의자들의 태도는 현대 의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호주에 오기 전에 유럽 대륙의 백조를 관찰한 조류학자들은 “모든 백조는 희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호주에 와서야 검은 백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경험적 관찰을 통해 지식의 정보를 축적하여 귀납적으로 자연 법칙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하는 경험주의자의 한계는 여기서 벽에 부딪히게 된다. 경험적 관찰이 능사는 아닌 것이다.
이러한 경험론자들에 견주어 실재론자들은 인체 안에서 실재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어하며, 그 원인을 특정 원인 혹은 부위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경험론자들은 관찰된 현상 사이의 통계적 관계에 주의를 기울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A형 논리에 충실한 히포크라테스는 실재론적 처지에서 인간의 병을 인간 내부의 어떤 특정 물질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인체 안의 네 가지 체액(humours)이 병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혈액‧점액‧황담즙‧흑담즙이 바로 그것이다. 건강한 사람은 이 네 가지 체액이 균형 잡혀 있지만, 환자는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이는 병의 원인을 바이러스라고 보는 현대 의학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원질(arche)이 무엇인가 물었던 그리스 철학의 질문과 불가분리적 관계에 있다. A형 논리란 이러한 원질 탐구의 논리인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가 물이 우주의 원질이라고 한 것과 맥을 같이하는, 환원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말미암은 실재론적 견해이다. 근원적 토대를 탐구하는 이런 논리학은 양의학의 철학적 기저가 되고 있다. 물질에는 그 물질의 토대가 있다는, 그런 사고방식에서 나온 논리학인 것이다.
이러한 실재론적 주장은 18세기의 윌리엄 쿨렌(William Cullen, 1712~1790)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는 질병이란 중추신경계의 조절에 이상이 생길 때 발생한다고 보았다. 쿨렌을 히포크라테스에 이어 같은 실재론자로 보는 이유는, 그가 병을 인체 안의 어느 특정 부위에서 발생하는 메커니즘으로 보았기 때문이다(울프, 1999, 57). 경험론자들이 관찰에 의존해 병의 원인을 찾는다는 점에서 실재론자와 다른 것 같지만, 그들도 궁극적으로 환원주의자들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예를 들면, 위장병 환자들이 위궤양 환자의 위에서 염산이 분비되는 것을 관찰하고는 귀납적으로 이것이 보편적 법칙이라고 여겨버리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그러나 백조가 꼭 흰 것은 아니듯, 위궤양의 원인이 반드시 염산의 분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울프, 1999, 41). 오랫동안 그렇게 믿어왔지만 최근에는 헬리코박터가 그 원인일 수 있다는 것이 밝혀져 위궤양 치료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처럼 서양의학의 철학이 두 갈래로 나뉘어 상반된 방향으로 나가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의학철학의 배경이 되는 논리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실재론과 경험론이 갈라지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파르메니데스 이후 일자와 다자가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재론자들은 병을 밝히는 데 이론에 의존하고 경험론자들은 관찰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론 없는 관찰, 관찰 없는 이론이란 허무맹랑하다. 칼 포퍼는 이에 대해 “이론에 의존하지 않은 채, 순전히 관찰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은 불합리하다.…… 관찰은 어디까지나 선택적이다. 그것은 선택된 대상과 일정한 임무, 관심, 관점, 문제를 필요로 한다”고 했다. 한의학은 실로 이런 실재론과 경험론의 약점을 극복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양의학(洋醫學)은 실로 경험론과 실재론을 둘로 나누는 양의학(兩醫學)이 아닌가 싶다. 이런 특징은 양의학의 구석구석에서 발견된다. 