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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4(화)
동아시아적 사유와 생명정치  
붓다의 정치적 사유를 중심으로

김영수 (국민대 정치학과 교수)

1. 서론: 왜 <동아시아>인가.

냉전이 끝나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승리를 구가하는 이 시대 Francis Fukuyama,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New York: Maxwell Macmillan International, 1992).
에, 「생명정치」에 대한 욕구는 새롭게 자라나고 있는 정치적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현대 산업사회에서 인류의 전체적인 삶은 매우 향상된 것이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깊은 욕구불만도 항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도 전쟁과 테러는 부단히 지속되고 있으며, 자연에 대한 조직적이고 대대적인 파괴가 진행되고 있다. 인류는 여전히 불행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의 현대문명은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성위에 건축된 현대문명의 또 다른 대안은 가능한가? 이것이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기하는 심각한 질문이며, 「생명사상」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왜 「생명정치」가 아니고 동아시아의 「생명정치」인가? 여기에는 <근대/서구>의 정치사상이 궁극적으로 생명의 가치를 옹호할 수 없다는 암묵적 전제가 깔려 있다. 즉, 이성에 기초한 서구성과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전제인 것이다. 한국 생명사상의 부활을 주장하는 김지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 생명가치가 사라지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근대화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근대화, 화폐경제, 자본주의적 교환시장이 위에서 이야기한 세 가지 생명과정을 해체하고 전면적으로 상품화했습니다. 당연히 살 맛 나지 않는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노동은 생계노동, 임금노동, 소외노동으로 전락했고, 문화나 영성, 인간의 개성적인 삶, 내면생활의 자유, 종교생활 등, 이 모든 것이 상품화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상품화될 것입니다.” 김지하, “접화군생: 인문학과 생태학”, 경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엮음, 󰡔인문학과 생태학󰡕 (서울: 백의, 2001), p. 27.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자기의 일로 느껴져야 합니다. 비약이 심한 것 같지만, 이것이 인문학적 상상력입니다. 상상력이 없으면 과학도 안 됩니다. 과학 특히 서양의 과학이 벽에 부딪히는 것은 중요한 상상력의 보전장소인 발칸과 희랍의 고대가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제는 동아시아로부터 중앙아시아, 이 전체를 괄호 안에 집어넣는 인류 시원의 문명, 麻姑城의 기억으로 인류 전체가 여행을 해야 할 때입니다.” 김지하, 위의 책, p. 44.


이리가라이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쨌든 내가 필요성 때문에, 그리고 일관되이 그렇게 서구문화를 실험하기 시작했던 것이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서구의 몇몇 현대 철학자들처럼 나는 방법상의 안내서와 입문서를 찾아내기 위해 동양 쪽으로 몸을 돌려야 했다.” 뤼스 이리가라이(Ruce Irigaray), 󰡔동양과 서양 사이; 개인으로부터 공동체로󰡕(서울: 동문선, 1999), p. 13


파라다이스가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특성처럼, 현대 동아시아의 생명사상 역시 시간과 공간으로부터의 비상을 희구하고 있다. 즉, 옛날이나 미래의 황금시대, 또는 종말과 구원의 날, 그리고 저기 또는 그곳(彼岸/utopia)에 존재하는 미지의 시공간을 이상향으로 갈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양은 확실히 서양에 비해 활동적 삶(vita activa) 보다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 활동적 삶과 관조적의 개념에 대해서는 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Chicago &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8), pp. 12-17을 참고하라.
을 지향해 왔고, 확장적인 삶보다는 수렴적이고 은일적인 삶을 이상으로 제시해왔다. 또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분석적인 사유(thinking)보다는 감성적이고 직관적이며 종합적인 통찰(awakening)을 중시해왔다. 윌리엄 시어도어 드 배리, 󰡔다섯 단게로 본 동아시아 문명󰡕(서울: 실천문학사, 2001)

적어도 19세기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동양적 삶은 낙후되고 소극적인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20세기를 통하여 동양도 서구만큼 욕구충족적이고 활동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해왔다. 일본과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그 사례이다. 이른바 유교자본주의론(confucian capitalism)은 동양이 그처럼 무지했던 것이 아니라, 근대 이전에 이미 높은 수준의 문명적 성취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Berger, "An East Asian development model". In In search of an East Asian development model, ed. Peter L. Berger and Hsin-huang Michael Hsiao, 3-11.(New Brunswick, NY: Transaction Books, 1988); Roderick MacFarquhar, "The Post-Confucian challenge," The Economist (February 9, 1980), pp. 67-72.
단지 욕구충족이 문명의 목표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러나 「생명정치」에서 바라보는 동아시아의 탁월성은 다른 데 있다. 즉, 활동적이고 확장적인 서구문명이 적어도 수세기에 걸친 제국주의와 식민지에 대한 착취, 세계대전, 자연파괴의 문제를 초래해 온 결과, 이제 그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전통의 패러다임을 재음미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인류는 수많은 문명과 세계관을 창조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인류가 재음미할만한 가치를 지닌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장구한 역사동안 서구의 그것에 비견할만하고 때로는 능가해 왔던, 그러나 이제는 거대한 문화의 창고 속에 잠자고 있는 동아시아의 정신적 유산에 대한 재음미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2. 동아시아 생명정치의 사유: 붓다와 정치

동아시아가 창조해낸 가장 위대한 정신적 유산은 불교와 유교, 그리고 도교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유산들은 적어도 2천년 이상 동아시아인들의 삶과 정신에 심오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그리고 현대 문명의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음미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정치에 관한 불교, 특히 붓다의 사유가 지닌 특징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붓다의 생명사상과 탈정치적 사유

붓다는 Kosala국의 雪山 한 아라냐 속에 고독하게 있으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죽이지도 않고 죽이라고 시키지도 않고, 이기지도 않고 이기는 것을 돕지도 않고, 슬퍼하지 않고 슬퍼하게 하지도 않고, 괴롭히지도 않고 如法하고 평화롭게 국가 통치를 올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sakkānukho rajjam kāretum ahanam aghātayam ajinam ajāpayam asocam asocayam dhammenāti.
   SN: I. Māra-samyutta, Raja-sutta. p.116. (난다라타나[I. Nandaratana Thero], “초기경전에 나타난 정치사상”, 󰡔한국불교학󰡕, Vol.31, 한국불교학회, 2002, p. 378에서 재인용.)


그는 죽이고 이기고, 슬픔을 초래하고, 타인을 괴롭히는 당시의 정치에 대해 깊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오늘날 생명정치의 문제의식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온순하고 관용적인 불교는 생명사상에 가장 어울리는 사유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어떠한 생명을 죽여서도 안 되며, 생명체만이 아니라 만물에 대해 공경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만물은 자신의 진정한 본질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萬物同體) 조용길, “응용불교 : 불교의 생명그물과 생태환경 윤리관의 인드라망”, 󰡔한국불교학󰡕 36집, 한국불교학회, 2004.

