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생명학연구원 대구 청소년 종합상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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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8(화)
생명 평화 선언  
우리는 인간, 사회, 자연 전체가 오늘 겪고 있는 ‘대혼돈(Big Chaos)’을 극복하는 길이 다름 아닌 ‘생명과 평화의 길’임을 믿으면서 오늘 그 ‘길’을 함께 나아가기로 결의한다.

그 첫 걸음이 생명, 우주생명의 역사를 기억하고 그 평화의 심각성을 다짐하는 것이라 판단하여 생명과 평화의 길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표명하고자 한다.

 

우주 생성

큰 혼돈 가운데 그 나름의 질서를 향한 요동과 폭발이 전개되어 오늘의 우주가 탄생하고, 줄기찬 생성과 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태양계가 생겼다. 대략 45억 년 전에 탄생한 지구는 한결같이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으면서 10억년이 경과할 즈음 최초의 생명체를 탄생시켰다.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한 이후에도 태양의 열 에너지 양과 지구 대기권의 화학적 성분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지만, 화석의 기록을 해독한 바에 따르면 지구상의 기후는 대폭적인 변화 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놀랍게도 지구상의 생명체가 생명의 터전인 자연환경과 교류하면서 생명적 안정성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진화를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의 진화가 자연선택을 통해 진행된다는 다윈의 설명과는 달리, 지구에서의 복잡화가 조성되면서 지구 생명 시스템 속의 생명체가 창조적으로 스스로의 생명유지에 적합한 여건을 조성했고, 그 과정에서 숱한 생물 종의 다양화가 이룩되었음에 대해 깊이 주목하고자 한다. 인간의 이성에 의한 남김 없는 해명은 불가능하지만, 지구가 질적 차원변화를 겪으면서, 마침내 가장 고등한 인간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문화의 출현

지구상에서 현생 인류의 직접적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대략 20만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출현했고, 네이처지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되어 ‘호모 사피엔스 이탈두’로 명명된 화석은 아르곤 연대측정법에 의할 경우 16만년 전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수백 점의 구석기 유물이 하마 및 물소 뼈 등과 함께 발견되었음에 비추어 볼 때 도구를 사용해 사냥을 행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20세기 초엽의 여러 고고학적 발굴과 고생물학 등에 의해 이른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출현이 약 5만 년 전이라는 학설도 세워졌음을 전제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1만 년 전부터 현재와 엇비슷한 기후 조건에서 인간은 본격적인 농경과 목축을 시작했고, 문자를 통해 역사를 고증할 수 있는 기원전 3천5백년 전부터 인류의 4대 문명이 등장했다.

본래 문화(culture)는 어원학적으로 보면 직접적으로 자연을 일구는 것(argricultura)에서 유래했고, 이차적으로는 정신과 영혼을 계발하는 것(cultura anima)을 뜻했다. 따라서 인류는 그 진화 과정에서 인간에게 보다 특징적인 이성과 정신, 그리고 영혼을 연마하여 자연을 인간의 생존에 알맞도록 조직 변형하여 문화를 구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좁은 의미의 문화는 정신적인 것으로서 지적이고 예술적으로 진행된 추상적 실체를 의미하 고, 문화인류학과 같은 사회과학적 차원에서의 문화는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것으로서 눈에 보이는 구체적 실체를 지시한다. 넓은 의미의 보편적 문화 개념은 정신적인 문화와 구체적인 문화 모두를 아우르는 것으로서 타일러(E. B. Tylor)의 표현을 빌릴 경우, “문화 또는 문명은 지식과 신앙, 예술, 도덕, 관습 및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습득한 다른 모든 능력과 습관을 포함하는 복합적 총체”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편적 의미의 문화가 광의의 문명과 동일하게 쓰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19세기 독일 사상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지만, 협의의 문명이 물질적 조직의 영역으로 국한되고, 문화가 가치와 의미의 영역으로 제한됨으로써, 협의의 문명이 정신적 의미의 문화와 대조적인 것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생겨났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여기서 우선 우리는 서구 사상사에서 문명(civilization) 개념이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으로 쓰여 왔으며 또 여전히 그렇게 쓰이고 있는 데 대해 새삼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자 한다.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들은 유럽 이외 민족의 야만(barbarism) 상태와 대조적인 것으로서 문명 개념을 사용했다. 바로 그 서양의 문명이 한때 인류사회의 평화를 극심하게 유린하는 제국주의 양태로 발전했고, 20세기 들어서서는 환경 재난에 따른 막심한 생명 위기를 촉발하고 있지 않은가?


산업문명과 환경 재난

사실 환경 문제는 산업문명 이전에도 발생한 적이 있다. 예컨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 양적 성장을 구가하는 과정에서 도시 비대화에 따른 인구집중, 많은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경작지 확충, 농수 확보를 위한 관개수로망의 확장을 과대하게 지속했다. 관개수로는 강에서 유입된 물을 경작지로 용이하게 이끌어 들이지만, 그 과정에서 물에 잔류하는 진흙과 모래가 쌓이고, 이것이 다시 수로 인근에 쌓임으로써 배수를 방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역시 물에 함유된 소금기가 바다로 배출되지 못하고 경작지에 축적되며, 마침내는 염분에 민감한 밀의 작황을 떨어뜨리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도시에 빈곤과 분쟁, 전염병 창궐이 야기되면서 문명을 극도로 취약하게 만들고 거기에 외적이 침입하자 무기력하게 몰락하고 만 것이다. 여기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유지하게 해준 바로 그 요인 자체가 확장 일변도로 치달으면서 도리어 문명의 몰락을 재촉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농업문화가 유지되던 시절의 환경 재난은 우연적이었다. 문화가 존속하는 과정에서 그 터전으로 삼은 생태계에 과부하를 줄 경우 그 피해가 부메랑처럼 되돌아옴으로써 문화의 취약화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산업문명은 본디부터 이미 구조적으로 막심한 환경 재난을 초래함으로써 생명 일반의 위기로 치닫게 하도록 마련돼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산업문명의 자연 이데올로기는 자연을 자원(resources), 즉 인간의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만 간주한다. 물론 인간의 목적 자체도 오로지 물질적 성장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도시와 공단으로 대표되는 인조환경 속의 인간은 논밭의 경작지와 야생 자연환경으로부터 자원을 채취하여 상품을 생산하고 유통?소비하며, 끝으로 폐기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공해와 오염 요인을 떠안은 생태계가 정화를 통해 감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훨씬 넘어서게 되는 정도로 자연 황폐화와 개체 동식물의 질병과 죽임, 동식물 종의 소멸로 이어진다. 그리고 미래세대 인류가 현세대와 같은 정도의 필요한 산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유와 행복 추구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하며, 더 나아가 방사성 및 유해 화학물질과 같은 요인에 의해 생명과 건강에 대한 권리를 근원부터 침해하는 방향으로 이행한다. 바로 이것이 구조적으로 진행되는 까닭에 물질적 행복 추구에 주안점을 두는 산업문명은 곧바로 생명 위기의 직접적 뿌리임을 우리는 이 자리에서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


산업 자본주의와 환경 그리고 평화 유린

산업문명의 핵심 체제인 자본주의를 비롯한 일체 물질문명이 자연을 착취하여 환경 문제를 초래하게 된 것은 그 안에 이미 그것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지배적 사회구조를 잉태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토지를 비롯한 생산수단 일체에 대한 사적 소유를 허용함으로써 사회의 계급적 차별을 조성하고, 이에 도전하는 민중의 요구를 압박하는 과정에서 자본가와 지배 엘리트는 국가에 의한 유형무형의 폭력을 법의 이름으로 정당화해왔다. 이것은 민족간에도 역시 그대로 재현됨으로써 지구촌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의 무역 전쟁이라는 구조적?간접적 폭력의 형태로 후진국과 제3세계 민중의 삶을 도탄으로 빠뜨리기 일쑤였고, 심지어 자원 확보와 패권 유지를 위해서 비극적 전쟁을 벌이는 극단적 반문명의 양태까지 보여 왔다. 최근 미국의 부시정권이 9.11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저질러왔던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침공도 그와 똑같은 선상에서 발생한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산업 자본주의는 민족간의 평화 유린에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환경 위기를 부르는 주범임을 부인할 수 없다. 고전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경제 체제 속에서 사회의 경제주체 각자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서 영리 활동을 수행하면 결국엔 모두가 잘 사는 번영의 사회가 도래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귀결점을 모두가 잘 사는 공리주의 사회로 치장했지만, 자본주의 세계화가 촉진된 결과 30대 70의 사회가 20대 80의 대결구조 사회로 더욱 그 모순을 심화하여 빈부격차가 날로 커지고 있는 데서 보듯이, 출발선상의 본질적 이기주의를 교묘하게 은폐한 감언이설에 불과함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더욱 참담한 것은 자본이 자연을 자원으로 적극 이용하여 경제적 이익을 배타적으로 향유하는 과정에서 오염의 외부화를 통해 비용 부담을 최대한 기피하고, 그 결과 지구촌 생태 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자본과 권력은 자연적 존재와도 함께 공유해야 할 바로 그 산 생명인 자연에 대해 기계장비류와 같은 시설을 들이대고 무차별 약탈 착취하여 이익과 혜택을 독점적으로 향유하는 반면, 그 과정에서 야기되는 생태학적 불이익과 부담을 오히려 힘없는 일반 민중에게 전가하는 생태적 부정의를 자행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동료 인류와 함께 하는 평화, 자연과 더불어 사는 평화를 위해 산업 자본주의를 극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선언한다.