그 가장 큰 양분은 바로 몸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실로 과학적 연구의 첫 단계는 관찰이 아니라 그 관찰을 할 수 있는 가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론이 앞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험론자들은 이를 반대로 뒤집어 생각한다. 그래서 포퍼가 말한 대로 마차를 말 앞에 두는 것과 같다. 포퍼는 반증(falsification)이라는 방법을 통해 이러한 경험론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다. 반증이란 검증(verification)에 대한 반대 입장이다. 위궤양이 염산의 분비 때문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헬리코박터라는 한 가지 이유를 관찰함으로써 염산이라는 일반 명제를 반박하는 방법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관찰자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새로운 추론을 대담하게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포퍼는 주장한다. 그러나 포퍼의 주장은 검증을 극복했다기보다는 피해갔다는 인상을 주고 만다. 그가 말하는 새로운 창의성 역시 귀납적 검증이 전제되고서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관찰에 앞서 이론이 중요하다는 실재론의 주장 역시 그 한계가 분명하다. 그러나 가설을 만든다고 할 때 여기에는 경험적 관찰이 전제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경험론과 실재론의 한계를 극복한 사람이 바로 칸트이다. 칸트는 인간의 상태는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은 백지 상태이지만 나중에 입력된 모든 정보를 조직화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컴퓨터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른바 칸트의 범주(category)라는 것이 이러한 프로그램에 해당한다. 양과 질, 원인과 결과, 가능성과 필연성 같은 범주들은 나중에 입력될 정보들을 처리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것은 우리가 본래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범주들이 있기 때문에 관찰자들은 관찰을 시작하기 전에 일정한 가설과 전제를 만들 수 있고, 이 전제와 가설을 기초로 해서 다음 관찰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선행하는 것을 그대로 물려받는 것을 전이적(transitive)라고 하고, 그렇지 않고 관찰에 의해 후속적 관찰로 얻어지는 것을 비전이적(intransitive)이라고 한다(울프, 1999, 50). 유기체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전이적인 것을 인과적 효능(causal efficacy)이라고 했으며, 비전이적인 것을 현재적 직접성(presentational immediacy)이라고 했다. 인식은 이 양자가 결합될 때 가능한데, 화이트헤드는 이것을 상징적 준거(symbolic reference)라고 했다. 한의학은 바로 상징적 준거의 틀 위에 건립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A형 논리학에서 빚어진 철학이 어떻게 의학을 이끌어왔는지 고찰했다. 여기서 서양의학과 한의학의 근본적인 차이를 알 수 있는데, 양의학은 인체를 바라볼 때 여전히 일차원적인 시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장기에 탈이 날 경우 장기 자체에 난 병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경험론자나 실재론자가 같다고 할 수 있다. 양자는 한치의 차이도 없다. 다만 인간 장기에 생긴 병을 관찰하는 데서만 차이가 날 뿐이다. 그러나 한의학은 인간의 몸을 다차원적으로 바라본다. 다시 말해서, 장기에 일대일로 대응하는 경맥이 있다고 보는 것인데, 장기와 직접 일대일로 대응하는 열두 개의 경맥을 정경(正經)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여덟 개의 경맥을 기경(奇經)이라고 한다. 그래서 몸에 병이 날 경우 장기 그 자체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경맥을 보는 것이다. 경맥 체계야말로 상징적 준거(symbolic reference)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논리상 큰 차이를 보여주는데, 대상과 메타로 나눌 때 장기는 대상에 해당하고 경맥은 메타에 해당한다. 경험론이든 실재론이든 대상만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한의학은 대상과 메타의 상관관계 속에서 인체를 고찰한다. 여기서 서양의학과 한의학 사이에는 깊은 논리적 문제가 제기되어 그 차이를 크게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기와 경맥의 문제는 곧 철학의 오랜 문젯거리였던 특수와 보편의 문제 그리고 개별자와 형상의 문제인 것이다. 