그러나 다른 한편 불교는 현상적으로 나타난 모든 생명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그림자와 같은 환상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영원한 생명은 그 현상의 너머에 존재한다. 그러한 사실을 거꾸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생명체가 고통의 바다에 빠져있는 이유이다. 그런 생명들이 이른바 衆生(sattva)이다.
생명현상은 인간과 생물(有情), 생태계(생물+환경, 衆緣和合生)로 대분된다. 범부인 중생들은 色에 물들고 受想行識에 얽매여 있으므로 중생이라 한다.(雜阿含經) 유정은 무명에 의하여 망념이 움직여 비록 생멸은 있지만, 아직은 주관(見分)과 객관(相分)으로 나누어지기 이전의 것이다.(大乘起信論疏) 이들은 감각적 수용능력을 지니고 맹목적 삶의 의지에 따라 행위하는 존재로, 감수성(情)과 의지성(行), 행위성(業)의 존재자이다. 생태계란 무수한 조건들이 화합하여 일어나는(衆生和合生起) 존재자들이다. 서로 연쇄되어 있고 순환하며, 나타나서 지속되다가 사라져 공으로 돌아간다.(成住壞空)
이처럼 개체적 생명 현상이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고정불변한 것이 없는(無自性, 空) 연속적 변화과정으로, 無常과 無我의 공한 현상이다. 근본적으로 공하지만, 현상적인 생명체들은 서로의 상호관계(緣起)를 통하여 삶을 순환한다. 이 상호관계는 긍정적 상호작용(善緣, mutual aid)과 부정적 상호작용(惡緣, 적자생존)으로 나뉘어진다. 김종욱, “불교사학 및 응용불교 : 불교생태학적 생명관의 정초 모색”, 󰡔한국불교학󰡕 38집, 한국불교학회, 2004.

불교의 가르침은 단순하다. 첫째, 자신의 생명현상이 그림자임을 알아, 본질적이고 영원한 불생불멸의 眞我를 각성하는 것, 둘째, 현상적인 삶에서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만들기 위해 선한 행위를 하는 것(慈悲,自利利他)이다.
생명사상은 불교의 두 가지 가르침과 모두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진정한 생명사상의 본질은 우리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만 만물에 대한 진정한 연민과 사랑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만물은 결국 자신의 다른 모습이며, 고통받는 자기를 연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천적 생명사상은 만물의 상호관계를 선한 관계로 만드는 데 있다. 어떻게 하면 만물이 스스로 자신의 분신임을 알고, 서로를 돕고 사랑하는 좋은 관계로 만들 수 있는가?(菩薩行) 불교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진리가 있다 해도 모두 다 배울 것이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이 있어도 모두 구하겠다는 悲願이 있다.(四弘誓願) 생명에 대한 불교의 이해와 실천은 이처럼 깊고 절실하다.
그러나 불교는 유교와 비교할 때 현저히 탈정치적이다. 이슬람교나 기독교와 비교할 때도 그러하다. 기독교는 그 창시자가 정치적 왕이 되기를 바라는 민중의 희망을 거부했고, 하늘나라의 것과 지상의 것을 명료하게 구분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서양 중세의 정치를 지배했다. 붓다에게는 친밀한 관계를 가진 왕들이 존재했으며, 사회의 하층에 있는 사람들과 교제했다.

붓다의 삶은 충분히 발전된 사회의식을 보여주는 주목할 만한 기록이기도하다. 그는 권력자들과 어울렸고 비천한 사람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빔비사라와 코살라의 파세나디 같은 국왕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는 아나타핀디카(急孤獨)와 같은 부유한 자본가(長者)와도 교제하였다. 그의 문하에는 비사카, 케마, 웁팔라반나와 같은 귀부인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그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교제가 앙굴리말라와 같은 강도, 수니타와 같은 청소부, 암바팔리, 파타차라, 순다리와 같은 매춘부 등과 친분을 맺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병자를 보살피고 버림받은 자와 가난한 자를 구제하였으며, 약자를 위로하고 불행한 자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사회를 회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람들의 모임 속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과 더불어 살았다. W. S. Karunaratne, Wesak Number 1965(Colombo: Department of Cultural affairs, 1965), p. 4.; 피야세나 닷나나야케, 󰡔불교의 정치철학󰡕 (서울: 대원정사, 1988), p. 83에서 재인용.


이처럼 불교가 본래 비사회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아쇼카왕과 같은 불교왕을 배출했으며, 중국에 불교를 전래한 초기 불교의 전도자들이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더, Kenneth Kuan Sheng Ch'en, 󰡔중국불교󰡕(上) 박해당 역 (서울: 민족사, 1991). 藤堂恭俊, 塩入良道, 󰡔중국불교사: 漢민족의 불교󰡕 차차석 역 (서울: 대원정사, 1992)
그러나 승단과 승려들은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경우는 없었다. 즉, 불교의 정치개입은 개인적이고 상황적인 것으로, 사회이념과 사회세력이라는 차원에서 정치를 정복한 적은 없었다. 13세기에 불교가 도입된 태국, 14세기에 도입된 라오스의 경우, 승단의 정치적 권위는 강력하였다. 즉, 왕권은 功德(merit)와 業(karma)에 의해 정당화되었으며, 국가는 승단을 보호했다. 이 때문에 탐비아는 태국의 전통정치체제를 불교정치체제(Buddhist polity)라고 명명했다.(Tambiah, S. J. World Conqueror and World Renounc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6. p. 111)  즉, 불교와 승가, 왕권이 결합된 혼합적 정치체라고 보았다. 왕권은 三寶(부처, 진리, 승단)를 실현하는 탐마라차(Dhammaraja), 未來佛, 轉輪聖王로 이해되었다.(김홍구, “상좌부 불교의 정치적 영향력: 태국과 라오스 비교연구”, 󰡔21세기 정치학회보󰡕 (구, 부산정치학회보), Vol.11, No.2, p. 295) 즉, 국가권력의 정당성이 불교의 논리에 의해 설명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정치의 상징적 영역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유교와 달리 불교 스스로가 구체적인 정치권력을 장악하지도 않았고, 기독교처럼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정치체제의 용어는 매우 일반적이고 제한된 의미에서만 이해되어야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정치가 종교나 철학과 깊은 관련을 가졌던 전통 사회에서 불교는 사회 전체의 안녕과 질서, 그리고 인간 사이의 적절한 관계에 대해 포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불교와 승려들이 본질적으로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에 무감각하고, 오히려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정몽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儒者의 도는 모든 일용의 평상사에 있습니다. 음식과 남녀는 모든 사람이 같이 하는 바이나 거기에 지극한 이치가 있으니, 요순의 도가 또한 다른 것이 아닙니다. 動靜語黙이 올바름을 얻으면 이것이 곧 요순의 도요, 시초가 심히 높고 행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저 불씨의 교는 그렇지 않아서, 친척과 절연하며 남녀를 끊고, 홀로 巖穴에 앉아 풀로 짠 옷을 입고, 나무열매를 먹으며 觀空 寂滅을 숭상하니, 어찌 이것이 정상적인 도이겠습니까? 정몽주, 󰡔高麗史󰡕 卷11, 列傳 30, 鄭夢周. 불교와 대비시키는 정몽주의 유교 이해는 󰡔中庸󰡕의 다음 구절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子曰 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中庸󰡕 朱子章句 13); 君子之道 辟如行遠必自邇 辟如登高必自卑(󰡔中庸󰡕 朱子章句 15)