산업 사회주의와 환경 그리고 폭력

그렇다면 산업문명의 또 다른 체제인 사회주의는 인류 평화와 환경 위기 극복의 유력한 대안일 수 있는가? 적어도 사회주의가 토지를 비롯한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도모하고 또 계획경제에 의해 자연에 다가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생태 및 생명 친화적인 요소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우리는 야수와 같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사회주의의 그것으로 대체하면 문제가 풀릴 수 있으므로 새로운 형태의 생명 윤리나 동양적 신비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따위의 매우 피상적인 주장에는 결코 공감할 수 없음을 밝히는 바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도 그 기본 착상이 생산력주의에 매몰되어 끊임없는 성장(sustainable growth)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경제는 지구 생물권 경제의 하위 영역이고, 지구 생물권은 생태 경제학의 기본 전제에서 보이듯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결코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에는 또 다른 치명적 문제가 있다. 전체주의 사회를 지향하면서 드러났듯이 전체로서의 사회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개체 민중의 자유와 고통, 생명을 침해하거나 도외시해왔다는 점이다. 인간의 경우, 나 자신에게 좋은 것을 취하기 위해서, 예컨대 마음의 양식인 책을 읽기 위해서 내 신체의 일부인 눈의 피로를 마땅히 감수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어리석음과 같은 것이다. 현존 사회주의가 빠져든 전체주의에서는 사회가 목적으로 부상하고, 개개인은 부분으로 축소된다. 따라서 사회의 생산성 증진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일부 민중이 입는 환경 및 생태?생명학 상의 피해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1986년의 체르노빌 원전 사고 발생과 사태 수습 과정에서 보듯이, 일부 민중의 환경상의 부담은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것은 전체를 대변하는 권위주의 질서, 예컨대 공산당과 국가관료 체제 등이 저지를 수밖에 없는 필연적 귀결이다. 따라서 우리는 또한 산업 사회주의를 극복하는 선에서 새로운 대안 문명을 추구하되, 그곳에서는 사회 구성원 각자의 개별성과 자율성이 근원적으로 존중되고 또한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지구, 즉 ‘생명지속적 발전(life-sustaining development)의 방향(백낙청 교수)을 만드는데 주력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 위기의 근원적 뿌리

왜 자연에 대해 착취적인 문명이 서양에서 가장 강력하게 태동한 것인가? 그것은 산업문명의 자연 이데올로기인 산업주의(industrialism)를 천착할 때 드러난다. 산업주의는 자연을 인간을 위한 도구로만 여긴다. 여기서 주객 이분법적 사유체계에 의해 인간과 자연 영역이 둘로 분리되고 그리고 인간은 목적(ends), 자연은 수단(means)이 된다. 이런 유형의 사유체계는 멀리 플라톤적인 이원론의 희랍적 사유와 로마의 실용주의 사관, 그리고 중세 시절 진행된 유대교-그리스도교 자연관의 왜곡된 해석, 가부장제 의식 등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따라서 산업문명과 자본주의, 제국주의가 출현하고 또 그 악순환을 더욱 강화해왔다. 자연을 착취대상으로 당연시하는 인류 역사에서 계급 차별과 성 차별, 인종 차별에 따른 극심한 폐해가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또 그 연장선상에서 막심한 생명 위기가 초래되었다는 것도 역시 당연하다 할 것이다. 지구촌 그 어느 곳에서나 잠재적으로 문제의 소지를 부분적으로 다 잉태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서유럽에서 가장 심각했던 것은 문제의 요소가 가장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분리주의 사유와 우열에 따라 지배-피지배로 고착화하는 지배체계가 핵심을 이루며, 이것이 역사 속에서 각양각색으로 현실화하면서 민중과 자연에 온갖 피해를 주게 된 원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자리에서 확인하고 또한 거듭하여 그 진실을 선언하는 바이다.


근대 과학 및 현대 과학기술의 성격과 폐해

1967년 린 화이트 2세(Lynn White, Jr.)가 사이언스지를 통해 발표한 것처럼, 오늘날 환경위기가 가속화하게 된 것은 현대과학기술이 경제성장의 엔진으로 결합된 데서부터 비롯된다. 자연에 대한 사실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과학과 문화적 도구 사용방식의 총체인 기술의 결합이 19세기 중엽 이후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자원으로서의 자연 수탈을 계속 심화시켜왔다. 이로써 옛 농업 등에서 관찰되듯이 인간이 생존 차원에서 자연에 부드럽게 다가가는 도구로서의 연장 문화는 실종되고, 흉물스러운 기계류 일변도의 자동 기계화 문명으로 전환되었다.

그렇다면 환경재난에 책임이 있는 것은 현대의 과학기술일 뿐 근대 과학은 관계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근대 과학의 이상을 제시한 베이컨(F. Bacon)은 자연을 그대로 내버려두기보다 인위적인 도구(기계장치)로 시험하고 고문하고 괴롭혀야 스스로를 잘 드러내며, 그럼으로써 자연 이용을 촉진하여 인류 제국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R. Descartes) 역시 정신과 물질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정신을 지닌 인간이 기계론적 법칙이 적용되는 자연에 대해 아무 거리낌 없이 지배와 약탈적 오만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었다.

지배적 세계관 및 가치관과 기계론적 법치주의가 결합하여 조성된 기계론적 자연관은 현대의 과학기술에 그대로 전이되었다. 무엇보다도 그 선봉에 선 생명공학은 자연 생명은 물론 인간 생명마저 도구화하여 조작을 일삼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늘 인류의 복지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외형적으로 내세우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오직 금력과 권력의 유지와 확장이 그 근본동기임을 고발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45억 년의 기나긴 지구역사에서 현대인은 거의 찰나에 불과한 현금까지의 불과 100여 년 만에 그처럼 생명력이 충만하던 지구 생물권과 각 생태계를 더 없이 황량한 불모지로 만들어버린 데 대해 다시금 경악을 금치 못한다. 보다 우려할 만한 것은 자연이 그 해법을 거의 알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단기간 시험한 유전자 조작 생명복합체가 기업에 의해 상품화되어 자연으로 대량 유출됨으로써 생태계를 극도로 교란시키고 나아가 인간에게 먹이로 되돌아옴으로써 인간의 생명피해를 가중시킬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며 이의 극복의 길에 대한 우리의 지속적 노력을 선언하는 바이다.


역사로부터 배워야할 교훈

우리는 인류의 문명이 자연에 대해 짐을 지운 부담과 그에 따른 인류의 피해로부터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첫째, 한 문명 또는 문화와 그것이 터전으로 삼고 있는 생태계는 외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목적과 수단,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음을, 달리 말해서 생명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둘째, 생태계에 기반한 문화 또는 문명이 그 생태계의 생명부양 여력을 넘어설 정도로 팽창하게 될 때, 그 문화 또는 문명이 몰락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셋째, 현 산업문명은 그 본질을 유지하는 선에서 어떤 체제를 구축하든 구조적으로 생명 위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넷째, 향후 문명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자연적으로 지속 가능한 문화를 재구축해야 하는 바, 그것은 필연적으로 생명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을 우리는 ‘생명 지속적 발전’ 또는 ‘생명학’ 그리고 순정한 우리말로써는 ‘살림’이라고 표현하기로 한다.


자연 친화적 대안 문명을 찾아서

원시 자연 속에서 나타난 지구촌 인간의 문화가 서구적 길을 걸으면서 자연 억압적 형태를 취하게 되었고, 그 결과 생명에 대한 보편적 죽임의 문화로 더욱 변질되고 있다. 특히 오늘의 산업문명의 생활양식은 자원 채취에서 상품 생산, 그리고 소비를 거쳐 폐기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생명을 존중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오늘의 우리는 새로운 문명을 적극 개척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역사적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생명의 살림에 바탕을 두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새 문명 패러다임의 두 가지 원리로 분별할 수 있다. 하나는 이분법적 분리주의를 대체하는 것으로서 생명, 우주생명의 유기적 관계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우열에 따른 지배와 억압의 사유체계를 청산하고, 이를 대신할 호혜적 상생의 사유체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지평을 포괄하되 더 나아가 자연적 감성과 생태적 영성의 차원에서 조망할 때, 바로 생명윤리의 안팎인 ‘모심’과 ‘살림’으로 그것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모심’과 ‘살림’이라는 새 문명의 두 화두는 생명적 기반인 자연과 인간사회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사회 내에서의 인간간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연속적 세 계기를 포함한다고 본다. 한편으로 자연 생명을 존중함으로써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문화 즉 ‘생명지속적 문화’를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문화 구성원 각자가 개별성과 자율성을 갖고 인간으로서 존엄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되, 서로 협력적으로 기대어 살아가는 ‘생명의 분권적 융합’, 즉 ‘호혜관계망’을 구성하고 동시에 자연으로부터 얻는 혜택을 공정하게 향유함으로써 정의로운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생명호혜관계망으로 구성된 문화 민족이나 나라들 간에 앞의 두 원리가 반복 적용됨으로써 지구와 주변 우주 간의 평화를 포함한 일체 자연과의 평화는 물론 지구촌 인류간의 평화와 인간의 내면적 평화 등 모든 평화가 함께 이룩되도록 해야 한다.


서구 생태주의 사상의 존중

우리는 환경위기 시대에 서구에서 대안적 생태주의 사상이 등장한 것을 진실로 반갑게 여기며, 그 기본 정신을 존중하고자 한다. 다만 전통적인 분리주의 및 지배적 사유체계의 산물인 생물학적 인식과 과학기술에 의한 해법과 자본주의 경제학이 서로 합세하여 만들어 내는 기술 중심의 환경 관리주의에 대해서는 문제를 본질적으로 호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 경계, 비판하고자 한다. 특히 ‘비용-이익 분석(cost-benefit analysis)’에 의해 자연의 ‘이용’과 ‘보존’을 결정하려는 속 좁은 ‘환경경제학적 시도’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는 바이다.

반대로 몇 갈래의 서구 진보적 생태주의 사상의 출현에 대해 우리가 이를 적극적으로 반기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속 좁은 자아를 넘어서서 이웃은 물론 온 인류 그리고 자연까지 하나로 이어지도록 하는 큰 자기실현(Self realization)과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말 그대로 평등하다는 생명 중심적 평등(biocentric equality), 이 두 규범을 초기에 천명함으로써 생명 존중의 새 물꼬를 튼 심층 생태주의(deep ecology)의 기본 정신을 우리는 소중히 여긴다. 또한 지구를 가이아(Gaia) 생명체로 인식하여 우리가 목숨을 기대어 살아가는 지구의 소중함에 대해 영성적 통찰을 제공한 가이아 생명론에 대해 우리는 찬사를 보낸다.