아직도 서양철학에서 미해결로 남아 있는 이 문제는 한의학을 통해 그 해결의 실마리를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한의학에 대한 고찰은 단순히 의학적인 문제가 아니고 철학의 주요한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장기와 경맥의 문제는 앞으로 말할 ‘자기언급’의 문제와 연관된다. 다시 말해서, 대상과 메타는 ‘닮음’의 문제를 제기한다. 장기와 경맥은 같기 때문에 경맥을 치료하면 장기가 동시에 치료된다. 그러나 장기와 경맥은 또한 서로 다르다. 즉, 장기는 가시적이지만 경맥은 비가시적이다. 서로의 다름은 분명하다. 양의학은 이러한 닮음과 다름의 문제를 의학적으로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양의학은 경맥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비가시적이라는 이유로 경맥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도 경험론과 실재론은 같은 처지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경맥은 전이적인 것이지만 장기는 비전이적인 것이다. 경맥은 전이적인 것으로 한의학의 기본 전제가 된다. 그러나 장기는 비전이적인 것으로 경험적 관찰의 대상이 된다. 위궤양이 염산의 분비 여부에 달려 있는지만을 볼 때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다양한 관찰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그것이 염산으로 말미암은 것이든 아니면 헬리코박터로 말미암은 것이든 위 경맥상의 허실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는 것은 한의학에서 기본 전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의학은 화이트헤드가 말한 상징적 준거에 따른 관찰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양의학과 한의학의 논리적 차이

(1)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의 논리적 차이:정비공이냐 정원사냐

서양의 A형 논리는 이제 의학에 다음과 같은 세계관을 제공한다. 뉴턴-데카르트적 세계관_            과학자 뉴턴과 철학자 데카르트는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뉴턴-데카르트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의 특징은 이원론적‧실체론적‧기계론적이라는 점이다. 서양에서 현대 의학이 시작된 역사는 고작 300년 정도라고 하는 이유는, 엄격하게 말해서 뉴턴-데카르트적인 세계관의 등장과 때를 같이해 현대 의학 개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의학은 뉴턴-데카르트적인 세계관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뉴턴-데카르트적인 세계관은 의학뿐만 아니라 정치‧경제‧교육 등 근대적인 세계관을 결정해온 기틀(paradigm)을 제공했다. 그리고 금세기 최대 과제는 바로 이 기틀을 깨고 새로운 틀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카프라는 자신의 책 {전환점(Turning Point)}를 통해 양의학에서 한의학으로 전환하는 것이 문명의 대전환 가운데 하나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카프라, 1986, 제9장).
뉴턴-데카르트적인 세계관의 첫번째 특징으로 이원론(dualism)을 들 수 있다. 이원론적 세계관이란 물질과 정신, 그리고 몸과 마음을 별개의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원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사람의 몸 역시 하나의 기계적인 부속품과 같다. 아울러 육체와 정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 자동차가 고장난 경우와 사람의 몸에 병이 난 경우, 이 둘 사이에 차이점은 무엇인가? 고장난 자동차를 고치는 사람을 ‘정비공(mechanic)’이라고 하고, 병이 난 사람의 몸을 고치는 사람을 ‘의사(physician)’라고 한다. 이때부터 의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의 몸을 기계의 부속품같이 보고 정비공으로서 구실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마음의 영역을 자기의 소관 밖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서양의학은 숙명적으로 몸과 마음을 갈라놓고 말았다. 기계에는 정신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의사가 담당해야 할 영역은 몸에 국한되며, 마음의 영역은 심리학자(psychologist)들의 손에 넘겨버렸다. 오늘날 양의학은 몸과 마음의 이원론에 근거해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몸과 마음의 분리라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야기하고 말았다.