고려말과 조선초의 불교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대체로 이러한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가장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비판으로는 정도전, 󰡔佛氏雜辨󰡕을 보라.
즉, 불교의 관심은 오직 자기의 구원(獨善)에만 있다고 본다. 원시불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몽주 시대의 불교는 상당정도 그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세상에 대한 유학의 관심은 강렬하다. 고려말의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맹자가 이르기를, ‘禹는 천하에 물에 빠진 자가 있으면 자기가 빠진 것 같이 생각하고, 稷은 천하에 주린 자가 있으면 자기가 주린 것 같이 생각한다’ 하였으나, 천하의 물에 빠진 자와 굶주린 자를 우가 몸소 빠트린 것도 아니요 직이 그 먹는 것을 막은 것도 아니거늘, 왜 단연코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 사양하지 아니하였겠습니까. 하늘이 大人에게 자리를 내린 것(降任)은 본래 이런 사람을 구제하고자 한 것이라, 진실로 곤궁하여 告할 데 없는 자를 보고 活然히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면, 어찌 하늘이 강임한 뜻이리요. 󰡔高麗史󰡕 列傳 23, 李齊賢傳.


伊尹은 “누구라도 요순의 혜택을 받지 못하면 자기가 구덩이 속에 떠민 것처럼 생각했으니, 천하를 자기 책임으로 여긴 것이 지극했” 󰡔牧隱集󰡕, 「覺菴記」.
으며, 范仲淹은 “선비는 마땅히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뒤에 즐긴다”고 말했다. 󰡔三峰集󰡕 卷4, 「二樂亭記」.
또한 張載는 “천지를 위하여 뜻을 세우고 생민을 위하여 도를 세우며, 옛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문을 잇고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연다”고 말했다. 爲天地立心 爲生民立道 爲去聖繼絶學 爲萬世開太平(󰡔近思錄󰡕 2-95.)
즉, 그들의 이상은 단지 인간 세계의 구원이나 당대의 구원을 넘어, 천지와 영원한 세대의 평화를 갈구했다.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의 불교가 반드시 비정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교는 대체로 왕권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근거나 국가 및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구복적인 역할에 동원되어, 성리학만큼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불교는 “복을 닦고 죄업을 소멸시키는 도량”(修福滅罪之處) (󰡔三國遺事󰡕 권3, 興法)으로 이해되었고, 호국 삼부경으로 仁王經, 妙法蓮華經, 金光明經 이 있었다. 고려의 팔만대장경은 그러한 불교 이해의 결정판이다.

그런데 신라말과 고려초의 불교가 시대적 참상의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태조 왕건과 진철대사 이엄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태조가) 어느 날 한가한 저녁을 틈타 가만히 禪扉에 이르러 묻기를, “제자가 삼가 慈顔을 대하여 바로 소박한 간청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금은 국가의 원수가 점점 시끄럽게 굴고 이웃한 적이 번갈아 침입하므로, 마치 초나라와 한나라가 서로 대치하여 자웅이 결정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3년 동안에 이르기까지 항상 二兇을 가까이 두고 있어서 비록 사이좋게 살아가고자 간절히 바랐으나, 서로 죽고 죽임이 점점 더해만 갔습니다. 과인은 일찍이 佛誡를 입어 은연중에 자비로운 마음을 나타내었는데, 침입자를 너그러이 대했다는 허물을 남겨 마침내 몸을 망치는 화를 당할까 두렵습니다. 대사는 만리를 사양하지 않고 와서 삼한을 교화하여 불타는 강토를 구하고 도리에 맞는 말로 깨우쳐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대사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무릇 道는 마음 속에 있고 일(事)속에 있지 않으며, 法은 자기로 말미암지 남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제왕과 필부는 닦을 바가 각기 다릅니다. 비록 전쟁을 행한다 하더라도 백성을 더욱 불쌍히 여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왕자가 사해를 집으로 삼고 만민을 자식으로 삼아, 무고한 무리를 죽이지 않고 죄 있는 무리를 처단함은 모든 선행을 받드는 바니 이를 弘濟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眞澈大師碑文」, 󰡔朝鮮金石總覽󰡕 上.


「弘濟」의 정치사상은 불교가 현실적인 정치적 문제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는 논리와 정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유학처럼 현실정치에 직접 뛰어들지도 않았고, 정치와 정치제도에 대한 포괄적인 견해를 발전시키지도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 원리에 따른 구체적인 정치체의 상이 어떤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2) 붓다의 정치원리: 법치, 분배, 관용, 공평

그러나 주목할 점은 붓다가 첫째, 정치가들의 규범과 건전한 정치를 위해 훌륭한 조언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둘째, 「상가」라는 고대 인도의 부족적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승단 조직을 「상가」와 동일한 방식으로 조직하고 운영했다는 점이다.
먼저 붓다는 죽이고 이기고, 슬픔을 초래하고, 타인을 괴롭히는 사회적 참상의 원인을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1】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보시하지 않을 때 가난함이 퍼졌고, 가난함이 퍼지다 보니 도둑 짓이 퍼지고, 도둑 짓이 퍼지다 보니 무기가 생기고, 무기가 생김에 따라 살생이 퍼지고, 살생이 퍼지다 보니 거짓말 하는 것이 퍼지고, 거짓말 하는 것이 퍼지다 보니 이간질하게 되어, 따라서 나쁜 말을 하게 되어 빈말을 하게 되고, 따라서 탐욕이 생기고, 성냄이 생기고, 邪見이 생기고, 따라서 부모, 자식, 비구 브라흐만들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들의 수명이 짧아지고, 맛이 사라지고 인간들의 마음에 탐욕과 성냄이 퍼지고, 살생하는 생각이 들어 마침내 날카로운 무기를 휘두르며 서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DN: III. Cakkavatti sihanāda sutta, pp. 114-116.(난다라타나, 위의 논문, p. 383에서 재인용)


【2】파실타요(Vāsettha), 그 다음은 그 중생들이 모였다. 그들이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지식들이여, 착하지 않은 법들(惡行)은 모두 중생들에게만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는 것(adattādāna)이 보이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만약 우리는 분명하게 한 사람을 우리들의 우두머리로 선택하게 되면, 그는 우리에게 자세히 말할 것을 말해주고, 자세히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금지시킬 것을 금지시키고 벌 줄 사람에게는 벌을 줄 것이다. 우리도 그에게 대신 쌀 한 부분으로 보답하자고 결론하였다. …
파실타요, 중생들이 결정했다는 뜻으로 Mahā sammatha라는 초기 이름이 생기고, 국토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Khattiya(귀족)이라는 두 번째 이름이 생기고, 법으로 남을 기쁨을 준다(남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Raja(왕)이라는 세 번째 이름이 생긴 것이다. DN: III. Agga̵n̄n̄a-sutta. pp. 80-81.(난다라타나, 앞의 논문, p. 380에서 재인용)


즉, (1) 사회적 재분배의 결핍으로 인한 가난, (2) 일반인(중생)들의 무지에 의한 악행이 사회적 참상의 원인인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분배를 실시하여 적절한 경제적 평등을 이루도록 하고, 사회적 분쟁에 대해 현명하게 판단하고 조치를 취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이 통치자로서의 왕의 기원이다. 이것은 요컨대 경제적인 평등과 정의로운 법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치의 항구적인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참다운 왕은 ‘법다운 인간’이 되어야 하며, 법(dhamma)에 의해 통치해야 한다.