또 달리 인류가 직면한 환경위기는 근원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그릇된 관계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오히려 인간 사회 내에서의 구조적 요인에 의해 초래되었다는 인식에도 상당한 정도로 공감을 표한다. 대표적으로 인간 사회의 서열화(hierarchy) 의식과 구조가 사회적 차별과 계급적 착취 그리고 자연 억압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인류 사회에서의 층층시하 서열구조를 혁파하는 선에서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존중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 자치주의와 연합주의를 구현하며 동시에 자연과 친화 관계로 들어가는 제3의 자연, 즉 자유 자연(free nature)을 구축하고자 하는 사회 생태주의(social ecology)로부터 많은 것을 시사 받을 수 있음을 적극적으로 긍정한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hierarchy)가 여성 억압을 형성하고, 이것이 자연으로도 이어져서 남성적 인간에 의한 자연 억압으로 진행되었다고 보는 생태 여성주의(ecofeminism)의 통찰에도 역시 깊이 공감한다. 또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 사회 내에서의 여성 차별을 초래하는 가부장제 의식과 제도를 원천적으로 청산하고, 그런 기반 위에서 자연에 대해서도 존중과 배려, 돌봄의 자세로 다가가는 페미니즘의 윤리적 자세를 새로운 생명학의 근거 위에서 참으로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또한 대다수 환경단체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멸종에 처한 동식물 종을 보전하고자 환경운동을 전개할 때 상대적으로 선진국 백인종 남성의 시각으로 접근한 탓에 일부 놓치는 부분이 있었고, 이것을 인권 운동의 시각에서 환경적 사안에 동참하여 바로 잡은 ‘환경정의’(environmental justice)조망을 존중한다. 실제로 자연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익과 혜택이 주로 사회적 강자 집단에게 돌아가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생태학적 피해와 부담은 주로 사회적 약자 집단, 예컨대 후진국?피지배계급?유색인종 ? 여성?아동?미래세대 인류에게 전가되면서 자연으로 이행함을 적시하고, 이를 정의의 차원에서 바로잡고자 시도한 것에 대해서도 역시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서양 생태주의 사상의 부분적 한계

우리는 기본적으로 서구의 다양한 생태주의 사상으로부터 소중한 정신과 실천적 내용을 배울 수 있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그러나 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더 자연 친화적이었던 문화권에서 살았고 또 풍성한 문화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동아시아와 한국인의 지평에서 바라볼 때 역시 그 심각한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음을 또한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다. 서구에서 채워지지 않은 것을 동아시아와 한국에서 채우면서 서로 호혜적으로 창조적 협력 관계에 들어설 때 비로소 위기 극복을 위한 진정한 전 인류적 전 지구적 해법을 모색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심층 생태주의는 인간 사회 내에 존재하는 불평등 구조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제대로 제시하기 어렵다. 가이아 생명론은 전일론적 생명론으로 이행하는 까닭에 지구 여신을 섬기고 숭배하는 데 적합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어도, 전체주의에 빠진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 개체의 생명을 존중하는데 적합하지 않을 수 있고, 동아시아의 풍수, 특히 한국 자생풍수학을 그 근원적 바탕으로 적극 접수하지 않으면 지구 치유의 참된 심층적 지구생리학, 의학으로 앙양될 수 없음을 우리는 직감한다. 심층 생태주의 역시 이런 한계 안에 머물러 있다. 사회 생태주의는 변증법적 자연주의에 의존하는 까닭에 생명사태가 자연스럽게 자유 자연으로 이행하게 될 수 있다고 봄으로써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인간의 자발적 노력을 고무시키기 어렵다. 생태 여성주의의 경우, 자칫 지구를 구하는데 여성이 더 나을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가부장제의 남성 우월주의를 똑같은 형태의 여성 우월주의로 역전시켜 버릴 수 있다. 그리고 이 역시 동아시아, 특히 한국의 여성생명학의 전통으로 남녀사이의, 여성중심의, ‘기우뚱한 균형’으로서 보완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환경정의 운동은 실천적으로 전개된 강점을 갖지만, 너무 인간주의적 접근이라는 한계에 봉착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행하는 비판적 지적이 서구의 생태주의 사상이 갖는 소중함을 폄하하는 것도 아니고 또 동아시아의 전통적 생명사상이 그런 한계를 모두 불식하는 최고의 해법을 갖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우호적인 비판은 위기의 깊음을 반영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서양의 생태주의 사상을 존중하되 분명 동아시아 생명사상 안에 서구의 한계를 불식시킬 명백한 실마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계발하여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서구의 것과 호혜적이면서 창조적 협력적으로 문제를 함께 풀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동아시아의 우리가 제시하는 것은 물론 생명을 존중하는 지구촌 어떤 민족의 고유한 통찰도 역시 우리는 그 가치를 겸손히 평가할 것이다.


동아시아 생태주의의 원형

 동아시아 문화권이 상대적으로 서구 문화권에 비해 자연 친화적일 수 있다. 그 이유는 문화를 이루는 핵심 요소인 종교와 종교 이전의 샤마니즘이나 신화 역시 매우 깊숙한 층위에서 자연 친화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불교는 삼라만상이 모두 인연관계에 놓여 있다는 연기설(緣起說)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인간 생명은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해 신중함과 존중의 자세로 다가가지 않을 수 없다. 노장사상 역시 생명 창조의 우주론적 원리로서 도(道)를 주창하고, 자연의 흐름에 일치하는 행위만을 무위(無爲)로 일컬어 도의 산물로 볼 뿐, 그 흐름에 역행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인위적 작위(作爲)로서 도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유학은 그 안에 가부장제 요소를 간직하고 있는 만큼 자연 억압적일 수 있는 소지를 품고 있지만, 주역의 음양론 체계에 의존하는 정도로 자연에 부드럽게 다가갈 수 있고 공자가 논어에서 “도가 인간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도를 기른다”(子曰, 人能弘道, 非道弘人)라고 한 데서 보듯이 인간이 자연의 참가자이자 완성자일 수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실재의 역사에서도 제왕의 도덕정치는 ‘오역(五逆)’, ‘오사(五事)’ 등 정치의 철두철미한 환경오염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유불선에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의 자연 친화적 문화를 복원하고 또 그것을 창조적으로 새 차원에서 발전시킴으로써 서구의 지혜와 더불어 새로운 문명에로의 전환을 도모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 실현의 길이 바로 ‘생명과 평화의 길’이며, 그 길은 환경론과 생태학을 넘어서되, 그 뼈대와 진리는 그대로 제 안에 품어 안는 새로운 ‘생명학’, ‘우주생명학’ 성립의 길인 것이다.


한민족 생명문화의 원류

동아시아 문화권을 대표하는 것이 중국 문명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모든 것이 중화로 그 중심이 확정되거나 획일화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 전래의 풍류 사상은 매우 심오하고 고유한 특성을 지니면서, 장차 생명학, 생명사상의 모태로 작용할 수 있고 그 모태를 드러냄으로써 그 해석학적 촉발력에 의해 중국의 관료 지식인들이 수십 세기에 걸쳐 수직적 통치 체계로 봉인하여 사장한 고대 이래 유불선 모두의 깊은 생성론과 혼돈적 생명론을 부활시킬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근대의 동학사상을 통해 그 창조적 부활이 웅숭깊게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신라 말의 뛰어난 유학 사상가 고운 최치원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우리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한다. 가르침을 세운 근원은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사실 애당초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중생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계속해서 예를 들자면, 공자의 충효와 노자의 무위, 그리고 불교의 선행을 언급하면서, 이런 삼교의 정신이 이미 우리 고유의 전통인 풍류 사상 속에 담겨 있어서,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용이했음을 적고 있다.

다소 고증이 취약해서 일 뿐이지,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어질고 착한 군자의 나라였다. 한때 허황된 위서(僞書)로 취급을 받았지만, 근자에 갑골문에 대한 해독을 토대로 동이계(東夷系) 방사(方士), 술사(術士)의 저작으로서 일부 신빙성이 확인된 요동의 지리서 ?산해경?(山海經)은 동쪽 군자의 나라 사람은 천성이 유순(天性柔順)할 뿐 아니라 삶을 좋아하고 죽이지를 않으며(好生不殺生) 사양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好讓不爭)고 적고 있다. ?이아?(爾雅)에서도 동쪽으로 해 뜨는 곳에 이르니, 그곳이 태평(太平)인데, 태평 사람은 어질다고 적고 있다. 공자도 ?논어?에서 바다 건너 군자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술회하였으며, 이를 뒷받침하듯이 ?한서?(漢書) ?지리지?에서는 공자께서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슬퍼하여 천성이 유순한 동이(東夷)에게로 가서 살고 싶어 했다고 적시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어질고 착할 뿐 아니라 죽임과 다툼을 싫어하였으니 이미 현대 인류와 지구 및 주변 우주생명이 목마르게 기다리는 ‘생명과 평화의 길’을 애당초 포함하고, 또 유불선의 기본 정신을 담은 고유의 풍류 사상을 이전부터 갖고 있었으니, 한편으로 사회 속에서 정의를 실현하고 또 민족간의 평화를 도모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자연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깊고 넓고 높은 새 차원의 인류적?우주적 생명평화사상의 참다운 원형을 간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사료적 가치가 있는 문헌으로 전하는 것이 빈약하다고 해도, 그 기본 정신을 찾아 우리 민족 스스로 나아가 모든 동아시아 민족들의 참여 속에 동아시아-아시아의 고대 르네쌍스를 주도 촉발함으로써 환경위기 시대에 고유의 생명사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동풍(東風?East Turning)에 관하여

목하 중국은 인류역사와 동아시아사상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대 추문(醜聞), 문화적?역사적?사상적인 일대 조작극을 꾸미고 있다. 한민족의 역사적 하이라이트인 고구려사와 발해 및 부여사 나아가 고조선까지(이것은 한민족의 고대사 전부다)를 자기네 역사라고 주장하면서 기록과 유물, 유적 전체를 날조, 위조하고 있다. 이른바 ‘동북공정’이다. 우리는 이 오류를 바로잡기위해 정치적 전쟁이 아닌 일대 역사전쟁을 선포하는 바이거니와 이 전쟁은 곧 한국 민족과 중국 민족, 일본 민족을 포함한 모든 동아시아 내지 전 아시아 민족들이 다 함께 참가하는 (물론 아메리카와 유럽, 모슬렘과 남미, 아프리카 역시 참가해야 할 것이다.) ‘아시아 고대르네쌍스’를 통해 전 아시아, 전 동아시아 민족이 공동 창조한 고대 문명 및 역사로부터 인류가 앞으로 창조해야 할 21세기 신문명의 강력한 암시를 획득해내는 과정에서 특이한 창조력을 크게 발휘해온 한민족의 고대사의 정의를 탈환할 것이다.

그것이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라는 것 외에 또 무엇을 더 강조해야 할 것인가? 강조해야 할 것은 중국 고대사와 고대사상에 등장하기는 하지만(물론 한민족과의 공동창조 내용이므로) 실질이 없는 사상들, 그러나 한민족에게는 중심이요 주류를 이루었으되, 중국 사상사안에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3천년 전 주(周)나라 문명성립 이후부터 봉건제, 가부장제, 장자세습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농업적 세계관과 억음존양(抑陰尊陽)의 남성우월주의 및 중국중심주의의 관료지식인들에 의해 수직적 통치철학으로 단단히 왜곡?봉인되어 버린 채 ‘살아있지 못한’, ‘죽임당한’ 사상들을 그 ‘죽임’에서부터 풀어내어 ‘살려내는’ 일대 르네쌍스라는 점이다.

그것은 곧 중국 관료지식인들의 주류 통치철학인 존재론, 실체론과 로고스 및 코스모스적 우주론(유럽의 주류철학과 마찬가지다)에 가리워져 있는 생성, 혼돈, 과정, 생명, 변화의 사상 및 세계관, 우주관을 크게 들어올려 유럽의 경우 희랍의 스토아학파와 근세의 스피노자, 현대의 니체, 베르그손, 떼이야르, 푸코, 베이츤, 화이트헤드, 들뢰즈와 가타리 등의 비주류 생성 및 혼돈사상과의 결합(이중적 교호결합)을 통해 창조적 사상세계를 구축하며 대혼돈으로부터 인간, 사회, 자연을 구원할 수 있는 탁월한 통합적 과학 창조를 촉발하는 일이 된다.