뉴턴-데카르트적 세계관의 두번째 특징은 실체론적(substantial)인 뉴턴의 입자설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입자설은 A형 논리학의 동일률에 근거한다. 즉, 돌은 돌로서, 나무는 나무로서 고유한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동일성은 바로 동일률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물질의 고유한 본질을 불교에서는 자성(自性)이라고 한다. 그런데 불교는 자성은 없다는 무자성을 말하고 있다. 한의학은 이런 불교의 무자성적 물질관에 철학적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양의학은 자성적 기반 위에 서 있다._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 역시 권력에는 그에 해당하는 실체 같은 방이 있다는 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 볼 수 있는 대학의 학과 구분 역시 학문에는 각 과마다 자성이 있다는 실체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학문관을 파괴하려는 것이 곧 ‘학제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체의 장기를 이해하는 데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성적 혹은 실체론적 세계관이 의학에 응용될 때, 병의 원인을 규명하는 문제에서도 역시 같은 실체론적 입자설에 기초를 두게 된다. 즉, 병에는 그것을 유발하는 실체의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다름아닌 ‘바이러스(virus)’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뉴턴이 물질의 근본이 되는 실체를 ‘입자(particle)’라고 본 것과 같다. 의학의 바이러스가 곧 물리학의 입자였던 셈이다. 나무는 나무로서, 돌은 돌로서 자기의 고유한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실체설이라고 했다. 이러한 실체로서 입자를 제거하면 물질은 그 본성도 없어지고 만다. 양의학에서는 병의 원인이 되는 이 바이러스를 제거하면 병이 없어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 바이러스를 박멸하기 위한 수많은 의약품을 개발해왔다. 뉴턴의 입자가 입자마다 고유한 자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물질이 바로 그 물질이 되도록 만드는 것처럼, 모든 병에는 그 병에 해당하는 바이러스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비실체론적‧무자성적 한의학에서는 병의 원인에 대한 견해가 당연히 서양과 다를 수밖에 없다. 한의학의 허실 진단법은 서양의 진단법과는 그 발상 자체가 다르다.
뉴턴-데카르트적 세계관 세계관의 세번째 특징은 기계론적(mechanistic)이라는 점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이란 인체가 마치 기계처럼 서로 독립된 수많은 부분들로 조직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각 기계의 부품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짜여져 있다. 각 부분이 고장나면 고장난 부분만 갈아 끼우면 된다. 마치 자동차 정비공이 차의 고장난 부품을 다른 것으로 갈아 끼우듯이, 의사들은 정비공과 같은 태도를 가지고 인체의 고장난 부분에 국한해 병을 치료하려고 한다. 그래서 바인필드는 말하기를, 서양 의사는 정원사(gardner)가 아니라 정비공(mechanistic)이라고 단정하고 있다(Beinfield, 1991, 20)._            Harriet Beinfield and Efremkorngold, L. Ac., Between and Heaven and Earth, New York:Ballantine Books, 1991, 20쪽.
인간의 몸을 한갓 기계로 보는 견해는 다음과 같은 데카르트의 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는 1634년에 쓴 {인간론(Triate de l’homme)}에서 “몸은 기계이다. 신경‧근육‧힘줄‧피와 피부로 된 기계이다. 그 몸 속에 마음은 없지만, 마음과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을 그만 두지는 않는다”(Foss, 2002, 37)라고 했다. 데카르트의 이 말 한 마디가 현대 의학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17세기 후반 생리학과 의학계에 등장한 패러다임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혁명과 함께 현대 이전의 전일적 인체관은 사라지고 몸과 마음의 이원론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McMahon, 1984, 35) 데카르트의 이 말에 충실한 양의사들은 정비공 노릇을 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러나 한의사는 정비공이 아니라 정원사와 같다. 정원사는 식물을 가꿀 때 그 식물이 자라는 토양과 기후 그리고 주변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정비공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양의사는 정원사 노릇을 하지 못하고 이와 같은 정비공의 구실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체는 정원과 같지, 기계와 같지는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정원과 같은 사람의 몸을 관리할 주인공은 과연 정원사인가 정비공인가(Leshan, 1982, chapter 2).