【1】여법한 진리의 왕은 법으로 나라와 국민을 다스리고, 무기들로 국민을 억누르지 않고 부정의를 버리고 정의로 국민을 다스리는 왕은 중생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평화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

【2】전륜왕은 여법하고 정의롭게 법다운 통치자로서 동서남북을 이기고 국민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지키고 무기를 버리고 여법하게 이 땅을 이기고 산다. DN: III. pp. 58-59.(난다라타나, 앞의 논문, p. 381에서 재인용)


즉, 왕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로운 법에 의해 정치를 실시해야 하며, 그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들에게까지 미쳐야 한다.
전륜왕의 정치적 임무는 4가지이다: (1) 여법하게 나라를 통치하는 것. “법을 존경하고, 법을 으뜸으로 삼고, 법을 깃발로 삼아, 법을 대장으로 삼아, 자기 이웃 국민들로부터 법다운 행위에 인도하라.”(DN:III, Cakkavatti sihanāda sutta, p. 100.; 난다라타나, 앞의 논문, p. 382에서 재인용)
(2) 국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 (3)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 (4) 전문가 또는 지혜로운 자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다시 부연하면, (1) 전통과 관습에 의해 형성된 법을 보호하고 잘 발전시키며, (2) 국민들의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필요사항을 충족시키고, (3) 재산을 얻고 재산을 보호하기를 원하는 국민들의 욕망을 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증식시키고 안전하게 보호하며, (4) 농사, 상업, 산업, 전쟁 등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과 지혜로운 자들의 충고를 잘 받아들여 모든 부분을 적절히 처리하도록 해야 한다.
훌륭한 법의 제정과 시행, 법에 의한 통치, 국민의 기본적 생활의 충족, 복지의 개선과 재산권의 보호, 국가의 문제에 대한 공론의 활성화는 오늘날의 정치에서도 여전히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붓다의 정치적 식견은 놀라운 바가 있다.
다음으로 전륜왕이 해야 할 10가지 규범(十王道, Dasarāja Dhamma)과 하지 않아야 할 4가지 규범(四非道, Cattāri agatīni)이 있다. 10가지 규범은 다음과 같다 dānam sīlam̖ sīlam̖ pariccāgam̖ - ajjaavam̖ majjavam̖ tapam̖
   akkodho avihim̖sāca - khantīca avirodhatā. (난다라타나, 앞의 논문, pp. 384-386에서 재인용)
:

① dāna(보시): 국민에게 복지를 실시해야 한다.
② sīla(계): 전통과 관습, 윤리적 덕목을 실천해야 한다.
③ parityāga(봉사): 재산, 심신의 힘을 바쳐, 자신의 안락을 버리고 국민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해야 한다.
④ ajjava(솔직함): 인간은 사비도에 의해 항상 편견과 잘못된 판단에 빠진다. 이 잘못을 버리고 공평하게 결정해야 한다.
⑤ majjava(부드러움; 유연심): 국민을 성내게 해서는 안 된다.
⑥ tapam(고행자의 마음가짐): 왕위에 있다고 해서 교만하고 나태하면 안 된다. 언제나 6근을 잘 다스리고 수행자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⑦ akkoda(분노하지 않는 것) 국민에게 성내고 급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 분노에서 벗어나 친절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⑧ avihim̖sā(잔혹하지 않음, 불살생, 자비): 왕은 32개의 큰 벌을 주지 말아야 한다. 범죄자에게 잔혹한 마음으로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고치게 해야 한다.
⑨ khanti(인내; 忍辱): 통치나 결정을 내릴 때, 문제가 생길 때 무ㅈ건 반대하지 말고 국민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한다.
⑩ avirodhatā(반대하지 않음): 여러 반대 의견을 거부하지 않고 충고를 들어야 한다.

십왕도를 요약하면 결국 법, 분배, 헌신, 관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전륜왕의 4대 임무를 보다 상세히 설명한 것이다. 四非道는 인간이 빠지기 쉬운 약점에 관한 것이다.

① Chandā(편향성): 무엇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뜻한다.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편견이 생겨 올라른 판단을 할 수 없다. 그 경우 올바른 사람에게 적합한 일과 책임이 주어지지 않는다.
② Dosā(성냄, 분노): 국민과 신하의 잘못에 대해 분노하지 않아야 한다. 왕과 국민・신하 사이에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③ Bhayā(두려움):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면, 의견이 다른 자를 공격하게 된다.
④ Mohā(어리석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하는 지혜가 없으면, 바른 것을 버리고 바르지 못한 것을 하게 된다.

사비도는 정치가의 건전한 판단력과 용기와 관한 문제이다. 즉, 정치와 왕이 발생하게 된 원인중 중생의 악행과 관련된 부분이다. 왕조차도 이런 잘못에 빠지면 정치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사비도는 통상적인 정치가가 일반적으로 저지르기 쉬운 오류와 약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이른바 四攝法 혹은 四攝事는 십왕도와 사비도를 간략하게 재종합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섭법은 이러하다: ① Danā(布施攝): 국민의 경제활동을 돕고, 부를 적절히 분배하는 것.  ② Peyya vācā(사랑스러운 말, 愛語): 국민에게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말을 하는 것. 왕의 말은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자기사랑을 벗어나 이타의 친절한 말을 해야 한다. ③ Artha caryā(이로운 행위, 利行攝): 이해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남을 돕는 행위를 하는 것.  ④ Samānātmatā(同事攝): 모든 문제를 한쪽에 기울어 생각하지 않고, 특히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양쪽을 공평하게 하는 것.(난다라타나, 앞의 논문, p. 388에서 재인용)
붓다가 이런 정치적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가 왕자의 신분이었던 점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 붓다와 이상적인 정치체: 「상가」(僧伽)와 공화주의 - 협의공동체