목하 지금의 중국사상계는 르네쌍스는 커녕 참된 역사와 사상과 문화의 적(敵)인 거짓과 왜곡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고 일본 역시 크게 예외는 아니다. 오로지 한민족만이 분단되어 고통 받고 있으나 세계사의 새 차원에 등불을 켜야 하는 제 자신의 사명을 희미하게나마 깨닫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널리 알려져 있지만 지난 20세기 중반에 유럽에서 일어난 두 가지의 의미심장한 사건이 있다. 하나는 생태학과 녹색운동의 태동이요. 다른 하나는 생명의 내면인 영성(靈性)운동으로서의 ‘발도르프 학교’의 영성교육운동이다. 그 창시자인 위대한 신비주의자 ‘루돌프 슈타이너’의 다음과 같은 유언이 남아있다. “인류문명의 대전환기에는 인간의 새로운 삶의 양식을 결정할 원형(原型?Archetype)을 제시하는 성배(聖杯)의 민족이 반드시 나타난다. 그 민족은 본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깊은 영성을 지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상을 갖고 있지만 거듭되는 외침(外侵)과 폭정(暴政)에 억압되고 훼손되어 그 이상을 쓰라린 내상(內傷)으로만 간직한 민족이다. 로마가 지배하던 지중해문명의 전환기에 나타난 그 민족은 이스라엘이었으나 그 때보다 더 근본적이고 광대한 전 인류문명사의 대전환기인 오늘에도 그 민족은 오고 있다. 그 민족이 지금 있는 곳이 극동인 것은 알겠으나 더 자세히는 나도 모른다. 그대들이 찾아내어 경배하고 배우라!” 이 유언에 접한 슈타이너의 일본인 제자이며 일본 인지학회(人智學會) 회장인 ‘다카하시 이와오(高橋巖)선생은 그 민족이 다름 아닌 한민족이며 근현대의 서세동점 등 문명사의 대전환기에 새 삶의 원형을 전 인류 앞에 제시한 것이 바로 동학과 동학계(최수운, 강증산 - 이와오의 주장)사상과 그 운동이라고 역설한다. 동학은 후천개벽(後天開闢)사상이요 원시반본, 무왕불복(原始返本, 無往不復, 원시가 그 근본을 되돌린다, 한번 간 것이 다시 돌아오지 않음이 없다)이라는 고대의 창조적 회복이다. 그렇다면 고대의 여러 동아시아 민족들과 함께 창조한 한민족의 독특한 세계관?우주관은 과연 무엇일까?


삼태극(三太極)에 관하여

북방 샤마니즘에 연계된 한민족의 고대 우주관의 핵심은 삼태극이다. 우실하(禹實夏)교수에 의하면 “태극의 한기운이고 셋을 품은 하나이며 그것은 동시에 동정과 음양(太極一氣, 含三爲一, 動靜, 陰陽)을 포함한다.”이다. 이것은 곧 천?지?인(天地人) 삼극(三極)과 음양(陰陽) 이기(二氣)의 이중적 교호결합(二重的交互結合)이다. 우리 민족의 고서(古書)인 부도지(符都誌)에 의하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율려(律呂)’가 바로 이것이요 한민족은 물론 중국 등의 고대를 관통하는 우주음악이요 세계의 정치경륜이며 인간내면의 가장 근본에 있는 무의식의 질서인 ‘율려’는 다름 아닌 ‘삼태극의 춤’인 것이다. 이것이 중국의 코스몰로지(혼돈을 억압하고 질서를 존중하는, 抑陰尊陽의 우주론)에 의하면 ‘12율려’이다. 그러기에 12율려의 중심음 또한 건괘(乾卦) 황종율(黃鍾律)로서 남자요 군자요 제왕이요 질서이며 중국이자 하늘이다. 그러나 한민족의 율려의 중심음은 황종이 아니라 협종률(夾鍾律)이다. 이것은 곤괘(坤卦)이니 황종의 반대이다. 더욱이 중국 사상문화의 꽃인 율려의 철학 곧 주역(周易)이 끝나는 때(終萬物)요 새 우주만물이 일어서는 때(始萬物)의 역학(易學)으로 새롭게 탄생한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에서는 우주의 질서인 율려를 거꾸로 뒤집어 여율(呂律)이라고 칭한다. 이것은 곧 율려의 코스몰로지에 대한 카오스모스(Chaosmos)의 탄생인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생명학’이다. 이것은 그러면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가? 이미 수 천 년 전에 한민족의 고전인 ‘천부경(天符經)’은 ‘한 처음이 처음이 없는 하나’요 ‘한 끝이 끝이 없는 하나다’라는 그야말로 ‘혼돈의 우주질서’를 제시하고 그 핵심명제를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다(人中天地一)’라고 규정하였다. 민족의 전통사상을 풍류(風流)라고 불렀던 대유학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이 ‘이미 유불선의 이치를 애당초 다 갖추고 뭇 삶을 다 가까이 하여 감화?변화시킨다.’(包含三敎接化群生)라고 말한 한마디에 이미 유불선 사이의 평화와 뭇 생명의 상호관계성이 제시되었고 벌써 삼태극의 춤이 작동하고 있으며, 대불교승려인 원효(元曉)안에 먼저 ‘부처와 불법과 스님의 세 가지 보물인 목숨의 진리에로 목숨을 들어 돌아간다(歸命三寶)’는 명제 속에 이미 삼태극이 나타나 ‘현실총괄의식인 칠식과 초의식, 무의식인 팔식을 깨달음과 어리석음의 양자가 다 들어있는 팔식에 터를 둔 한마음(一心)으로 통합한다’로 비약하고 ‘그렇지 않음과 그럴듯함의 양면에서 어우러지는 통합적 판단’에로 넘어가서 드디어는 십문화쟁(十門和諍)과 비승비속(非僧非俗)의 무애무(無碍舞)로 차원을 바꾸어 버린다. 이어서 한민족의 유불선 사상사와 역사, 문화의 절정에는 반드시 음양을 동반한 셋이면서 하나인 삼태극의 춤이 움직였음을 알아야 한다. 어찌 일연(一然)과 이승휴(李承休)만이랴! 현금 유럽의 선진과학이나 들뢰즈의 결론인, 카오스문화의 ‘삼축(三軸)-이축(二軸)’론 등이 바로 이 같은 생명의 춤 ‘삼태극’에 연속되어 있음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못된다. 세계 사상사의 미래를 동아시아 고대 르네쌍스를 통해서 창조하려 할 때 반드시 한민족 사상사의 생명학의 근거인 ‘삼태극의 춤’을 제 길로 삼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동학과 생명사상

동학은 북방 샤마니즘의 ‘삼태극의 춤’과 천부경의 ‘사람 안에 천지가 통일되어 있다’의 명제와 함께 풍류의 생명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안으로 유불선의 전통과 밖으로 기독교의 충격을 통합하면서 5만년 전 원시를 새 차원에서 창조적으로 부활시켜 후천개벽을 주장하기에 이른 인류사상사 최고의 대변혁사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한 생명학으로서 대전환기의 새 삶의 원형을 인류 앞에 제시하는 성배(聖杯)의 민족사상이다. 동학은 선약(仙藥)이다. 고대의 풍류선도의 무병장수(無病長壽)의 생명학이다. 동학은 영부(靈符) 즉 천부(天符)를 제시한다. 루돌프 슈타이너가 예언한 바로 그 성배요 원형이라는 추론도 가능할 듯하다. ‘그 모양은 태극이요 또 그 모양은 궁궁.(其形太極 又形弓弓)’이라함이 그것이다. 그 뜻은 ‘코스모스요 동시에 카오스다.’ 그리고 ‘선천의 원형이요 동시에 후천의 원형이다.’(후천개벽은 선후천이 동시에 균형을 이루되 후천 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우는 ‘기우뚱한 균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극은 주나라 이후 2천 8백년 선천(先天)시대의 코스몰로지인 주역의 상징이요 궁궁은 19세기 말 서세동점의 지구변혁기에 민생의 비밀장소로서 정감록에 예언되어 나타난 혼돈의 구멍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학의 원형은 다름 아닌 ‘카오스모스(들뢰즈, 가타리의 패러다임인 Chaosmos, 혼돈의 질서)’다. 그 이유는 다음에 아주 명백하게 밝혀져 있다.