네번째로 뉴턴 과학은 병과 약을 차연 관계로 생각하지 않고 대립 관계로 본다. 그래서 양의학은 병과 약을 대립‧투쟁적인 관계로 본다. 병은 약에 의해 박멸되어야 할 대상이다.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 의사이고 병을 고치는 것이 약이라고 본다. 그런데 과연 병과 약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것일까? 양의학에서는 병이 만일 ‘질문’이라면 약은 그 ‘대답’과 같다고 생각한다. 환자는 묻고 의사는 대답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양의학에서는 병의 원인이 바이러스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정복할 약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약을 개발하면 어느새 그 약을 능가하는 새로운 바이러스가 나타난다._            퇴치되었다고 생각했던 폐결핵이 최근 재등장하는 것은 하나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즉, 약이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약 자체가 병을 계속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한의학은 이 역설을 일찍부터 터득해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병과 약이 같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깥에서 약을 투입해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병 자체가 약이 되는 역설(paradox)을 이용해 차연 관계로서 병 스스로가 병을 고치도록 한다. 의사의 구실 도 마찬가지이다. 환자 자신이 자기 병에 대한 의사이다. 한의학에서는 그래서 환자가 찾아오면 의사가 환자를 향해 먼저 절을 한다. 왜냐하면 환자 자신이 자신에 대해 의사이고 의사는 환자의 보조자 구실밖에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교육자를 가리켜 산파와 같다고 했는데, 이는 피교육자 스스로 지식을 잉태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한국에서는 천연두 같은 전염병에 걸리면 ‘손님이 들었다’고 한다. 이 말은 병을 귀한 손님 대하듯 해야 한다는 뜻이다. 손님이 주인이 되는 주객전도가 생겨야 병이 낫는다고 본, 그런 철학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한다. 병은 퇴치와 박멸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이런 점에서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은 근본적으로 병의 대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기계가 고장 났을 경우, 고장난 상태를 그냥 둔다고 해서 기계 스스로 고치는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체나 살아 있는 생명체는 그렇지 않다. 생명체는 스스로 자기의 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고, 스스로 병을 방어하는 면역 체계도 지니고 있다. 이를 두고 자기치유(homeopathis)라고 한다. 동양의학은 이 사실에 착안한다. 동양의 의사들은 정원사같이 토양과 기후 그리고 주위 환경을 고려해 생명체가 스스로 치유(cure)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구실을 한다. 병든 나무를 손대려 하지 않고, 나무의 주위 환경을 돌봄(care)으로써 나무를 치유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치유의 논리를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언급의 논리를 이용해 병을 치유하는 기술을 터득했던 것이다. 즉, 병은 병 자체가 약이며, 병이 난 몸은 그 자체가 의사가 된다는 것이다. 자기치유란 바로 거짓말쟁이 역설에서 말하는 ‘자기언급’이다.
서양의 종교는 인간의 영혼을 치료하는 데서도 정비공 같은 태도를 취한다. 종교인들의 바이러스는 죄이다. 그래서 교회의 목사들은 죄라는 바이러스를 뽑아 제거하고 성령이라는 약을 투여함으로써 영혼의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설교한다. 그러나 동양종교는 한의학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자생적 치유력이 인간 영혼에 있다고 믿는다. 마치 서양의 의사들이 바이러스를 제거하려고 약을 사용하면 할수록 사람을 더욱 불행하게 만들듯이, 동양종교의 견지에서 보자면 영혼을 치료하는 목사들도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오늘날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최대의 신학적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예수도 알고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예수의 이 말은 구원을 밖에서 구하지 말라는 뜻이다. 영혼의 병을 밖에서 구하지 말고 자기 안에서 구하라는 뜻이다. 자기 안에서 스스로 치유하는 힘을 동양에서는 ‘기(氣)’라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기치료를 위험시하며, 오직 밖으로부터 오는 능력이 전부라고 말한다. 기는 마음속에 집을 짓고 있는데, 장자는 이를 심제(心齊)라고 했다.
해마다 의료보험에 드는 비용은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지만, 양의학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의학에 대한 불신만 증가시키고 있다. 서양 사람들 스스로가 정작 서양의학에 대한 불신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서양의학에 세뇌되어 한의학을 미신이요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하는 의사들이 있는가 하면, 서구의 의료 방식에 대한 맹신을 가지고 있는 동양인들 사이에서 서양의학은 더 애호를 받기도 한다. 이는 또 하나의 의학적 오리엔탈리즘에 지나지 않는다. 서양의학은 근본적으로 병에 임하는 논리를 바꾸어야 한다. 이렇게 뉴턴의 과학과 데카르트의 철학은 암묵적으로 그리고 뿌리 깊게 현대 의학의 기초가 되고 있다. 즉, 현대 서양의학의 많은 장점과 약점을 모두 데카르트의 철학이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Pellegrino, 199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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