다음으로 정치제도와 운영에 관한 붓다의 생각을 살펴보기로 하자. 붓다는 통치계급 사이의 정치적 원칙에 대해서 대단히 인상적인 말을 남기고 있다. 당시 인도의 정치제도는  10개의 부족적 공화국(republic)과 16개의 강력한 왕정(monarchy)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부족국가들은 왕정이 아니라 부족회의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그것을 Ganatantra 혹은 Samūhān̖d̖u라고 불렀다. 그런데 Ganatantra는 Samūhān̖d̖u와 달리 국민의 선택 없이, 각 가문의 수장들이 협의하여 통치했다.
10개의 부족국가중 Mithilā(미틸라)국과 Vesāli(비사리국)은 Vajji(밧지) 가문이 통치하였다. 그들의 통치규범은 󰡔대열반경󰡕(Mahā parinirvān̖a sutta)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밧지 가문의 통치방식은 Ganatantra로서, 붓다를 배출한 Sākya 가문의 Magadha국과 동일했다. 붓다가 열반직전에 설명한 밧지 가문의 통치 규범은 다음과 같다. DN: II. Mahāparinibbāna sutta. pp. 112-113.(난다라타나, 앞의 논문, p. 389에서 재인용)


① 자주 모임.
② 조화롭게 모여, 조화롭게 행동하여, 조화롭게 헤어진다.
③ 전에 없었던 전통과 일치하지 않는 법을 만들지 말 것. 있는 법을 잘 지킨다. 옛 밧지의 법을 따른다.
④ 어른을 존경하고 그들의 말을 잘 들음.
⑤ 기혼 여성이나 미혼 여성들에게 나쁜 행동을 하지 않음.
⑥ 자기 국내의 성지들을 존경하고 잘 관리하는 것.
⑦ 종교 지도자들에게 잘 대하고, 국내에 들어 온 외부 종교지도자들을 잘 모시는 것. 또 오지 않은 외부 종교지도자들을 초대하는 것.

이러한 원칙은 간단하지만, 정치의 핵심적인 사항이다. 특히 자주 모이는 일을 정치의 첫 번째 규범으로 제시한 것은 현대 공론정치의 관점에서 비추어서도 놀라운 견해라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인간의 모든 “partnership”은 “함께 말하기”에서 시작되며, 이것을 연결고리로 해서 계속적으로 더 확장해 나가든가 아니면 “함께 말하기”가 깨어짐으로 인해서 축소·소멸되든가 한다. 따라서 함께 말하는 “방식”은 “정치적인 것”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partnership"의 성격과 스타일, 즉 그것의 ‘Regime’ 또는 ‘질’을 규정하고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김홍우, "한국정치사상 연구의 새로운 지평", 󰡔정치사상의 전통과 새 지평󰡕 (서울: 서울대학교 정치학과·현대사상연구회, 2005), p. 7.


첫 번째에서 세 번째까지의 규범은 사실상 인류의 항구적인 정치적 규범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즉시 모이고, 훌륭한 의견을 활발히 개진하여 좋은 방책을 마련하며, 그에 의해 형성된 공론이 법으로 제정되고 준수될 수 있다면,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치이자 최고의 정치체인 것이다.

“실현가능한 이상사회”란 과연 어떤 곳일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아마도 첫째, 좋은 의견들이 자유롭고 풍부하게 개진되는 곳(1단계)이고, 둘째,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곳(제2단계)이고, 셋째, 힘이 실린 좋은 의견들이 본래의 의도대로 실현되는 곳(제3단계)일 것이라고 상상해 보았다. 김홍우, 앞의 글, p. 14.


그리스 민주정의 이상도 그와 같은 것이었으며, 현대 민주주의의 이상도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제도와 다른 모든 정치적 원리들은 이것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이것을 실천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다.
특히 일곱 번째의 규범은 처음 세 개의 규범을 실천하기 위한 기본적 규범이다. 즉, 종교처럼 근본적이고 대립이 격심한 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을 가졌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가진 종교지도자를 초청해야 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의미의 개방성과 관용성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정치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다원성(plurality)과 차이(difference)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깊은 성찰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모든 정치적 삶의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가능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적이다. Hannah Arendt, 󰡔인간의 조건󰡕(서울: 한길사, 1996), p. 56.


‘공론 영역의 실재성’은 수많은 측면과 관점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초해 있다. 이러한 측면과 관점들 속에서 공동세계는 자신을 드러내지만, 이것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척도나 공통분모는 있을 수 없다. 공동세계가 모두에게 공동의 집합장소를 제공할지라도, 여기에 모이는 사람들의 위치는 상이하다. 두 대상의 위치가 다르듯이, 한 사람의 위치와 다른 사람의 위치는 일치할 수 없다. 타자에게 보이고 들린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각자 다른 입장에서 보고 듣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적 삶(public life)의 의미이다. Hannah Arendt Ibid, pp. 110-111.


요컨대 붓다의 정치적 사유는 구체적인 정치제도나 정치체의 구상으로 확대되지도 않았고, 승려들이 그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지도 않았지만, 최선의 정치체가 지녀야 할 본질에 대해 깊이 있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깊은 정치적 사유의 전통이 2500년이 지나도록 불교 교단을 존속시켜 온 진정한 힘인지도 모른다. 예컨대 불교 교단(sangha, 僧伽)은 원리적인 측면에서 완전한 평등과 협의에 의해 운영되었다.


불교 상가는 대체로 민주주의 단체라고 묘사되어 왔다. 그 이유는 거기에 專制的 우두머리가 없고 명령과 책임이라는 권위주의적 끈이 없었기 때문이며, 또 공동체 전체가 함께 결정을 내리는 공인된 절차가 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생활에 관한 심의에 있어서는 틀림없이 상가의 구성원 각자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Trevor Ling, The Buddha (London: Temple Smith, 1973), p. 130(붓다 닷나나야케, 앞의 책, pp. 89-90에서 재인용) 「상가」라는 말은 불교가 출현하기 이전의 북동 인도에서 공화주의 또는 부족제도라는 일종의 정치제도를 가르켰다. 불교 수행자들의 조직을 나타나기 위해 상가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불교도들의 혁신이었다.(위의 책, p. 73) 상가의 운영자는 붓다가 아니었으며, 상가내의 지위는 법과 계에 의존했다. 아난다는 붓다가 죽기 전에 상가의 질서에 대해 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붓다는 상가의 질서는 담마(진리)에 의지하여 보호받고 구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러므로 아난다야, 너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自燈明 法燈明)라고 말했다.(위의 책, p. 55) 상가의 계율은 원인 없이 미리 정해지지 않았으며, 원인이 생길 때만 제정되었다. 계율을 어긴 자에 대해서는 1. 잘못을 지적하고 충고하며, 처벌에 대한 결정은 법을 어긴 자의 앞에서만 행하여졌다. 2. 법을 어긴 자로 하여금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도록 하였다. 비난받는 자는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를 가졌다. 계율을 담당하는 승려는 다음과 같은 규범을 따라야 했다: 1. 순서대로 이야기함, 2. 진실로서 이야기 함. 3. 부드럽게 이야기 함. 4. 이익을 이야기 함. 5. 자비심을 가지고 이야기 함(난다라타나, 앞의 글, pp. 390-391)


민주주의가 모든 정치적 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대의 뛰어난 정치제도를 민주주의라고 반드시 명명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현대 인류가 창조해 낸 다수의 정치적 선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고대 불교가 성취했던 정치제도가 근본적인 의미에서 그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면 두 용어를 함께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현대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고대의 「상가」와 유사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체제 또는 제도는 종교적 경건함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