동학은 하느님을 ‘지극한 기운(至氣)’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첫째, 1902년경 전주 모악산 밑 구릿골(銅谷)에서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집행하던 후동학(後東學)의 강증산(姜甑山)이 ‘수운(水雲)의 지극한 기운(至氣)이란 율려를 말하는 것이고 율려가 이제부터 후천세상을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둘째, 이것은 수운에 의해 해설되기를 ‘혼돈한 근원의 질서(混元之一氣), 즉 혼돈한 태극일기(太極一氣)’요 이전의 성리학에서 주장하던 이(理)와 기(氣)의 모든 공능(功能)을 다 가진 것으로 극에 이르러 그 신령한 힘을 발휘한다 하였다. ‘혼원지일기’는 다름 아닌 ‘혼돈의 우주질서’이니 곧 ‘카오스코스모스’, ‘카오스모스’다. 셋째, 동학은 진화론이며 더욱이 ‘창조적 진화론’이다. 수운의 모심(侍)에 대한 해설의 구조가 대고생물학자요 대진화론자인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인간현상’ 중의 핵심사상인 ‘진화의 3대 법칙’에 그대로 일치하며, 수운의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라는 글은 그대로 진화론, 특히 ‘창조적 진화론’인 ‘조화론(造化論)’으로서 유럽과학과 종교조차도 갈망만 했지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과학종교의 기원 곧 ‘창조와 진화의 통일’ 곧 ‘창조적 진화론’에 신령한 빛을 비추어주고 있다. 더욱이 진화의 주체로서의 하늘(天) 또는 신(神)을 일체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공(空), 허(虛), 무(無)로 남겨두고 그 공경에 가득 찬 ‘님’의 진화활동만을 해설함으로써 삶에 시시콜콜 간섭하는 고대적인 신이 아니라 ‘활동하는 무’, ‘창조하는 자유’로서의 신, ‘진화의 우주적 주체로서의 신’을 설정?인식할 수 있게 한 점이다. 다섯째, 동학은 다윈주의적 진화론의 한계를 일찌감치 벗어나 에리치 얀치 등이 역설하고 있는바 선진적?통합적 진화론인 ‘자기조직화(自己組織化)’의 진화론을 이미 1860년에 인류사 앞에 제시하였다. 내면의 신령(神靈)과 외면의 기화(氣化) 사이의 이중적 교호과정을 진화로 봄으로써 자기조직화로서의 진화의 핵심을 찔렀다. 더욱이 그 다음에 떼이야르까지도 잘못 인식한 바 있는 ‘군집(Union)은 개별화(Differentiation)한다.’는 법칙을 역으로 뒤집어 현대의 자유와 자기선택의 진화론에 여명을 비추듯이 ‘각 개체 개체가 제 안에서 움직이는 우주적 불가불리성(不可不離性?朱子의 ‘不移’)을 나름 나름으로 깨달아 실현한다.(一世之人, 各知各移者也)’라고 명언함으로써 여섯째로 해체 및 탈중심과 함께 새로운 ‘배열’이나 ‘계열화’나 ‘촉매’ 또는 ‘뿌리’의 탈중심적 중심성을 논구해 역시 생명과 영성의 ‘카오스모스’를 강조한 바 있다. 일곱째, 동학은 우주개벽과 사회혁명을 내면의 영성(靈性, 무의식)과 외면의 생명(生命, 생태학)사이의 ‘아니다?그렇다(不然‘其然’?no-yes의 생명 및 영성의 차원변화논리)’의 이중적 교호관계로, 그것을 드러난 차원과 숨은 차원 사이의 이축(二軸)적 교호관계 속에서 오행이라는 지구물질구성의 벼리?법칙(綱?天)으로서의 하늘, 그 질료?물질(質?地)로서의 땅, 그리고 그 생명?주체(氣?人)로서의 사람의 삼축(三軸)의 요동으로 인식하고 있어 유럽철학 및 과학보다도 근원적으로 더 깊고 훨씬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점을 유럽의 과학?철학이 한참 차원변화한 오늘날에야 비로서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생태학이 도달한 자연과 자유 사이의 통합, 혼돈과학이 결핍하고 있는 혼돈 나름의 독특한 질서, 생성철학이 갈망하는 삼축과 이축의 보다 긴밀한 통합과 거리(틈), 또한 창조와 진화, 의식과 복잡화, 개체와 융합 사이의 여러 가지 생명학적 명제에 대해 동학은 미래의 커다란 창조의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동학의 평등주의와 페미니즘

동학과 동학계 사상들은 생명학에 입각한 평화와 평등의 사상이다. 최수운은 애당초 후천개벽의 밝고 밝은 운수를 각 개체 개체가 다 제 나름 나름대로 밝히라고 하여 개체의 중심성과 그 개체 개체들의 우주적 생명의 연속성을 함께 파악함으로써 평화와 평등을 보장한다. 내면의 정신과 외면의 물질복잡화, 내면의 수양과 외면의 사회적 변혁, 내면의 영성과 외면의 생명, 신(神)과 기(氣), 영(靈)과 화(化), 후천과 선천, 수련정진과 사회도덕, 숨은 차원과 드러난 차원, 개벽과 혁명, 접(接)과 포(包), 육임제(六任制)에서의 삼축(三軸)과 이축(二軸), 흥비(興比)와 비흥(比興) 등등, 이 모든 이항대립 사이에 ‘아니다?그렇다’의 평등논리로 일관하여 근원적 평화 위에 삶의 평등한 변혁과 우주질서의 조율까지도 기도하였다. 포(包)가 유불선 삼교 명망가들을 포섭하는 네트워크였다면 접(接)은 호혜(互惠)관계인 계(契)의 공생(共生)적 형태를 띠었고 가장 혁명적 내용인 ‘안심가(安心歌)’를 최초의 신도인 자기 부인에게 헌사하고 노비 두 사람을 해방하여 딸과 며느리로 삼은 것은 물론 안심가에서 ‘어젯날 부귀자는 오늘날 빈곤자요 어젯날 빈곤자는 오늘날 부귀자’라는 개벽적 혁명내용이 모두 그러하였다.

수운 뒤 20년에 충청도 연산의 김일부(金一夫)선생은 자기의 후천역(後天易)인 정역(正易)에서 깨달은 자의 교화(敎化) 및 문화론인 ‘십오일언(十五一言)’과 민중들 자신의 민주적 고대정치경제론인 ‘십일일언(十一一言)’ 사이에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근본에서 평등한 바른 체제를 세웠고 日月을 평등히 보았을 뿐 아니라 군자와 여인 등 소인 사이에서의 우주질서의 평등화의 기틀로서 율려를 ‘여율(呂律)’로 바꾸며, 주역의 ‘음을 누르고 양을 받듬(抑陰尊陽)’의 체제를 변혁하여 ‘양을 고르게 하고 음을 춤추게 함(調陽律陰)’의 정역(正易)을 세움으로 ‘바름(正)’ 곧 평등을 취하여 생명평화의 기초 위에 정의를 굳혔다. 그러나 ‘혼돈의 질서’, ‘역동적 균형’, ‘해체적 계열화’ 등은 여율 만이 아니라 ‘여율적 율려’를 담은 민속학에서의 ‘본청(本淸)’에 와서야 비로서 활발히 표현되고 있는 한국 근대민중예술사의 필연적 차원변화론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일부 이후 20년에 등장한 강증산은 수운, 일부의 생명학에 기초한 평화와 평등을 담대무쌍한 우주적 상상력의 차원에서 신비적으로 집행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우주재판 즉 ‘천지공사(天地公事)’다. 강증산은 그의 제자 김형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인네들이 손으로 염주 굴리는 저 소리를 들어봐라. 수 천 년을 부엌데기로, 남자의 완롱꺼리로 구박받아 오며 쌓이고 쌓인 원한이 구천(九天)에 사무쳤다. 하늘이 이를 용납했으니 어찌 옛 여인네들만의 세상(母系)이 되겠느냐, 남녀가 동등한 세상이 오겠지!’ 강증산은 그 뒤 두 번째 부인인 고판례(高判禮)를 우주의 주체로 떠받드는 ‘천지굿’을 집행한다. 정읍 대흥리 차경석의 집에서 남자 수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고판례의 누운 몸 위에 먼저 올라타고 식칼을 겨누며 증산은 왈, ‘천지대권을 받을 준비가 되었느냐’는 뜻의 질문을 한다. 그 뒤 자기가 스스로 눕고 그 위에 고판례로 하여금 올라타고 식칼을 겨누며 ‘삼계대권(三界大權)을 지금 당장 다 내어 놓으라!’라고 호통 치게 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는 두 손을 싹싹 빌면서 ‘네에, 지금 당장에 다 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 그리고 난 뒤 마당에 불경, 성경, 사서삼경과 공명첩(功名帖), 계산서 등 온갖 서류를 다 갈기갈기 찢어놓고 고판례가 그 위를 밟고 다니며 걸뱅이 각설이 타령쪼에 따라 춤추게 하였다. 증산은 제자들에게 이것이 바로 ‘천지굿’이니 천지태평의 길이라 말한다. 당시 강증산은 스스로 옥황상제 즉 하느님을 자처했으니 이 굿은 곧 그의 우주재판인 ‘천지공사’와 안팎을 이루는 ‘후천개벽의 페미니즘’인 것이다.

그러나 동학에서 평등, 평화, 페미니즘 사상은 사실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에 이르러 그 극치에 도달한다. 해월은 아예 동학의 명운을 ‘부인도통(婦人道通)’에 걸었다. 많은 부인들이 도통하느냐 마느냐에 동학의 흥망성쇠가 걸려있다고 볼 정도로 해월은 여성의 중요성 즉 여성, 여성성, 모성, 카오스 중심의 생명운동의 중요성을 의식하였다. 해월의 가르침 가운데 핵심은 우선 ‘내측(內則?부인들의 행동지침)’과 ‘내수도문(內修道文?부인들의 수련교과)’ 두 개에 두었고 여성들의 임신, 즉 ‘포태(胞胎)’를 두고 ‘후천시대의 타고난 도인(道人)은 부인들이니 곧 천지부모라! 천지부모인 사람을 스스로 모셔 제 안에 잉태할 수 있으니 천지부모의 천지부모라’고 하였다. 자연히 집안 살림을 가장 중요한 생명운동 즉 ‘살림’으로 동일시하여 음식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였다. ‘밥 한 그릇이 만사지(萬事知)다’라고 했으니 이 한마디는 20년 전의 ‘한살림’생활협동운동, 유기농운동의 케치프레이즈가 되었다. 현금에 있어서도, 전 세계적으로도 시민생명운동, 생태환경운동, 즉 ‘생협과 녹색운동’ 전체에 있어서 해월의 이 사상은 변함없는 지침인 것이다.

제사에 있어서 위패(位牌?신위)와 멧밥의 위치를 벽을 향하여 설치하는 제사(向壁設位)에서 나를 향하여 설치하는 제사(向我設位)로 대역전시킨 1897년의 ‘앵산(鶯山)의 가르침’은 인류 오만년 역사의 가장 큰 사건이요, 생명의 참다운 생성 즉 시간을 지식인들의 변조물인 역사와 구별하는 인류문화의 대구조혁명인 것이니, 그 앞에서는 평등이니 평화니 하는 자잘한 이념들이 모두 다 무색하다. 왜냐하면 나로부터 시작된 우주생명의 시간적 의미는 천지만물과 고금역사가 신령과 함께 지금 여기 살아있는 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는 이 제사혁명에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홀해질 때 노동정의도 민중의 내면적 삶의 생성과 그 충족도 없기 때문이니 도무지 어디에 평화와 평등이 있으랴! 또한 해월은 인간이 다른 생명을 먹고, 생명을 생명이 먹는 먹이사슬을 ‘한울이 한울을 먹는다(以天食天)’라 하여 명백히 우주적 ‘자기조직화’의 원리를 가르쳤다. 우리의 생명학, 우주생명학은 바로 여기에 터를 잡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해월사상에서 드러난 가장 감동적인 사상은 청주 서태순의 집에서다. 뜨거운 한여름날 집 뒷방에서 그 집 며느리가 덜거덕덜거덕 베틀 짜는 소리를 듣고 있던 때다. 해월은 그 때 ‘며느리가 일하는 한울님이니, 일하는 며느리를 한울님으로 모셔라’고 말씀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천덕꾸러기인 여성 중에도 가장 밑바닥의 천덕꾸러기가 며느리 아니었던가! 새벽부터 밤까지 끝없이 일하고도 밑바닥 대접 밖에 못 받던, 그 이름조차 없던 며느리를 그 시아버지인 서태순더러 한울님으로 모시라는 한 말씀에 생명의 세계관과 평등과 평화의 원천이 시퍼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한민족 고유의 생명사상 방법론