3. 전통적 「생명사상」의 정치관과 편견: 반이성과 반정치에의 가능성

이상에서 정치와 정치제도에 대한 붓다의 사유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른바 「생명사상」 또는 「생명가치」라고 하는 현대의 새로운 지적 조류에는 정치에 관한 독특한 견해가 깔려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생명사상」에는 일종의 정치 허무주의 또는 정치 무용론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시민운동단체가 지금 전국에 2만개나 퍼져 있지만 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구의 시민운동에서는 하버마스나 한나 아렌트에 의해 너와 나의 소통에 의해서 형성되는 사회, 시민사회를 가장 중심에 두고 정치나 경제나 문화를 생각하는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너와 나의 소통, 인간적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하공심적인 소통이고 사회적 소통성이며, 사회적 공공성의 소통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안 됩니다. …철학적 개념 안에 사회적 소통성이 우주사회적인 소통성, 공공성으로 변해야 합니다.” 김지하, 앞의 책, p. 40.


김지하는 사회적, 인간적 소통성을 넘어서 이른바 우주사회적 소통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정치를 넘어선 종교의 세계이다. 김지하는 또한 "이 때 중요한 것이 풍류, 요즘 문자로 해서 문화운동“ 김지하, 앞의 책, p. 34.
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정치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종교와 문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앞서 붓다의 정치관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근본을 지향하려는 이러한 초월적인 노력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정치를 배제하고, 또는 정치를 가로질러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생명사상이나 생명가치가 반드시 인간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의 실현은 결국 인간의 관심사항이며, 인간을 떠나 생각될 수 없고, 결국 인간의 동의와 합의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붓다는 깨달은 자였지만, 정치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또한 정치를 종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그는 정치를 초월하거나 환원하려고 하지 않고 정치가 해야 할 일을 잘 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정치는 우주적 소통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자주 모여서 잘 이야기 하고, 잘 결정해서, 결정된 것은 바꾸지 말고 잘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불교의 수행자 조직인 상가는 이러한 원리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것은 H. Arendt나 Habermas가 말하는 공론과 숙의(deliberation), 그리고 그에 의한 법의 제정과 준수와 동일한 정신이다. 이것은 평범하지만, 인류의 정치는 이 평범한 수준에도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인간에게 있어, 생명사상과 생명가치는 결국 정치의 문제이다. 그러나 정치는 매우 제한적이며 그 발전은 대단히 느리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2만개가 넘는 시민단체의 활동은 답답하고 지리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정치가 아니라, 정치의 주체인 인간이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자들에게 정치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느리고, 한계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사상은 정치를 초월하여 곧바로 종교적이고 예술적인 화합 또는 일치에 도달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요컨대 생명사상이 얼마나 현실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는 결국 정치에 얼마나 인내할 수 있는가, 혹은 얼마나 철저하게 정치적이 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생명사상은 인류에 나타났던 수많은 백일몽중의 하나로 나타났다가 사라질 것이다.
둘째, 생명사상은 「인간성의 혁명」의 필요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김지하는 “마음보를 고쳐야 합니다”, 또는 “마음을 바꾸고, 사상을 바꾸고, 문화적 표현을 바꿔야 합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1960년대초 박정희도 국가의 긴급한 과제로 "지난날 우리 민족사상의 악유산을 반성하고 이조당쟁사 일제식민지 노예근성 등을 깨끗이 청산하여 건전한 國民道를 확립하는 일이다. 인간이 혁명되지 않고는 사회재건은 불가능하다" 박정희, 위의 책, p. 2.
고 말했다. 신채호도 그러했으며, 안창호, 이광수도 그랬으며, 그리하여 결국은 모든 한국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한국인들은 이러한 생각에 매우 익숙한 민족이다.
그러나 D. Hume은 “인간의 본성은 바꿀 수 없으나, 관습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영국인의 생각이다. 한국인들은 형이상학적이고 근본주의적인 반면, 영국인들은 경험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경향이 있다. 영국인들은 뛰어난 정치적 감각(political sense)의 소유자들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원리는 대체로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인들은 인간성을 개조하거나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절한 법률과 제도를 통해 인간성은 충분히 개선되거나 통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의 정치적 삶은 서구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매우 평화롭고 질서 잡힌 것이었다. 수다한 전쟁이 있었지만, 서유럽처럼 전쟁과 평화의 구분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서구는 근대민주주의가 탄생하기 전까지 일상적인 전쟁상태에 살고 있었다. 그 참혹한 경험이 민주주의와 같이 인간성에 대해 매우 현실적이고 관용적인 정치사상과 제도를 가능하게 했는지 모른다.
「인간성의 혁명」이라는 사유는 오늘날 좀 더 가혹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나치즘이나 공산주의와 같은 현대의 전체주의(totalitarianism)는 인간 본성의 개조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전체주의는 과거의 독재(autocracy)와 다르다. 과거의 독재는 일종의 專制政(monarchy)으로, 통치자의 인격에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현대의 전체주의는 인간의 본성과 인간이 사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인간의 지적 능력에 의해 바꿀 수 있다는 현대문명의 세계관과 직접 연관되어 있는 현상이다. 과학(science)은 인류가 입증한 자기의 능력이다. 정치적으로 그것은 고도하게 통제적이고 조직화된 합리성의 체계(system of rationality)로 나타나고 있다. M. Weber는 그러한 근대의 전형적인 조직을 관료제에서 목격하였다. 관료들은 철제의 새장(iron cage)에 갇힌 존재들이다. 이 합리성의 체계는 말과 행위의 세계를 불합리한 것으로 만들며,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은 일종의 군중(mass)이 되는 것이다. 나치와 공산주의자들은 가스실과 강제노동수용소를 통해 인간을 개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명사상의 생각은 수사학적인 의미에 멈추는 한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적인 근본주의와 동일하거나, 정치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보편주의적 원리에 입각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하나의 세계관에 입각한 것일 뿐이다.
그러한 사유는 인간의 본성이 이해될 수 있다는 사유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답할 수 있지만,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성 혁명」론은 신의 담론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치로 확대될 때 전체주의가 탄생하는 것이다.
셋째, 현대 한국의 생명사상은 상당정도 탈이성적이며 친감성적이다. 김지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律呂에 의한 치료, 즉 우주적 예술, 우주적 음악에 의한 치유를 포함해야 합니다. 김지하, 앞의 책, p. 35.


이 문화혁명, 미적 교육, 율려적인 구조, 유희충동을 압축한 것을 나는 풍류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문화운동의 중요한 원리는 인문학과 생태학을 결합할 수 있는 원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ibid.


처방은 하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모두 춤추고 노래 불러라’는 것입니다. 김지하, 앞의 책, p. 48.


즉, 반생명현상에 대한 치유는 우주적인 의미를 지닌 음악이나 춤, 즉 감성에 의존한다. 이성은 언급되지 않는다. 하버마스나 아렌트의 공론장이나 사회적 소통론이 우주적 소통론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는 사유와 이러한 생각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성은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의 반생명현상을 초래했다. 동양은 그 반대이다. 감성적이고 생명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신화적 인식에 가깝다. 전근대의 동양 사회가 반드시 인간적이고 도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동양 사회의 대부분의 진보는 서구에 힘입은 것들이다. 인권, 민주주의, 대화, 평등, 자유, 위생, 교육, 풍요 등은 모두 서구적 이념과 제도, 지식과 기술에 의해 성취된 것들이다. 현재의 동양사회 역시 서구보다 더 훌륭하지는 않다. 많은 동양사회가 여전히 낙후되어 있고, 비인권적인 상황에 처해 있으며, 교육의 결여로 인한 무지와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요컨대 근대 서구문명의 「이성」은 한 측면에서만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참혹한 파괴를 수반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문명을 창조해냈다. 문제는 어떤 이성이냐는 문제이며, 어느 정도의 이성인가의 문제로 생각된다. 합리적이고 대화지향적인 이성은 정치공동체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불가결하다. 민주주의는 그러한 능력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이성은 감성처럼 인간을 완전히 통합시킬 수 없다. 절제된 통합, 거리를 둔 통합만이 가능할 뿐이다. 감성은 절대공동체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완전한 파괴와 분리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감성과 예술, 혹은 춤과 노래만의 강조는 어떤 의미에서 반정치적이다. 현실가능하고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이상적 정치공동체는 이성에 기초하고 감성에 의해 보완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생명사상의 정치관을 검토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생명사상은 다음과 같은 정치적 문제점을 깊이 성찰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이상과 현실의 조화에 관한 문제이다. 예컨대 리얼하고 통렬한 정치적 견해의 대표자로 알려진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과 살아나가야만 하는 방식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상을 터득하기 위해 현실을 소홀히 보아 넘기는 사람은 자신의 구제는커녕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슨 일에서나 선을 최우선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틈바구니 속에서 파멸하게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자기의 지위를 보존하려는 군주는 선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악인이 되는 법도 알아야 하며, 또한 그러한 경륜을 필요에 따라 행사도 하고 중지도 할 줄 알아야 한다. N. B. Machiavelli, 󰡔君主論󰡕. 김영국 역(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pp. 153-154.


생명사상은 이러한 충고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명한 계몽사상가 볼테르 역시 “정치가가 된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범죄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생명사상은 정치가 지닌 이러한 통렬함을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사상을 지닌 자라해도 국방의 의무를 지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생명사상을 소유한 자가 대통령이 되었다 해도 자국을 침범한 적군을 살해하도록 명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무한한 인명의 손실을 지속시키는 것이며,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이 신속하게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면, 생명사상을 지닌 정치지도자는 어떤 정치적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이것이 정치의 현실이다.
생명정치나 생명사상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러한 현실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러한 역설적인 현실에 대해 답변해야 하며 자기의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생명정치가 이러한 정치현실을 뛰어넘어 존재하고자 한다면, 또는 현재의 문제에 대결하지 않고 미래의 비전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그 정치적 비전은 현실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미래의 비전을 실현시키고자 한다면, 바로 이곳의 정치와 대결하면서 스스로를 성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그러한 점에서 생명정치는 정치와 책임(responsibility)의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성공한 정치는 모두 좋은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우리가 말한 것은 정치가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공이 모든 것을 신성화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우리가 말한 것은 실패란 과오이며, 정치에서 누구도 실패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성공만이 처음에 과단성과 신념이었던 것을 결정적으로 합리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정치의 저주받은 운명은 [정치가의] 가치들을 사실들의 영역 속에 나타나게 해야 한다는 데 있다. M. Merleau-Ponty, 󰡔휴머니즘과 폭력󰡕 박현모·유영산·이병택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4, p. 34.


정치는 훌륭한 것을 주장하는 것만으로 족한 세계가 아니다. 생명정치나 생명사상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 사상은 종교나 형이상학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정치와는 매우 간접적인 관계에 국한되어야 한다. 그러나 생명사상이 정치적으로도 유효한 것이 되고자 한다면, 동기만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것이 훌륭한 것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 정치공동체의 운명은 실험적인 대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목숨을 건 결단행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생명사상 혹은 생명정치는 이러한 운명에 직면하고 견디면서 정치적 행위에 투신할 수 있는가?
셋째, 생명사상과 생명정치는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고, 동시에 정치의 가능성을 이해해야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의 절대악은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악이 근본적인 원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기독교에서도 원래의 인간은 완전한 존재였다. 단지 완전한 지혜를 얻으려는 욕망에 굴복했을 뿐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악이 無明, 즉 존재의 실상에 대한 무지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Arendt에 의하면, 유태인 대량학살에 관여하여 기소된 아이히만은 악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의식하지 못했던 생각하지 않음(thinklessness)의 산물이었다.
인간은 분명히 한계를 가진 존재이지만, 그러나 그 한계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생각함, 혹은 성찰(reflection)을 통해 우리를 개선할 수 있다. 그러나 한계가 근본적인 것이 아니므로 우리의 개선이 용이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관습은 그만큼 완강한 것이다.
그런데 Q. Skinner는 “다른 사람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정치를 통한 자아의 실현에 의한 것”(「정치적 자유의 패러독스」)이라고 주장했으며, 칸트는 민주주의에 대해 “좋은 정부는 악마의 종족들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Kant)고 말했다. 비록 인간의 약점을 쉽게 개선할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는 가장 유력하고 유효한 노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보다 부드럽고 제한적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배태된 인간 유형은 총체적 변혁을 추구하면서 이상사회를 구축하고자 삶의 모든 것을 투척하는, 자기희생적 변혁에 복무하는 인간이라 하겠다. 다렌도르프의 개념을 빌리면, 그러한 인간유형은 「총체적 인간」(total citizen)인 것이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의 사회를 이상화하는 동시에, 과도한 도덕적 의무를 개인에게 부과한다. 이들이 실제의 민주주의를 대면했을 때 총체적 인간에 대한 강조가 강했던 것만큼, 민주주의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전면적 자기부정이든 혹은 자기반성이든 지난날의 자신과 급격히 단절할 수밖에 없었다. 총체적 인간은 민주주의하에서 자율적인 자기정체성을 형성하기가 쉽지 않다. … 민주화 이후의 오늘날에는 총체적 인간보다 「부분적인 인간」(partial citizen), 즉 민주적 정치과정에서 적극적이되 자신의 자율적 가치와 내면세계를 가지면서 자신의 분야에서 실천하는 민주적 시민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 보비오가 말하듯이, 「민주주의의 과도함만큼 민주주의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은 없다」라고 생각한다.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서울: 후마니타스, 2002), pp. 229-230