참다운 생명과 평화의 길은 매일 매시간 우리의 삶에서 진행되는 생각과 인간관계와 자연과의 관계 등에 일관하는 논리형태, 즉 삶의 방법론에 달려있다. ‘나는 네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니다’라거나 ‘이것은 저것이 아니고 저것은 이것이 아니다’라는 논리와 말과 삶. 그리고 ‘너와 나는 항구적으로 싸우거나 잠정적으로 화해하는데 결국 둘 중의 어느 하나가 승리해야 둘은 통일 된다’라는 논리와 말과 삶. 크게 보면 이것이 인류의 ‘죽임’의 논리요, ‘죽임’의 방법이다. 그리고 이 ‘죽임’은 ‘있음’을 목표로 하고 ‘있음’에 의해 합법화된다. 생명은 ‘있음’이 아니라 ‘살아있음’이다. 생명은 죽음과 대립하지 않는다. 생명은 삶과 죽음을 다 포함하는 우주적 순환, 관계, 다양이다. 생명은 인위적 살해, 즉 ‘죽임’과 대립한다. 그리고 ‘죽임’은 목숨을 끊는 것만이 아니라, 억압, 착취, 구속, 멸시, 학대, 부자유, 차별, 강제, 세뇌 등 온갖 생명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하는 행위 등을 다 가리킨다. 바로 이 ‘죽임’에 대립하는 것이 곧 ‘살림’이다. 우리가 생명운동을 ‘살림’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살림’은 ‘모심’을 전제한다. ‘모심’만이 ‘살림’의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논리, 방법은 모심, 타자의 생명의 모심, 양자 사이의 관계의 모심을 전제한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너는 내가 아니고 나는 네가 아니지만 너는 나이고 나는 너이다.’ 또는 ‘이것은 저것이 아니고 저것은 이것이 아니지만 이것은 저것이고 저것은 이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렇게 말해야 한다. ‘너와 나는 서로 달라서 반대되지만 서로 상호보완적이다. 둘 사이의 관계가 바뀌어 새로운 사태가 나타나는 것은 제3의 지양과 통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동안 보이는 너와 나의 관계라는 보이는 차원 밑에 숨어있던 근본차원이 드디어 드러난 차원으로 차원변화하는 탓이다.’

외면의 생명도 내면의 영성도, 외면과 내면의 관계도 그 관계들의 차원변화도 다 그렇다. 우리는 형식논리, 배제의 논리와 변증법을 적극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아마도 유럽의 ‘모순어법(Oxymoron)’은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삶의 논리, 생명사상의 방법론을 변혁함에 다음의 세 가지 원리가 배경이 되고 기초가 될 것이다.

첫째

역(易)에서와 같이 음(陰)과 양(陽), 상생(相生)과 상극(相克)은 항시적,  잠정적 차이가 없고 언제나 상보(相補)적이다.

둘째

현대 생물학이나 물리학에서와 같이 만물만생과 영성은 드러난 보이는 차원과 숨은 보이지 않는 차원이 있다. 숨은 차원은 드러난 차원을 추동, 발전, 변화, 수정, 개입, 보조하다가 드러난 차원의 해체기에 가서는 숨은 차원 스스로 드러난 차원으로 눈에 보이게 나타난다. 차원변화요 ‘개시(開示)’이다.

셋째

동학의 ‘불연기연(不然‘其然’)’에서와 같이 드러난 차원의 상생과 상극의 상보적 관계에서도, 드러난 차원과 숨은 차원관계에서도, 숨은 차원이 숨어있을 때와 드러날 때의 관계에서도 언제나 적용되는 논리는 ‘아니다?그렇다(不然‘其然’)-no-yes’의 논리다. 모든 생명철학과 베르그손, 떼이야로 드 샤르뎅, 베이츤 등의 논리와 뇌활동의 원리이며 그 모방으로서의 컴퓨터의 이진법이 바로 이 논리이다.


한민족 고유의 자연친화적 문화통로

동아시아와 한국은 근대의 서세동점시대에 유럽의 과학에 밀려 자신의 과학을 망각하였다. 그러나 근대화, 유럽화 과정에서도 끝끝내 완전히 망각하지 않고, 또 수정이나 탈파(脫破)의 과정 없이 비교적 순정하게 전승해온 동양 나름의 과학이 있다면 두 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동의학(東醫學)과 풍수학(風水學)이다. 의학은 몸에 관한 것이고 풍수는 땅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몸 역시 마음에 연속되고 땅 역시 하늘에 연결된다. 그러므로 몸 안에서 마음을 보고, 땅과 함께 하늘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동의학과 풍수학은 동양 나름의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결합이요 앞으로 동서양 과학 및 인문학의 창조적 결합 또는 이중적 교호결합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 유용한 디딤돌이다. 우리나라의 옛 의학, 즉 동의학에서의 커다란 두 기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과 이제마(李濟馬)의 사상의학(四象醫學?東醫壽世保元)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 두 기둥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가장 결핍된 부분인 과학철학, 생명과학의 철학 원리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것이 어쩌면 생명학 건설의 구체적인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

천부경(天符經)에는 다음과 같은 기이한 구절이 있다. ‘셋과 넷이 고리를 이룬다(三四成環)’ 셋은 무엇이고 넷은 무엇인가? 단전과 경락계의 사정을 육체에 관한한 거의 전 방면을 ‘산채로?일상적으로’ 기록하고 산채로 처방한 동의보감이 혼돈한 생명기운의 운동과 그 병적인 발현 및 그에 대한 살아 생동하는 처방이라는 ‘3수분화적(三數分化的)’ 과학이라고 한다면 태극?사상의 역(易) 원리를 관통시켜 눈에 보이는 세포, 장기, 기관 등을 음양?사상 체계적으로 분석 종합, 처방하되 심장만은 ‘일묵(一?)’으로 ‘모심’ 처리한 이제마의 사상의학이라는 ‘2수 혹은 4수 분화적(二數或四數分化的)’  생명활동의 과학이라고 구분할 경우 하나는 활동, 다른 하나는 위상(位相), 하나는 혼돈, 다른 하나는 균형, 하나는 카오스, 다른 하나는 코스모스, 하나는 ‘삼동계(參同契)’나 ‘단전법(丹田法)’ 등 선도풍류계 생명학이라면 다른 하나는 ‘황제내경(皇帝內經)’의 정통법을 음양?사상으로 리모델링한 ‘사위생명체’의 우주적 신체학이라 할 수 있다. 한민족의 선도풍류와 노장학이 공유(共有)하는 ‘환(環)’ 또는 ‘고리’는 ‘끝난 곳에서 시작하는’ 이른바 ‘종시(終始)’의 사상으로서 ‘몸’의 율려를 가르킨다. 동시에 셋으로서의 보이지 않고 확정키 어려운 병기(病氣)의 혼돈이 넷이라는 사위체(四位體)요 눈에 보이는 균형 또는 위상과 연결되어 ‘환’ 또는 ‘환중’과 같은 미묘한 ‘혼돈의 질서’를 형성한다는 것은 천부경에서 ‘삼사성환’ 뒤에 붙어 ‘오칠일(五七一)’이라고 불리우는 뇌세포 및 무의식의 최심부의 치료, 즉 ‘지극한 치료(至療)’의 경지라 바로 최고의 치유를 율려라고 부르는 의학상의 비의(秘儀)에 가깝다고 하겠다. 이것이 아마도 우리의 구체적 생명과학의 첫 기초일 것이다.

풍수학은 문자 그대로 땅에 있어서의 바람과 물 즉 장풍(藏風)과 득수(得水)의 관계로부터 땅과 하늘의 관계인 좌향(坐向), 땅의 구심작용인 형국(形局), 땅의 경락(經絡)과 단전(丹田)을 심층 표층에서 물과 공기와 토질, 암석, 식생계를 연관하여 보되 기(氣)의 운동으로 밝히고 처방하는 것이니 왈, 땅의 생명학이다. 오늘날 유럽에서 제기되고 있는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학설, 일명 지구의학, 지구생리학도 유럽과학치고는 대단히 파격적이지만 지구풍수학의 도움 없이는 그저 지표(地表)에 대한 외과적 조치로 끝날 뿐 심층치유가 불가능할 것이다. 풍수의 형국론은 곧 생태학의 생물지역론(Bioregion)으로서 생명학에 입각한 지역자치제의 재구획활동에서 결정적 소의과학(所依科學)이 될 것이다. 풍수의 근본, 특히 한민족의 자생풍수(自生風水)는 그 바탕에 풍류(風流)를 깔고 있다. 우리는 땅과 흙과 지구의 생명학인 풍수를 재탐구하여 심지어 오늘날 유럽, 아메리카에서 인테리어나 도시설계에까지 활용되고 있는 이 분야를 러브록류의 지구과학과의 사이에서 창조적으로 탐구연찬하며 우선 그 사이에 끼어있는 천박한 오리엔탈리즘부터 제거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한국의 생명학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을 분기점으로 하여 그 동쪽 서쪽으로 구별된다. 동쪽은 북방 대륙의 유목문화인 하느님숭배(天祭檀)와 천지인의 삼수분화론(三數分化論)이 지배적이요 여기에 이수분화론(二數分化論)이 배합적이며 서쪽은 남방 해양의 농경문화인 고인돌(支石墓)과 음양의 이수분화론(二數分化論)이 지배적이요 여기에 삼수분화론은 배합적이다. 이것은 불교와의 관계나 무속(巫俗)이나 기타 세시풍속(歲時風俗)에서도 그러하지만 민요의 장단이나 기타 여러 가지 민예(民藝)에서도 예외 없이 관통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의 생명학은 바로 이 같은 백두대간 동서의 차별과 동일성을 북방 대륙계 고대유목문화와 남방 해양계 고대농경문화 사이의 이중적 교호결합을 중심으로 기타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여러 민족 문화의 제반 관계를 창조적으로 연결 탐색하는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균형의 기우뚱함’은 실재하는바 북방 대륙계 유목이동문화의 천지인 삼수분화론의 혼돈지향의 카오스적 균형이 도리어 기초요 바탕을 이루고 있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호혜적 문화교류를 통한 지구촌 평화의 길