그리고 생명정치가 원하고 있는 인간의 변화, 그리고 정치의 변화는 붓다가 말했던 매우 간단한 원리를 어떻게 실행하는가에 달려있다. 조선의 이상적인 정치가였던 세종의 정치에 대해 이율곡은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예로부터 큰일을 성취한 군주가 지극한 정치를 흥기시키려 했을 땐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현자를 대하였는지라, 군신간의 수작이 마치 메아리 울리듯 하였으며 마음을 열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위아래가 서로 미쁘게 되어 정치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요순시대에는 말하지 않아도 신실함이 있고 의도적으로 하지 않아도 교화가 이루어져 마치 언어가 필요없었던 것 같았지만, 고서를 상고해 보면 요순이 정신(廷臣)들과 정사를 의논하면서 자신의 찬성과 반대의 뜻을 분명히 답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더구나 후세이겠습니까. 아조의 세종과 세조 같으신 분은 군신들과 서로 친하기를 가인(家人)이나 부자처럼 하였기 때문에 뭇 신하들이 은혜와 덕에 감격하여 사력을 다했던 것입니다. 󰡔宣祖實錄󰡕 宣祖 2年 9月 25日(乙未)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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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思錄󰡕(주자)
󰡔牧隱集󰡕(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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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 宣祖實錄󰡕
󰡔中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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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명과 평화의 길

<발표자 소개>

김영수 (金永壽,  Kim, Young Soo)

<학력>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졸,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과 졸 (정치학 석, 박사)

<주요 경력>
서울대 정치학과, 성균관대 정외과, 한국외국어대 정외과 강사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대한민국학술원 학술총람편찬위원회 실무간사
일본 동경대 법학부대학원 객원연구원
일한문화교류기금 초청연구원
현재,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연구원,
현재, 국민대 일본학과, 서울대 정치학과 강사
현재, 한국동양정치사상학회 편집이사
현재, 한국정치사상학회 연구이사

<주요 논문 및 저서>
「韓末 高宗의 政治的 役割에 대한 一硏究」, 서울대학교 정치학석사 학위논문, 1990.
“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정치적 역할”, 󰡔한국정치사상󰡕, 박영사, 1991.
共譯書: L. Strauss and J. Cropsey(eds.) History of political philosophy(2nd ed.; Chicago: Univ. of Chicago Press, 1981); 󰡔서양정치철학사󰡕(서울: 인간사랑, 1992).
󰡔高麗末과 朝鮮朝 建國期의 政治的 危機와 克服過程에 關한 硏究󰡕, 서울대학교 정치학박사 학위논문, 1997.
“한국 정치의 근대성에 관한 의문: 약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강한 유혹”, 󰡔현대사상󰡕 2, 민음사, 1997.
“고려 공민왕대 초반기의 개혁정치와 반개혁정치의 대립”, 󰡔한국정치연구󰡕 제6호,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1997.
“정치와 운명: 고려말 恭愍王의 정치적 방황에 나타난 風水·圖讖과 儒敎의 대립을 중심으로”, 󰡔정치외교사논총󰡕 제17집, 한국정치외교사학회, 1997.
“갑오농민군과 興宣大院君의 정치적 관계에 대한 연구: 李秉輝, 全琫準 供草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사회과학󰡕 제19권 제3호,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1997.
“여말선초 정치운영론의 변화”, 󰡔역사와 현실󰡕 제29호, 1998.9
“토지와 정치: 고려말 조선 건국세력의 전제개혁을 중심으로”, 󰡔한국정치사상의 조명󰡕, 한국정치외교사학회, 1998.
“威化島回軍의 政治: 崔瑩·李成桂의 遼東攻伐政爭과 李穡·李成桂의 政治改革·正統性論爭”, 󰡔韓國政治學會報󰡕 33輯 1號, 1999年 春.
“高麗末と朝鮮初の性理學と公私觀の變動”, 󰡔日韓で初めて語る公私問題󰡕, 日本將來世代國際財團, 1999.
“獨立의 政治: 高麗 恭愍王의 反元政策”, 󰡔韓國政治硏究󰡕 第8·9合倂號, 서울大學校 韓國政治硏究所, 1999.
“역사안의 진리: 여말선초 지식인들의 문제의식과 역사적 태도”, 󰡔전통과 현대󰡕 1999년 가을호.
“李穡과 鄭道傳: 麗末鮮初 정치사상의 갈등”, 󰡔韓國政治思想의 비교연구󰡕(서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學術總攬: 政治學·행정학·사회학󰡕, 제54집, 대한민국학술원, 1999. (정치학 집필)
󰡒1960년대초 박정희의 정치리더십󰡓, 정윤재 편,『1960년대초 주요 정치지도자 연구』(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0. 10. 31). pp. 163-287
共譯書: James MacGregor Burns, Leadership(New York: Harper & Row, 1985); 󰡔리더십 강의󰡕(서울: 미래인력연구센터, 2000).
“여말선초의 역사적 도전과 실천성리학: 정몽주와 정도전의 <歷史-天道>論을 중심으로󰡓, 󰡔韓國政治硏究󰡕 第10號, 서울大學校 韓國政治硏究所, 2001.12.
“정치의 모험: 숨은 압제와 민주주의의 위기”, 한국정치학회, 󰡔한국정치학 50년: 정치사상과 최근 연구분야를 중심으로󰡕(서울: 한울 아카데미, 2001.3), pp. 43-85.
“高麗末 辛旽의 改革政治에 대한 硏究(上)”, 󰡔동양정치사상󰡕,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제 1권 제 2호, 2002.9.
“麗末鮮初 정치사상의 變動”, 李在錫 外, 󰡔韓國政治思想史󰡕 (서울: 集文堂, 2002.9)
“근대 한국의 실패와 정치적 리얼리즘(I): 조선 말기 興宣大院君 집권기의 정치와 정치리더십을 중심으로”,  󰡔동양정치사상󰡕,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제 2권 제 1호, 2003.3.
“고려말 신돈의 개혁정치에 대한 연구(中)”, 󰡔한국정치학회보󰡕 제 37집 2호, 2003.7.
“고려말 신돈의 개혁정치에 대한 연구(下)”,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 25집 2호, 2004.2
“근세 도쿠가와 일본의 정치와 윤리: 「赤穂事件」에 나타난 武士道의 「정치-윤리」의 갈등을 중심으로”, 󰡔정치사상연구󰡕 10집, 한국정치사상학회. 2004.5
“근세 도쿠가와 일본의 정치적 아이덴티티: 「赤穂事件」에 나타난 武士-庶民의 정치적 아이덴티티와 주체성을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38집 5호, 한국정치학회. 2004.12
“민주적 전환기의 한국정치와 의회정치의 위기: 공안-정치-항의”, 󰡔역사와 사회󰡕 제33집, 국제문화학회. 2004.12.15
“정치와 진리: 李珥의 공론정치론과 Arendt의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을 중심으로”, 󰡔유교문화연구󰡕 제9집, 2005년 2월. pp. 83-173.
“태종의 혁신적 리더십”, 󰡔선조에게서 배우는 혁신리더십󰡕, 문화재청. 2005.1
“왕과 정치: 인간의 한계와 공민왕의 정치”, 󰡔정치사상연구󰡕 제11집 1호, 2005. 6월. pp. 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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