한국과 여러 동아시아 민족 전통의 고대에는 여러 부족 사이에, 그리고 해양과 대륙 사이에 산악과 벌판, 공급계와 수요계, 유목민과 농경민 사이에, 또는 신령한 하늘숭배문화와 지상적 신체적인 삶의 문화 사이에, 상호 혜택을 나누고 공유하는 호혜시장, 즉 ‘신시(神市)’가 유행했다고 한다. ‘신시’는 그 바탕에 여러 유형의 복합적인 ‘계(契)’의 기능을 갖고 있고 그 교차로, 융합권, 해방구, 용광로, 결절점(結節点)이 곧 솟대 또는 솥터였다고 한다. 고대민족들은 이러한 호혜(互惠)라는 인격교환과 생태학적 배려와 신성한 우주질서에 대한 엄중한 경배를 기본 성격으로 하는 ‘신시’를 통해 인간내면의 영성적 평화, 사회적 평화, 민족간의 평화, 농경정착문명과 유목이동문명 사이에 자연생명과 인간과의 평화를 성취하였으며  심지어 일월(日月)과 함께 지구중력권, 태양계, 은하계까지의 소위 ‘우주적 만물질서의 평온’을 누렸다고 한다. 이러한 생명과 평등, 평화의 정치적 반영이 곧 고대 직접민주주의와 전원일치제인 ‘화백(和白)’이었고 생명평화의 문화가 곧 ‘풍류(율려는 바람, 즉 풍류다)’이다. 또는 일본 아스카 고분에서 출토된 고구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에 의하면 거대한 성운군(星雲群)인 천시원(天時垣), 자미원(紫薇垣), 태미원(太微垣) 사이의 질서의 평온이 유지되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한국역사천문학회에 의하면 당시 지구중력권의 직녀성과 태양계 중심의 남두육성(南斗六星)과 은하계의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직렬(直列)함으로써 우주질서의 평화가 왔다고도 한다. 이 같은 일 만년 또는 일만사천년 전의 경우 천문에서 나타나는 우주와 지구의 평화는 우리에게 그저 신화에 불과하고 비과학적 미신에 불과한 것일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기상이변을 근본에서 극복하라는 화두(話頭)인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影動天心月)’에서 우리는 그 어떤 ‘우주생명학의 길’을 찾아 나아가야 할 것인가?

생명학은 우주생명학(일월을 포함한 중력권, 태양계, 은하계의 여러 성운군에 관한 직관과 과학적 참구(參究)에 의해 이루어질 ‘큰 살림’ 또는 ‘한살림’)에 와서야 그 극치에 이를 것이다. 지금의 불볕과 열대야를 어찌할 것인가? 아니 무슨 현상인가? 이것을 몰라도 되는 것일까? 그저 속수무책으로 하늘에만 비는 것으로 아니면 바다와 산 속으로 도망가는 것이  능사인가? 참다운 평화는 우주만물질서의 평온에 이르러서야 이룩되는 것이며 다른 모든 인간적 평화가 모두 그것에 의거해 이루어지는 것이니 생명학은 곧 우주생명학인 것이다.


모심을 통한 살림의 길

생명에 대해, 우주생명에 대해, 혹은 무생명까지도 우주적 공동주체로 인정하는 넓은 인식의 지평 위에서 우리가 반드시 먼저 지켜야 할 윤리는 ‘모심’이다. 그러나 모심은 단순한 공경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창조적 배태이며 긴장의 지속이며 은혜에 대한 보은이며 산 것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기름(養)이다. 바로 이 같은 모심에 의해서만 죽임에 의해 위협받고 시달리는 생명, 우주생명, 무생명과 모든 사물, 사태, 사유와 예감까지도 살아나는 참다운 ‘살림’에 도달할 수 있다. 오늘 한국인과 동아시아, 아시아인, 그리고 세계인의 생명운동은 결국 두 명제로 귀일되는 것이니 그것이 곧 ‘모심’과 ‘살림’이다. 바로 모심과 살림만이 성장의 한계와 질적인 성숙을 도모할 것이며, 이른바 생태정의를 구현할 것이며, 페미니즘의 근본자세를 정립할 것이며, 생태계의 문화를 보다 근본적인 생명문화로서 높이고 넓히고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생명과 평화실천의 선결 과제 세 가지

첫째 과제, 천지인 삼수분화적 접근

천지인(天地人)이라는 삼수분화의 혼돈에 중심을 둔 이수분화 배합의 세계이해로부터 우주생명학 성립이 가능한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생명학적 접근으로 인간 내면의 평화, 민족과 민족, 문명과 문명 사이의 전쟁 없는 영구평화, 우주만물질서의 근원적 평온의 회복,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경제적 평화, 인간과 자연의 생태학적 평화, 인간과 도구 사이의 경건한 평화가 참으로 가능한가를 거듭거듭 물어야 한다.

둘째 과제, 음양 이수분화적 접근

중심은 삼수분화에 두되 그 기우뚱한 균형 속에서의 음양(陰陽)이라는 이수분화에 또 하나의 중심을 둔 세계이해로부터 보다 체계적이고 카오스-코스모스적인 우주생명학 성립이 가능한가를 물어야 한다.

생명과 영성의 관계정립, 에코와 디지털적 영적통신의 관계정립, 뇌(腦)에 대한 자연과학적 접근을 우리는 매우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지만 뇌와 영성사이의 관계는 단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악학궤범에서의 이른바 ‘팔풍사위(八風四位)’에서의 사위(四位)의 과학적 중요성 등이 그것이다.

셋째 과제, 혼돈의 질서(Chaosmos)와 불연기연론(不然其然論)

‘혼원지일지(混元之一氣)’의 문제의식을 확실히 할 것.

혼돈적 질서를 통한 구체적 삶의 모습에 대한 지속적 논의가 필요하다.

‘한살림’의  한은 크게 세 가지 뜻을 가진다. ① 낱(개체) ② 온(전체) ③ 중간(관계) 이것은 여하히 논리적으로 인식되는가?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대중화가 필요하다. 예컨대 그레고리 베이츤의 생명차원변화론, 데이비드 봄의 드러난 차원과 숨은 차원의 물리차원 관계론과 함께 최수운의 불연기연론의 삼자비교분석이 실재화해야 한다. 생명, 물질, 영성의 삼자관계다.

그 위에서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의 개괄적 인식과 ‘율려 및 여율론’의 상세한 해석이 필요하다. 또한 강증산의 부인과 식칼의 의미, 페미니즘적인 반전(反轉)을 살펴야 하며 모악산에서 또는 정읍 대흥리에서 제자들에게 ‘나는 옥황상제다. 그러므로 너희도 옥황상제다’라는 파격적 선언이 오늘에 의미하는 것을 밝혀야 한다.

허준(許浚)의 동의보감 연구가 위크샾의 형식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의 사상의학 워크샾, 혜강 최한기(惠崗 崔漢綺)의 기철학과 특히 그의 ‘운화론(運化論)과 인정(人政)의 관계’가 정역(正易)의 ‘십일일언(十一一言)’과의 비교 속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넷째, 해방이후의 사상사에서

김범부(金凡夫)의 ‘제3휴머니즘’이나 ‘동방르네쌍스’, ‘사증론(四證論)’, ‘최재우론’과 ‘음양론’ 등은 심층 연구되어야 하며 한동석(韓東錫)의 두 권의 저서, ‘우주변화의 원리’와 ‘동의수세보원주석’은 수차례의 워크샾을 통해 연찬 이해되어야 한다.

식민지와 해방 이후 시대의 동학계 사상 이해가 상세히 적시되어 현재와 보다 가까운 근대적 조건 안에서 생명학을 현재화하고 구체화, 실질화해야 한다.

다섯째, 일본과 중국으로부터의 참고

유럽사상에서의 생명학 연찬과 중국사상사에서 또는 모슬렘으로부터와 인도로부터도 역시 그 사업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한민족의 촉발, 즉 ‘서울 발 고대아시아 르네쌍스’ 과정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전에, 예외적으로라도 검토되어야 할 필수적 학문 등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6세기 북경에서의 마테오 리치의 활동에 관한 연구.

일본 기리스땅(切支丹?일본 카톨릭)연구.

중국 태평천국(太平天國)연구.

중국 담사동(覃嗣同)과 이대교(李大釗)연구.

일본 오모도교(大本敎)와 ‘에자나이까 운동’ 및 일련정종(日蓮正宗)의 창가학회(創價學會) 그리고 니시다 기따로(西田幾多郞) 및 명치(明治)에 거역했던 다수의 일본 참회 귀족들의 사상모험에 관한 탐구.

기타 베트남, 인도, 몽골 및 티벹 불교의 연구 등이 지속적인 워크샾 등을 통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여섯째, 원주캠프의 생명사상과 ‘한살림운동’의 분석 평가

한살림생협과 카톨리시슴, 또는 동학.

한살림생협과 일본생협의 교류사.

한살림과 생협 일반.

한살림운동과 환경운동.

소비생산 유기농산물도농직거래와 생명문화운동의 교호관계 연구가 모두 관련자의 사망이나 자료 산실 이전에 생생한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


결어

사단법인 ‘생명과 평화의 길’은 자기의 활동구호를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로 결정한다. 이 말은 한시의 한 구절로 ‘影動天心月’이다.

1850년대 무렵 충청도 연산(지금의 논산) 인내강변의 ‘띠울’이란 마을에 한 기인(奇人)이 살고 계셨다. 전력은 참판까지 한 분인데 낙향하셨다.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奎)선생이시다. 연담선생 문하에 세 사람의 제자가 있었다 한다. 최수운(崔水雲), 김광화(金光華), 김일부(金一夫)다. 연담은 최수운에게 선도(仙道)부활의 동학을, 김광화에게 불교혁신의 남학(南學)을, 김일부에게 유학의 꽃인 주역(周易)의 일대혁파에 의한 간역(艮易?즉 正易)의 길을 제시해주었다. 수운이 경상도에서 동학을, 광화가 전라도에서 남학을, 그리고 일부가 충청도에서 정역을 창조하였으니 격암유록에 의한 삼남후천개벽을 상기시킨다. 연담이 일부에게 새 시대의 대역(大易) 창안을  제시하면서 주신 화두가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이다. 이것은 정역의 원리 중 ‘역수성통원리(易數聖統原理)’의 상징이다. 2천8백년의 나이를 먹은 중국역, 문자역, 남성역인 주역에서는 ‘참찬론(參贊論)’이라 하여 인간은 우주의 질서를 깨우쳐 배우되 그에 일치해서 도덕을 세우고 세상을 다스릴 뿐, 우주질서를 바꿀 수는 없다는 것, 즉 참여할 뿐이라는 말뜻이다. 뉴톤의 우주론과 흡사하다. 여기에 비교할 때 ‘易數聖統原理’는 우주변화의 진리를 인간이 깨우치고 나면 그 진리(물론 후천개벽의 진리다.)에 의해 우주질서를 조절하여 바꿀 수 있다는 엄청난 개벽적 혁명의 논리다. 심리물리학이나 관찰자참여우주론과 비교할 만하다. 천심월(天心月)은 우주핵이니 쉬운 말로 ‘신의(神意)’ 즉 ‘하늘의 뜻’이다. 후천개벽은 정역식으로 풀이하면 ‘천심월(우주핵)’이 ‘황중월(皇中月?존재핵?사람 마음의 중심)’로 ‘옮겨옴(動)’을 뜻한다. 그런데 사람 마음의 핵이 곧 우주의 핵인 것이다. 우주질서와 인간마음의 일치결합이니 이것이 바로 율려이고 개벽이니 오늘날 같은 후천개벽시대에는 그것이 바로 ‘여율’인 것이다. 바로 그 ‘여율’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이 또한 강증산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천지굿’도 있었다. 여하튼 ‘동천심월(動天心月)’은 개벽이요 우주를 바꾼다는 뜻이다. 무엇이 우주핵을 존재핵으로 바꾸는가? 율려요 여율로서의 율려다. 그 율려 또는 여율적 율려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늘’이다. ‘그늘’은 무엇인가? ‘그늘’은 물론 역학(易學)과 율려학(律呂學)에서는 그 나름의 복잡한 음악학적인 전문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연담의 이 시구에는 그런 전문적 의미까지도 포함한 채 보다 대중적?민중적인 삶의 내용이 깊이 담겨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늘’이 무엇인가?

이것은 차라리 판소리나 시나위나 산조(散調) 등의 속악(俗樂)에서 그 말의 참 뜻, 그야말로 말의 그늘을 찾아야한다. 연담의 뜻이 ‘뭇 생명을 가까이 해서 변화시킴(接化群生)’에 있지 전문적 학술에 있지 않음을 빨리 눈치 채야 한다. 그것이 스승에게 배우는 자세다. 소리에 있어서 그늘은 미학의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이다. 우선 윤리적으로 인생의 쓴맛, 단맛의 신산고초를 피해버리거나 적당히 얼버무리는 사람에겐 ‘그늘’이 깃들지 않는다. 피하지 않고 받아내되 분노나 폭발이 아닌 ‘삭힘(견딤)’으로 인욕정진(忍辱精進)하는 삶의 자세에서 그늘이 깃든다. 그것은 그윽한 슬기로움과 숨은 용기일 터이다. 예술적으로 그것은 피를 몇 대접씩 쏟는 독공(篤工)의 결과로 슬픔과 기쁨, 웃음과 눈물, 청승과 익살, 이승과 저승, 사내와 계집, 나와 너 등 온갖 상대적인 것들을 함께 또는 잇달아, 하나로 또는 둘로 능히 표현할 수 있는 성음(소리)인 ‘수리성’을 ‘그늘’이 깃든 소리라고 한다. 예컨대 임방울의 심청가에서 심봉사가 개굴창에 빠지는 청승스런 대목을 도리어 익살스럽게, 뺑덕엄씨와의 우스꽝스런 작희를 오히려 심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이 끝없는 인욕정진의 ‘삭힘’에서 비롯된 ‘시김새’가 있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그늘’이라 하는데 우리 소리의 미학에서는 바로 이 ‘그늘’이 결정적이다. ‘저사람 소리엔 그늘이 없어!’하면 예술가로서는 끝장이다. 바로 이렇게 윤리적 패러다임과 미학적 패러다임이 일치하는 데에서 우리 민족의 민중예술과 미학의 탁월함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같은 ‘그늘’도 ‘귀신울음소리(鬼哭聲)’까지 표현할 정도래야 진정한 예술로서 ‘지극한 예술(至藝)’에 이르고 지예만이 참 도(道)에 이르는 것이다.

‘귀곡성’까지 가려면 ‘그늘’만으로는 부족하다. 우주를 바꾸려면 신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시켜야 하는데 그러자면 그늘이 있어야 하고 그 그늘만 아니라 거룩함, 신령함, 귀기(鬼氣)나 신명(神明)이 그늘과 함께 있어야하며 그늘로부터 ‘배어나와야’ 한다. ‘아우라’ 혹은 ‘무늬(文)’다. 바로 이 경지를 ‘흰 그늘’이라 부른다. ‘흰’은 곧 ‘신’이니 ‘?’ ‘?’ ‘불’ 등이 ‘흰’이다. 그늘의 이중적 교호관계라는 드러난 차원과 함께 그 뒤에 숨은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흰 빛’ ‘신령하고 성스러운 흰 빛’이 눈에 보이게 배어나올 때에 적어도 ‘역수성통원리(易數聖統原理)’가 관통해서 우주가 바뀌는 명리가 된다. ‘귀곡성’이 좋은 예이다.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는 말은 우주를 바꿈, 즉 숨은 신령의 드러남인데 바로 우주를 바꿀 때의 그 주체인 그늘이 곧 ‘흰 그늘’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몸은 낡고 줄기는 괴상하나 가지는 깨끗하고 끝은 연하고 부드러우며 꽃은 기이한 그러한 매화의 경지나 바람과 란, 즉 난초의 움직임(飄然)과 뼈기운(骨氣)을 함께 포착하는 데에 사군자(四君子)의 의미가 있듯이 ‘우주를 바꾸는 그늘’은 곧 ‘흰 그늘’이니 말 자체로서는 ‘형용모순’이요 ‘모순어법’이나 우리가 내내 탐구해왔던 ‘상극 상생의 상보성’이나 ‘반대되는 것이 서로 돕는 것’, 즉 ‘아니다’이면서 ‘그렇다’이고 ‘그렇다’이면서 ‘아니다’인 것, 드러난 차원 밑에서 숨은 차원이 드러나 보이기 시작하는 차원변화, 우주개벽과 사회혁명을 하나로 연속시키고 교호시키는 개벽적 혁명, 이 모든 모순어법이 ‘흰 그늘’인 것이다.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는 생명과 평화의 길이 ‘흰 그늘’을 목적으로 함을 뜻한다. 그러나 ‘흰 그늘’이 까다롭고 어렵기만 한 고급담론에 그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월드컵 때 한 달 내내 전국의 거리와 운동장을 가득 메운 ‘붉은 악마’ 그 칠백만의 물결이 거듭 내세워 외쳐댄 세 가지 명제가 무엇이던가? 3분박 플러스 2분박의 혼돈의 질서(카오스모스)인 ‘대~한민국’과 ‘따따따 따따’의 이른바 ‘엇 박’이 아닌가! 과거 유목을 청산하고 농경에만 문명의 기초를 놓고자한 중국의 황제(黃帝)와 74회의 피투성이 전쟁을 치러낸 고조선 배달국 14대 천황 치우(蚩尤)의 시뻘건 로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방계 대륙의 유목이동문화(현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세계화 방향의 지배적 문명론)와 남방계 해양의 농경정착문화(현금 제3세계의 반세계화주의자들과 민족 및 지역주의, 생태주의와 농업주의자들의 문명론)의 이중적 교호결합을, 달리 말하면 도시중심의 디지털과 농촌중심의 에코가 우리의 신령한 육체 속에서 이중적으로 교호결합, 새로운 차원변화를, 새 문명의 모습을 현대세계에 제시한 집단적 예언이 아니었는가? 붉은 악마가 계속 밀고나온 상징이 무엇인가? 태극기 아닌가? 태극기가 무엇인가? 한민족의 태극기는 중국의 태극형상과 ‘같지만 다르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중국의 태극도설이 나온 것은 송(宋)나라 때 주렴계(周濂溪)에 의해서이고 한국에서 태극 또는 삼태극은 북방 샤마니즘의 오랜 고대 문화, 바로 신석기시대의 홍산(紅山)문화에서이며 아주 가까운 물증으로라면 송대보다 수 세기 앞선 신라 때의 감포 감은사 두 탑 사이의 두 댓돌위에 새겨져 있다. 중국의 태극형상은 흑과 백에 나누어져 좌우로 서있다. 그리고 흑점?백점이 있다. 그리고 첫째 건괘(乾卦)와 둘째 곤괘(坤卦)에서 63번 수화기제(水火旣濟)와 64번 화수미제(火水未濟)까지의 역경 전 괘상을 모두 압축한 네 개의 괘상(卦象)이 동서남북 정방(正方)에 배치되어있다. 여기에 비해 한국의 태극기의 태극형상은 붉음과 푸름으로 점은 없고 위 아래로 나뉘어 누워있다. 그리고 역경 전체를 압축하는 네 개의 괘상은 동서남북의 간방(間方)에 배치되어 있다. 역(易)은 읽는 방식에 따라 뜻이 같으면서도 또한 달라진다. 중국 태극과 한국 태극은 여러 가지 읽는 방식을 달리할 때 같은 뜻임에도 엄청난 차이를 드러낸다. 바로 이 같음과 다름을 큰 틀에서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 곧 한민족 고대의 ‘삼태극’이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역사왜곡의 근거인 동일한 사료(史料)에 대한 해석학(읽기)의 큰 차이요 역사전쟁의 전략인 사관(史觀)의 차이가 될 것이다. 바로 이 같은 뜻이 모두 담긴 용(用)이요 활동으로서는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이고, 체(體)이며 상징으로서는 ‘흰 그늘’인 것이다.

생명과 평화의 길은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는 새 시대의 생명학, 우주생명학을 찾아가는 길이며 그 길 자체가 곧 ‘흰 그늘’인 새 삶의 원형을 제시한 성배(聖杯)의 민족노선이요 ‘흰 그늘’ 또는 ‘흰 어둠(白闇)’의 새로운 인류문명의 길, 카오스모스 문화, 역동적 균형에 가까운 새 문명의 길인 것이다. 앞으로 100년간 폭염(暴炎)이 지구를 지배하리라 한다. 어찌할 것인가? 이 길 뿐이다. 이 길은 ‘삼태극의 춤’이니 곧 옛 김범부 선생의 그 ‘동방르네쌍스’의 길이요 신인간에 의한 호혜세계창조의 길인 것이다. 흰 그늘이 붉은 악마의 눈빛에 서글서글한 아리따움으로 드리울 날. 그 우주가 바뀌는 날, 우리는 바로 그 날을 기다린다. 중력권 내부로부터 흰 빛 초월의 아우라가 솟아나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대개혁, 대자유의 날!

젊은 다중적민중(多衆的民衆)

10대, 20대, 30대의 카오스민중과 전 민족, 전 동아시아와 아시아, 전 태평양주변의 민족들, 아메리카와 유럽과 모슬렘, 러씨아, 아프리카, 남미, 호주 등을 모두 다 끌어안은 ‘카오스민중’들 속에서 ‘흰 그늘’이 떠올라 드디어 ‘그늘이 우주를 바꾸는 그 날’이 오기를 인격, 비인격, 생명, 무생명 모두를 아우르는 우리, 그 우리가 기다린다.

‘생명과 평화의 길’은 바로 스스로 노력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신령한 차원의 우주적 실현에 대한 바로 이 기다림인 것이다.



단기 4337년

서기 2004년

8월 26일

사단법인 ‘생명과 평화의 길’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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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명학연구원